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24화 (524/653)

524화 대침체(3)

* * *

상민은 천천히 자신의 재보를 거닐었다.

이곳, 황금산의 규모는 지금까지 계속 커지고 있었다.

지금은 안에 보관된 귀중품들이 거의 한계까지 가득 수용된 처지였다.

나중엔 북려에 지반이 안정된 지역을 골라 이와 비슷한 곳을 하나 더 만들려는 계획도 있었다.

가장 압도적인 부피를 차지하는 물건들은 단연코 귀금속의 왕, 금괴였다.

당연히 전부 순금이었지만 미주대금광에서 발견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천연 금광석도 기념으로 하나 있었다.

상민이 최근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이곳에 저장된 금의 양은 만천백이십삼 톤의 규모에 달했다.

다른 귀금속도 마찬가지지만 금도 산업화 이전과 이후의 채굴량이 극명하게 나뉘는 자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많은 금이 채굴되었다.

지금 세계에 풀린 금의 양은 육만 삼천 톤가량이라고 추산되었다. 그중 상민 개인이 거의 1할 7푼 넘게 가지고 있는 셈이니, 끔찍하게도 많은 양이었다.

어떠한 국가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지 못했다. 기억으로는 예전 삶에서의 조국인 대한민국이 2020년대에 100톤 정도의 금을 가지고 있었다고 얼핏 들었던 적이 있으니 상민이 본의 아니게 세계 경제에 부리고 있는 패악질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끝은 아니었다. 상민은 이미 고려 내에 많은 광산들을 구매해 놓았었다. 엄청난 금 매장량으로 명성이 높은 미주대금광은 아대륙자원보호법에 의해 완전히 채굴되지도 못했다. 찔끔찔끔 파먹는 것에 불과했다. 아직까지도 멀쩡히 은을 산출하는 포토시와 비슷한 운명에 처할지도 몰랐다.

워낙 땅덩어리가 넓다 보니, 오지브웨 같은 북려 다른 곳에도, 남려에도, 중려에도 입이 떡 벌어지는 거대한 금광은 많았다.

하지만 역시나 그곳들도 법의 효력을 받았다.

고려 회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밖으로 나가 현지 왕국들과 협력을 체결해 금을 캐야 했다. 현지 왕국들은 어차피 세계 최고의 토목공학을 보유한 고려 없인 지표면 근처에 있는 금만 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협력 이외에는 선택이 없었다.

막상 협력 체계가 갖춰지자 고려 회사들은 오히려 외국의 저렴한 노동력을 합법적으로 이용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좋아했다. 고려 광부의 임금이 100이라면, 다른 곳의 광부들은 50에서 최소선인 20 밑까지 내려가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현지 정부가 광부를 등쳐먹는 것까진 고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현재 활발히 채굴되는 광산은 누아 에린과 뉴펀들랜드, 무타파와 누산타라, 콩고, 파푸아, 서아프리카 국가 등에 있었다. 그 대부분의 나라는 고려와 경제적으로 밀접했고, 정치와 외교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받고 있었다. 일부는 동맹국이기도 했으니 고려가 자신들의 금광을 잘 캐지도 않으면서 전 세계 금의 9할 이상을 끌어모으는 것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금들은 어떻게 어떻게 이 악랄한 용의 재보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상민이 입에서 불을 뿜고 다니며 가옥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여 귀금속을 강탈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시장 경제의 흐름이 그렇게 만들었다.

침체를 예상한 이후에는 더 많이, 과감하게 모으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정당한 거래로 모은 것이었다.

금괴뿐이랴, 보석과 여러 장신구들도 많았다.

당대 으뜸가는 세공사들이 혼을 갈아 넣은 화려한 장신구 같은 것들은 동 무게의 금을 초월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러시아 차르들이 사치를 부리기 위해 만든 이스터 에그(부활절 달걀)와 같은 장신구들과 베네치아 도제의 반지, 합스부르크와 프랑스에서 노획한 기타 여러 가지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유물들도 있었다. 앞으로 즉위할 황제의 선물을 고를 땐 여기서 하나씩 가져가면 될 것이다.

해씨 황가의 보물창고에는 금액과 화려함보다는 옥새나 왕관 같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물건들이 많았다. 물론 그곳도 8할 이상은 자신이 채워 넣긴 했지만.

그리고 그런 것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추억이 담긴 유품들도 있었다.

상민은 금과 보물들의 수량을 점검한 뒤에는 재보 가장 안쪽으로 다가가 작은 문을 열었다.

추억의 방, 상민은 이곳을 그렇게 불렀다.

이 작은 구역에 있는 물건들은 검은 천이 뒤덮여 있었다. 상민은 그 천을 끌어당겨 치웠다.

그 속엔 자신이 즉위식 때 입은 옷과 제사를 지낼 때 썼던 황금대향로 같은 물건들. 전쟁을 나설 때 입었던 갑옷들, 쓰던 검과 창들, 초기형 권총과 총들이 있었다. 그가 직접 쓴 책―주로 일기―들도 있었고, 개정판 이전의 훈요 128권도 이곳에 보관했다. 괜히 이것들이 밖으로 나돌아다니게 두어 자신의 흑역사를 박제하고 싶진 않았다.

또 이곳엔 태조 해민 시절의 옛 물건들뿐만 아니라 아내들의 장신구들과 유품들도 있었다.

몇 개는 무덤 속에 부장품으로 넣어주었지만, 중요한 것들은 그가 간직하고 있었다.

화려함도 화려함이지만, 이것들은 역사학자들이나 종교학자들이 보면 눈이 돌아갈 정도의 물건들이었다.

역사적으로 도저히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물들, 하나하나가 국보다. 소실된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되찾기 위해 나설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상민은 소행성이 떨어져 이 세상이 망할 때까지 이 물건들에 대해선 처분은커녕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추억은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설령 여기 있는 양만큼의 금괴들을 더 준다고 해도.

상민은 예전에 잔이 쓰던 생트 카트린의 검을 한 번 뽑아보고는 그 자리에서 검을 청소했다. 기름을 잔뜩 발라 놨기에 녹이 슬어있지는 않았지만 습관과 같았다.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지만, 이곳까지 데리고 오는 것도 일이다.

검 손질을 끝낸 이후에는 근처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익숙한 듯 근처의 청소도구함에서 솔과 부식방지제, 방부제 등을 꺼냈다.

상민은 왕예가 쓰던 보관(寶冠)과 혁대를 풀어 근처에 있는 청소도구함에서 솔을 꺼내 닦았다. 루크레치아와 아이샤, 연화의 물건도, 콤니나가 자신을 기억해달라며 준 선물도.

그저 자리에 앉아 묵묵히 청소를 끝낸 그는 마지막으로 작은 목함을 열었다.

그곳엔 풋풋했던 시절 왕예와의 추억이 담긴 서신들이 있었다. 조지서가 만들어 놓은 종이의 질이 참으로 좋은지 서신들은 반천년의 세월 속에서도 크게 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상민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계속 닿아 그랬을지도.

그는 한 장의 편지를 조심스럽게 열고는 피식 웃으며 글귀를 읽어내렸다.

상민에겐 오백 년 전의 아련한 옛 기억의 편린일 뿐이지만, 사학자들에게는 태조의 려글 창제에 관해 아주 큰 단서가 될 수 있는 무가지보일 터.

하지만 그 단서는 주인이 한 번 읽어내린 뒤 그저 나무 상자 속으로 되돌아갔다.

상민은 다시금 검은 천을 휙 던져 덮었다.

다음에 다시 보자.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추억의 방을 떠났다.

금괴를 보러 온 것인지, 아니면 유품을 보러 온 것인지.

상민은 출구로 가다 사각형의 금괴 더미에서 괜스레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말랑말랑한 두부를 주무르듯 순금을 만지작거리다 금세 작은 공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냈다.

― 휙

순금구를 가볍게 위로 던졌다 받아낸 상민은 문을 닫고 나가기 전, 다시금 창고들을 한 번 바라보았다. 추억의 방에 있을 때와 달리, 그가 금괴 창고를 바라보는 눈은 흐뭇함도, 만족감도 아니었다. 착잡함이 가장 컸다.

밖으로 나오니, 보안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업무를 보던 11사도가 뛰어나왔다. 상민은 그를 불렀다.

“제가야. 옷 한 벌 내오너라.”

“예. 여기 있습니다.”

박제가는 미리 준비한 의복을 내밀었다. 상민은 힘을 쓰느라 찢어져 버린 상의를 탈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제가는 둥글게 구겨져 구형에 가까워진 금괴를 건네받으며 아연실색하다, 이윽고 상민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준비하거라.”

“금괴를 쓰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어차피 이럴 때 쓰기 위해 모아놓은 것들이니 이때가 아니면 언제 쓰겠느냐.”

상민의 중얼거림에 제가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인원을 엄선하여 빠르게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3번 보관대까지 뺄 생각이다. 준비되면 보고하라. 문을 열어줄 터이니.”

“예.”

경기가 침체로 들어서고 있는 입장에서 가장 많은 타격을 입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상민이었다.

그는 이미 고려의 경제 그 자체였기에, 경기가 침체로 들어섰다 하면 필연적으로 큰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가 지금 이 창고처럼 거대한 부를 쌓아두고, 또한 이 침체에 앞서서 많은 재산을 현금화했다고 해도, 여전히 그가 가지고 있는 기업의 주식들과 부동산들, 기타 여러 가지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자산들은 유동성의 정도에 따라 피해를 봐야 했다.

하지만 상민은 이런 일로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자금은 언제든지 쌓인다. 경제도 다시금 성장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겠지만, 결국 상처는 아물고 사람은 성장한다.

그러니 역으로 지금의 순간은 상민에게 있어선 기회였기도 했다.

혼란한 세계정세와 경제적 위기 덕에 우량한 기업들의 평가도 덩달아 낮아지고 있었다. 상민은 막대한 현금을 통해 그 기업들에게 임시적 자금을 수혈해 주면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지분을 확보할 예정이었다.

우량한 기업이라….

상민의 생각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 아이들은 모였느냐?”

“이미 객원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 * *

석규는 회의장의 한편에 서서 어색한 듯 시계를 매만졌다. 내로라하는 대단한 인물들이 있었다. 석규도 장인과 함께 유안투자은행의 실질적 소유주였지만, 그보다 연배가 높은 선배 기업인들과 금융인들, 또한 예술계와 문화계에 몸을 담고 있는 여러 인물도 보였다.

절대적인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제국에서 한가락씩 하는 인물들이 전부 모인 셈이었다.

그중 몇몇은 석규도 알고 있었고, 그들이 석규를 알고 있기도 했다. 석규는 자신을 알아챈 사회의 선배들을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들도 고개를 숙여 보이며 화답했다.

심지어 몇 명은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려고 했다. 하지만 문 입구가 무언가 소란스러워지자 그들은 이내 손바닥을 들어 양해를 구했다.

작은 모임의 규모상 신입이 들어오면 환대를 해주는 것이 전통이었고 미덕이었지만, 오늘은 공교롭게도 이 모임에 있어서도 굉장히 큰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정말 모두가 긴장해 있는 상태였다.

문에선 이제 무게감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들이 차례차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의 존재감에 넓은 객원의 회의장이 비좁을 정도였다.

이 한곳에 이렇게 많고 중요한 사람들이 있으니, 설령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고려의 경제와 세계 경제가 훨씬 더 휘청거릴 수도 있겠다.

새로 들어온 자들 중에는 아랍 연방의 대통령, 나시르 대에미르도 있었다. 그 유명한 하팀의 아들이다.

이라크의 술탄도 들었다. 알 바키 가문은 굉장히 흥성했다. 술탄 만수르는 여전히 정정했고, 그는 무려 일곱 명의 아들을 두고 있어서 왕조의 단절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진주 왕가도, 앙주의 왕가도 왔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감히 그런 지위를 자칭하지도 못했다.

황제 폐하도 드셨다. 근위대가 폐하께서 앉은 이동식 의자를 밀고 들어오시는 것이 보였다. 모두가 고개를 숙여 보였지만, 황상께서는 인사를 금하고는 손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황상마저도 다음 인물을 위해 자신의 서열을 낮게 두고 계신 것이다.

“드십니다!”

지배인의 그 한마디 말에 실내는 완벽히 조용해졌다.

석규는 이 분위기와 위압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초대받은 거부들과 기업인들, 왕족들, 기타 중요한 인물들이 하나같이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석규도 엉겁결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기분을 느꼈다.

들어온 자는 황제가 아니었다. 석규는 이 정도의 거물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정도의 대우를 받고 그만큼 존재감 표출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제국 황제 해청뿐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들어온 자는 웬 덩치 큰 사내였다.

― 저벅, 저벅

하지만 석규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은 고양의 앞의 쥐가 된 것마냥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석규는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사내가 지나가며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 무슨 빌더버그 회의도 아니고.”

상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 저 애틋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만수르처럼 보고 싶었던 인물도 있지만, 대부분 지긋지긋한 놈들이 초롱초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보기 부담스러운 놈들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 경제위기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할 사항들이 많았기에 직접 광명회를 소집했다. 회주라니, 쓸데도 없는 감투 하나가 추가되었다고 성질을 내었는데, 개똥도 쓸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상민은 손짓했다. 문이 닫히고 첫 번째로 회주까지 참석한 ‘제대로 된’ 광명회 모임이 시작되었다.

회의의 이름은 대외적으로 쓸 수 없는 광명회라는 이름 대신 처음 열린 장소의 이름을 따서 구안 회의라 불릴 것이었다.

[작가의 말]

2022년 현시점 세계엔 대략적으로 이십만 톤의 금이 채굴되었다고 예상됩니다. 이 중 3분의 2만큼, 14만 톤 이상이 1950년 이후에 채굴되었다 합니다. 2차대전 전까지 인류가 채굴한 금의 양은 6만 톤 정도입니다.

Metals Focus, Refinitiv GFMS, US Geological Survey, World Gold Counc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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