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14화 (514/653)

514화 선의 안배(4)

“자 기억하시오. 신기전.”

상민은 노인을 배려하여 초등학교 교사마냥 천천히, 친절하게 입술을 떼었다.

해청은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신기전은 예전의 물건이 아닙니까? 포병에 밀려 도태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니오, 충분히 잠재력 있는 무기체계지.”

이향이 만들고 후대에 몇 번 더 개량을 거친 신기전은 그 전통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금 박물관에나 있었다.

예전 신기전은 내장된 엄청난 화약량으로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무시무시한 화력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대포가 발전하며 비슷하거나 더 우월한 공격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도태된 상태였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은 그 관계가 역전될 여지가 생겼다.

충분할 정도의 공학과 추진체의 발전이 있다면, 신기전은 작약을 터트릴 때의 물리 운동량에만 의지하는 포탄은 감히 꿈꾸지 못하는 거리를 날아가 타격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 ‘개념’ 자체가 생소한 때였다. 다른 나라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고려도 과거의 일이니 잊어버렸을 터다.

하지만 아무리 잊어버렸다 한들 고려는 예전에 신기전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었고, 그 자료 또한 충분히 남아 있었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공학도 가장 발달한 나라였다.

굳이 지금 마라타 연맹이나 비자야나가르 연맹에 가서 인도식 견본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고려제국의 장군이자 정치인이었던 이향의 신기전은 그가 살아갔던 개천 2세기에 이미 삼사백 년 뒤의 개천 6세기 초에 등장할 알리 로켓이나 콩그리브 로켓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이제 귀관의 무기는 세상에 다시금 등장하여 모두를 전율케 할 것이다. 어쩌면 우주를 진동하게 할지도 몰라.’

상민은 예전 보았던 이향의 얼굴을 떠올렸다.

상민의 진중한 표정을 본 해청이 다시 되뇌었다. 신기전.

“저번 주에 내 휘하에 있던 공학자들과 일전의 공학자들을 나누어 신기전 추진체를 담당하는 충천사를 따로 설립했소. 이름은 회사지만 이번에도 따로 상장하진 않을 게요. 아직은 연구소만 가지고 있기도 하니까. 장소는 남려 외진 곳에 두었소. 외부의 시선도 없을 만한 곳에. 황상이 방문하시려면 내게 말씀을 해주시오.”

“알겠습니다.”

해청은 그러려니 설명을 들었다. 상민은 다소 실망했다.

해원은 이런 대화를 나눌 때마다 눈이 초롱초롱해져서 선망 가득하게 자신을 바라봤고 비밀무기를 알려주지 않으면 한동안 토라져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였는데, 청이 이놈은 천성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상민은 해안만큼은 조금 무기체계에 관심이 있는 애이길 기원했다.

‘사관학교에 넣어놓을까? 나폴레오네 옆에 두면 뭐라도 배우겠지. 마침 경준이 그 녀석도 비슷한 나이대에 사관학교 생도가 되고 싶다고도 하고.’

상현과 세희의 손주를 떠올린 상민이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나이 차이가 이렇게 심하구나.

둘은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항공모함은 황상도 잘 아시지요? 단엽기가 배치된 지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해군 함정에서 항공모함과 항공 전력이 차지하는 중요도가 더 상승할 게요.

항속거리와 속도,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가 크게 진일보했으니까 이제 과거의 비행기와는 차원이 다르지.”

상민의 추가적인 설명에 해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희가 열변을 토한 적이 수차롑니다.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고려의 해군학파 중에서도 거함거포주의와 완전히 대비되는 열성 항공론자인 세희는 자신의 직급에 맞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현재 정장급의 해군항공사령관에 보직된 상태였다. 그 이상의 계급이라고 해봤자 별로 없고 항공대를 떠나야만 했으니, 그럴 바엔 끝까지 그녀가 사랑하는 항공대의 우두머리로 남아 전역할 생각인 모양이다.

반대로 남편 다르크 상현은 별 넷의 공군전투사령관에 오르며 공군의 최정상에 올랐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함주의는 딱히 변하진 않았지. 항공모함은 더더욱 커질 테니까. 다시 말해, 거포주의가 서서히 도태될 수 있다는 거요. 이것은 아까 말한 신기전의 발달에 영향을 받을 것이고.”

“포의 사정거리 밖에서 타격할 수 있다는 원리라 들었습니다. 비행기가 주된 이유인 줄 알았지만, 신기전의 발달도 거드는 모양입니다?”

“이해가 빠르시구려.”

세희가 먼저 설명해 놓은 모양이다. 어쨌든 이해가 빨랐기에 상민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 참, 신기전 추진체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추진체가 있소. 전투기용이지. 이것도 충천사에서 만들었소. 가져가지 말고 그냥 눈으로 보시오. 이거 귀한 건데 내 특별히 황상한테는 보여주는 거요.”

상민은 미리 가져온 도식을 주섬주섬 꺼내 하나 보여주었다.

“아직 시험기종이라 언제 완성될지는 나도 몰라요. 어쩌면 신기전 기술보다도 더 어려울지도. 하지만 만약 완성만 된다면, 바람개비를 쓰는 비행기(프롭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강력한 전투기를 만들 수 있소.”

해청은 그저 멍하니 도식을 바라봤다. 상민은 이해하는 것까지 바라진 않았지만 속이 답답했다. 차라리 그냥 세희랑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연료분사기관]

그래도 해청은 도식에 써 있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

“증기분사기관이랑 개념이 같습니까?”

비교적 좋은 질문이었다.

“비슷하오.”

상세한 공학적 설명을 파고들기엔 상민도 설명이 어딘가 부실했지만, 적어도 가스터빈과 제트엔진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 힘을 발전기를 돌리는 데 쓰느냐, 기관을 밀어내느냐는 사실 비슷한 원리였다.

그리고 가스터빈은 증기분사기관, 즉 증기터빈과 비슷했다.

증기터빈은 이미 한참 전의 전함인 불공급 전함에 쓰일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녔으니, 이미 충분히 개념이 익숙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현장의 상황과는 다소 괴리된 높으신 분의 전형적인 꼰대 생각이 분명할 것이다.

상민은 천성이 아주 못된 인물이라 기술자들에게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툭툭 지나가듯 던져대는 악마였다. 괜히 기술선도국 화장실 벽면이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것이 아닐 터다. 대우를 잘 해주긴 했지만, 기술선도국은 제국의 노동자법에 완전히 벗어난 음지 중의 음지였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

[살려줘!]

소리 없는 비명을 화장실 벽면에 적어놓은 당사자들, 현직 기술자나 공학자들이 만약 방금 상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을 들었다면 거품을 물 것이다.

그들은 연료분사기관의 세부 개념들이 어떠한 면에서 다른지, 전투기용 연료분사기관이 왜 발전용 연료분사기관보다 더 복잡하고 까다로운지 삼 일 밤낮을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민은 그런 변명을 들을 필요가 없다. 많은 이들의 앓는 소리를 경험해본 입장에서, 돈과 인력을 충분히 공급하고 시간을 넉넉히 준다면 불가능한 것은 없었다. 고려의 현 기술력으로도 초창기의 제트엔진까지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었다. 고출력회전기관(터보팬)에 비해 비교적 단순한 고출력분사기관(터보제트)은 가능하지 않을까.

그는 적어도 6세기 중반이 되기 전에는 제트엔진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충천사와 부익사가 합작해, 새로운 음속 전투기를 만드는 것도 보고 싶었다.

“다음은 연산기요.”

상민이 제시한 화두에 해청이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아, 연산기. 들었습니다. 보안국에도 한 대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정보총국만 쓰고 있다고 들어서 서운한 모양입니다.”

“알았소. 한 대 주문해 주지. 그러면 무슨 원리고 어디에 쓰이는지는 아시겠소?”

“원리는 잘 모르나, 암호해독이나 기타 여러 가지 수학적 연산에 쓰인다 들었습니다.”

차분기관 발명자 라이프니츠는 해석기관을 만드는 것을 단념했다. 왜 그러했는지는 몰라도, 아마 재질의 한계를 느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시간이 흘러 돌파구를 찾았다. 그는 개천 430년 유승엽이 만든 전구에 영감을 받아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개천 440년에 2극 진공관을, 개천 445년에 3극 진공관을 만들면서 연산기에 대한 기초 개념 작업을 마쳤다.

다만 그때 나이가 이미 일흔이 되었으니, 라이프니츠는 연산기의 개발만큼은 후대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인물은 세 명이었다.

라이프니츠의 수제자인 차건승은 당시 스승과 자신의 친구였던 니콜라스 베르누이와 레온하르트 오일러 등을 고려로 오도록 꼬드겼다.

제국 바깥에서 학문을 배우겠다는 말은 실로 어리석은 생각과 다름없었다. 둘은 결국 앙주주립대학에 적을 두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학문은 물론이고 차건승의 연산기 개발에 도움을 주었다.

결국 차건승은 개천 470년에 진공관을 이용하여 최초로 연산기를 발명했다. 이름은 척척거인이었는데, 어원을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건승은 기쁨에 못 이겨 밤늦게까지 동료들과 함께 축하연회를 즐겼지만 다음 날 아침 정보총국에 끌려가게 되었다.

― 차 박사님, 협조 부탁드립니다.

― 이게 협조를 구하는 태도요?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아 토할 것 같으니 쓰레기통 좀 가져다주시오.

이 시대 연산기의 주된 업무는 수학적 계산이었다.

하지만 연산기들은 또한 암호 해독에도 이용이 가능했다. 인간이 쉽게 못 하는 정도의 반복적인 일을 연산기는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었다. 정보총국은 라이프니츠 시절부터 상민에게 귀띔을 받아 차건승을 감시하고 있었다.

결국 여러 가지 지원을 받아낸 차건승은 정보총국의 주문을 받아 몇 가지 기계를 더 만들어주었다.

이는 안 그래도 유령 같은 정보총국의 인원들에게 연산기라는 무시무시한 조력자가 생겨났다는 의미였다.

이제 정보총국은 전통적인 보안 수준에서 벗어나 최초로 현대적 암호화와 복호화의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 능력은 정보국으로서는 도저히 탐을 내지 않을 수 없는 능력들이라 정보총국은 물론이고 황립보안국, 각 군의 정보국들도 모두 간절히 연산기를 원하고 있었다.

“대단한 물건이었군요.”

상세한 설명을 들은 해청이 감탄했다. 상민은 구태여 미래에 그 연산기가 어떻게 더 대단해지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해청이 반도체의 역사와 함께할 운명은 아닐 테니.

상민이 문득 물었다.

“며늘아기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잘 모르겠습니다.”

갈등으로 쩍쩍 갈라진 노인의 말에, 상민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달랬다.

“청아. 구태여 전통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네 할아비로서, 이 나라의 태조로서 하는 말이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상민의 말에 해청은 한결 가벼운 표정을 지었다.

“폐위까진 하지 않더라도, 태자 책봉은 안이로 할 생각입니다. 곧 있으면 안이도 성년이 될 터니….”

마흔에 달하는 장남 해완이 반발할 가능성은 높았다.

이미 장성하여 자식도 있었으니 더더욱.

하지만 황제는 그 정도야 충분히 무마시킬 수 있었다. 여차하면 상민도 있었다.

해완은 태자가 아닌 일개 황자 신분이라 뭘 할 수도 없었다. 이미 대중도 황후보다는 원비를 지지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해청은 참담한 심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선대 황제들도 삐걱거리는 부부관계가 없진 않았지만, 자신과 황후처럼 이렇게 언론이 발달한 최근에 파국이 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특히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를 보았던 해청은 자괴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혹시 소손이 강화의 사정을 조금 더 살펴야 했던 걸까요?”

“그 일은 강화의 업보니라. 네가 감당해야 할 짐은 아니다. 그리고 넌 충분히 덕천씨를 도왔잖느냐. 내가 다 봐서 안다.”

“…제가 생각건대, 할아버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줄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안토니아가 집필한 악의 탄생을 읽어보지도 않았건만, 해청은 문득 그런 소리를 했다.

상민은 일단 시치미를 뗐다.

“모든 일들이라니?”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의 상황, 강화의 이런 모습까지요. 마치, 마치 진작부터 예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뭔가 더 있다면 속 시원히 말씀해 주십시오.”

이놈도 수십 년간 자신을 봐온 짬이 있는 모양. 상민은 일부러 주제를 돌렸다.

“가만있어보자, 내가 몇 가지를 이야기했더라?”

“…….”

“항공모함을 포함하면 네 가지인가? 뭐 그건 산업이 아니지만 말이다. 이제 나머지 하나를 설명할 차례구나.”

상민은 마지막 하나 남은 것의 설명을 두고 뜸을 들였다. 주제를 돌렸는데, 돌린 주제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 이것을 설명해주어야 하나, 상민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 나라 황제에게는 거의 웬만한 비밀은 다 공유하기로 했기에 입을 열었다. 그의 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지막 하나는… 원자력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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