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화 하늘눈
황후는 곧 훙했다. 그녀는 소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지병이 있었기도 했고 나이도 많았었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남편과의 갈등이 큰 정신적 압박을 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황후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에 해청은 결단을 내렸다.
사실 상민이 뒤에 있기에, 조금 더 여유롭게 생각을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손에서 이 일을 매듭짓길 원했다. 그 또한 노환으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안이가 성년이 된다면 태자로 책봉할 생각이다.”
결심이 선 노인황제는 상복을 입은 채로 자신의 장남을 불러다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라 중년의 황자는 아연실색했다. 그 뒤에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잘못 들었나 부정하다, 갑자기 왈칵 울분 섞인 고함을 질렀다.
“아버지,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심지어 어머니의 국상 기간인데,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너무 가혹했다. 해청도 미안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해청의 결심도 확고했다. 그는 열여섯의 나이가 되면 해안을 태자로 책봉할 예정이었다. 별 의미는 없었지만 정치인들도, 종친들도 동의의 의사를 표시했다.
해완의 태자 책봉 거부의 이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황후가 잘못했다 한들 그 아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이유는 없었다. 어미와 아들의 입장은 같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과 부모가 비슷한 생각을 한다면, 밥상머리에서 싸우는 가정을 찾기가 힘들 것이었다. 아무리 소명황후가 친강화적 행동을 해도, 해완이 그 생각과 대가를 고스란히 가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해완은 평소 해청의 생각과는 좀 많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도 몇 번 해청은 해완을 태자로 세워 국정을 서로 보완해 나가길 꿈꿨다. 마치 해원과 해청의 사이처럼. 하지만 둘 사이의 생각은 영 좁혀지지 않았다.
물론 해원과 해청도 가끔 갈등을 드러냈지만, 두 부자는 서로 이견을 절충하며 보완해 나갔다.
다만 해완은 어디서 물들었는지는 몰라도 굉장한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책임은 위대함의 대가니라. 너는 성공이라는 개념을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다. 범인에게 성공과 성취란 그 개인의 영달에 한할 터, 그것을 나쁘게 볼 이유는 없다.
허나 지도자에게 성공이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이 책무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지도자는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없노라. 이 비유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그러하지만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유효하다.”
“모두가 잘난 미래를 꿈꾸시는데, 어찌 세상은 여전히 이 지경 이 꼴입니까? 증오를 퍼트리는 자들이 사방에 생겨나고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잖습니까? 고려는, 아버지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국제연합은 뭘 하고요?
장담컨대, 앞으로 이 혼란은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겁니다. 오직 확고한 질서와 규율만이 모든 평화를 담보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고려는 다른 나라보다 우월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월한 것이 맞지요. 이는 철 지난 옛 선민당 패당들의 인종적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체제와 역사, 문화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모든 나라는 우리의 지침을 따라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하여 평화를 담보받아야 할 것입니다.
고려는 단순히 거부권을 가진 의장국 정도가 아니라, 모든 국가의 제대로 된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모든 군주들의 군주로 군림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나디르 샤가 아버지와 할아버지께 바친 이름이 아닙니까?”
해청은 인상을 크게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너의 그런 생각도 네가 말한 증오를 퍼트리는 자들의 말과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느냐? 공포와 위대함을 헷갈리지 마라. 우리는 세계가 풍요롭고 번영하길 바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우리의 통치 이념이다. 우리가 이 사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피폐한 비극 속의 한 장면이 될 터인데 너는 어찌….”
어찌 영원토록 아래를 굽어보길 원하느냐, 저 청명한 하늘이 위에 펼쳐져 있건만.
해청은 탄식했다. 장남은 이미 머리가 굵을 대로 굵어 있었다. 이견은 좁혀질 수 없다. 그는 해완을 제위에 올린다면 큰 혼란이 펼쳐지리라 생각했다. 해안은 잘못을 바로잡기 충분한 나이였다.
해완은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곁에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있다고 해도 자신의 태자 책봉을 반대하는 무리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황제는 입헌군주국인 제국에서도 상당한 권한을 가졌으나, 황자 심지어 황태자는 그런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예외라면 지금 황제 해청의 황태자 시절이었는데, 그의 모든 권한과 권력조차도 해원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황제의 지지 없는 후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특히나 고려의 전통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내전을 벌이거나 못된 마음을 품을 수도 없었다. 누가 철 지난 황실의 다툼에 거병하겠는가. 장군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제국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황제가 멀쩡한 이상에는 더더욱.
사실 해청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장남은 완전히 정신 나간 악인과는 거리가 있어, 그런 불충하고 패륜적인 못된 생각을 실행에 옮길 자는 아니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해청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정보총국과 추밀원, 황립보안국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될 것이다. 심지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비책은 있었다. 그 정도까지 된다면 그분이 직접 개입하실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겠지만.
‘완아. 네가 여기서 내 말을 들어야 산다. 제발….’
해청은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는 아비는 이 세상에 없다.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는 더더욱.
그분께서 직접 개입하시면 험한 꼴을 당할 것이다. 그분은 후손에게 정말 애착이 많으시지만, 반대로 누구보다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분께서는 가장 잔혹한 방법도 꺼리지 않으셨다.
이 세상에서 해씨를 가장 많이 죽인 당사자는, 역설적이게도 해씨의 시조였다.
해청은 문득 몸을 떨었다.
황후의 국상 이전에 나눈 대담에서 원자력이라는 아주 새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설명할 때, 선조는 잠시지간 힌두교의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서 나온 비슈누의 모습을 빌렸다.
―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태조의 현신은 짧지만 강렬하고 아찔했다. 마치 눈앞에 태양 그 자체가 드러나고 번개가 친 것처럼 눈이 번쩍였고, 그 뒤엔 어두운 암흑이 깔렸다. 충격과 공포, 비명과 신음이 일 초보다 더 짧은 시간에 한꺼번에 몰려왔고 들렸다.
해청은 감당할 수 없는 위압감에 가슴을 부여잡고 떨어야 했다. 그분께서 직접 자신을 살피지 않았다면 아무리 정정하더라도 해청은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분께선 무언가 결심을 하신 모양이었다. 도대체 바라보고 있으신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해청은 태조의 기대에 어긋나게 행동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아버지와 독대한 자리에서, 해완은 순응의 의사를 표명했다.
“…알겠습니다. 안이는 어린 나이임에도 착하고 똑똑하니 책무를 잘 이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다만… 외가에 방문하여 좀 쉬고 오고 싶습니다.”
“알겠다. 그리하거라.”
‘어머니… 당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이 일이 있게 되니 해완은 문득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아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황후의 행동으로 인해 그녀의 아들인 해완은 정치적으로 굉장히 불리한 위치에 처했다.
하지만 해완은 원망의 마음을 접었다. 어머니의 몇 가지 비행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순응하고 그와 비슷한 정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면 크게 상관없을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였다. 해완은 자신의 피 절반은 그녀에게서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니 그는 처음으로 외갓집에 다녀오기로 했다. 대체 덕천 가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필 목적으로도.
* * *
중려
투투테펙 주
후악사카
투투테펙주의 주도, 후악사카는 과거 아즈텍이 남쪽의 국가들, 자포텍과 믹스텍 등을 정벌하며 세운 요새도시였다.
쿠쿨칸의 계시를 받은 칵틀 루임의 카롬테가 식인종 악의 제국이었던 아즈텍을 공격할 때, 아즈텍의 두 수괴 중 하나였던 재상 틀라카엘렐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주둔한 요새로 유명했다.
물론 지금은 요새적 의미는 하나도 없었고 그 과거의 유산들은 오로지 관광명소로 기능하고 있었다.
고려인들이라면 마땅히 자국의 옛 원주민 역사들을 다 봐야 했다. 대표적으로 세 지역의 문명이 있었는데, 남려의 아타카마와 타완틴수유의 문명, 중려의 아즈텍과 마야 문명, 북려의 문명화된 여섯 부족과 이로쿼이, 누무누 등이 꼽혔다. 괜히 중학교 국사책이 엄청 두꺼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역사는 재미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오로지 시험공부 따위를 위해서일 것이 분명했다. 고려는 여러 공직 시험과 자격시험을 볼 때 최소한의 국사 지식을 요구했다. 과거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미래를 논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가 주된 논리였다.
물론 사람들은 문명화된 여섯 부족이 어디서 뭘 했고, 어떻게 고려에 귀화했고 자제감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같은 역사만 배운다면 재미가 없어서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몇 가지 이야기는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도 초롱초롱 눈을 밝혔다.
대표적으로는 망나니 종친이었다가 개과천선한 해우석과 앙주 여왕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을 터였다.
그 이야기는 이미 몇 차례나 소설로 써졌고, 지금도 걸핏하면 쓰이는 상태였다. 한술 더 떠서 훗날 상민과 결혼하게 된 루크레치아는 남편의 사별한 전처 이야기를 아주 유명하고 아름다운 가극으로 만들어 놔 아직까지 살아있는 당사자의 심기를 크게 어지럽히기도 했다.
하지만 중려대륙엔 그것만큼 재미있고 자극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갈래(장르)가 다르다. 연애 이야기는 연애 이야기고, 무서운 이야기는 무서운 이야기였다.
심장을 뽑아 하늘에 바치고 인육을 먹는 이야기만큼 재미있고 자극적인 것은 별로 없었다. 특히나 무더운 여름, 풀벌레 소리가 자욱한 밤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 사이에선 더더욱.
그러니 중려대륙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내지인도, 입국허가증명을 받아 관광을 온 외국인도 있었다.
투투테펙의 현지 사람들은 알차게 이 문화재들을 써먹었다. 돈이 잘 벌렸다. 사실 그들도 같은 중려 문화권이라 선조들의 악행에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아즈텍이 했던 인신공양과 식인은 당시 중려 문명권에서는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껴안고 몰락해버린 아즈텍 덕분에, 이들은 상대적으로 면죄부를 얻었다. 그러니 그들은 과거에 대해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고 전통과 문화유산을 잘 지키고 있는 셈이다. 남쪽으로 쫓겨난 선주인들이 누구보다 가장 빠르고 격렬하게 남려 본토, 특히 수도권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채택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덕분에 지역경제는 활황을 맞이했다.
매년 엄청난 관광객들과 사학과 교수들, 그리고 눈이 퀭한 제자들이 이곳을 들락날락하니 당연했다.
특히나 테우얀테펙 운하가 개통된 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테우얀테펙 운하는 청사진이 총 세 번 바뀌었다. 모두 기존의 규모를 확장하려는 욕심 덕분이었다. 덕분에 공사는 조금씩 밀렸지만, 장시간의 공사 끝에 완공된 이곳은 이제 니카라오 운하가 수용하지 못하는 물류를 완전히 수용할 수 있었다.
평지에 지어진 대운하는 거대한 선박이 오가기에도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그동안 니카라오 운하를 오갈 만하다고 해서 붙여진 니카라오급 전함이 있었다면, 테우얀테펙급 전함이라는 수식어는 한동안 등장하지 않을 정도였다.
후악사카는 테우얀테펙 운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대도시였다.
태생이 항구도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바다와 그리 먼 것도 아니었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철도가 모일 수밖에 없는 위치상 거점도시로 기능하긴 충분했다. 단연코 중려의 가장 큰 도시로 발돋움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이런 도시에서, 일곱 개의 국가에서 온 사내들이 한 객원에 모였다.
모두 누구보다 평범한 관광객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웬만큼 첩보에 대해 통달한 사람이라면 수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고려, 조선, 백제, 옥저, 에이레, 네덜란드, 도이치. 7개국의 정보 수장들은 황립보안국과 정보총국 대내국에 의해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객원의 회의실에 모여 서로 통성명을 나누었다.
[작가의 말]
후악사카 = 오악사카
7개국에 루밀 키치파닐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