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
모든 것이 행복하게 마무리되었다.
주열은 맵시경연에서 굉장한 찬사를 받았다.
눈이나 젊은 나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워낙 큰 사건이 일어나다 보니 그의 일화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거장들은 그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해 주었다.
기반이 없었던 그는 단번에 청해 고급의상조합에 들어갔고, 상의국에도 자리를 얻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기회를 얻었다.
불편한 것은 있었다. 아니 불편하지 않은 게 없었다.
하지만 주열은 감내했다. 절망에 순응하는 것은 그의 장기 중 하나였었다. 시력을 잃었지만, 자유를 얻었으니 이 정도면 받아들일 수 있는 거래일지도 몰랐다.
이후 주열은 승승장구했다. 그는 마침내 고려 내에서 최고로 유명한 여섯 명품 가문 중 하나를 일으켰다.
그 이름은 드레라 했다. 점잖은 인격과 비슷한 표현이었다. 주열은 자신의 옷으로 말미암아 착용자 또한 심신 모두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원했다.
‘드레’는 나머지 다섯 개의 명품 가문들보다도 최고로 꼽혔다.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려연과 르클레르, 뒤샹, 플로라키스, 아리따움 등은 제각기 독특한 매력이 있었지만, 주열이 거장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후부터는 그의 사후까지 천부적인 감각을 따라잡기 급급했다.
경쟁자이자 동반자인 려연은 여성 현대복을 이끌며 승승장구했지만 최고급 전통 남녀 복식과 남성 현대복, 가방 등에는 드레에게 게속 밀렸다. 고려에서 가장 상징적이라고 볼 수 있는 황후와 태후의 예복은 연희가 아니라 주열이 무려 삼십팔 년 동안 독점으로 만들었다.
이야기가 명품을 만들었다.
려연과 드레는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그러니 후대의 모든 재봉사들은 그곳의 수석재봉사로 일하길 원할 것이 분명했다.
사적으로도 주열은 희망과 행복을 찾았다.
그가 진정으로 믿고 사랑할 사람도 찾았다. 그리고 나중엔 핏줄로 이어진 가족도 얻었다.
그가 한 가지 정말 안타까워하는 것은 가족의 얼굴을 한 번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것 빼고는 모든 것이 행복했다.
한주열은 홍진후에 봉해졌다. 큰 의미는 없었지만 스스로가 그것을 원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회사가 번 돈의 일정 부분을 죽을 때까지 홍진과 고려 내 빈민구제와 고아원 설립 등에 기부했다.
황제 해원은 국혼을 반대하지 않았다.
결혼할 사람이라며 연희가 주열을 창천궁에 데리고 왔을 때도, 그는 남몰래 한숨을 흘릴지언정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해원이 이 예비 사위에게 느끼는 책임감은 굉장히 컸다. 이 끔찍한 일의 피해자에게 어떻게 마지막 행복까지 빼앗아갈 수 있을까. 해원은 그 정도로 못난 사람이 아니었다.
마침내 황제가 국혼을 허락하자, 신민들은 이 동화 같은 이야기에 모두 찬사를 보냈다. 최근에 드러난 몹시 실망스러운 정부의 행태에도 황실의 인기는 여전히 견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원이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 절대 양보 못 하는 것이 있었다.
* * *
한차례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홍진의 작은 해안 어촌 마을엔 오랫동안 몸을 숨기며 살아온 중년의 남자, 한대수가 있었다.
그는 이 어촌의 폐가에 한동안 넙죽 엎드려 살았다.
범죄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해도 별 볼 일 없는 잔챙이에 불과했기에 고려의 수사기관이 고려 내의 범죄조직이란 범죄조직과는 전부 전쟁을 벌일 때에도 추가적인 추적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바퀴벌레와도 같은 생존력을 자랑했다. 그는 모두가 일터로 떠난 낮에 문단속이 잘되지 않은 넉넉한 인심의 시골 어촌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먹고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대수는 마침내 마을의 신문 가판대에서 대문짝만하게 쓰인 머리기사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세기의 결혼]
“으하하! 이제 난 살았다. 난 살았다고!”
자신의 아들이 공주와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이다. 처음에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장난이냐고 생각도 했었다. 혹은 자신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우리글을 읽을 줄 알았다. 한주열, 여기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지 않은가.
자신의 인생은 풀렸다.
설마 부마도위의 아버지를 해칠 수는 없으리라.
어쩌면 수도로 돌아가면 아들이 자신을 뫼실 수도 있었다. 화려한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평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세상을 지배하는 황제의 사돈인데, 그 정도는 감히 기대해도 되지 않느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알게 된 직후의 어느 날 밤, 그의 집에 두 명의 사내가 찾아왔다.
대수도 말단이라 하나 깡패였던 만큼 덩치가 나름대로 크고 강한 사내였다. 하지만 찾아온 사내들은 그 분위기가 차원이 달랐다. 방정맞지도, 으레 목소리만 크지도 않았다. 차갑고 고요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단 한마디, 그대가 한대수가 맞느냐고 질문을 한 것 이외에 그들은 휘장도, 뭣도 제시하지 않았다.
“이 자식들…!”
무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대수는 곧바로 주먹을 뻗었다.
별것도 아닌 자기를 일부러 찾아온다는 것은 굉장히 수상했다. 설마 황제의 사돈이 된 자신을 모시러 온 것인가 생각을 해보려 해도, 이런 분위기의 사내들을 보내진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대수의 저항은 무의미했다. 그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그 이후 그는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제압당했다. 이들은 차원이 다른 자들이다. 하나하나가 인간병기와 같았다. 어중이떠중이들이 감히 상대할 자들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대수는 폐가 밖 한 그루 나무가 있는 공터에 묶인 채로 쓰러져 있었다. 쏴아, 하는 바닷가의 파도 소리가 시원했다.
그는 얼른 입을 열었다. 입마개는 없었다.
“사… 살려주시오. 내… 내 아들과 말하고 싶소. 내 아들… 내 아들은 부마도위요, 그대들도 알고 있지 않소! 날 이렇게 대우하면 큰일 난다고!”
태연자약하게 돌아다니는 사내들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내 중 가장 가까이 있는 자는 밧줄을 묶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집 안에서 의자를 들고 왔다.
“으, 으으…!”
그들은 힘 빠진 대수의 신체를 제멋대로 조종했다. 대수는 저항해보려 해도 물 먹은 듯 흐느적거리는 신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느꼈다. 할 수 있는 것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누워버리는 것이었다.
마침내 밧줄이 대수의 목에 매달렸다. 이윽고 한 사내가 굵은 나무의 줄기에 대고 대수의 목에 걸린 밧줄을 당기자, 대수는 목 졸려 죽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하지만 우악스러운 힘은 멈추지 않았다. 대수는 고통스럽게 목을 조르는 밧줄을 뜯어내려 했으나 손은 묶여 있었다.
― 끄으, 끅
대수가 고통스럽게 떨었다. 밧줄을 당기지 않고 있는 자가 슬쩍 그의 다리를 껴안아 위로 조금 올려주었다. 줄이 약간 느슨해진 대수가 필사적으로 발을 디딜 데를 찾았다. 사내가 의자를 가져다 대니, 그제서야 대수는 그곳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희망을 주었던 그 사내는 곧바로 대수가 디디고 선 의자를 툭 차서 넘어뜨렸다.
그들은 무신경하게 사건 흔적들을 정리했다. 허름한 해안가 가옥에서 바다를 향해 바라보던 남자가 회한에 젖어 목을 매단 사건이 ‘창조’되었다. 그의 옆에는 신문이 놓여져 있었다.
제대로 된 수사가 일어난다면 손목을 강제로 묶은 상처나 밧줄에 거칠게 쓸린 나무줄기 등의 증거로 이것이 교살인지 자살인지 구분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제대로 된 수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내들은 교묘히 사진을 찍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자살한 것으로 추정. 수사 종료.]
* * *
백화점에 간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상민에게 품보기―쇼핑―란 딱히 의미는 없는 행동이지만 그래도 부부가 같이 거닐며 하는 재미있는 유흥거리였다.
딱히 지치지도 않았다. 상민은 딱히 물건을 고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무슨 물건을 살지 갈등이 생긴다면 그냥 전부 사면 되었다.
좋은 물건이 확실하다면 돈 쓰는 건 아깝지 않았다.
상민도 주열의 팬 겸 후원자였다.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된 베토벤, 상민은 주열을 그렇게 불렀다.
주열이 나중에 남성복도 만들기 시작하자 상민은 제일 먼저 그 옷을 맞춤제작하기도 했다.
주열은 일반적인 사람의 규격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주문을 받아 상당히 당혹해했지만 그래도 역시나 상민이 입었던 옷 중에서 가장 빼어난 옷을 만들어 상민을 만족스럽게 만들었다.
부부는 오랜만에 드레를 들러 옷과 갓, 신발과 시계 등을 샀다. 아예 따로 최고급 시계 ‘박물관’을 가지고 있는 상민이지만, 가끔은 막 차고 다닐 시계가 필요한 때도 있었다. 물론 그가 지금 차고 다니는 것도 천문학적인 돈이긴 했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이었다.
그는 아이샤에게도 가방과 높신, 속옷과 향수 등을 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머나먼 이라크 땅에 두고 온 아들 만수르와 자밀라에 대한 선물도 샀다.
이러니 들고 갈 짐이 너무 많아 수송용 차를 두 대나 더 불러야 했다.
“선물 고마워요.”
상민은 웃으며 아이샤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중년의 미부인이 행복감에 젖어있는 것처럼 그도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느 건방진 여자가 그의 기분을 더럽힐 뻔했지만 괜찮았다.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자 아니나 다를까, 아까부터 말을 걸고 싶어 하던 사도가 그에게 불쑥 물어보았다.
“어찌 처리할까요?”
상민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이 사도란 놈들은 자신을 뭐라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진짜 존경하는 것인지, 아니면 좀팽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는 소소히 모욕당했다고 앙갚음을 하는 편협하고 잔인무도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은 관대했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낸다면, 무덤조차 가지지 못했던 많은 이들이 절규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불특정한 다수의 시민이나 자신이 찜해놓은 인재들에게 못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상민은 흉포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버려 두거라. 과하게 반응하지 말라. 어차피 연희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 아이는 똑똑하니.”
한 번 정도는 충분히 웃으며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이 같은 결정을 내린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기분이 썩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민은 이번 휴가를 기대하며 조금 신이 나 있었다.
그는 이번에 백화점에서 두툼한 겨울용 옷을 샀었다. 특수 제작된 옷이었다. 잘 팔리지 않아 다소 한적한 매대에 있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는 시점이긴 했지만, 사시사철 온화한 청해의 날씨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외투들이었다.
다만 청해는 몰라도 남려 최남단 지역인 우수아이아나 북려 최북단 지역 중 하나인 누나부트, 빙주에서 휴가를 보내기에는 적절할 의복이었다.
평생 사막에서 자라온 아이샤는 고려에서 처음 접해본 눈을 몹시 좋아했다. 상민은 그녀와 함께 이번 겨울(북반구) 빙주에 새로 구매한 겨울용 별장에 가보기로 했다.
흰 눈이 무릎까지 쌓인 별장에서 넉넉히 저장된 식량을 까먹고 나무 땔감을 피우며 책을 읽으면 지상낙원이 따로 없을 것이 분명했다.
* * *
그리하여 둘은 가을이 찾아왔을 때, 빙주의 주도인 나녹까지 갔다.
빙주는 말 그대로 얼어붙은 땅이었다. 근처에 있는 아이슬란드와 비슷한 어원을 지녔지만, 아이슬란드는 오히려 기후가 빙주보다는 더 온화했다.
그나마 빙주의 남서쪽 일부는 바다의 온기를 품을 수 있어 영구동토층이 아니었다.
나녹도 수목이 성장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땅 중 하나였다. 겨울에 눈으로 잔뜩 뒤덮이는 것은 다른 빙주와 마찬가지지만 여름에는 산과 들에서 꽃과 풀이 푸르게 피어났다.
휴양지로서는 꽤 매력적이었다.
나녹은 엄연히 한 주의 주도임에도 불과 만 이천 명 정도만 살아가는 아주 소규모의 도시였다. 수목이 자란다고 해도 애초에 환경 자체가 척박했다. 외부의 식량과 물자 수입이 없으면 만 명도 부양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이곳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마을 중 하나였다. 재판소도, 경찰도, 소방서도 병원도 다 있었다. 고려에서는 빙주의 영유권 문제도 걸려있고 하니 이곳의 지자체에 많은 보조금을 주곤 했다.
둘은 나녹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별장에서 체류하기로 했다. 상민이 소유한 58번째 별장이었다. 환경상 그가 소유한 부동산치고는 소박한 축에 속했다.
둘은 가을 동안엔 근처의 자연환경을 관광했다.
타세르미웃(Tasermiut) 협만은 인세의 절경 중 하나였다. 자그마한 나룻배를 타고 거대한 병풍마냥 주변의 산들이 협만을 휘감아 바다로 내려오고 있는 빙하의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세상의 온갖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아이샤는 절경을 보고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 옆에는 킨구아(Qinngua) 계곡이라는 다른 절경도 있었다. 빙주 안으로 조금 들어간 내륙지역인데도 추운 외부의 바람을 막는 병풍 덕에 계곡 안에는 온갖 아름다운 식생들이 있었다. 눈 덮인 산줄기 사이로 초록색, 붉은색 노란색으로 피어난 꽃과 풀, 관목들은 명실공히 빙주의 자랑 중 하나였다.
겨울이 온 뒤 부부는 나녹의 별장에 박혀 계획대로 밖에 나돌아다니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즐겼다. 견고하게 지어진 별장은 구조상으로도 굉장히 단열이 잘 되어 있었다. 단열재의 최고봉이었던 석면은 없었지만 근래엔 유리섬유가 단가가 많이 내려와 보급되고 있었다.
상민은 가끔 한 자루의 엽총과 낚싯대를 들고 집 밖을 나서기도 했는데 눈 덮인 평야 위에서 오랜만에 투실투실한 흰색 북극곰과 교감을 나누기도 했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겨울이 막 지났을 때였다.
여유 있게 대자연에서 치유 여행을 마친 부부가 다시 남려로 향하려 준비할 무렵, 갑자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조금씩 나녹에 오기 시작했다.
상민은 이들에게 큰 흥미를 느꼈다. 이 사람들은 그처럼 이 작은 도시의 별장에 휴양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을 북쪽으로 가는 전초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짐을 하역하는 중이랬다.
나녹은 북극으로 가는 주요한 관문 중 하나였다. 당장 나녹을 떠나 타세르미웃 협만을 거쳐 북쪽으로 올라간다면 영구동토층이 나왔다.
빙주는 북극해 위에 떠 있는 대륙만 한 크기의 거대한 빙하와 이어져 있었으니 그곳에서 더욱 위로 북상한다면 마침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지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후아이나푸티나 전후로 존재했던 소빙기의 흔적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대세가 된 화석연료의 사용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는 건지 지구는 조금씩 따뜻해졌다. 지구 전체로는 연 평균 기온이 영 점 몇 도가 오른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 정도로도 극지방의 기후는 천지 차이가 났다.
바야흐로 인류는 또 다른 도전을 눈앞에 두게 된 셈이었다.
상민의 눈이 돌아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터였다.
[작가의 말]
나녹(拏綠 Nanoq) : 나노르탈리크(Nanortalik)
타세르미웃 협만 : Tasermiut Fj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