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81화 (481/653)

명품(6)

연희가 제안한 최초의 청해 맵시경연은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상표나 이름 간의 싸움이 아닌 재봉사 개개인의 이름을 걸고 나왔다.

상의국 출신의 민백오나 피에르 김, 그리고 북려 왕가들의 전속 재봉사인 나경복과 프랑수아즈 르끌레르 등등 유명한 사람이 전부 다 참여했다.

공주의 제안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쩌면 연희의 제안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순위를 매기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경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은 누가 최고의 재봉사인지 겨루어 보고 싶어 했다.

굉장히 많은 이들이 흥미를 보였다. 최고의 유통과 무역, 객원사업의 대기업인 아타나토스도 후원 의사를 밝혔고 다른 기업들도 한 발을 걸치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 장성하지 않은 공주가 한 일치고는 굉장히 거대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연희는 치밀어오르는 부담감에 화장실로 들어가 몇 번 운 적도 있지만, 동 나이대의 소녀답지 않게 꿋꿋하게 자신의 할 일을 했다. 다만 꿍꿍이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노인네들 상대는 해원이 파견해준 내관들이 맡았다.

그녀가 할 일은 수많은 참가 희망자들의 명단 속에서 제대로 자격이 있는 자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참가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최고의 재봉사들이 겨루는 자리인 만큼, 까다롭게 선별하는 것이 맞았다.

“정말….”

장인의 재봉 실력은 단 한 벌의 옷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녀도 그랬고, 참전하지 않는 상의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애초에 희망자 자체가 워낙 많았기에 옷더미에 파묻힌 그들은 연신 뻑뻑한 눈을 문질러가며 옷을 감정해야 했다.

“…다음부터는 업계에서 이름을 좀 알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참가 자격에 제한이 없으니 업무가 너무 막중합니다.”

어떤 사람이 우울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연희는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게요.”

누군가 그래도 공주의 편을 들었다.

“첫 회이니 시행착오는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너무 괘념치 마시옵소서.”

점심시간이 되자 몇 명은 커피를 내렸고 몇 명은 밖으로 나가 기지개를 켜며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저도 커피 한 잔 주세요.”

“안 됩니다. 키 안 크십니다.”

내관의 말에 연희는 꿍얼거리며 손을 놀렸다. 그 와중에 한 벌이라도 더 보기 위함이었다.

“아이씨, 무슨 포장을 이렇게 한 거야.”

그녀는 보자기를 꽁꽁 싸맨 것도 모자라 박음질까지 해놓은 것을 보고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가위를 가져와 투두둑 자르니, 그 안에 상자 하나가 있었다.

그 어린 마음에도 심상치 않은 포장에 그녀는 얼굴을 굳혔다. 혹시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이 극독이라도 바른 옷을 여기에 준 것이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생각도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공주가 직접 이 옷을 심사하는 사실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연희는 슬그머니 몸을 빼며 손가락 끝으로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그녀가 옷을 펼쳐 들고 한동안 넋이 나간 채 바라보고 있자,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가오더니 멀리서부터 탄성을 내뱉었다.

“실로 대단합니다. 전하, 혹시 어느 명인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불쑥 말했다.

“이 정도로 색상을 잘 다룬다니… 혹여 태로의 플로라키스 선생이 아닐까요?”

“그분께선 연로하셔서 이번에 참여치 않으신다고 하셨소. 자제분은 진작 제출했고.”

“아무리 그래도 기성이 아니면 이 정도로….”

“…잠시만요.”

― 툭

연희는 상자를 집어 올렸다. 더 이상 경계심은 없었다. 재봉사가 누구인지가 너무 궁금했다. 상자에서부터 작게 접힌 종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저곳에 적혀 있을 것이다. 연희는 냉큼 주워 그를 펼쳤다.

하지만 편지의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그녀는 눈이 휘둥그렇게 떠지더니, 이윽고 아무에게도 그 편지의 내용을 말하지 않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궁녀들이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았다.

* * *

공주는 열차를 타고 창천궁으로 갔다.

처음 이 편지를 읽었을 때, 그녀는 극히 당황했다.

이렇게 아버지에게 달려가면서도 몇 번이나 다시금 읽어내렸다. 혹시 이 편지가 지독한 장난은 아닐까 싶었기도 했다.

하지만 삐뚤빼뚤한 글씨, 어긋난 맞춤법, 그리고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된 종이, 이 모든 것이 오히려 공주의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편지에 적힌 상황과 더해보면 너무나 신뢰성이 높았다.

그 옷, 그런 옷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이 이런 장난을 칠 리가 있겠는가.

옷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 옷은 연희가 본 것 중에 가장 소름 끼치는 옷이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리고 이 편지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소름이 끼쳤다.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 방 안에 들어온 딸의 얼굴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해원이 이윽고 편지를 넘겨받아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온화했던 그의 얼굴은 차츰 무겁게 가라앉았다. 딸이 없었으면 흉악하게 일그러졌을지도 몰랐다.

“넌 이만 가 보거라. 이건 내가 알아서 하겠다.”

자초지종을 들은 해원은 딸아이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연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등을 돌려 나갔다.

“…네.”

[이 글을 보시는 귀인께….]

편지를 쓴 당사자는 어쩌면 그렇게까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복을 심사하는 유명한 재봉사가 그저 수도의 큰 경찰서에 어떻게 이 편지를 보내는 정도로만 해줬어도 감읍할 일이다.

그러면 혹여 편지에 적힌 대로 지방의 경찰조직과 부패한 범죄조직이 관여하지 않는 부서에서 독립적인 수사가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중수부는 바라지도 않더라도, 창양경찰 같은 곳도 있었다.

그게 아마 편지를 쓴 사람의 실낱같은 희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그보다 아득하게 커졌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보고체계의 가장 끝에 닿았다.

해원은 이를 갈았다. 그는 박살 낼 듯 문을 열었다. 내관들이 깜짝 놀랐다.

― 쾅

“시중이랑 경찰청장 오라 그래. 법무상서도, 어사대부도 불러! 당장! 십 분 내로 튀어 오라 그래!”

“예, 예 폐하!”

황제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궁내 모든 사람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천생 무골에 건장했지만 해원의 원래 성격은 굉장히 부드러웠다. 황후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궁인들은 황제의 분노가 이토록 지엄했는지 새삼 깨닫고 있었다. 베네치아와 러시아의 행동으로 혼돈으로 빠져들어 가는 국제 정세에도 별 상관 않으셨던 황상이다. 그러나 황상은 도리어 국내 문제를 훨씬 더 민감하게 여기셨다.

호명된 네 사람은 몇 분이 되지 않아 금방 등청했다.

모두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심리적인 땀이 아니라, 정말로 뛰어오느라 그런 모양이다.

그들은 집무실 문 앞에서 서로 눈치를 보더니 대체 왜 황상께서 저렇게 진노하시는지 아느냐며 수군거렸다. 보고받은 것이 있어야 예측이라도 할 수 있었고 대비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불호령이 떨어졌다.

“니들 빨리 안 들어와!”

“예, 예!”

네 명의 대신들이 엎어지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황제는 평시 대신들에게 예의를 차렸다. 시중이 민선시중이 된 이후에도 그랬다. 시중뿐만 아니라 밑의 대신들에도 연장자이면 대체로 상호 존대를 하고, 연장자가 아니라도 꼬박꼬박 경이니 하며 존칭을 붙였다.

하지만 지금 해원은 상스러운 말도 서슴지 않았다.

“너 이 새끼들, 뭐 하는 새끼들이야! 야 최정석이, 너부터 이거 읽고 말해봐.”

“그게 저….”

“어디서 뚫린 입이라고 지껄여!”

방불기, 방어가 불가능한 기술이다. 대신들은 벌벌 떨었다.

폭풍이 몰아쳤다. 그토록 호걸 같던 경찰청장은 숫제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경찰이랑 어사대는 이 일을 책임지고 수사해. 니들 이번 일 제대로 못 하면 아예 부서를 없앨 거야. 알아?”

“예! 알겠습니다!”

“시중 빼고 다 나가봐.”

대신들은 축 처져서 나갔다. 해원은 끝까지 가만두지 않았다.

“안 뛰어!”

* * *

소위 말하는 ‘홍진 사건’이라는 대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심할 정도로 다그쳐진 경찰청장과 어사대부가 자신의 근무지로 돌아가 무슨 일을 벌였겠는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책상이 뒤집어지고 서류는 날아다녔다.

수사를 담당하게 된 어사대는 엄중히 비밀을 지키며 순식간에 홍진에 파견할 병력을 구성했다. 경찰은 어사대를 도울 중앙수사국 경관들을 파견했다. 이들은 시가전이라면 너무나도 이골이 난 마약단속국에게 전술훈련을 받은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작전이 끝나면, 이들은 새롭게 경찰특공대라는 이름을 받을 것이었다.

이들은 심지어 군과 해경의 업무협조를 받아 빠르게 지역범죄조직 소탕에 나섰다.

홍진시경의 경관들은 사전에 다 직위해제가 되었다. 나중에 가담한 자와 가담하지 않는 자를 가리겠지만 지금 당장은 법적으로 어떠한 행사를 할 수 없었다. 현지 범죄와 밀접하게 관련된 치안감은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지만, 이미 그 인맥들은 전부 다 침묵을 지키는 상태였다. 심지어 일부는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현지의 범죄조직들은 미미하게 저항시도를 했지만, 모두 죽거나 사로잡혔다.

주열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이들도 멍한 얼굴로 돗자리 위에서 휴식하고 있었다.

불법적으로 일을 하던 아이들은 모두 풀려났다. 마찬가지로 불법적인 도박장과 인신매매적 현장도 박살이 났다. 범죄자들은 수갑이 채워져 제도로 압송될 예정이었다.

증거는 차고 넘쳤다. 특히나 주열이 아이를 시켜 땅에 묻어놓은 서류들은 감자나 고구마 줄기마냥 공장 사장과 그 주변인들, 그 주변인들의 주변인들까지 줄줄이 엮을 수 있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쩌면 사형까지 구형될 수 있어 보였다.

“너, 이 새끼… 네가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수갑이 채워진 사장이 분노 섞인 눈으로 주열에게 침을 뱉었다. 거리가 되지 않아 침은 허공을 날아가다 도중에 떨어졌지만 증오는 온전히 전달되었다. 경관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시체가 말도 하는군. 넌 제도로 가면 사형이야 임마.”

사장뿐만 아니라,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아저씨들, 의외로 친했던 아저씨들까지. 이들 모두는 경관들에 의해 질질 끌려갔다.

주열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눈물을 닦았다. 후회가 되진 않았다. 속이 뻥 뚫려버린 시원함이 찾아왔다. 다만 억눌려왔던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해방되고 있었다.

‘정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수 있게 되었어.’

홍진사건 이후, 해원은 경찰 및 기타 대내 치안조직을 다시 손봤다.

이런 사건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나성과 마야미, 하와이와 와야킬 등의 도시에 있는 범죄조직들은 꽤 큰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가 빠르게 성장하니, 이런 조직들도 떨어지는 콩고물들을 받아 빠르게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싹을 잘라놔야 한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해원은 어사대와 사헌대를 혁파했다. 이들은 검찰청과 감찰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시중의 휘하에 들어갔다.

경찰의 부패가 심각한 문제가 되자, 이를 견제키 위해 검찰은 기소권을, 경찰과 보안관은 수사권을 가졌다. 감찰원은 두 권한 다 없었지만 공직사회 전반에 대해 감찰하게 되었다.

다만 중앙수사국은 완전히 경찰조직에서 분리되며 명칭도 연방중앙수사국, 혹은 연방수사국으로 바뀌었다. 법무부 휘하가 된 이들은 굉장히 폭넓은 수사권과 일부 영장청구권을 허락받았다.

반대로 검찰은 기소권적 측면에서 수사가 미흡할 수 있는 경찰과 보안관에 대해 더 자세한 수사를 재촉하는 보안수사권을 가졌으며, 특별사건에 대해선 자체 수사권을 가졌다.

또한 해원은 황제의 아래에도 어느 정도의 권한 있는 수사단체를 만들길 꾀했다.

그는 외국 작전에 대해서 굉장히 폭넓은 권한(당연히 비밀이었다)을 가지고 있는 대외국과는 달리, 정보조직일 뿐 수사권과 기소권 모두 없는 대내국에게 조력자를 만들어 약간의 팔을 붙여놓기로 했다.

정부나 국가기구의 부패를 견제하며, 또한 다소나마 황권을 보장할 것이다. 어찌 보면 혁파된 어사대가 이름만 바꿔서 살아남은 것이라 볼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어사대는 수사권이 없었기에 그것보다도 더 강할지도 몰랐다.

다만 기관의 덩치는 어사대보다도 조금 더 작아졌다.

이렇게 생겨난 황립보안국은 거의 웬만해선 사건에 잘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등장하면 굉장히 폭넓은 권한을 가졌다. 지방경찰청의 허술함이나, 처리할 업무가 많아 항상 과부하가 걸려있다고 봐도 무방한 중앙수사국, 어디까지나 방첩 조직이라 일반적 권한은 제한적인 정보총국 대내국 대신 지정된 특정 일에 대해 빠르고 효율적이며 신속한 일 처리를 담당했다.

아마 이때부터 경찰이 담당하게 된 최중요 사건 현장에 한 박자 늦게 도착해 왠지 경찰보다 더 크고 화려한 금빛의 휘장을 들이대는 연방중앙수사국, 그리고 사건을 넘겨받는 중수국 사람에게 휘장을 들이대는 대신 한 통의 비밀 전화를 하는 황립보안국에게 경찰이 울분을 터트리며 모든 자료를 건네주게 되는 아주 고전적인 장면이 극장에서 등장하게 되었다.

* * *

고려를 한 번 뒤집어 놓은 주열은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일평생 거의 노예마냥 살아왔던 그가 단번에 이런 자유를 누린다 해도 그 기쁨을 완벽히 향유할 수는 없었다.

“저는 범죄자에 불과한데요. 저도 저들에게 부역했어요.”

“괜찮습니다. 충분히 정상참작이 될 겁니다. 다만 앞으로 좀 법원에 많이 출석하셔야 할 겁니다.”

오히려 윽박지르는 것이 일상인 검사가 그를 진정시켜야 했다. 이 사람은 오히려 너무 자학적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사건은 도무지 언제 해결되었을지 기약이 없었다.

황제는 이 사건에 연루된 피해 아이들을 대부분 황립보육원에 보내 잘 돌보도록 명령했다. 성인이 되면 피해보상금도 받을 것이었다. 다만 주열은 이제 곧 성인이라 알아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의 손에는 자신이 의복 상자에 같이 보낸 편지의 답장이 있었다. 답장이라고 보기엔 초청장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그는 목적지를 떠올렸다.

청해로 가고 싶었다.

수정궁은 박람회를 한다고 해서 부지만 확보했지만 지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부지를 그냥 놀려두지는 않았고 이미 행사나 예식장으로 쓰이던 큰 건물이 있었기에, 그것을 중심으로 아마 제1회 맵시경연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주열은 주춤주춤 전시장 옆 가건물의 문을 열었다.

준비장소로 쓰이는 건물이었다. 개인 작업실이 목적지였지만, 개인 작업실로 가는 복도 앞에는 넓은 휴게실이 있어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모여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힐끗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주열은 그 눈들에서 딱히 부정적인 감정은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도 외로움을 느꼈다.

이런 곳에 참석하는 재봉사들은 각자 제자들이나 수련생들을 데리고 있었다. 예술 쪽은 아무래도 도제식 관계가 많았다. 노동을 분담할 수 있었고 경험을 교육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열은 혼자였다. 게다가 한참 늦게 왔기에 손에 든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경연대회가 코앞이다.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는데 대체 왜 이곳에 왔는지 주열은 스스로에게 의아해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그래도 그는 보답해주고 싶었다. 실낱같은 희망에 모든 운을 걸고 하늘에게 기도를 했더니, 경찰들이 와서 그를 구원했다. 그러니 은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가 보낸 초청장에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던가.

작업실은 정말 쾌적했다. 밤늦게까지 열악한 환경에서 몰래 일하던 장소와는 천지가 다를 정도로 대단했다. 재봉틀은 심지어 전기로 가동되었다. 단지 발로 발판을 꾹 누르기만 하면 손잡이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그 말고도 다과 도구도 있었고, 간식거리도 있었다.

그를 배려하기 위함인지, 작업실 옷걸이에는 먼지 방지 덮개를 씌운 최초의 걸작이 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다시 쓰다듬었다. 오랜 친구를 만나는 듯했다.

이렇게 좋은 환경을 제공했으니 주열이 재능을 뽐내지 않을 순 없었다.

본보기로 옷을 입어줄 여인들, 즉 의인(衣人)들도 없었고 제자도 없었지만 그는 묵묵히 도안을 그리기 시작했다. 재봉사는 옷을 만들면 그만이다.

비극은 그때 찾아왔다.

주열은 계속 눈을 문질렀다.

왜 이러지.

시야는 흐릿하다. 명확히 보이지가 않았다. 자연스럽게 연필은 삐뚤빼뚤해졌다. 겨우겨우 눈을 비벼가며 도안을 완성했지만, 이제는 재봉틀을 돌리기 힘들었다.

요 근래에 몹시 피로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하루면 낫겠지 하며 잠에 들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에도 그의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빠르게 악화되었다. 아니, 이미 악화되어 있었다. 그가 인정하지 않고 있었을 뿐.

시야는 조금씩 조금씩 흐려지더니, 마침내 간신히 어둠과 밝음을 구분하는 정도로 추락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운영되는 염료공장의 유독한 기체와 봉제공장의 먼지들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았다.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내요?”

연희는 문득 궁금증에 그렇게 물었다. 곧 경연이 열리는 시기니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가 자꾸 신경 쓰였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인데, 너무나도 많은 지옥을 헤쳐 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구원하는 데 한몫을 거들었기도 했다.

“글쎄요. 한동안 보이다가 요 근래는 안 보이던 거 같은데.”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중년의 여인 하나가 그 옆에서 한마디를 더 거들었다.

“며칠째 두문불출하던걸요?”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연희는 벌떡 일어나 그의 작업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벌컥 열었을 때, 그녀는 쓰러진 채로 절망에 흐느껴 울고 있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눈이, 눈이 보이지 않아요.”

연희는 마음이 미어졌다. 이자가 겪어온 지옥이 너무 안타까웠다.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건만, 그는 너무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대체 왜 태조께선 이 불쌍한 아이를 보우하지 않으신단 말인가.

종통으로서 그녀는 신민의 고통에 큰 책임감을 느꼈다. 모성애일지도 몰랐다.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그 여파도 수습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어디 푹 좋은 곳에 요양을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시력이 다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는 휴식을 누릴 권리가 있었다. 없다면 그녀가 그렇게 만들어 주리라.

하지만 주열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오기가 그의 얼굴에서 피어났다.

솔직해지자.

경연이란 것, 오히려 자신이 하고 싶었다. 은혜를 갚는다고 온 것도 맞지만, 하고 싶어서 온 것도 있었다.

최고의 아름다움을 겨루는 자리에서 자신도 당당히 서고 싶었다. 천재들은 향상심이 넘쳤다. 자신 또한 첫 작품처럼 대단한 옷들을 더 만든다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절망에 빠졌을 때, 그는 오히려 강력한 욕망을 느꼈다. 한 번만 더.

“절… 절 다시 재봉틀 앞에 놓아주세요. 단지 그 앞에만 놓아주면 돼요.”

연희는 그녀보다 덩치가 더 크지만 앙상한 청년을 힘들이지 않고 일으켜 세웠다.

주열은 금방 재봉틀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될 턱이 없었다. 그는 아직 잃어버린 시력에 대해 충분히 적응하지도, 심지어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몇 번 재봉틀이 헛돌았다.

헛돈 재봉틀의 바늘이 그의 손을 파고들었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사고가 날 것이 뻔한데도 그를 자리에 앉힌 연희가 자책하며 의사를 데려왔다.

“손의 상처는 얕습니다. 다만 눈의 질환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추측하면 백내장 같은 부류일 듯합니다.”

시력에 관한 질환은 대체로 불치였다. 그래도 연희는 제도나 창양에서 내로라하는 명의에게 편지를 보냈다. 혹여 그의 증상과 비슷한 것을 치료한 경험이 있느냐고.

하지만 그 전에, 연희는 다른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알려줘요.”

“……네?”

“당신의 도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재봉이라면 연희도 만만치 않았다. 도안에 따라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다만 원작자의 도안이니만큼 어떤 식으로 만들어가야 하는지 개념을 알고 싶었다.

“여기 가까이 앉아요. 앉아서 말해줘요.”

주열은 홀린 듯 그 옆에 앉았다. 연희는 독촉하지 않았다.

그의 중얼거림이 시작되고, 연희는 발판을 밟았다.

연희는 전율했다.

눈을 감은 채 자신의 할 말을 하는 주열은 그녀의 손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았다. 어찌나 정확한지, 아주 잠시간은 눈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계속 그의 지시에 따랐다. 그리고 서로가 가진 의복에 대한 가치관을 깨달았다.

그녀가 입기 편하고 매력적인 옷을 두루 추구한다면, 주열은 그야말로 극한의 미를 추구했다. 자신이 좋은 옷을 입겠다는 자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옷을 입혀주고 싶은 자의 관점이었다. 서로의 개념은 합치될 수도, 반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희는 지금 당장은 자신의 주장을 굽혔다. 그리고 그저 그의 요구에 따라 만들었다.

새로운 감각이었다. 주열은 눈을 감은 채 온전히 심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그랬지만 눈을 감으면 심상은 더 또렷했다.

반면 연희는 나름대로 상당히 특출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재능조차 압도하는 주열에게 몰입했다. 그는 고려 전통 복식과 유럽 복식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운 자가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생각의 틀이 제한되지 않았다.

차용할 것은 차용했고, 뺄 것은 뺐다. 저고리와 치마 혹은 드레스인지, 두루마기와 숄 혹은 판초인지, 그저 아름다우면 그만이다. 아름다움엔 국경이 없었다. 그가 만든 최초의 의복이 가장 형식이 있었다.

― 드르르륵

공주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걱정되어 찾아온 내관들은 그녀의 손짓에 물러나야 했다. 겹빵과 물만 먹고 잠깐잠깐 화장실만 가는 것을 반복한 두 명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집중했다. 연희는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왔다.

그리고 마침내 옷들이 탄생했다.

연희는 기뻐서 팔짝팔짝 뛰었다. 아주 약간 염려한 적도 있었다. 사실상 자신이 절반쯤 이 옷들을 만들고 있으니, 평가의 객관성이 흐트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어차피 순위를 매겨 상금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이런 대단한 옷을 만들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흥이 넘치는 나머지 연희는 그중 하나의 옷을 입었다. 신기하게도 옷은 자신에게 꼭 맞았다. 이게 운명일까. 그녀는 옷을 입은 채로 와락 주열을 끌어안았다.

그때 주열은 깨달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니 그다음 자신이 무언가를 얻었을 때는 그것이 자신의 전부가 될 것이라고.

[작가의 말]

와야킬 : 과야킬

황립보안국 : MI5 + NCA ― 방첩

정보총국 : CIA + DEA + NSA

연방중앙수사국 : FBI

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의인 : 모델

오늘분은 꽤 길어졌네요.

이번 에피소드는 이번 화로 끝났습니다.

월요일은 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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