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의 꿈(2)
주문호는 곧바로 절명했다.
폐가 관통된 서황비는 몇 분 더 살아있었는데, 그녀도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동훈의 손을 잡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유언을 남길 시간만큼은 가질 수 있었다.
삽시간에 폐를 가득 채우고 끓어오른 피를 게워낸 서황비가 자신의 피로 그의 손바닥에 어렵사리 몇 개의 글자를 써 내렸다.
― 續
“끝까지 계속하라… 하신 겁니까?”
서황비가 핏발 선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권력 근간이었던 그녀도 죽어가고, 심지어 그녀의 권력 근간이었던 그녀의 아들도 바로 앞에서 죽은 이 마당에서 대체 그에게 뭘 바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동훈은 약속을 해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알았어요. 꼭 그리할게요.”
마지막 요구사항마저 들어주겠다 그리 대답한 그의 품에서 서황비는 떨리는 손으로 몇 글자를 더 쓴 뒤 최후의 숨을 몰아쉬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 愛
온 손바닥이 그녀의 피로 붉게 물든 광경 속에서, 그는 허망한 얼굴로 마지막 글자를 보다 그녀의 눈을 감겨주었다.
최고 권력자의 암살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서황비가 집권한 이후 비교적 안온하게 지냈던 경사가 다시금 혼란에 빠져들었다.
경자정변과 신축조약, 그리고 그 이후 진행된 변법자강운동의 일수만 따져보면 불과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지만, 이제 명나라 사람들은 그조차도 그리워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 콰앙
“이자인가?”
흉흉한 살기를 뿌리며 취조실 문을 박차고 들어선 양계는 이번 사건과 연루된 인물들 몇을 추포해 붙잡아 놓은 장소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암살자는 곧바로 현장에서 사살되었었다.
추가 총탄을 발사하기 위해 쌍열총을 재장전하려는 모습을 보였기에 당연한 행동이긴 했지만, 그 덕에 그 뒷배를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은 막혀버리고야 말았다.
지금 명 금군의 무능력함이란.
양계의 뒤를 따라 들어온 동훈은 탄식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짧은 시간에 군주가 여러 번 휙휙 바뀌면서 장수들이 너무나 자주 물갈이되어 지휘체계가 망가진 사정을 고려해봐도 그랬다.
이들의 본질적 문제는 이들이 심지어 하북군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대에 동떨어진 구식군이라는 것이었다.
아직도 총 대신 기다란 창과 칼을 패용하고 다니는 인간들이니 화기에 대한 이해는 너무 낮았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암살에조차 허술한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닌가.
동훈이 훈련시키고 있는 신식군이 조금만 더 훈련을 받았다면 이들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었을 텐데.
동훈의 원망과는 별개로 여전히 의문점이 있었다.
제아무리 구식군이라 하나, 이들도 기본적인 대비 정도는 했을 것이다.
정치가 혼란한 명나라에서 이런 종류의 암살 시도가 한두 번이었겠는가.
비록 이번 사태의 도구인 쌍열권총은 아니더라도 석궁이나 활로 저격을 하려던 시도는 있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는 사전에 극장에 진입해 준비를 미리 마쳐놓은 조력자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제아무리 근거리였다 하나, 개머리판도 없는 쌍열권총을 저토록 잘 맞춘 사실도 의심스러웠다.
죽은 암살자는 이번 일의 성사를 위해 일정 기간 이상 특별한 교육을 받았던 것이 분명했다.
이는 척화를 부르짖는 한족주의자, 혹은 태평천국의 잔당이 벌인 충동적인 암살이 아니라, 뒷배가 있다는 뜻이었다.
제일 처음, 동훈은 자연스럽게 양계를 의심했다.
둘의 관계는 최근 썩 좋지 못했으니까.
암살 이후 저렇게 분노와 비애감이 섞인 표정을 짓고 다니며 복수를 부르짖는 것도 다 가식이 분명할 터.
그러나 차츰 생각을 정돈해 가면서, 동훈은 양계가 이번 일의 뒷배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완전히 배제하긴 힘들지만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서황비는 연인이었던 동훈과 약간의 갈등을 빚긴 했지만, 그렇다고 척화파 신중론자들의 손을 마냥 들어주지도 않았다.
또한 양계는 동훈과 같은 총리아문 소속이며, 또한 외국인인 동훈을 대신해 사실상의 수장 노릇을 해왔기 때문에 권력에서 소외당하지도 않았었다.
그의 권력 근간도 사실은 서황비였던 것이다.
양계도 암살 이후부터 거의 묵언수행을 하는 고승처럼 입을 잘 열지 않는 나라동훈을 불러 독대했다.
“드릴 말씀이 있소.”
근래의 취조를 주도한 탓에 피 냄새와 살이 타는 냄새가 온몸에 배어있는 양계가 동훈에게 그렇게 말을 꺼냈다.
“우리의 예전 사이가 어떠했든, 지금 우리는 전대미문의 국난 속에서 대명을 수호해야 할 막중한 위치에 있소.”
양계도 동훈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동안 날 의심하셨지요?”
양계의 질문에 동훈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해두건대, 나는 서황비 전하의 충성스러운 지지자였소. 전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대체로 그것을 따랐지.”
그랬나?
“심지어 태후가 되실 분의 행동으로는 아주 좋지 않은 사적인 일, 예를 들면 어제까지만 해도 외국인이었던 사람과 썩 건전하지 못한 관계를 이어 나가고 계셨을 때도.”
“…….”
“그대가 나를 불신하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오. 전하께서 변을 당하셨으니, 이제 명은 무너져 내릴 것이오. 그대도 알다시피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고 계시지 못하는 폐하께서도 희망이 없는 상태, 후사조차 남기지 못하실 것은 당연하오. 만약 폐하께서 붕어하신다면 이제는 사방에서 자신이 명의 다음 황제가 되겠다는 자들이 넘쳐흐를 터.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하오.”
의외의 말이었다.
지금 그가 말하는 어조는 마치 양계가 동훈의 총리아문 직 유지를 긍정하고 지지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양계의 입장에서 이는 당연했다.
동훈은 서황비가 죽은 뒤 끈을 잃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자괴감과 비통함, 그리고 무기력함에 젖은 그의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동훈은 옥저의 지지를 받는 자.
이는 동이 국가들과 교류할 때 탁월한 이점이 되었다.
또한 그는 개인 성격상으로 무리 지어 다니는 패당을 형성하지도 않았으며, 혼자 조용히, 충성스럽게 윗사람을 모시는 부류의 사내였다.
서황비도 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태자 전하께서 승하하신 지금, 가장 가까운 계승서열은 폐하의 십육촌이오.”
실제적으론 육촌과 팔촌이 두엇 있긴 했지만, 그들은 현 황제보다 항렬이 높았으며 늙어서까지 후사를 보지 못했기에 자격이 없었다.
결함 있는 자들을 제한다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십육촌이 되는 먼 친척을 제위에 올려야 했다.
그리고 이는 필히 불협화음을 내재하고 있었다.
촌수가 멀어질수록, 정통성은 약해지고 경쟁자는 늘어났다.
권위 없는 자가 명의 천자가 된다면, 다른 권위 없는 자도 그 정도의 욕망을 꿈꾸지 않겠는가?
지극히 당연한 소리였다.
동훈은 마침내 그가 이곳에 처음 올 때 생각했던 것이 사실로 바뀌게 되자 침음성을 삼켰다.
‘당신은 어찌 나에게 그런 부탁을….’
“배후는 찾으셨습니까?”
마침내 동훈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어보자 양계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진 몰라도, 일 처리 하나는 확실히 하는 놈들이더군. 수상쩍은 놈들은 전부 자결했거나 죽었소. 산 채로 압송하여 고신해본 놈들도 떨거지에 불과하오. 도무지 배후가 짐작이 가지 않소.”
암살자는 극장에서 일하던 자의 신분을 도용했으며, 안에 들어온 뒤에는 본래 자리에 참석할 사람의 신분을 빼앗아 그 자리에 앉아있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 일을 벌인 자가 외세란 말씀입니까?”
그러나 그 말에도 양계는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제아무리 대단하다 하나, 외세의 열강이 경사에서 이런 수준의 일을 꾸밀 수 있겠소? 도리어 경사의 일에 밝은 사람이 한 짓이 분명하오.”
대사관 거리가 죽음 직전까지 내몰린 것이 엊그제였다.
그 정도의 음모를 꾸밀 수 있다면, 진작 동황비를 암살해보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외세 열강이 그러지 않은 것은, 그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양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동훈은 나름대로 알고 있었다.
명나라 사람들은 모르지만, 세계는 이미 고려와 러시아라는 두 제국의 패권 전쟁이 시작된 이후였다.
총소리가 나진 않지만, 전쟁은 가끔 조용하게 비수를 들이대며 싸우기도 했다.
이런 여파는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많은 열강들도 이 싸움에 휘말려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정보조직을 만들거나 재정비하고 있었다.
유럽도 그랬었고 옥저도, 조선도, 백제도, 강화도 그러는 중이었다.
하지만 양계의 생각도 이해는 갔다.
남의 나라 수도에서 남의 나라 군주를 상대로 이 정도의 암살 모략을 행하기 위해선 강력한 자금과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외세가 이 일을 꾸몄다면 그 명성 높은 고려 정보총국, 대외부나 그와 준하는 조직이 관여해야 할 정도란 소리였다.
그렇다고 고려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명은 고려의 적대국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귀찮게 일을 할 위치도 아니었다.
사실상 고려 함대와 공군이 명의 혼란을 막고자 서황비를 옹립한 것이 아닌가.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
고려의 입김을 받는 조국은 물론이고, 예맥한계는 이번 일과 연관이 아예 없을 것이다.
강화와 다른 열강들은 모르겠지만, 그들도 대체로 서황비와의 조약에 만족하고 있었다.
남는 것은 프, 오, 포 3개국.
한번 과욕을 부리려 했지만 좌절되었고, 고려의 반마약정책의 피해자가 된 그들은 제법 확실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훈은 그가 고려 대사관으로 찾아가 담화를 할 때, 3개국의 대사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려의 대사관을 찾아온 광경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 이번엔 정말 아닙니다!
윤 대사를 향해 말하던 그들의 외침도.
“어쩌면 살아남은 강경론자들의 잔당이 일을 벌였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흉중에 큰 야심을 가지고 있는 군벌이 행했을지도 모르지. 보시오, 경사 명 조정은 이렇게나 적이 많소.”
양계는 짐짓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동훈은 그의 한숨 속에서 차마 숨기지 못한 기대감과 설렘을 얼핏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총리아문은 경사와 직례(경사 주변의 경기지역)를 중심으로 단단히 뭉쳐야 하오.”
“저에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나는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경사와 황상을 지킬 것이오.”
마침내 양계가 야욕을 드러냈다.
그동안 장성할 태자를 위해 공석으로 비워두었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스스로 오르겠다 천명한 것이다.
그 일인도 식물인간이니, 사실상 만인지상의 자리인 셈이다.
“떨어진 조정의 권위를 수습하고 또한 아름다운 민본통치를 위해, 고려의 선례를 좇아 내각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
척화와 전통주의를 주장하던 양계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
“그대는 오로지 총리아문의 명만을 받는 중양통상대신(中洋通商大臣)이 되어 절강성과 상해를 포함한 송강부를 관리해 주시오.”
군벌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 * *
개천 446년의 겨울.
위도가 낮은 경사에서도 겨울엔 가끔 눈을 볼 수 있었다.
때마침 서황비의 장례식에는 눈발이 휘날렸다.
미끄러질까 저어하여 연기하자는 소리도 있었지만, 총리아문에서는 이를 기각했다.
그래도 자금산까지 가는 거리는 제설작업이 완료되어 있었다.
명의 조정 신하들은 상복을 입고 있었으며, 백성들도 그러했다.
태자와 서황비의 영구가 움직이는 와중, 소리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행렬과 가마들, 기병들이 움직이는 광경은 장엄했다.
용과 봉황, 기타 신수들이 수놓아진 황색 비단과 붉은 수실의 깃발들이 초겨울의 바람에 펄럭였다.
이를 관람하고 있던 외국 대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금색의 물결이 경사에서 밖으로 쏟아져나오는 듯했다.
명 최후의 장례식이라도 한 듯.
영구가 그들이 있는 가까이 다가오자 자금산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열강의 대사들도 모두 일어나 흑립이나 다른 모자들을 벗어 공손히 예를 표했다.
자금산에는 명 태조 주원장과 효자고황후가 묻힌 효릉이 있었고, 그 동쪽으로 명의 황제와 황후들이 잠들어 있는 능들이 대체로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만든 능은 지금 묻히는 서황비와 주문호는 물론이고 나중에 주동휘의 능이 될 예정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동훈은 서황비의 유해가 저곳에 묻히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죽기 전, 서황비가 남긴 또 다른 유언은 양계도 마지못해 들어주었으며 그녀의 유해는 토장(土葬)이 아닌 화장(火葬)으로 비밀리에 처리되었다.
그녀의 유해는 나라동훈이 직접 그녀의 고향인 영파로 가 매장할 것이었고.
명나라의 옛 관습, 즉 대명률에는 불교식 화장을 금지하였고 지금도 그 관습은 여전히 유지되어 내려오고 있었지만, 서황비는 자신이 가진 불교적 생각과 기존의 유학적 질서에 대한 반감, 그리고 죽기 바로 직전 동황비를 책하여 시신을 훼손하고 그 아들 또한 참시를 했기 때문인지 매장을 원치 않았다.
장례식 이후 중앙과 지방의 대립은 노골적으로 시작되었다.
서황비 시절에도 외세에 넙죽 엎드린 조정의 행태에 불만이 많았던 군벌들은, 이제 사실상 조정을 장악해버린 양계와 소위 말하는 경사 중심의 직례군벌의 놀음에는 놀아나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을 확실히 했다.
제일 먼저 하북의 서기효가 반기를 들었다.
사실, 서기효는 여전히 대명에 충성을 하려는 입장이었지만, 그의 아들들은 그걸 원하지 않았고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 하북군벌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광동성과 광서성을 관할하던 총독이 자신에게 남양통상대신의 자리를 주지 않는다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 경사에 통보하듯 야심을 보였다.
동황비의 지지기반이었던 산동성도, 순나라와의 접경지역이었던 하남성과 산서성도 들썩였다.
이때를 틈타 태평천국의 잔당, 동왕 진사당과 북왕 오흠광도 정말 망해버린 태평천국의 껍질을 버리고 제각기 호북과 호남에서 세를 엿보기 시작했다.
* * *
고려 대사 윤성도는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끝마치고는 주명 고려대사 자리를 내려놓고 명을 떠났다.
그는 창양으로 곧바로 향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바로 태평양을 횡단해야 하겠지만 그는 대신 정반대의 항로를 선택했다.
누산타라해를 거쳐 인도를 지나 페르시아만에 진입한 그는 마침내 이라크 지방에 위치한 항구, 바스라에 도착했다.
그분의 곁을 잠시 떠났을 뿐인데, 다시 돌아와 보니 바스라는 이전의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바뀌어 있었다.
항구와 바스라시(市)의 중심부는 열차가 오가고 있었으며, 많은 물류도 있었다.
이곳에서 전쟁을 치렀던 외인부대가 아니라, 이제는 이라크 현지인들로 보이는 자들로 구성된 치안대가 순찰하는 것이 보였다.
비록 이 작은 바스라에 한하는 광경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예전 그토록 혼란스러웠던 땅에 이렇게 질서를 불어넣는 광경을 직접 보게 된다면, 절로 경탄이 나오게 되었다.
‘어쩌면 용께서 직접 명에 가셨다면, 명의 혼란은 가라앉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혼란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나라동훈의 자리까지 차지해 서황비를 홀라당 매혹시키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시지 못할 상황이니 그분이 대신 사도인 자신을 보낸 것인데, 자신은 결국 그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윤성도는 다시금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명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느냐?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명이라는 이름은 끝이 났으니, 군벌들이 사방에서 할거할 것입니다.”
상민은 예전에 그가 계획한 중화다분지계가 마침내 빛을 발하게 되었지만 만족스러워하진 않았다.
이 급변하는 시대, 명이라는 족쇄 아닌 족쇄가 풀려난 저 땅에서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서로의 번영을 꾀했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구나. 차선을 택하는 수밖에.”
이왕 이렇게 된 것, 군벌들의 할거를 통해 대계를 마무리 짓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결국 군벌의 시대도 신해혁명으로 끝장나지 않았던가?
‘허나 이 이상으로 신경을 쓸 이유는 없다. 설령 국민당이 들어서 명이 다시금 통합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고려에 위협을 가할 수 있을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테니.’
“송구하옵니다. 소신의 실패를 벌하여 주소서.”
윤성도의 생각과는 별개로, 상민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제일사도를 보냈어도 일이 이렇게 흘러갔다는 것에 별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와 고려는 명을 위해서 할 만큼 했다.
지금은 훨씬 더 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순간이었다.
“명에서의 일은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 그대는 할 만큼 했어.”
그 말에 윤성도가 고개를 들었다.
“다만, 지금 꽤 재미난 일이 벌어졌단 말이야. 그대는 이 상황을 어찌 생각할지 궁금하군.”
“무슨 일입니까?”
상민은 씩 웃었다.
“나디르, 그놈이 여기 바스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