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디르 샤
나디르는 똑똑히 기억했다.
애초에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그 순간의 참상은 마치 뇌리에 각인된 듯 원치 않을 때도 꺼내 보아야 하는 악몽이 되었으니까.
아부다비의 전투에서 대패한 나디르는 이라크까지 도망갔다가, 이제는 다시금 그들이 왔던 곳, 이란의 땅으로 후퇴해야 했다.
물론 고려도 전함이 큰 피해를 입고 순양함들이 침몰하였으며 방어군인 해병대도 성치 못했지만 그래도 승리를 거머쥔 것은 그들이었다.
지금까지 병력의 열세로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있었어도, 이렇게 병력의 압도적 우위에서 대패를 한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나디르는 그가 알던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철조망이라니, 그런 끔찍한….’
전통적 전쟁의 논리는 산업화된 국가에서 나온 직업군대에겐 도통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가축을 도살하는 육가공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마냥, 그저 몰려드는 페르시아인들을 하나씩 하나씩 도축했던 것이다.
물론 나디르도 고려가 공세의 입장이 된다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준비된 전장에서 적을 맞이하는 거라면 그 역시도 뒤지지 않는다 자신했다.
하지만 아부다비 전투 이후, 고려는 다른 병력을 부렸다.
갈색의 군복을 입은 그들은 나디르가 보았던 그 어떤 군대보다도 맹렬하고 단단하게, 엄청난 규율을 통해 싸웠다.
그들의 군복과 철모, 총은 화려함이나 멋이라곤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색깔도, 장식도 칙칙했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의 무구와 전술은 오로지 승리를 챙기려는 입장에서 지독하게 충실했고, 나디르와 같은 자들은 그 모습에서 도리어 강렬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야말로 전쟁기계.
이들의 진군은 이라크를 완전히 집어삼킬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나디르도 본 바가 있었기에 이후의 전투에서 어떻게 아부다비에서의 전술을 따라 해 보려 시도했지만, 그 정도의 철사를 만들 공장은 페르시아에 존재치 않았다.
그리고 설령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원만히 운반할 수단도 없었다.
그때야 비로소, 나디르는 이 제국들의 싸움을 이해했다.
나디르는 러시아의 무기들을 복제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고, 지금은 제사총을 독자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의미가 있던가?
국가의 기본적인 산업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전쟁은 단순히 무기를 복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복제를 많이, 충분하게 해야 했다.
그리고 심지어 하늘에 떠다녔던 비행선과 같은 일부 무기들은 복제할 수도 없는 상상 속의 무기들이었고.
나디르는 그 이상 고려와 싸우지 않고 퇴각했다.
페르시아의 위기를 놓치지 않았던 무굴이 무함마드 샤의 지도 아래 엄청난 군세를 휘몰고 동에서 쳐들어와 일단 그들의 군세부터 막아내야 했다.
물론 나디르는 후퇴하면서 만약 고려가 섣부르게 자그로스산맥을 통과한다면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요량으로 그의 군대를 조금 분할하여 위험한 함정을 몇 가지 준비하고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이성적인 놈들이다.’
그러나 고려는 딱 이란고원의 초입부인 아바즈와 슈슈타르까지만 진출했을 뿐, 그 이상은 가지 않았다.
그들은 대신 현 페르시아의 역량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라크를 점령하고 안정화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페르시아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갈 수 있게 이라크의 반페르시아파(시아파)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더랬다.
이 지독한 놈들은 나디르 자신과 달리 전쟁과 영광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오로지 전쟁은 이들의 이권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으니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이득이 된다면 이렇게 진군을 멈추고 눌어붙어 버리는 것이다.
외세가 이라크의 땅을 쉽사리 점령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고려인들이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그토록 뭉치기 힘든 아라비아를 하나로 결속시켰던 것을 보면, 이라크 또한 그러지 않으리라고 마냥 단정할 순 없었다.
실제로 몇 달이 흐르자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나디르의 아프사르 왕조는 이라크의 토착 지배계층들과의 연락이 서서히 단절되었다.
사파비가 멸망할 때까지 지켜냈던 메소포타미아를 그의 대에서 허망하게 손에서 놓치게 된 셈이다.
나디르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느꼈다.
그처럼 전쟁의 영웅에서 출발하여 왕조를 개창한 사람은 빈약한 권위를 일신의 능력으로 대체하고는 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 이후, 그는 처음으로 부하들에게 불신과 회의감 비슷한 표정을 보았다.
이런 균열은 지금 당장은 별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그의 목을 향하는 칼날이 되리라.
나디르는 다시금 증명해야 했다.
진실로 자신의 군사적 역량이 세계의 제일이라 호언장담하고 있던 그로서는 고려와의 전투는 도무지 감내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 * *
다행스럽게도 때마침 그런 전장이 다가왔다.
“보아라, 이게 제대로 된 전장이며, 제대로 된 전투이니라!”
― 이란과 이란의 샤는 위대하다!
이라크 전쟁의 패배를 차마 수습하지 못하고 바로 시작된 페르시아―무굴 전쟁에서 나디르는 단지 자신이 지금까지 고려라는 불가해한 상대를 만나 고전했을 뿐이라는 듯 이번에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무굴의 병사들을 크게 물리쳤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군대가 아닌, 상식 안의 군대와 싸우는 그런 전장에서 나디르는 정말이지 적수가 존재치 않았다.
헤라트에서, 카불에서, 마지막으로 그들이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카이베르 고개에서 무굴의 십삼만 군대는 모두 척박한 땅에 파묻혔다.
무굴의 황제, 무함마드 샤만이 필사적으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페샤와르에서 그는 진격을 멈추었다.
호라산부터 그를 따랐던 부하들은 다시금 단단하게 그를 지지하게 되었으나, 이란의 토착 귀족들은 샤가 본격적으로 무굴을 공격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다.
언제고 그들의 세력 기반인 서쪽 봉토들이 고려에 의해 유린당할지 모르는데,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무굴 원정이라니.
비록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나, 나디르의 제국은 여전히 내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싸움에 굶주린 전쟁광이 이런 갈등을 제대로 풀 리가 만무했다.
“너희들은 짐이 거병했을 때 대항하던 놈들이었지. 하지만 짐은 너희들의 과오를 용서하고 휘하에 들였다. 그랬던 너희들이 이제는 짐에게 감히 이빨을 다시금 드러내느냐?”
나디르의 기병대장인 이나크 칸 잔드가 애원했다.
잔드족은 옛날부터 자그로스에서 살아오던 쿠르드―라크계 민족이었다.
비록 나디르가 그 부족이 딴마음을 먹을까 부족 중 일부를 호라산으로 강제 이주를 시켜 그 세력을 약화시켰음에도 여전히 많은 부족들이 자그로스에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은 고려가 공격한다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당사자이니 이렇게 절박한 것도 당연했다.
“샤! 이건 샤에 대한 불충이 아니라, 이란의 종속과 이스파한의 안위가 달린 문제입니다! 고려가 얼마나 강대했는지 생각해 보소서!”
그러나 아부다비의 전투를 겪은 이후 훨씬 더 증폭되어 있었던 나디르의 포악한 성미는 이나크의 예상을 벗어났다.
부하의 입장 따윈, 이 사람에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핑계와 변명에 불과했다.
“너희 잔드족은 언제고 고려와 같은 자들에게 붙어먹을 놈들이렷다!”
그는 항의의 주체인 이나크와 그 부하들, 무려 삼백팔십여 명의 기병대를 전부 죽였다.
이나크의 기병대는 수년간 나디르를 위해 싸워왔던 자들.
이들이 그렇게 손쉽게 내쳐지는 것을 바라본 부하들이 동요했다.
그러나 나디르는 자신의 우상인 티무르를 본받겠다며 한술 더 떠서 이나크와 그 부하들의 두개골로 탑을 지어 전시하기까지 했다.
“이 일을 기억하라. 짐의 명에 거역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젊은 영웅의 눈엔, 어느새 광기가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에게 위기감이 드리워지기 전에 그의 상대인 무굴 제국이 먼저 스스로 자멸하고 있었다.
옛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의 업보가 컸다.
과도한 전쟁과 오로지 국가의 확장에만 몰두하는 군주는 그의 치세에는 찬란하게 빛날지 모르나, 제국의 후대에선 멸망의 기틀을 제공하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아우랑제브의 극단적 이슬람 강요는 이미 무굴의 여러 토착 세력에 큰 반발의 씨앗을 뿌렸던 적이 있었다.
마침내 무굴이 한 번 휘청이자 카슈미르와 펀자브에 있던 시크교도들이 북쪽에서, 비자야나가르와 힌두 세력의 후원을 받는 마하라슈트라 지방의 토후 연맹, 마라타 동맹이 남쪽에서 봉기를 일으켜 양면으로 그들을 압박했다.
나디르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카이베르 고개를 돌파하는 것으로 무굴 정복은 이미 반쯤 완수되었다. 델리는 지척이고 펀자브의 시크교도들은 우리의 공격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참에 무굴을 끝장내자.”
실제로 그의 맹렬한 공격은 무굴과 주변 나라들, 그리고 열강들마저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페샤와르에서 라왈핀디, 라호르를 거치며 순식간에 진격한 그들은 불과 한 달 하고도 보름 만에 마침내 델리에 도착해 나디르가 천명했던 대로 무굴의 심장, 붉은 요새를 함락하곤 약탈했다.
무굴 이전부터도 여러 왕조들이 터를 잡으며 수천 년간 번성했던 델리의 부는 상상을 초월해, 지금까지 정복으로 일관하여 일어난 페르시아의 재정적 문제를 거의 대부분 해결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나디르가 약탈한 보물 중에는 그 유명한 무굴의 ‘공작 왕좌’가 있었다.
이 보물 중의 보물은 붉은 요새의 디와니카스에 위치하여 있었는데 그 가치가 무굴 건축의 정수라 불리는 타지마할의 건축비의 두 배에 달했을 정도였으니 수도로 돌아가 제대로 팔 수만 있다면 앞으로 고려와의 전쟁에 쓸 군자금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보아라, 짐에게 반대하는 것들이 과연 이렇게 될 줄이나 상상이라도 했겠느냐? 짐은 옳고, 무결하며 끝내는 승리할 것이다!”
허나 산을 타는 것도 등산보다 하산이 더 위험한 법.
나디르는 무굴을 약탈하고 돌아가는 귀향길에서 큰 습격을 받았다.
대승을 거두었다고 해도 나디르의 병력은 원정을 시작할 때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병사들은 적병이 아니라 음식과 물, 그리고 풍토병에 상해 있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많은 전리품들은 병사의 운신에도 독이 되어 나디르는 전술적으로 썩 좋은 대형을 이루지 못한 채 수레를 끌고 길게 늘어서서 가야만 했다.
금은보화를 버리고 갈 수는 없었기에.
그러나 때로는 손에 든 것도 버려야 하는 법.
페르시아 군대가 자신들의 땅을 가로질러 무굴을 공격할 동안에도 숨죽이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파슈툰계 부족들이 지난날의 설욕을 하겠다며 무방비한 페르시아군을 사방에서 덮쳤다.
아프간은 그야말로 유격전의 땅.
재화의 욕심에 눈이 멀었던 나디르는 전리품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부하들은 부하들대로 잃어버리면서 비참하게 이스파한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흘린 귀중한 전리품들은 고스란히 파슈툰족의 반란 군자금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불만이 있었던 부족은 비단 아프간의 파슈툰뿐이 아니었다.
“폐하! 자그로스의 군소 부족들이 폐하께 반기를 들었습니다!”
“쿠르드 반군이 케르만샤에서 거병했습니다!”
“발루치 놈들이 배신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샤에 올라 세상을 호령하려던 군주는 자신이 아우랑제브의 전철을, 아니 그보다 더 심한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 *
나디르는 처음엔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고려와의 대적자로 행동하길 원했던 나디르가 그들의 이권과는 딱히 상관이 없었던 무굴을 공격하는 바람에 심기가 불편해진 러시아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나디르에게 누가 우위에 있는지 제대로 알려주려는 모양.
만약 그들이 델리의 약탈품을 가져와 그것을 들이밀며 협상을 했다면 러시아가 받아들일 요량이 있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게다가 지금은 러시아도 나름대로 군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터라 예산이 몹시 빠듯했다.
중앙아시아의 일을 총괄하던 표트르는 지금 흑해로 가 모종의 일을 하고 있었고, 대신 간니발이라는 젊은 장교가 이곳의 일을 맡게 된 상황.
그동안 나디르는 고려의 전함도 제대로 침몰시키지 못한 천박한 흑인을 은연중에 무시하였기에 그와의 사이 또한 좋지 않았다.
러시아의 거절을 받자, 나디르는 일단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수습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철의 심장을 가진 전쟁영웅이라 하더라도, 배신은 견디기 힘든 법이었다.
비록 그 또한 사파비조의 마지막에 반란을 진압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군벌이었지만, 이제는 이란의 거의 전 부족이 그를 반대하며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과 부담감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내전을 진압하는 동안 나디르는 여러 번의 암살 시도를 받았고, 그때마다 잔혹하게 관련자를 숙청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친동생, 이브라힘 칸이 암살 시도와 연루되어 있다고 확신한 나머지 그의 두 눈을 도려내기까지 했다.
동생의 비명과 원망의 목소리에 나디르 또한 자신이 저지른 짓을 후회했지만 이미 그는 친족의 지지까지 잃어버리게 되었다.
마침내 개천 447년(CE 1722).
명의 서황비가 죽고, 변법자강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마침내 거대한 제국이 종말을 고할 때.
나디르도 큰 화를 입었다.
불면증이 있던 나디르 샤는 평소 깊게 잠을 자지 못했으나, 어쩐 일로 그날은 푹 잠에 들었던 것 같았다.
아마 잠에 들기 전에 한바탕 폭음을 한 탓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어둠 속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일단의 무리의 접근을 허용하고 말았다.
“죽여라!”
번쩍 깨어난 나디르는 필사적으로 저항해 암살자 중 몇 명을 죽였으나, 암살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온몸이 피칠갑이 된 상태로, 나디르는 호위병들의 저항을 틈타 기적적으로 궁궐을 탈출하여 말 위에 올랐다.
허벅지와 옆구리, 어깨.
나디르는 피가 계속 나오는 상처를 불로 지진 뒤, 서쪽으로, 남쪽으로 정처 없이 도망갔다.
큰 부상을 입은 탓에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가지고 있는 음식은 거의 없었고 물도 모자랐다.
다만 그는 필사적으로 말을 움직여 돌과 자갈로 이루어진 험준한 자그로스산맥을 넘고 넘었다.
산맥의 작은 계곡들에서 목을 채우고, 산짐승을 잡아 그 피와 고기로 원기를 채우고.
한때는 중앙아시아를 호령한 샤는 비참한 몰골로 자신이 세운 나라와 백성들을 모조리 팽개친 뒤 이렇게 걷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종착지는, 슈슈타르였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이곳이더냐?’
나디르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그 광소가 마치 비명처럼 들려, 슈슈타르의 주둔지에 있던 고려군 외인부대 병사가 참호에서 나와 그를 살펴보러 오기까지 했다.
나디르는 그 모습을 보며, 억누르고 억눌러 왔던 그간의 피로와 고통이 곱절로 몰려드는 것을 느끼고 의식을 잃은 채 말에서 굴러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