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근
전조는 해가 바뀐 연초부터 일어났다.
새해 첫날부터 햇무리와 달무리가 계속 보였다.
천체들의 움직임도 수상했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위에서 나왔는데 꼬리가 길고 색깔이 붉었다.]
개천력 395년(CE 1670) 1월 10일과 19일에 쓰인 서운관 관리들의 보고서는 최근의 ‘불길한 징조’, 즉 유성에 대해 표현하고 있었다.
당시 개성 송악산에 있던 고려의 송악천문대에서도 비슷한 천체현상이 확인되었다고 하니 유성의 발현 자체는 객관적 사실이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유성의 출현 전에 조선은 지진과 전염병 등의 일을 겪었던 터라 민심은 크게 흉흉해졌다.
연초의 첫 조참에서 근정전에 모인 신하들은 조선 왕 이욱의 심기를 달랬다.
“과인의 덕이 부덕한 터라,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욱의 말은 겉으로 보기엔 부덕을 자처하나, 왕의 입장에서는 신하에게 민심을 달랠 계책을 어서 빨리 내놓으라는 이야기가 분명했다.
“전하, 이는 단순한 천문현상이며 이를 재해와 연관 짓는 것은 오직 과거의 헛된 미신이니 크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으실 것으로 아뢰옵나이다.”
조선은 세월이 지나도 전통적인 60갑자 연도법을 조정의 여러 부처에서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문과 군사의 계열에는 확실히 바뀌었다.
본래는 경술(庚戌)년이라 표현해야 할 날짜를 고려의 개천력에 맞추어 표현하기 시작한 것.
천자의 연호에 따라 바뀌는 다소 복잡했던 연호제에 비해 건국 기원력은 계산하기도 편리했다.
연도 표기법 말고 달력 또한 정일력과 맞추었다.
조선에게는 몹시 큰 동기와 이점이 있었다.
어차피 재조지은의 상국 달력이다.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세계의 거의 모든 문명국이 이를 받아들인 상황.
다른 곳은 몰라도 적어도 기독교 문화권은 확실히 정일력을 도입했다.
옛 로마의 교황 마르티노 5세부터 고려의 정일력은 교황들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 여러 교황들을 거치다 마침내 알렉산데르 6세에 의해 고려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되자 교황령 또한 제국력(Calendarium Imperiale)이라는 명칭으로 고려의 개천력을 사실상 이름만 바꾸어 반포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은 얼떨결에 세계와 역법체계를 동등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국이라는 것이 로마를 의미하는지, 혹은 고려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팔레올로고스의 국혼 이후 포르피로예니티(Πορφυρογέννητη)의 피를 이은 로마고려를 의미하는지는 당대의 신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마다 해석이 제각기 달랐지만.
어쨌든 당대 조선의 지식인들은 더 이상의 예전의 혼천설이니 뭐니 하는 이론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고려의 지동설과 근대 태양계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운관에서조차 이제는 고려에서 들여온 굴절망원경을 쓰고 있기에 해와 달을 제외하고 맨눈으로 관측할 수 있어 그 존재가 예전부터 파악되었던 다섯 행성들, 즉 수성과 화성, 금성과 목성, 토성을 더 정밀하게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존재들인 빙성(氷星, 천왕성, 고려의 천문학자 최경재에 의해 발견), 해성(海星, 해왕성, 고려의 천문학자 갈릴레오에 의해 발견)까지도.
이런 입장이니 물질적 기술의 진보가 이성을 일깨우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미신 자체는 완벽하게 가시기 힘들다.
고려는 유럽에서 들여온 점성술사니 예언자니, 조선에서 들여온 무당이니, 혹은 예전부터 아주 가늘게 이어져 내려오는 도참 승려니 하는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을 몹시 경계했고 이들이 선을 넘는다면 사기죄로 처벌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았다.
반면 조선은 명목이 괴력난신을 좋지 않게 여기는 유학의 나라임에도 구폐습이 완벽하게 가시진 않았었다.
오직 발달된 과학만이 미신을 퇴치하는 것이 분명하니 아직 조선이 나아갈 길은 멀었던 것이다.
* * *
별일이 아닌 것 같았던 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큰일이 되어갔다.
1월의 전조는 오직 괴상한 천체현상과 지진, 전염병에 불과했다.
물론 지진과 전염병이 허투루 볼 재난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언급을 할 만큼 바로 뒤따랐던 현상들이 심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2월의 마지막 날, 도성에 우박이 떨어졌다.
그 뒤, 심지어 경상도에서도 우박이 떨어졌다.
사람이 상할 크기의 우박은 아니었으나, 곡식들은 피해를 받기에 충분했다.
본래 서서히 따뜻함을 체감할 3월과 4월에는 냉해가 기승을 부리고 작물의 한 해 풍흉을 결정짓는다는 봄비 또한 내리지 않아 논밭이 쩍쩍 갈라졌다.
냉해는 4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가뭄은 5월까지 지속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끔찍한 해충이 동시기에 사방을 휩쓸었다.
포악한 메뚜기는 백성들이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 일구어낸 논밭을 무정하게 초토화시켰다.
대부분 봄에 파종을 하는 농부의 입장에서 봄과 초여름의 날씨와 환경이 이렇게 끔찍하다면 한 해의 농사는 아예 박살이 나는 것과 같았다.
조선의 조정은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영의정 정태화는 물론이고, 서로 만나면 목소리 높이기 바쁠 만큼 앙숙이던 좌의정 허목과 우의정 송시열마저도 다가오는 재앙에 당파싸움을 멈추었을 정도였다.
“전하, 하늘에 제사를 드리시지요.”
“전국에 은사(恩赦, 사면령)를 내리소서.”
일부 덜떨어진 문신들은 정말이지 사건의 문제해결과는 영 관련이 없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대표적으로 군주의 덕과 선정이 자연의 재앙과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은 아직도 많이 있었다.
왕권천수설(유럽에서는 신수설이라고도 한다)을 신봉하는 계몽주의 절대왕정에서는 이를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 명석한 관료들은 다른 답을 찾아내었다.
“전하, 올해 파종된 곡식들이 많이 상하였으니 필히 낱알을 거둘 시기가 온다면 굶주리는 자들이 많이 생길 것이옵니다. 따라서 미리 여러 곳에서 곡식을 사 와야 하옵니다.”
“호조, 재정은 넉넉한가?”
“올해 홍삼과 비단, 종이 산업의 이윤은 평년과 다름없사옵니다만 지금까지 흑자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어느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조선의 종이와 비단은 고려 자체로도 생산 가능한 품목이었지만 고급화 전략으로 인해 상국인들의 향수를 자극했는지, 혹은 품질이 좋아 그러했는지 몰라도 꽤나 잘 팔리고 있는 효자 상품이었다.
홍삼은 대체재가 아예 없었다.
인삼을 특별한 방법으로 찐 것이 홍삼이니, 인삼 자체의 대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풍요로운 고려 본토조차 제대로 된 ‘고려인삼’을 길러낼 수 없었다.
북려에도 삼과 비슷한 것이 있었으나 효능은 비교가 불가능했다.
세상의 종자란 종자, 가축 품종이란 품종은 죄다 몰래 빼돌려 확보하는 탐욕스러운 고려는 번국이라고 해서 딱히 사정을 봐주진 않았다.
하지만 이것들의 종자를 확보하여 남북려의 땅에 길러보았음에도 결과물은 신통치 않았다.
땅에 무슨 영험한 기운이라도 있는지, 아니면 척박하고 괴상한 환경(예를 들면 끔찍한 일교차)에 놓여야 제대로 자라는지, 이 인삼이라는 것은 저 반도의 땅에서 자라야 제 몫을 해내는 것처럼 보여질 정도였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왕씨 고려 중기부터 고려의 홍삼이 유명했다 한다.
하지만 고려는 지금은 영락없이 조선에게서 고려홍삼 전량을 수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여담으로 개성과 그 주변의 여러 농가들이 어마어마한 홍삼 수요를 위해 거대한 인삼농장을 만든 것도, 일개 상단에 불과했던 송상(松商)이 고려의 자본가 순위 100위 안에 들 만큼 거대한 회사로 발돋움한 것도 이 자그마한 식물 뿌리 덕분일 것이다.
사실 인삼을 재배하면 토질을 거의 몇 년 동안 황폐화시키니 토지에 양곡을 일구길 권하는 조선의 전통적인 사상에는 맞지 않았지만, 산업화 시대의 돈맛은 왕으로서도 끊기 힘든 덕에 인삼 농가는 절정에 달했다.
“상국의 상인들에게 미리 연락하여 보존식을 사놓고, 백제와도 연동하여 곡량의 안전성을 늘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제적인 대응책에 이욱이 이를 허락했다.
다른 신료들은 달라진 조선의 국제적 위신을 언급하며 해결책을 찾았다.
“이번에 옥저와 노서아가 명왕(明王, 명국의 왕)으로부터 북방안정유지비를 받아내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명의 왕에게 일부 곡물을 빼앗… 아니, 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흐음….”
조선의 조정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만큼, 명의 국제적 위신은 아예 심각하게 떨어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들은 중앙의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며 독립한 대리와 순나라 모두를 진압조차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순나라는 비록 지금은 부유해진 강남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여전히 중원의 역사에서 지극히 중요했던 관중지방을 점령하고 서안(장안)을 자신들의 도읍으로 삼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되는 명의 암군과 더욱더 혼란해지는 정치, 그로 인해 느슨해진 중앙집권의 여파로 지방에서는 후한처럼 군벌들이 날뛰니 명의 목숨은 실로 파리와 같았다.
‘공교로운 일이로구나.’
이욱은 몇몇 신하들이 ‘도의’를 어기고 말하는 것을 딱히 지적하진 않았지만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여기 모인 신하들도 지금 명이 몰락하는 원인을 잘 알았다.
순나라의 발호는 개천력 352년(CE 1627) 섬서성 일대를 휩쓴 대기근 때문이 아니던가.
그때의 섬서성은 들판에 시신이 쌓이고 까마귀가 포식하는 곳이더랬다.
명 조정이 제대로 된 대응을 했다면 많은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섬서성은 아직 그들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 일로 완전히 조정에 등을 돌린 섬서성의 백성들은 이자성(李自成)이라는 반란군 수괴에게 조아렸다.
명은 이 순나라의 왕가를 자신들을 해치는 다른 두 명의 이씨(조선의 전주 이씨, 옥저의 양산 이씨)와 함께 삼이적(三李敵)이라 하며 좋지 않게 보였지만, 도리어 순나라는 그 이후 옥저 및 노서아와 연계하여 외교적 고립 탈피를 꾀했다.
비슷한 일이 조선에 일어나게 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걱정이 치밀어오른 이욱이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루손(壘孫)섬에서의 경작은 기대하기 어렵겠소?”
옛 조명전쟁 이후 조선은 요서회랑뿐만 아니라 루손섬을 획득했다.
사실상 그 이후의 해적 토벌을 군사적 지출을 꺼리던 고려 대신 대행했으므로 고려는 수고비로 그 정도의 이권은 나누어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온전히 좋은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바다 건너의 식민지라는 것은 몇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내륙과 멀리 있다는 것으로 사민을 꾸준히 시행해야 하고, 오고 갈 만큼의 해양 전통이 유지되어야 했다.
사민이야 대부분의 농민들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해양 전통은 고려로부터 군선 몇 척을 사 놓는다고 쌓이는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직접 배를 끌고 갈 만큼의 바다 접근성 및 동기가 명확히 존재해야 했다.
조선은 분명히 둘 모두 제한점이 있었다.
항구적인 투자도 부족했다.
조명전쟁 이후 조선은 요서회랑의 안정화와 심요도 발전(농업적인 것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면 또한)이 핵심 목표였다.
가뜩이나 검소함에 대한 강박이라도 있는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덕에 조정의 예산은 국가체급에 비해 썩 좋지도 못했던 터라 루손섬의 개척 및 개간은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해적 세력을 많이 짓눌러버린 것만 해도 좋은 성과였을 터.
심지어 아직까지 위험한 황열병은 물론이고 상국이 판매하는 값비싼 약을 먹지 않으면 황열만큼 무서운 학질, 그리고 기타 여러 열대 토착 질병들이 존재하는 만큼 조선의 관리들 또한 그곳으로 부임되어 가는 것을 상당히 꺼렸다.
‘양심도 없으시지….’
‘거의 사실상 귀양지 아닌가?’
투자한 것은 사실상 십에 불과할진대, 백의 결과를 바라는 임금의 말에 몇몇 신하들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루손섬이 지금껏 순탄하게 경략되어지고 있는 것은 임금의 은덕도 지금 조정에 자리한 자들의 공로도 아니었다.
사실상의 귀양지에 자청하다시피 간 루손 총독 유형원의 업무 능력이 뛰어난 것과, 애초부터 루손섬이 꽤 비옥하고 날씨가 좋은 이유일 것이다.
조선의 네 번째 루손 총독으로 임명된 유형원은 열대기후와 해적들 사이에서 생존해나가기 급했던 과거 총독들의 피땀 어린 기반을 디디고서 마침내 건실한 관청과 행정체계를 만들어냈다.
또한 농업적으로도 노력을 기울여 바로 이웃인 고려의 마긴다나오 자치령에서 거북열매와 카카오의 종자를 들여와 심어보기도 하고, 사탕수수를 재배해보기도 하고, 이곳의 토착 종려나무 마종려(조선이 코코넛을 부르는 이름)와 황감초(甘蕉, 조선이 바나나를 부르는 이름) 재배해보기도 하는 등 상업적인 노력을 기울여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역시나 조선인 아니랄까 봐 쌀에 대한 엄청난 집착을 보여, 상당히 이른 시기에 쌀을 포함한 서로 다른 세 작물로 삼모작을 성공시켜 식량의 자급화를 성공해냈다.
이욱도 이를 알고 있었다.
“일단 루손섬에서 최대한의 지원을 명하시오.”
하지만 루손섬이 제아무리 농사짓기에 좋아 자급자족을 한다지만 기근이 든 조선 전체를 먹여 살릴 순 없었다.
또한 루손섬이 조선인들만 사는 곳인가.
엄연히 조선인보다도 많은 토착민이 살아가는 곳이니 일정 이상의 곡물을 공출한다면 오히려 현지의 민심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 뻔했다.
그래도 유형원은 어명에 충실히 따른 모양이었다.
상당한 수의 쌀과 콩들이 배에 수송선에 실려 조선으로 왔고 곡창에 이를 보관한 이욱과 대소신료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