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테르담 체제
* * *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의 성장세는 대단했다.
사상적 기조는 유물론과 무신론이 아니었다.
엄연한 기독교적 교리.
대표적으로 사도행전이 있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이들은 사도행전의 4장 32절, 34절, 35절과 2장의 44절, 45절 등에서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의 모습을 그려내며 기독교 사회주의의 이론을 다진 것.
구약과 야고보서 등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찾을 수 있었다.
예전 뮌처의 혁명 시기에 활약했던 재세례파는 한동안 상당한 탄압을 받고 지하로 잠적해야만 했으나,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이 설립되자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씨앗은 썩지 않았다.
뮌처의 급진적 종교개혁을 토대로, 대동계의 핵심 사상인 공화주의적 정치체제와 톰마소가 주장한 공동농장에 대한 이념을 천명하니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은 농민들에게서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유럽의 땅 없는 빈민들이나, 혹은 지주에 의해 핍박받던 소작인들은 이를 두 팔 벌려 환영했고 과도한 세금에 고통받던 자들은 귀족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며 공화국에 합류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금방 주변국들의 경계를 샀다.
자기 집안일인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인접한 경계선에 위치한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일련의 사태로 폴란드에게서 숙원인 서프로이센과 독립을 모두 쟁취한 것도 모자라, 삽시간에 북부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라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프로이센.
심지어 이번 일의 사실상 조력범 그 자체인 프랑스까지.
주변의 모든 군주정들은 이 상황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1665년, 로테르담에서 열린 회의에는 외교관들끼리 고성이 오갔다.
“어떡할 거요?”
“우리가 뭘?”
“당신네들이 저 불순한 종자들에게 무기며, 식량을 지원해 주어 이 사달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숨기려 들지 마시오!”
오스트리아 대사의 노골적인 비난에 주변의 원망 어린 시선을 받는 것을 느낀 프랑스 대사가 지지 않고 항변했다.
“당신네들 땅에서 번진 불길이 우리의 들판까지 들어오는데 그 비판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으신다고? 허, 참. 그렇게 따지면 평소에 잘해서 그러한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든가! 그리고 철 지난 종교탄압은 그만두시오.”
두 대사는 주변에 돌멩이라도 있었으면 서로에게 던져대었을 테다.
“그만들 두시구려. 이 자리는 귀국들의 행태로부터 촉발된 분쟁을 끝내고 유럽이 공통된 안정을 찾아가는 자리요. 우리가 싸워봤자, 웃는 것은 저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이란 말입니다.”
외교관들은 대체로 상당한 고위 귀족들이라, 어지간해서는 말을 잘 듣질 않았다.
하지만 중재자이자 이 회의의 주최자인 나사우 공작 빌럼 4세가 이토록 말하자 소란은 사그라들었다.
그의 선조인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빌럼 2세는 신성로마제국 내의 봉신 귀족이기도 했으나, 네덜란드의 영지를 물려받은 이후에는 네덜란드의 귀족이기도 했다.
부르고뉴김 가문이 고려의 영향을 받아 이런저런 이유로 입헌군주국을 천명하고 의회에 권력을 넘겨준 이후에는, 네덜란드의 초대 수상이 되어 훌륭하게 통치하여 정의공 빌럼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던 것이다.
이후, 나사우딜렌부르크 가문은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의 등장으로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자 라인란트 지방과 쾰른 등을 묶어 나사우 공국을 만들었다.
당연히 그들 가문의 특성상 나사우 공국은 네덜란드의 봉신국에 해당했다.
“일단 어떻게 할지부터 논의해 봅시다.”
빌럼 4세는 각국의 대표자들에게 제시했다.
“저들의 성장세를 두고 볼 수는 없어요. 인접한 모든 국가들에게 제의합니다. 저들과의 무역을 단절하여 제대로 된 물자 공급을 차단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탈리아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들은 알프스를 걸치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영토 덕분에라도 완전히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과는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역시도 자국 머리 위에 있는 불덩어리를 지극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동의합니다.”
폴리투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왕국을 선포한 지 오래되지 않아, 국제적인 외교가에서 약간은 소외되었었던 프로이센 왕국의 대사가 잠재적 자신의 동맹 후보의 말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본 프로이센 왕국 또한 이에 동의합니다.”
“신성로, 아니 오스트리아 제국 또한 이에 동의하오.”
“…프랑스 또한 동의합니다.”
“…….”
“스위스 연방은 이번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내면서도, 또한 바이에른과도 마찬가지로 교류하지 않겠다고 확언했으니 남은 것은 보헤미아로군요.”
빌럼 4세의 말에도 보헤미아의 대표가 침묵을 지켰다.
오스트리아가 또다시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아, 또 다른 범인이시구만. 그래, 다음은 뭐요? 이제는 뭐 조공국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셨소?”
“…페르디난트 공 제발!”
그러나 오스트리아 대사의 얼굴은 활활 불타고 있었다.
보헤미아의 적절한 지원이 없었다면,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은 능히 저 떨거지들을 박살 냈을 것이다.
물론, 국민개병제가 실시된 이후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땐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 또한 초기의 어수선함을 탈피하지 못했지 않은가?
그놈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비열한 배신자! 돈에 환장하여 저 혁명 종자들을 지원한 보헤미아의 멍청한 후스 신자!
그러나 보헤미아가 왜 그러했겠는가?
보헤미아 대사는 억울한 얼굴로 오스트리아를 바라보았다.
“보헤미아는 이번 조약의 동의에 앞서, 오스트리아에게 먼저 요청합니다. 아국과 귀국 간의 항구적인 평화 조약을 말이오.”
애초에 원죄는 신성로마제국에 있었지 않은가?
보헤미아는 후스파 봉기 이후부터 살육을 행하는 가톨릭 광신도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는 아주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대(對)바이에른 포위망이 결성되기 위해선, 주변국들의 모든 동의가 선행되어야 했다.
공은 다시금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갔다.
진땀을 흘렸으나, 이번 조약은 다행스럽게도 주변국 모두의 동의를 얻었다.
회의가 열린 장소를 따서 이름 붙여진 이 ‘로테르담 체제’는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에 대한 무역 제재 등 그들의 성장세를 제한하는 여러 가지 약속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헤미아―오스트리아 간의 평화 조약, 보헤미아―프로이센 동맹, 프랑스―네덜란드 평화 조약과 이탈리아―오스트리아 간에 계속되었던 이스트리아반도 영유권 문제의 해결, 프랑스―이탈리아 간의 구 사보이아 공국 지역의 영유권 문제 해결까지.
유럽의 구성원들이 매번 으르렁거렸던 문제들이 결국은 합의되었던 것.
오르베텔로 조약 이후 유럽사에서 가장 중요한 조약이라 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주변의 왕정들에 의해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의 앞날은 지극히 불투명해졌다.
비록 공동 군사 대응까지는 여러 정치적 문제 때문에 불가능하겠지만, 외부로부터의 무역이 끊긴 나라는 기술적, 군사적으로 정체되거나 심지어 후퇴할 것이 분명했으니 시름시름 앓게 되겠지.
그렇다면 순리에 맞추어 강대국들은 그들의 영역을 다시 한 땀 한 땀 파먹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번 체제가 모든 것의 해법은 아니었다.
모든 왕족들과 귀족들이 경각심을 느끼고 애민심과 책임감을 느끼는 동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국가적 대응책과는 별개로, 주변국들의 내부의 문제는 거의 해결되지 않았다.
왕과 귀족들은 여전히 사치스러웠고, 농민의 세금은 여전히 높았으며, 노동자들은 여전히 도시의 시궁창에 돌아다니는 쥐와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자신들의 적이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과 같은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그들 내부의 모순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
* * *
권리장전(權利章典)
처음 이 단어는 고려에서 등장했다.
먼 과거의 황제권 제한을 명시한 금헌칙서 이후, 상민은 자신이 시중의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에 후대의 시중들을 위해 권리장전, 즉 다시 한번 국가법률에 따른 황제권 제한과 인간의 천부권을 명시했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기나긴 세월 동안 너무나도 확고히 자리 잡혀 후대의 황제들이 상서성에 가는 것조차(가끔 신년사나 행사가 있을 때) 무척이나 어색해하는 지금도 황제 앞에서 쩔쩔매는 후대의 시중들을 볼 때면, 자신이 그 매듭을 짓고 나온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이후 민선시중들에 의해 제국법의 근본인 전국대전이 개정을 거듭해 나갔고 마침내 학문적 발전에 따라 제국헌장과 제국헌법이 만들어졌다.
제국헌장은 고려의 본토와 연방 간의 관계와 황제권에 대해 명시하고 있었으며 제국헌법과, 연방법, 자치령의 법들보다 법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그 뒤 제국헌법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 국가권력의 조직과 작용을 규정했다.
제국법의 제정은 당대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일이라, 외부의 주목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세상에 자신의 권력을 순조롭게 내려놓는 위정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렇기에 워싱턴이 미국의 국부가 되었고, 그것 하나로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며 만고의 존경을 받지 않았던가.’
현재의 고려사에서는 단 한 번도 권력다툼을 하지 않고 권력을 후임에게 이양해온 이타심의 화신들, 즉 가면의 시중들이 그러한 존경들을 받고 있었지만, 결국 그 인간들은 허구의 존재들이었고 도리어 장기집권의 수단에 불과했으니 상민은 지금에 와서야 약간은 머쓱한 기분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고려는 산업혁명과 계몽주의, 인본주의를 통한 인간 이성의 시대가 온 뒤에는 다른 친밀한 국가들에게 의회민주주의를 넌지시 추천하고 있었다.
내정간섭 수준은 아니었다.
의회민주주의 할 거야 안 할 거야? 하며 함포를 가지고 항구에서 을러대지도 않았고, 경제적 보복이니 뭐니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것의 효용성을 학문적으로 증명해 주었을 뿐.
고려가 군주정에 대해 딱히 적대감을 보여서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위대한 황실을 가진 자들이 그럴 이유가 있겠는가.
다만, 상업적 기풍이 강한 나라로서 대외 투자나 사업을 할 때 현지의 정치체제가 어떤 것인지는 명확히 따져봐야 했다.
군주정이라도 의회와 국민이 정책의 주체가 되는 나라는 국가의 신뢰도가 압도적으로 우수하다.
같은 사업을 해도 왕명 하나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라에서 무슨 일을 같이 하겠는가?
반면 제대로 된 의회의 비준을 받은 정책은 무르기 쉽지 않았으며, 그 책임은 국민들 또한 같이 지게 되니, 외부의 자본들이 그곳에 투자를 하는 것에 상대적으로 부담감을 적게 느끼는 것이다.
상업적 기풍이 뛰어난 나라들, 그리고 고려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아 인본주의가 활짝 발아된 나라들이 의회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
1576년, 제일 먼저 네덜란드의 시민들과 스타텐 헤네랄(네덜란드 의회)이 그들의 왕가, 부르고뉴김가에게 권리장전을 얻어내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국가 주권이 왕실에서 의회로 이양되는 이 사건을 네덜란드 명예혁명이라 불렀다.
이후 1601년, 에이레에서 명예혁명이 발생하였고 의회가 설립되었다.
동시기 이탈리아는 여전히 계몽주의 전제군주정을 천명하고 있었으나 고려의 중서성을 본받아 이탈리아 의회를 설립하고 각 지의 의원들에게 입법권을 이양했다.
뿐만 아니라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의 의회 또한 그 입김이 강해졌다.
심지어 이는 동아시아의 3개국에서도 태동하기 시작했다.
옥저는 인구수에 비해 무척이나 광대한 지방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지역 대표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백제는 부여씨의 친정욕망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재상정치제로 돌아갔으나, 부여씨의 왕들은 특유의 흑막정치를 해소하기 위해 오히려 앞장서서 의회를 주장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조선은 달랐다.
전형적인 유교의 나라인 조선은 의도치 않게 정여립이라는 세계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을 배출해내는 기염을 토했으나 역으로 저 멀리 유럽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상황을 받고는 반동적 질서로 회귀했다.
“정여립 패당 놈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행하고 다녔는지 모르는가?”
“네놈, 설마 정여립 패당 놈들이냐? 불순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정여립과 같은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그와 일면식도 없었던 의회주의자들이 대규모로 탄압당했던 것.
그들은 억울했을 것이다.
“저기 구라파에 간 정여립을 내가 어찌 만날 수 있겠소!”
고려의 눈치를 보느라 피는 흐르지 않았으나, 이들은 전부 오지로 귀양을 가야 했다.
심지어 몇몇은 아예 조선에 학을 떼며 개성으로 망명하니 조선의 의회주의는 그 빛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조선왕은 다시금 계몽전제주의를 열심히 흔들어대었고, 도리어 조선 국왕의 힘은 더욱 강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1670년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