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근래 살짝 좋지 않은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상기후와 냉해, 홍수와 가뭄이 때때로 고려를 휩쓸었다.
아무리 농업의 강대국인 고려라도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다 말할 수는 없었다.
21세기가 되어도 이러한 자연재해는 농산물에 치명타를 주었고 농민들의 삶에도 상처를 냈으니까.
상민도 소위 말하는 ‘소빙기’의 존재를 어렴풋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하늘과 땅의 상황은 앞으로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좋지 않은 방향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니,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지.
그래도 기본 생산량 자체가 워낙 많았고 모든 계란이 한 개의 바구니에 담겨 있지 않은 상황이라 고려는 이러한 재해에 상당히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남려의 곡식 산출량이 적다면 북려에서 끌어오면 되었고 북려가 흉년이 들면 남려에서 식량을 보내면 되었다.
앙주는 차츰 북려 최고의 곡창지대로 발돋움하고 있었으니까.
농사기법과 시비법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리고 작물의 다양화도 상당한 공헌을 했다.
쌀과 밀, 그리고 기타 식용작물들.
과거 쌀에만 미쳐 있었던 전조와는 달리 지금은 넓은 기후와 비옥함에 따라 쌀과 밀, 보리와 옥수수 등을 섬세히 구분하여 길렀다.
그중에서도 특히 열대와 아열대, 온대에서 잘 자라는 고구마와 온대와 한대, 냉대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
두 구황식물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이 굶어 죽지는 않게 해주었다.
보관 방법의 개선도 있었다.
일반적인 작물을 빠르게 썩는다.
특히, 연중 온화한 남려의 내지와 북려의 개척지에서는 더욱더.
아무리 식량을 많이 생산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자연의 섭리로 썩어버리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괜히 고려가 이 작물들을 서둘러 유럽(주로 종교전쟁을 하고 있던 지역)에 가져다가 팔았을까.
빨리 썩어버리기 전에 보존할 수 있는 무언가로 바꾸는 것이 이득이었으니.
파는 것 외에도 다른 방법을 구가해야 했었다.
식량 자체를 보존하는 것.
물론 유리와 자기산업이 발달하면서 병조림 같은 것은 진작부터 나와 있었으나 부피가 커다란 곡물 및 식량을 전부 그런 무겁고 귀중한 용기에 담아 저장하지는 못했다.
병조림은 주로 선박의 괴혈병을 치료하는 음식(김치 같은)이나 값비싼 기호품, 예를 들면 설탕으로 담근 단졸임(잼)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다.
곡물은 다른 수를 써야 했다.
주로 뱃사람들에 의해 개발된 이런 보존방법은, 쌀과 밀과 같은 곡물들을 빻아 반죽을 만들고 그것의 수분을 한계까지 제거해 굽는 형태로 나타났다.
고려어로는 건빵, 잉글랜드에서는 쉽 비스킷이라고 한다지.
이 ‘건빵’은 21세기에서 살아온 입장에서 미래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맛이 없었고 훨씬 더 텁텁했다.
당연하게도 별사탕 같은 건 첨부되지 않았다.
설탕이 얼만데.
어찌 되었든 이런 건빵과 육포는 몇 년을 버틸 수 있었으니(농무부에서는 그 기간을 대체로 3년으로 잡았다.) 흉년이 들었을 때 건량을 구호 물품으로 지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결국 인구의 증가 폭은 다시금 원래대로 회귀했구나.’
지지부진한 인구증가를 바라본 상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지금 고려의 인구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가파르게 증가하는 중이다.
몇 번의 재해와 그로 인해 흉년이 찾아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러나 상민의 시선에선 여전히 시원찮았다.
그동안 고려의 인구는 계단식으로 증가해 왔었다.
고려는 의료체계의 개선과 의학의 발달, 농업생산량의 증대와 토지의 원활한 분배에 따라 시대적으로 타 국가와 비교하여 말도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인 자연인구증가율을 누려왔지만, 여전히 지금은 근대의 초기에 불과했으니 당연한 한계점이 존재했다.
횃불을 들어 밝힌 의학의 영역보다, 저 멀리 어둠 속에 잠긴 곳들이 무수히 더 많은 상황.
따라서 이런 계단식의 인구 폭발은 자연증가율의 현격한 변화라기보다는 다른 거대한 원주민 집단을 흡수하는 와중에 껑충껑충 솟아오른 것이었다.
예를 들어, 타완틴수유의 흡수와 문명화된 여섯 부족의 동화과정 같은.
그리고 이제는 주변에 흡수할 부족이 거의 없었다.
적대적인 자들, 혹은 고려를 피해서 북으로 달아난 사람들.
그들을 억지로 잡아다 동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흐음···.”
상민은 한숨을 쉬었다.
고려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먼 옛날부터 유럽에는 감자가 퍼져나갔다.
상민과 같은 고려의 미식가들에 의해 ‘맛있게 먹는 법’까지 동봉된 이런 감자들은 무슨 영문인지 원 역사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탄식할 정도로 빠르게 민간에 보급되었다.
소위 말하는 최고의 문명국가가 감자를 맛있게 먹는다는 이야기는, 곧 이런 작물이 처음부터 돼지 사료 취급을 받지 않았단 의미였고, 유럽의 빈민들에게도 경계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고려의 영향으로 무식한 중세의 위생 관념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곳도 많아졌다.
페스트, 즉 흑사병이 설치류(정확히 말하자면 벼룩이겠지만)를 통해 전파된다는 사실은 이미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게 알려져 한동안 쥐잡기 운동을 벌인 곳도 있었다.
물론 고려의 인구는 언젠가 유럽의 국가들을 뛰어넘을 것이다.
불과 4만 명으로 시작되었던(그조차도 한 차례 내전을 벌인) 고려는 현재 유럽의 최강국, 프랑스의 인구 추정치에 비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으니까.
어디까지나 추정치일 뿐이라도.
아무리 유럽이 따라잡는다 하더라도 기술의 선도는 고려가 주도할 것이며 문명진보의 가장 큰 혜택은 항상 내지가 먼저 누릴 것이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다른 문제도 떠올랐다.
‘내가 지금은 우생학의 문제로 인해 경당을 지지하고 있지만, 경당의 말도 항상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
상민은 근래, 이민자 출신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랑스계의 앙주인과 그리스계의 진주인 등.
그가 의도한 일이었긴 했다.
그러나 상민은 고려가 고려만의 특색을 잃어버리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무분별한 수용은 그저 여러 재료를 때려 박기만 하여 맛의 방향성을 알 수 없는 꿀꿀이죽과 같다.’
흰쌀밥이라는 중심을 잡아 줄 기둥이 없다면 비빔밥은 줏대가 없는 요리요, 방향성 없는 퓨전이다.
밥보다 나물이 더 많으면 그게 비빔밥인가? 나물에 밥알을 얹어놓은 거지.
무분별하게 유럽인들의 이주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고려가 아니라 단지 유럽의 새로운 이름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의 의지가 황조(皇朝)에 반(反)하게 된다면.
‘그것은 용납할 수 없다.’
원과 청을 생각해 보라.
한 줌도 되지 않은 이민족들이 결국 거대한 중원에 의해 중원화가 되어버린 것을.
고려는, 어디까지나 고려로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근래에 아주 제한적인 이민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고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특정한 국가를 배경으로 하는 세력이 고려를 좌지우지하지는 못하게 되도록 여러 문화권을 포용하여.
북게르마니아(북독일)와 스칸디나비아, 폴리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이탈리아와 이베리아, 브리타니아 같은.
이미 앙주에 수많은 프랑스계 고려인들이 살고 있으니 현시점 유럽에서 건너올 프랑스계 이민자들의 숫자가 지극히 적어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하지만 그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 * *
상민이 한창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밖에서 비서관이 외쳤다.
“당하, 외무상서가 입시(入侍)를 청하나이다.”
“드시라 하여라.”
외무상서 류곤이 조약의 최종안을 가지고 창양으로 돌아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석 달이 넘는 대동양 항해를 하느라 볼살이 홀쭉해진 얼굴을 본 상민이 류곤에게 이 주일의 휴가를 주었다.
“감사합니다!”
악독한 상관에게서 처음으로 긴 휴가라는 것을 받아봤는지 부하가 기쁜 감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본 상민도 퇴청을 준비했다.
“나 때는 말이야, 저 멀리 카나리를 들르고 앙주에 가고, 창양으로 가는 일정을 소화한 이후에 곧바로 업무를 시작했는데 요즘 젊은것들은 하여튼 엄살이···.”
류곤은 사십 대, 젊진 않았다.
그러나 그 앞에서는 그 정도 세월은 핑곗거리가 되지 못했다.
피부가 주름지고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월이 지나면서 그 특유의 생각은 항상 드나 보다.
마차를 부르고 정녕당으로 가라 명령한 상민은 그 짧은 거리 동안 계속 조약안을 살펴보았다.
강대국의 땅따먹기.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도 했다.
‘만약 동남아시아가, 남아프리카처럼 고려 본국에서 가까웠다면···.’
그렇다면 지금 무타파와 메리나를 후원하는 것처럼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상민은 그 순간 그의 뇌리에서 울려 퍼지는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그의 성정과는 다르게 끈적한 탐욕과 욕망이 섞여 있었다.
― 제국의 치(治)가 덕치라는 것은 누가 증명하는 것이냐?
뇌리에 떠오른 생각에 한동안 그는 무겁게 탄식했다.
상민 자신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제국이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자비롭다는 선전.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교’이며,
따라서 ‘대조군’이 필요하다.
연성권력의 영향력은 오히려 경성권력을 일삼는 자들에 의해 확립되는 개념이니까.
유럽인들이 그들의 치세 아래 저들을 죽이고 착취할수록 고려의 치세는 더욱 밝게 빛나니.
“당하, 도착했습니다.”
상민이 자괴감을 애써 누르며 마차에서 내리자 여인 한 명이 정녕당의 대문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뒤에 있는 하녀들을 보면 그녀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소식을 들었나보다.
상민은 안절부절못하는 루크레치아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착 감겨드는 포근하고 말랑말랑한 체온이 기분 좋았다.
“무사하실 게요.”
“아아······.”
불안에 떨던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쉰 채로 주저앉으려는 것을 지탱한 그가 루크레치아를 안아 들고 정녕당 안채로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
평소 엉겨 붙는 쪽은 그녀였고, 상민은 받아주는 입장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하녀들이 부럽다는 얼굴을 하다가도, 그래도 상전의 부모가 학질을 앓고 있다는 소식에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 보였다.
“키닌을 복용하시면 차도가 있으실 테니.”
“흑··· 고마워요······.”
루크레치아가 훌쩍였다.
장인, 알렉산데르 6세는 인간적인 면을 볼 때는 혐오감이 들 정도로 최악의 인물 중 하나였지만, 현시점 이익을 공유하는 바가 있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아들이자 이탈리아의 현왕 체사레 1세는 근래에 학질로 추정되는 병을 앓아누웠다 한다.
하루아침에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잃어버릴 처지에 놓인 그들은 순식간에 죽음의 문턱 앞까지 걸어갔다지.
그때, 다행스럽게도 카나리 제도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서유럽회사의 상인이자 첩보원 하나가 긴밀하게 키닌을 진상했다.
상민이 내린 명령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훌륭하게 처리했기에 상민은 그 요원에게 작지 않은 상을 내렸지.
어쨌든 본 역사에서 하루아침에 중병에 걸려 몰락했다던 그 부자(父子)이자 처가댁은 이제 다시금 야망을 꿈꿀 수 있을 것이었다.
이미 일흔 살이 넘은 장인은 살날이 얼마 남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체사레는 다르니까.
루크레치아가 붉어진 얼굴과 정신을 가다듬고는 그의 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안채에 있는 유모에게 우는 아이를 건네받아 달랬다.
상당히 이질적인 그녀 특유의 금발을 물려받았지만, 얼굴은 자신을 꼭 빼닮은 갓난아기.
불안에 떠는 어미 대신 울음을 터트리던 아이가 이내 조용해졌다.
잔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그와 잔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덕에 머리색만큼은 죄다 흑발이었지.
그러나 루크레치아와의 아이들은 그녀가 자랑하는 화려한 금발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상민은 새삼스레 생각했다.
역사가 참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이 바뀔 것이라고.
‘···핏줄이라.’
아까 전, 또 다른 그의 손자인 로베르 드 아르크가 미주에 도착하여 창양으로 보낸 보고서가 집무실에 도달했었다.
고민을 해결할 방도는 언제나 존재했는데.
대체 무엇을 고민하는가?
이곳은 수만 명, 어쩌면 수십만에 달하는 그의 가족들이 사는 곳.
따라서 이곳이 그의 조국이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이 조국을 위해 살아가기로 했던 이 나라의 정치가였고.
따라서 과거의 동정심과 인연은 집어넣어야 할 때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조선에 대한 고려의 입장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