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23화 (223/653)

조선(2)

미주의 주도, 미원(美原).

로베르는 잠종을 무사히 운반했다.

비록 많은 수의 누에가 죽고, 부화된 것들 중에서도 상당수를 뽕나무 잎의 수량을 위해 바다에 던진 적도 있었지만 일부는 성공적으로 누에나방으로 변태할 수 있었고, 변태한 누에나방들은 새로운 알을 깐 덕분에 새로운 잠종들이 태평양을 건넌 먼 대지에 도착했다.

버선발로 달려 나온 미주의 주지사가 잠종을 보더니 감동의 눈물을 보였다.

“이게 다 안평공(安平公) 전하 덕분입니다.”

로베르는 감사 인사를 받았음에도 살짝 마뜩잖은 얼굴을 보였다.

“이제는 공호를 버렸으니 그저 회사의 사장이라 불러주십시오.”

한 줌의 명예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앙주 여왕의 사남(四男) 말고 스스로 이루어 낸 동아시아회사의 사장으로 대우받길 원한다는 로베르의 말.

“예, 예, 전하.”

주지사가 뽕나무 잎을 열심히 파먹는 누에를 살펴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 후 주지사는 꿋꿋하게 로베르의 공호를 딴 안평 잠실(蠶室)이라는 곳을 미주의 남쪽에 세웠으며 그 주변에도 잔뜩 뽕나무를 심었다.

양잠 사업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앞으로 갈 길이 멀었지만 적어도 지금 주지사의 얼굴을 본다면 아마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부처님의 자애로운 미소를 떠올릴 수 있을 법했다.

* * *

미원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을 만나고 몸을 추스르고, 보급물자를 정돈하며 창양으로 떠난 연락선의 답신을 기다리는 지 몇 달째.

드디어 시중의 답신을 품은 서신이 도착했다.

그러나 서신을 실어나르는 배 뒤에 같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 듯한 수많은 배들이 보였다.

분명히 외국 선단이었다.

“한 척··· 두 척··· 저게 다 몇 척이야?”

“오메, 무슨 일이 나는가벼?”

미원의 주민들이 동요할 정도로 선단의 숫자는 상당히 많았다.

사실 선박의 크기는 대형 협저선(캐러밸)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커 보였기에 대형함으로 분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외관 자체는 상당히 중범선과 흡사했다.

처음 겪어보는 새로운 외국 함대의 출현에 미원의 항구가 대포를 준비하랴, 뭐를 하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이미 뱃밥을 많이 먹은 로베르는 싸울 의향이 전혀 없어 보이는 대선단의 모습에 일단 침착하게 관찰부터 시작했다.

어차피 니카라오 운하를 통과할 국적의 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유럽인들이 남대동양을 지나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을 통과해 미주로 온다?

그럴 이유는 전혀 없지 않겠는가.

‘늦은 세계 일주라도 꿈꾸면 모를까.’

혹시나 하여 품속의 망원경을 빼 바라보니, 과연 선수에 네덜란드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네덜란드 선단의 대표자가 항구에 내렸다.

미주의 땅을 처음 밟은 이들은 이 온화한 날씨가 신기하다는 듯 사방을 둘러보다가, 이윽고 주지사와 미주의 사령관, 그리고 로베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네덜란드에서 왔습니다.”

국기는 네덜란드이지만, 이 네덜란드의 대표자들은 상당히 많은 자들이 고려인과 흡사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 사실에 영문을 몰라 하던 로베르는 이윽고 그들의 차림새를 보고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손뼉을 딱 쳤다.

“바다의 거지들(괴젠)이시오?”

딱히 모욕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이제 이 명칭은 너무나 많이 퍼져 있었고, 그들 자신도 프랑스에게서 종전협정을 이끌어 낸 이후부터 반감 없이 오히려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네덜란드의 대표자 또한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는 그의 동양적 모습으로부터 누군가를 떠올려내는 것에 성공했다.

예전의 셰피 해전 이후 김홍을 따라 네덜란드에 귀화했다던 고려인 무리들을.

그 후로는 자연스럽게 저 배들의 정체들까지 알 수 있었다.

북유럽회사가 도입하고 있는 대표적인 상선이라 했었지.

“그렇습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소?”

“시중께서 대금을 치르신 배들을 직접 운송하기 위해 왔지요.”

괴젠은 그 말을 하면서 등 뒤의 배들을 가리켰다.

총 스무 척의 중범선.

일반적인 중범선과는 다르게, 저 상선은 크기가 작고 무장이 빈약했다.

그렇게 들으면 대체 그런 배를 왜 네덜란드에게서 사 왔냐 의문이 들을 법도 했다.

그러나 이 상선용 중범선들은 그들만의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뿌리 자체는 중범선에서 파생되었기에 대형 협저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견고하고 대양 항해에 편리했다.

게다가 애시당초 상선이라는 특화된 목적을 반영한 듯, 전투에 쓰일만한 부분과 잡스러운 것들을 빼버려 전체적인 구조의 간략화를 꾀한 이 범선은 살짝 좁은 상부 갑판 밑에 두툼하고 뚱뚱한 선체를 지녀 실로 엄청난 양의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이 정도의 배를 운용하는 데 필요한 선원의 수가 고작 서른.

그리고 고달프겠지만 비상시에는 그 수를 줄여 심지어 열 몇 명으로도 항해가 가능했다.

일반적인 중범선의 승선 인원이 백 명이 넘어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엄청난 장점이 아닐 수 없었다.

“배의 이름이···?”

“선박들의 이름은 앞으로 명명하시면 되는 것이고, 만약 규격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희 네덜란드에서는 이 배를 플류트(Fluyt)라 부른답니다. 물론 내부구조는 주문하신 대로 살짝 바꿨지요.”

“플류트라···.”

“예. 어찌 되었든 북유럽회사를 통해 이미 대금을 치르셨기에 저희들은 이 확인서만 받겠습니다.”

먼 거리의 항해에 피곤할 법도 했지만, 괴젠들은 다소 독촉하고 있었다.

로베르는 북유럽회사에서 동아시아회사로 선박의 소속을 변경한다는 서류를 받아들고 확인란에 인장을 찍었다.

“무사히 머물다 가시오.”

“하하, 말씀만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아마 오늘 하룻밤만 이곳에서 간단히 여독을 푼 후, 파푸아로 갈 생각입니다.”

“그렇구려. 그럼, 그대의 항해에 평안이 있기를.”

작별의 말을 주고받은 로베르는 그제서야 시중이자 대주주의 명령서를 받고 배 위로 승선할 수 있었다.

“······그렇군.”

서신을 읽으며 플류트라 불린 함선의 갑판 하부로 내려가 보니, 로베르는 확실히 명령서에 쓰인 내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자 대신 사람을 실어오라, 그런 말씀이시구나.”

일반적인 화물을 적재할 곳에도, 가림막은 물론 침상과 그물침대들이 잔뜩 설치되어 있었다.

본래 배의 생활은 열악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승객들의 편의를 최대한으로 봐준 것이라 해도 무방했다.

많은 화물을 운반하는 배들이 이제 오로지 사람을 수송하는 목적을 가지고 대양을 건너는 것이다.

고려의 인력난이야 워낙 유명하니 이민은 흔한 일이었다.

조선에 대한 동아시아회사의 입장을 받아 든 로베르가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포르투갈이 노예수송을 하는 것처럼 무력적 사용을 통한 납치, 뭐 그런 것은 아니겠고.

유럽에서처럼 종교전쟁과 기근, 마녀사냥 등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을 모으라 뭐 그런 뜻이시겠지.

이 시대, 고려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는 호랑이보다도 무섭다는 정치를 피해 산과 오지로 달아나는 자들이 무조건적으로 존재했으니까.

토지구조와 신분제의 모순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고려의 행동을 썩 좋아하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걱정이 들진 않았다.

마침 카디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하니, 다바오에 있는 군함들이 잠시 자리를 비워 북상해도 괜찮겠지.

* * *

북방의 겨울은 춥다.

얼음이 낀 탓에, 심수(瀋水)의 도도한 흐름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어쩐지 서글프게 느끼며, 노년의 무장은 두정갑을 여몄다.

하얀 입김이 피어났다.

“차라리 겨울이 조금 더 혹독했으면 좋으련만.”

만약 그렇다면, 조선은 적어도 잠시간의 안락함을 영위할 수 있었을 테다.

북적(北狄, 몽골, 북원의 멸칭)이 사는 북방의 초원에 주드(Dzud)가 몰아닥친다면 북원은 물론이고 북원을 지지하는 몽골의 부족들은 제각기 자신의 부족을 건사하느라 대외의 원정에는 힘을 쏟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 겨울은 물이 얼기에는 충분히 추웠으나 대초원의 사람들을 얼어붙게 하기에는 너무나 따뜻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누대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강 건너, 옛 영화를 상징했던 폐허가 눈에 띄었다.

심양성.

본래 몽골인들과 전조의 왕씨들이 차지한 심왕의 거처로서 쓰이던 강 건너의 성은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남서쪽에 위치한 요양성과 더불어 요동의 주요한 거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성 모두 전조 공민왕과 조선의 태조가 이뤄낸 요동 정벌 시기에 불타 소실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요동의 실질적 영유권은 조선이 쥐고 있었으니, 굳이 강북의 거점을 재건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성들의 잔해를 이용해 강의 북쪽이 아닌 남쪽에 새로이 성곽과 요새를 쌓아 북방의 침입에 대비토록 하니, 사실 이제는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은 요음(遼陰)과 심음(瀋陰)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심요도(瀋遼道)는 조선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땅이었다.

태조의 창업 이후 조선의 여러 군주들은 수성(守成)을 하면서도 이곳을 지켜내야만 했다.

고토란 그런 존재였고 사내 또한 당연히 그리 여기고 있었다.

‘허나, 심요의 가치가 그렇게 귀중하다면 성상께선 어찌 지금까지 이 사람에게 온전히 믿음을 주지 못하셨나.’

그는 파들파들 떨리는 눈을 억지로 감았다.

예순이 넘은 나이, 누명과 귀양살이를 하다 겨우 다시금 복직한 그의 자리는 이제 어딘가 몸에 맞지 않는 구석이 있었고, 기력은 이미 모진 귀양살이에 쇠하여 갑옷을 입고 꼿꼿이 서 있기도 힘들었다.

“도원수(都元帥) 대감.”

등 뒤에서, 젊은 사내의 단단한 음성이 들렸다.

아끼는 아이라, 믿음을 주고 있었기에 자신이 만약 훗날에 어떠한 방식으로 그릇되게 된다더라도 남은 일군을 잘 수습할 수 있을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자신의 사후를 생각하던 노인은 이내 쓴웃음을 거두고는 다시금 엄하게 표정을 지었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예. 모두가 올바른 위치에서 적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

조선국 북방도원수(北方都元帥) 남이(南怡)는 성곽과 안쪽 늘어선 병사들이 제각기 무구를 갖추어 입고 활과 병장기들을 쥐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북원의 대칸, 바투뭉케라 하더라도 이 심양을 아무런 피해 없이 넘지는 못할 것이었다.

장졸들 또한 그들의 장군을 바라보며 억지로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 두두두두

차츰 굉음이 가까워졌다.

수만 필, 아니 수십만 필의 말발굽이 천하를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

성안의 사람들은 요동치는 대지의 소리에 불안에 떨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삽시간에 병졸들에게도 달라붙는다.

아무리 정예하다 하더라도, 죽음은 항상 두려운 존재였으니.

“북원제국···.”

오이라트부 출신 에센 타이시의 그늘에서 벗어난 바투뭉케가 이끄는 초원의 제국.

멸망의 문턱에서, 다시금 초원으로 되돌아가 재기에 성공한 제국.

중화를 버림으로써 다시금 예전만큼 잔혹해지고 난폭해진 유목민들의 나라.

― 꿀꺽.

저들의 말발굽 소리 하나하나에, 마치 두 번째 몽골의 치세를 이 땅에 불러일으킬 기세가 들리는 것 같아 병졸들이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장수들 중에서도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저들의 무리 개개인은 한낱 장졸들마저 말을 노련하게 다루며 활을 뛰어나게 쏘는 전사민족이다.

반면 심요도병마절도사(瀋遼道兵馬節度使) 시절 남이가 조련한 심요의 정병들 또한 본래는 뛰어나고 용감했지만, 그가 조정의 누명을 쓰고 귀양을 간 이후에는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던 탓에 군의 기강이 절로 해이해졌다.

벼린 칼처럼 날카로웠던 병사들의 눈매는, 지금도 중앙에서 변덕스럽게 줄인 군량으로 인해 어딘가 혼탁하게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지금 외적과 맞서야 할 심요에도 군량이 넉넉지 않았으니, 그 변덕은 사실상 진행 중이라 해도 무방했고.

‘조정에는 의심병이 쌓인 환자들이 많으니 이를 어이할꼬.’

이들은 북방의 외적들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된 무관들을 전혀 믿지 않았다.

언제든지 그 칼날을 다시금 한양으로 들이밀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마도 폐주(廢主)를 상대로 한 정난의 여파였는지, 혹은 그저 당금 주상의 기질인지는 몰랐다.

허나, 그는 조선의 무장이었다.

그러니 심요 땅의 단 한 치도, 저 북적들에게 내줄 수 없었다.

심수 건너편에 집결한 저들의 군세를 바라본 남이가 문득 가볍게 웃으며 자신을 유배 보낸 시구절을 변용하여 읊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리라

압록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니

남아 육십에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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