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21화 (221/653)

카디스 조약(2)

아마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 카디스의 회의를 일컬어 많은 강대국들이 참여한 최초의 근대적 국제조약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서로에게 큰 상처만을 남긴 첫 번째 종교전쟁(삼십 년 전쟁) 이후 공허함을 느낀 국가들이 제각기 허물어진 기존의 종교적 가치관보다는 이제 조금 더 명확한 가치, 즉 이권을 위해 이합집산을 시작하게 된 기념비적인 순간이라고.

그러나 막상 이곳에서는 고성과 삿대질, 험악한 말이 오갔다.

화자의 품격에 걸맞는 말은 아니었지만 자국의 첨예한 이권이 대립된 상황에서 체면을 차리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사태를 한 발짝 뒤에서 관망하고 있던 고려의 특사, 외무상서 류곤(柳滾)은 우아하게 커피를 홀짝이며 아귀다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려는 딱히 지금 이 제안에 반감이 없었다.

자세히 보면 고려 자체는 북태평양 및 남태평양의 군소 제도와 톤도 제도만을 영향권 안에 넣는 영양가 없는 조약이었다.

그러나 동맹국들을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동맹을 끌어들여 본국의 힘은 최대한 적게 들이는 방법을 택한 고려는 선뜻 동맹국들의 이권을 존중해 주었다.

본디 무리의 우두머리는 베푸는 바가 있어야 소속된 무리들이 따르는 법이니까.

시중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대로 현재 고려는 북려를 먹는 것도 지금 배가 터질 지경이다.

일단 이탈리아는 나팔수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사, 니콜로가 류곤에게 다가와 국왕 체사레의 당부를 전하며 운을 띄웠다.

"아국의 폐하께서 특별히 큰 신경을 쓰셨으니···."

"알겠습니다. 그 건에 관해선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이탈리아는 수마트라 제도 북쪽에 설치했던 반다 아체(Banda Aceh) 항구와 인도의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땅에 대한 영향권을 얻지 않았다.

상당히 의외였다.

그러나 자신들이 스스로 중재자를 자처하며 그렇게 결정했으니 다른 국가들은 금방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반면 사전에 이야기가 오고 갔던 류곤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탈리아인들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지중해를 빙 돌아가야 하는 인도와 누산타라가 아니었다.

북아프리카였지.

이번 조약에 고려의 의중을 상당 부분 반영한 이탈리아는 덕분에 가장 큰 것을 얻어냈다.

만약 오스만이 북아프리카의 맘루크를 멸망시키고 그 서쪽, 키레나이카와 트리폴리까지 나아간다면 고려의 지원을 받는다는 약속을.

일단 고려의 현 황제는 황후 헬레나의 영향을 받았는지 오스만을 썩 좋아하진 않았다.

아무리 시중이 실권을 꽉 쥐고 있더라도, 그런 미묘한 감정을 완전히 거스를 수 없는 법이니 오스만의 팽창에 대한 불편한 시선은 정계에 만연해 있었다.

게다가 아랍계―정통 수니파와는 조금 다른 무어계―무왈라드 수니파인 마라케시를 번국으로 둔 이상 북아프리카에서의 오스만 승천 또한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었으니 이해관계의 합치는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되도록이면 붙지 않고 여전히 유럽의 근심거리로 남아있길 원하긴 하지만···.’

아직 싸우지 않는 방법도 여전히 남아있긴 했다.

황상께선 썩 마음에 안 들어 하시겠지만,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오스만에게 맘루크를 병탄하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압박을 넣으면 굳이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아도 되니까.

물론 동생 젬의 반란으로 인해 후계자 아흐메트를 잃고, 젬을 후원한 이탈리아와 베네치아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난 바예지드 2세가 바다도 아닌 육지에서의 싸움을 멈출 것 같지는 않아 보이긴 했다.

그러나 그 오만한 술탄국도 가끔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려야 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탈리아의 특사가 한 번 왔다 간 뒤로, 마야의 특사도 다가왔다.

"카롬테(마야의 신성왕)께서 감사를 전했습니다."

"전하께 염려 마시라 전해주세요. 다만 전에 약조한 것은···."

이번에는 류곤이 마야의 특사에게 말을 꺼냈다.

"위대한 용께서 내리신 대명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비단 이번의 일이 있지 않았더라도, 우리 마야는 항상 고려의 용과 함께할 것입니다."

류곤은 그로서는 보기 드물게 진실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맙습니다."

한참 프랑스 특사와 신경전을 벌인 끝에 파푸아섬의 서쪽 일부를 원안 그대로 내주게 된 네덜란드의 특사는 이빨을 벅벅 갈며 분통을 터트리다 이내 체념하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자연국경을 존중하자는 두 번째 수정안에 따른다면 파푸아섬의 맨 서쪽 지역은 네덜란드의 땅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기어코 양보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놓고 자신들은 자연국경을 문제 삼아 술라웨시섬을 전부 소유하겠다 하니, 돼지 같은 탐심이 실로 경이로웠다.

"향료 제도를 전부 다 처먹고도 저리 욕심을 부리니!"

회의장에서 오가는 고성을 안 듣고 싶어도 안 들을 수가 없었기에 류곤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다 생각하시는 것이 편할 겁니다. 프랑스의 탐욕을 생각해 볼 때 예견된 수순이었으니."

샤를 8세와 브르타뉴의 여공작 안 드 브르타뉴와의 결혼으로 인해 이제 명실상부하게 아름다운 육각형의 국토를 자랑하게 된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이 휘청이는 지금 비옥한 토지와 수많은 인구, 찬란한 문화와 지리적 여건을 모두 등에 업고 단연코 유럽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육군과는 달리 해군은 아직 모자란 감이 있었으나 샤를 8세의 주도로 빠르게 갤리온을 건조하며 따라붙기 시작하니, 고려를 제외한 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는 다른 국가들은 경계의 눈으로 프랑스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네덜란드에 미리 영향력을 투사하지 않았었다면 고려도 그들의 기세에 흠칫 놀랐을 것이었다.

인구만 보면 아직 고려제국은 프랑스의 인구를 넘지 못했으니까.

교황 또한 유럽의 패권국이자 전통적 가톨릭 우방국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는지 상당히 많은 특혜를 프랑스에게 주었다.

알짜배기인 말루쿠 제도(Maluku Islands)를.

아직 누산타라 지역 대부분의 섬들이 미지의 베일에 싸여 있는 상황에서 이 제도는 유난히 유럽에까지 잘 알려진 상태였다.

지금은 이슬람 상인들과 마자파힛 제국에 의해 다른 섬들과 인도에게까지 퍼져나갔지만. 한때는 육두구와 정향 같은 향신료 등이 이 제도에서만 자생했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온갖 향료의 원산지답게 얼마나 많이 자라고 있었는지 이 섬에 도착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사방에 잔뜩 깔린 향료들을 보고 향료 제도(Spice Islands)라는 이름까지 붙였을 정도였다.

향료는 여전히 비쌌고, 프랑스는 이번 조약 원안에 대해 누구보다도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알겠습니다."

비록 용맹공 김홍의 지도 아래 몇 번의 방어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하나, 계속 프랑스와 마찰을 빚는다면 국가와 가문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네덜란드 특사 또한 알고 있었기에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류곤은 그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 잉글랜드와 에이레의 특사마저 불렀다.

한창 내정을 돌봐야 할 시기, 호주(Hoju)라고 알려진 아주 먼 곳의 이권을 상당히 뜬금없이 얻게 된 두 나라의 특사들은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어라 치고받고 싸웠던 구원(舊怨)마저 잊었는지 서로 쑥덕이고 있었다.

마야를 제외한 세 특사가 그의 앞에 서자, 류곤이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귀국들에 대해서는 니카라오의 통행권을 보장해 주겠습니다. 물론 적법한 통행료를 낸다면 말이지요."

니카라오 운하를 만들어 놓고, 기껏 고려만 운하를 쓴다는 것은 들어간 자금을 생각해보면 수지타산에 전혀 맞는 행동이 아니었다.

고려는 이를 노리고 온갖 해적이 득시글거리는 불안정한 아프리카의 해안가를 가는 길 말고도 니카라오 운하를 통과하여 태평양을 횡단하는 경로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밝혔다.

통행료는 지불해야겠지만, 칼리나해는 제국의 함대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해적을 박살 내고 있는 곳이니만큼 쾌적했고 어찌 되었든 선택지 하나가 더 늘어난다는 것은 괜찮은 일이었다.

"성상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저 말은 대체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잉글랜드의 특사가 같은 위계의 류곤에게 읍을 하며 아주 굴종적인 인사를 올리자, 에이레와 네덜란드의 특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가렛 여왕과 그 뒤에 있는 대왕대비 해영에게서 단단히 무슨 소리를 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호주라는 거대한 땅 중 비옥한 동쪽 영토는 죄다 에이레가 가져가고 서쪽의 황무지만을 가지게 된 잉글랜드였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당장 지금 이 자리에 끼지 못했을 수도 있었으니.

한동안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잉글랜드의 특사를 바라봐야 했던 류곤은 이내 안색을 수습하고는 박수를 두어 번 쳐 주의를 환기했다.

"비록 지금 이렇게 조약을 만들어 가지만, 본디 이런 조약이란 어설프고 허점이 많습니다."

약속과 조약은 사실 깨라고 있는 것.

거인들의 약속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휴짓조각이 될 수 있었다.

"······."

특사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 사이에서도 불신이 잔존한다.

특히 잉글랜드는 아직도 업보를 채 청산하지 못한 상황.

그래도 이렇게 모이게 되었으니, 고려는 이들이 서로 연합하여 다른 해양국가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아내길 바랐다.

적어도 한 세기라도.

"누산타라는 이 조약 이후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울 겁니다. 다만 아국과 귀국들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의리를 지키길 바랍니다."

포르투갈은 초기 그들의 세력을 인정받아 가장 광대한 곳의 이권을 보장받았다.

아마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이 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른 열강들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회의장 반대편에 고려와 네 국가들에 대항하여 포르투갈, 카스티야와 프랑스 삼국이 서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고려라는 확실한 주도권이 있는 이곳과는 다르게 저곳은 아직까지도 확실한 결론에 수렴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 미묘한 불협화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더 벌어지겠지.

모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잉글랜드만 또다시 그 음흉한 성정을 내보이지 않으면 된다.

좌중의 마땅찮은 시선을 또다시 받은 잉글랜드 특사가 벌건 얼굴로 대답했다.

"마땅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되도록 그곳의 신민들에게 덕을 베풀어주십시오."

류곤이 말한 마지막 말은 다소 냉엄했다.

고려는 관계가 없는 타 열강들이 동남아시아의 이권을 착취하는 것까진 막을 입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동맹국들은 ‘온화한 통치’를 하길 원했다.

위선자라고 해도 할 말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최소한의 도덕적 안배였다.

세 나라의 특사는 류곤의 말을 듣고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어찌 상관이 부탁을 빙자한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 * *

바스쿠 다 가마는 곧바로 조약의 결과를 받아들 수 있었다.

최종 조약안은 단순히 위도와 경도만을 나눈 초기의 제안에서 몇 가지 자연국경을 반영하여 수정되었으나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머리를 상당히 잘 굴렸고 결과적으로 유럽과 고려 모두의 입맛에 맞는 결과가 도출되었으니까.

"흐음···."

강력한 세력을 일구고 있던 포르투갈 동인도회사는, 적도 밑 누산타라 구역을 이곳에 심지어 오지도 않은 나라들(네덜란드와 에이레, 프랑스와 마야 등의)에게 나누어야 하는 짜증 나는 상황에 처했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긴 했기에 불만을 애써 가라앉혔다.

일단, 가장 중요한 말레이반도는 그들의 영향권이다.

보르네오해도 마찬가지.

이번 카디스 조약은 누산타라와 말레이반도, 그리고 톤도 제도 등의 ‘주인 없는’ 섬들에 한해서였지, 내륙의 주권국들에 대한 조약은 아니었기에 명과 명의 동쪽에 있다는 조선과 왜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어찌 되었든 현재 그들 소유의 항구인 마카오를 가는 곳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셈이었다.

‘법에 살고 법에 죽는 고려인들은 조약을 최대한으로 지킬 터, 명에 대한 우리의 권한만 침해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딱히 불리할 것도 없다.’

계속 분쟁을 일으키느니 차라리 앞에서는 이런 조약을 맺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영파에서 고려의 선박이 드나든다는 보고가 신경이 쓰이긴 했다.

‘명의 고자에게 더욱 많은 은을 진상하여 고려의 세력을 찍어눌러야 하겠군.’

바스쿠는 탁자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결정을 내렸다.

‘이 조약은 탁상공론의 잔여물에 불과하다. 저들은 직접 이 수많은 섬들이 있는 땅에 와보지도 않은 채로 지도를 펼치고 여러 가지 사항들을 결정했으니, 이곳의 혼란은 오히려 가중되겠지.’

거리는 여전히 멀고, 먼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찰하기도 힘들다.

앞으로 수많은 나라들이 이곳에 와 재물들을 실어나를 것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잘됐다. 누산타라라는 빵이 커진다면, 그 빵을 운반하는 놈들을 약탈할 몫도 늘어날 터.’

그들이 본격적으로 이곳을 개발한다면, 그들의 수송선들은 무방비하게 이 바다를 오갈 것이었다.

황금과 은, 향료를 싣고.

그러면 바스쿠는 이곳의 주인으로서 적법한 권리를 행사하기만 하면 된다.

"사략함대를 확충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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