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20화 (220/653)

카디스 조약

로베르는 영파에 있을 동안 현지의 여러 관리들과 인연을 맺고, 또한 중앙의 명 조정에도 간단한 끈을 대었다.

항상 그렇듯, 너무 깊게 매달리지는 않았다.

중앙의 정계란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변하는 성향이 있었다.

지금 명나라를 좌지우지한다는 환관 유근에게 돈을 바쳐 영파에서 무사히 상행을 했다 하더라도, 다음 상행에는 유근이라는 존재가 덜컥 죽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고려의 동아시아회사는 역적 및 탐관오리와 결탁한 외세가 될 수도 있었고.

그러니 빨리 빠져나가야지.

영파에는 운학이 남긴 했다.

시중께서 내리신 임무가 있다 한다.

로베르는 그 인간 자체를 상당히 싫어했지만, 그래도 한때는 고려의 중서성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사람이니 영파에 간단한 거처를 마련해주고 은괴를 적지않게 주었다.

대충 일을 마무리한 로베르가 서둘러 영파를 빠져나올 때 쯤, 운학은 어디서 왔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명의 식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별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

로베르에게 중요한 것은 명인들과의 교류가 아닌 상행이었다.

팔고 싶은 물품은 다 팔고, 사고 싶은 물품은 다 샀다.

그리고 비밀리에 가져야 하는 물품도.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선장실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로베르는 등 뒤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흠칫하며 물건을 가렸으나, 이내 영파가 보이지 않을 만큼 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흔쾌히 등 뒤의 물건을 보여주었다.

"내 정신좀 보게, 자네를 불러놓고 딴 생각에 젖어 있었으니..."

득팔은 이제 동아시아회사의 통역사가 되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그는 마침내 장경창이 이끄는 주나라 수군에서 나오겠다는 뜻을 밝혔다.

어차피 조선인이라 알게모르게 주의 무리들에게서 소외받는 것이 있었고 경창 또한 득팔과 같은 일개 선원은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 충분히 허락할 것이었다.

게다가 득팔은 조선어와 명어, 중원의 사투리와 심지어 왜어에도 능하니 동아시아 회사에서는 충분히 우대를 받을 수 있었다.

조선의 촌에서 난 사람답게 일자무식이라 한문을 읽고 쓰는 것엔 지장이 있지만, 오히려 그 부분에선 로베르가 역으로 한자를 가르칠 수 있을 것이고.

출신 성분답게 약간 자유분방한 기질이 있는 득팔은 로베르의 등 뒤에 있는 기묘한 물건에 호기심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 잠종(蠶種)을 보관하는 곳일세. 자네도 우리의 사람이 되었고 이제 이 일 자체는 딱히 비밀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봐도 무방하겠지."

로베르의 등 뒤에는 마치 두부를 만들 때 쓸 법한 큰 판이 있었고 그 위에 무언가 잔뜩 놓여있었다.

"잠종이요?"

아무리 한자에 친숙하지 않은 득팔이라 해도 잠종이 누에의 알을 의미하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과연 살펴보니 그 두부판 위에 마치 검게 물든 조그마한 좁쌀 모양의 알들이 있었다.

상당히 많아 새어보진 못했으나 알만 수백개에 달한다고 말해도 믿을 정도.

"가장 최근에 얻은 잠종이라 하더군. 부화하는데 시간이 보름이 넘게 걸린다 하던데 오히려 더 걸렸으면 하는 바램이야."

영파에서 떠날 때, 선단은 잠시 남쪽의 어디 해안가를 들린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마 잠종과 뽕나무를 구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명의 감합무역은 아직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대부분의 무역은 밀무역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돈만 충분하다면 사방에 난립한 명의 암상(暗商)들에게서 이런 것들을 구하기는 너무나도 쉬웠다.

"...선실에서 부화하면 어떡하지요?"

득팔도 온갖 곳을 다닌 입장에서 양잠을 하는 과정을 모르진 않았다.

중원과 조선에서 뽕나무와 누에는 상당히 흔했으니까.

"이것들이 죄다 부화하진 못할 게야."

로베르는 거래를 한 자에게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십분의 일이라도 부화한다면 아마 운이 좋은 경우라 들었네."

로베르가 선실의 뒤를 바라보자, 득팔의 고개도 같이 돌아갔다.

창이란 창은 죄다 열어 놓은 것도 모자라, 채광에 방해가 되는 곳은 아예 뜯어버린 선장실은 선장이 자는 곳이라기보다는 개조된 창고 같은 느낌이었다.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는 작은 술통을 이용해 만든 수많은 화분들이 있었고 그 대부분의 화분에는 뽕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뽕나무 씨앗을 따로 챙기긴 했으니 저 뽕나무들은 딱히 미주에 가져가 심을 목적은 아닐 것이다.

오로지 잎을 따서 앞으로 부화할 누에들을 먹이는 것에 쓰이겠지.

한 눈에 보이는 뽕나무 화분의 개수가 많음에도 득팔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정도도 너무 많습죠. 이 손톱보다도 작은 누에가 얼마나 많은 뽕잎을 먹는지 직접 보지 않으면 정말 믿기 힘듭니다요."

"그정도인가?"

"예, 알을 까고 나온 놈 중 실한 놈들만 골라 다시금 수를 좀 줄여야 할 겝니다."

로베르가 풀죽은 채 대답했다.

아까운 것들.

"...그건 부화한 다음 생각해 보자고."

중원의 왕조들은 하나같이 비단으로 유명했다.

애초에 누에의 기원 자체가 이쪽 동네이기도 했고, 비단은 황실의 권위를 나타내는 사치품이기도 했으니 어떤 나라가 들어서도 조정에서 특별히 신경써 육성하는 산업 중 하나였다.

자체적으로 벨벳(우단)같은 비단을 생산하고 있는 유럽과 중동도 감히 명에 양잠사업을 비교할 순 없었다.

기나긴 비단의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세월 동안 누에와 뽕나무도 인간이 기르기 알맞게 개량되어 왔으니 지금 명에서 잠종과 뽕나무 씨들을 확보한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좋은 일이었다.

듣기론 중원의 누에 원종(原種)이 유럽의 원종보다 더 뛰어나다 하니 무사히 이것들을 미주로 가져갈 수만 있다면 미주는 차츰 차츰 양잠사업을 확충해 나갈 것이고, 마침내 비단에 있어서 확고한 생산자로 발돋움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미주의 주지사 또한 기주의 수출용 담배처럼 연방의 다른 주들이 제각기 전략적 상품들을 개발하는 상황에서 혼자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었으니 동아시아 회사의 상단에게 기대하는 바가 커 많은 지원을 아끼고 있지 않은 상황이니까.

다만 지금까지의 식물의 종자는 대부분 밀랍으로 봉인한 자기로 운반하는 것이 많았는데 잠종이라는 특수함 때문에 이번 일은 특별히 신경을 많이 써야만 했다.

채광과 습도, 그리고 식물을 기를 깨끗한 물까지.

셋 모두 준비가 넉넉하게 되었거나 혹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기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먼저 하기로 했다.

선장실에서 나와 선미루의 갑판으로 올라간 로베르가 한동안 망원경으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지시를 내렸다.

"바로 북상하여 하이도와 미주로 가는 북부항로를 타자꾸나. 왜와 조선은 지금 당장 논할 곳이 아니야. 우리는 무사히 잠종을 옮겨야 한다."

어차피 근해에 왜구가 날뛴다니, 무력적 지원 없이는 당장 조선과 왜구에 가는 것은 무리다 싶었다.

"예, 사장님."

***

카디스.

총독 관저.

평소 총독과 그 휘하의 관리들이 회의를 하는 이곳에는 이번엔 총독조차 감히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지체높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면면을 보자면 모두 화려했다.

거의 대부분이 세습 귀족들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일단 아직까지는 카디스를 점유하고 있는 고려의 특사와 이 자리를 만들어낸 이탈리아의 특사가 있겠고.

마지못해서 협상장에 나온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특사도 있겠고.

그리고 한창 사이가 안좋기로 소문이 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특사도 보였다.

그리고 의외로 고려와 전쟁을 했던 잉글랜드의 특사도 보였고.

전통적인 고려의 우방국, 에이레와 더불어 유럽인들이 정말이지 단 한 번도 보지도 못한(들어보긴 했었지만) 곳에서 온 특사도 있었다.

"크흠."

헛기침을 하는 사람도 보였고 서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흥!"

유럽의 종교전쟁은 발발한지 거의 삼십 년이 넘게 흘렀지만 딱히 변한 것이 없었다.

감정의 골 정도가 깊어지고 있겠지.

맨날 치고박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는 시간도 필요했고, ‘하찮은 백성들’이 아이를 까고 길러 그들의 병사로 자랄 시간도 필요했다.

게다가 두 세력은 나름대로 비등비등하였으니, 자연스럽게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신성로마제국의 엉덩이에 다시금 불이 붙었다는 것이겠지.

오스만이 심상치 않았다.

콘스탄티니예에 엄청난 병력이 모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상당히 견고한 첩보망을 다시금 가동하고 있는 고려조차도 그 병력이 어디로 갈지는 예측이 힘들었다.

북부로 나아가 발칸 및 일리리움의 소국들과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노릴 수도 있었고.

혹은 그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광활한 이란 왕국(사파비 왕조)를 노릴 수도 있겠고.

혹은 아예 이번 기회에 남쪽의 숙적, 맘루크 술탄국을 박살낼 수도 있겠고.

그래도 종교전쟁은 가톨릭계 국가들이 주도하는 바가 있었다.

개신교야 그들의 박해에 맞서 싸우는 입장이니까.

하지만 당장 지중해와 남쪽의 입지가 불안한 이 와중에 소모전을 하기는 시기적으로 좋지 않은 감이 있었다.

저 멀리서 발생한 바스쿠 다 가마 총독과 이광영 총독의 사소한 충돌은 이 엉덩이 무겁고 앙숙인 사람들이 제각기 한 자리에 모이도록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여기 모이신 여러 현명하신 분들, 그리고 여러분들이 모시는 지극히 귀하시고 찬란하신 분들 또한 오늘의 이 회담에 기대하시는 바가 클 터이니,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고려와 포르투갈, 카스티야와 프랑스의 특사는 번지르르하게 입을 연 이탈리아의 특사를 바라보았다.

가톨릭의 본고장 로마를 사실상 소유하고 있고 심지어 현 국왕은 교황의 사생아이기까지 하면서 도리어 종교적 수호보다는 이권을 챙기려는 현 보르지아 가문의 작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바가 많았다.

체사레 1세의 여동생이 고려의 재상과 결혼했다는 사실은 아마 저 한미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농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리나시타로 대변되는 실리적인 학풍이 현 이탈리아를 휩쓸고 있다지만 적어도 교황은 그러면 안되었다.

가톨릭계 국가들에서 온 특사들이 하나같이 얼굴을 찡그릴 때에도 이탈리아의 특사는 별 반응이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우리가 다툴수록, 서로가 확보할 수 있는 부유함의 총량은 줄어들겁니다."

말을 하면서, 그는 제일 먼저 고려 특사의 얼굴을 흘깃 살폈다.

무표정한 것이 당장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제의를 다 듣고 난다면 크게 기뻐하리라.

그리고 그는 천천히 다른 자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탐욕스러운 고려가 동인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에 현 포르투갈의 왕이 밤마다 악몽을 꾸면서 일어난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잘나가는 포르투갈과는 달리, 고려와의 다툼으로 인해 한 박자 늦게 바다에 진출한 후발주자인 카스티야인들은 한창 동인도의 부를 모조리 끌어모으고 있는 옆집 이웃을 보고 배가 심하게 아플 것이었다.

대륙에 발을 걸쳤던 잉글랜드의 잔재를 몰아낸 이후, 비록 저지대는 따로 떨어져 나갔지만 지방의 봉건 귀족들은 때려잡는 것에 성공한 프랑스는 한창 어딘가로 그 넘치는 욕망을 분출하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고.

반대로 네덜란드는 대륙에 바로 접한 프랑스의 진출 야욕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고려와 치고박고 싸웠던 잉글랜드는 더블린해전으로부터 십삽년이 지난 지금에는 도리어 마가렛 여왕의 치세 아래서 아예 친 고려파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더블린 해전 이후 완전히 해양패권을 잃어버린 없었던 그저 그런 섬나라 사람들을 이 자리에 부른 것은 다름아닌 고려였으니까.

잉글랜드가 참석한 자리에, 전통적인 고려의 동맹인 에이레가 빠질 수는 없었고.

이탈리아의 특사는 마지막으로 한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흑인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일반적인 고려인들보다도 조금은 왜소하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자랑하는 이들은 마야인이라 한다.

그로서도 저들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얼마나 강성한지, 도저히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동안 교류를 해왔어야 알지.

이 자리에 낄 만한 체급은 아니라는 평가가 우세했으니 누산타라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전역에 든든한 우방국을 만들고 싶어하는 고려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양대 열강인 포르투갈 또한 카스티야와 프랑스를 끌어들여 고려에 함께 대항하는 동맹을 꾸밀 모략을 획책하고 있으니 고려로서도 이탈리아의 중재안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선제적인 조건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마야와 에이레가 프랑스 하나의 힘을 대적하지는 못할 것이니까.

잉글랜드야 고려가 잔뜩 쥐어 패 논 여파를 아직 극복하지도 못했고.

이들 제각기 속으론 무슨 꿍꿍이를 하고 있는지는 하느님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이 나라들의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면 지금 당장 아귀다툼을 하기보단 당장 동인도에서 부를 끌어오길 원한다는 것.

싸움은 일단 돈이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진작부터 와 있던 포르투갈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후발주자들은 선발주자들과 이렇게 대등하게 회의를 하는 것 자체를 몹시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다.

"제가, 아니 성하께서 여러분들께 제의할 것은 하나입니다."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특사는 타락한 가톨릭의 수괴가 무슨 말을 하던지 자신들은 상관이 없다고 면전에 대놓고 쏘아붙이기보다는 일단 사전에 고려와 미리 협의한 대로 들어나 보자는 표정을 지었다.

"제국 경도(창양 경도) 기준, 정 반대편인 180도 경도선과 적도를 해당하는 지역을 기준으로 이 지역을 아홉 등분으로 나누지요."

- 촤르륵

이미 진작부터 설계를 한 모양인지, 교황의 특사는 똑바로 된 직선이 그려져 있는 지도를 가져와 펼쳐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