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
침략자와 원주민.
둘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지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상민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역사는 아득히 먼 과거로부터 얽히고설킨 것이 대부분이라 어떤 두 집단 간에 존재하는 증오의 원인을 언제부터 찾아야 할지 모르는 것이 많았다.
본래 상민은 일반적인 한국인보다 유럽의 역사에 대해 꽤 관심이 많았다 자부할 수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범인들보다 조금 더 나은, 즉 취미로 역사를 접한 역덕의 입장에 불과했다.
알고 있는 것이 전부 확실하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학자들처럼 사료의 진위성과 교차검증을 꼼꼼하게 따져보며 배우진 않았다는 소리.
그리고 유럽사에 둔 관심보다 이슬람 문명권에 대한 관심은 확연하게 작았다.
처음에 상민은 레콩키스타로 물러난 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이 단순한 피해자라고 생각했었다.
11세기부터 유럽인들이라는 침략자에 밀려 고난을 겪는.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상민의 착각이었다.
무슬림들이 피해자라고?
아니었다.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다른 종교와 다른 문명과 민족들처럼 그들이라고 특별하게 피해자만도, 가해자만도 아니었다.
그들은 현지세력을 존중하며 적당히 온건하고 인간적인 통치정책을 하기도 했다.
현지의 문명은 그들의 이슬람과 동화되어 빼어난 문화와 아름다운 예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콘스탄티노플 함락 때 벌어진 학살마냥 피가 강처럼 흐르고 시신이 산처럼 쌓이는 정복을 했으며 그 이후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의 차별을 일삼기도 했고 지역 경제를 박살 내기도 했다.
아랍의 종교는 아주 약간의 논란이 있긴 하지만, 세계의 주요한 종교들, 즉 불교나 기독교, 힌두교 등과 비교해 볼 때 확연히 늦은 610여 년경에 선지자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 이후, 이들은 질풍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건조한 초원에 불길이 번져가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은 절대 평화나 번영의 사도가 아니었다.
일례로 현 북아프리카에 퍼져나간 이슬람을 보자.
북아프리카는 원래 딱히 이슬람을 믿지도 않았다.
아니, 서기 610년까진 믿을 수도 없었겠지.
본래 이슬람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북아프리카는 나름대로 상당한 잠재력과 괜찮은 농업생산력을 보였다.
한때 북아프리카 튀니스에서 지중해를 주름잡던 카르타고 제국처럼.
그러나 무슬림이 이곳을 휩쓸고, 이후 일어난 아랍의 파티마 왕조가 북아프리카를 의도적으로 황폐화시킨 이후, 한때 역사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이슬람 세계와 유럽사에서도 삼류 변방 지역으로 떨어졌다.
차라리 베네치아가 점령한 튀니스가 나을 수도 있었다.
근처의 해적을 잠재운 그들은 상업적으로 무척이나 번영하기 시작했으니까.
이베리아의 역사 또한 북아프리카와 닮았다.
본래 이 땅에 살고 있었던 민족은 따로 있었다.
역사학자도 아니고, 그 먼 과거까지 굳이 상세하게 알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어찌 되었든 그 원주민들은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를 박살 내면서 지중해의 패자로 떠오르고 있던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거의 오백 년에 달하는 시간동안 로마인으로 살았었던 이들은 서로마 이후 북쪽에서 게르만인들의 침략을 받았다.
그리고 이 게르만인들, 정확하게 말하면, 수에비족과 서고트족이 로마의 잔재 위에 세운 나라가 현 이베리아 국가들, 즉 카스티야와 아라곤, 포르투갈의 전신이라 할 수 있겠지.
게르만계 왕국들은 이베리아를 하나로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711년, 남쪽에서 아랍인들과 베르베르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서고트왕국은 내분과 혼란한 정치상황으로 인해 이들의 공격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몰락하게 되었고, 오직 이베리아 북부의 조그마한 땅들만 살아남아 저항하고 있었다.
아마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시도한 마지막 저항이 성공이 아닌 실패로 돌아갔다면 이베리아는 물론이고 심지어 당대 프랑크 왕국까지 이슬람의 침략 공포에 떨었겠지.
그래.
명백하게 이슬람인들은 침략자였다.
그리고 그 침략자들은 절대 온건하지 않았다.
이베리아에 융성한 이슬람문화 뒤, 얼마나 많은 기독교 세력의 피가 흘렀는지는, 당대 그곳에서 시대를 살아갔던 자들만 증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달도 차오르면 결국 기운다고 이슬람인들이 세운 안달루시아의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고 그 계승자인 후우마이야 왕조 또한 위기를 맞게 되자, 북부에 살아남은 기독교인들은 드디어 저항할 기회를 얻었다.
레콩키스타(Reconquista).
그들의 영토수복전쟁은 그들 나름대로의 대의명분이 있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명분이란 전쟁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작용하기도 한다.
싸움을 싫어하는 일반 농민들조차 앞다투어 전쟁에 나서고, 적들을 쳐부수기도 했으니까.
성공적인 십자군이라 불릴 수 있는 레콩키스타는, 다른 십자군들과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 결국은 성공할 운명이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1498년, 마침내 그라나다 토후국이 멸망했다.
이베리아반도 끝에 붙어있던 이 작은 이슬람계 왕조는 그동안 숨만 붙어있는 중환자와 같다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합동 공세로 결국은 무너졌다.
고려는 두 나라의 트라스타마라 가문이 결혼으로 완전히 합쳐져 하나의 나라로 발돋움하지는 못하게 했지만, 그들의 역량 자체를 완벽하게 봉인하는 것에 성공하지도 못했다.
사실 대동양을 오고 가는 것이 세 달이 더 넘는 시대에 그럴 수 있는 나라가 존재할까마는.
게다가 이 나라들은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생각이 있어, 적어도 공동의 침략자에 대해서는 충분히 협력할 수 있었다.
고려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음지와 양지로 그라나다에 대해 조금씩 후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라나다는 프랑스에 항거하는 저지대마냥 비옥하지도 않았다.
이베리아반도 남부에 있는 베티카 산맥(Cordilleras Béticas)은 나름대로 외세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벽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안 그래도 조그마한 그들의 영토를 효율적으로 경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해양패권을 위한 전열함의 건조 등이 중요 국책으로 대두되며 소중한 예산을 어디까지나 타국에 대한 후원으로 펑펑 소모할 수 없었던 고려는 결국 그들의 멸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패배… 이 단어는 영 익숙하지가 않군.’
상민은 숭무감에 올라온 전술지도를 바라보았다.
최선을 다했다는 고려의 흔적이었다.
페데리코 몬테펠트로는 이미 죽은 지 한참은 된 인물이었지만, 그의 이름을 물려받은 용병대는 아직까지도 건재했다.
과거, 페데리코가 용병대장을 하던 시기에는 그의 국적을 따라 이탈리아인들이 상당히 많았었지.
그러나 이제는 고려인들이 삼 할로 주축이 되고 유럽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그 뒤를 받쳐주는 다국적 용병대였다.
이들은 인종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뽑았다.
오직 단 하나, 용병이면 용병답게 규율에 철저하게 따를 수 있었으면 모두가 동일한 조건에서 근무를 보장받았다.
대신 본래의 용병대들보다도 족히 두 배는 더 많은 봉급을 받았으니, 모름지기 돈이 급히 필요하거나 야심이 있는 자들은 페데리코 용병대에 가입하길 희망했다.
이와 같은 좋은 근무여건 덕분에 모든 국가들이 상비군체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며 용병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는 이 시대, 이탈리아의 콘도티에로도, 스위스 용병대도 아닌 페데리코 용병대만이 거의 유일하게 강력한 무력과 탁월한 전술을 가다듬고 있는 용병대라 칭할 수 있었다.
고려는 이런 용병대를 그라나다 토후국에 꽤나 합리적인 가격으로 지원했다.
그라나다의 에미르, 무함마드 12세는 마치 전쟁을 다 이긴 양 몹시 고마워했지.
그러나 이런 용병계의 역사를 쓰고 있던 페데리코 용병대 또한 필연적인 패배를 맞이했다.
전술적인 패배가 아닌, 전략적인 패배.
‘실로 많은 것을 시사하는구나.’
페데리코 용병대는 용병대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말하자면 고려 육군의 실전훈련소나 다름없었다.
숭무감에서 파견된 소수의 검증된 인원들은 용병대에서 실전연습을 하고, 고려 육군의 경험치를 늘려주었다.
반대로 페데리코 용병대는 질이 일정하게 양호한 지휘관들을 공급받아 꾸준한 실력을 발휘했었지.
이 대단한 사내들이 무기력하게 진다?
일반적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상민은 보고서에 적힌 적장의 이름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이라. 이를 전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만이지.’
패배를 선사한 적장의 이름은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Gonzalo Fernández de Córdoba).
원 역사에서도 통합 스페인 제국 최고의 명장이라 꼽힐 인물.
인류사를 통틀어 백 명의 위대한 장군을 뽑아도 항상 그 이름을 당당히 올려놓을 만한 인물.
현시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2세의 충신이자 총신.
그가 페데리코 용병대에 실시한 전략을 본 상민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15세기에… 참호전이라고?’
야전축성과 전투공병의 아버지라고 평가받는 명장은 페데리코 용병대에게 자신의 장기인 ‘지연전’을 실시하여 전술적 기동력을 묶었다.
아무리 고려의 총과 대포가 발전했다 하더라도, 적들 또한 이제는 총과 대포를 쓰고 있다.
게다가 그라나다의 방어에 임할 수밖에 없는 입장의 용병대의 처지를 역이용하여 선보인 전술적 참호전이라니.
물론 1차 세계대전마냥 몸을 다 엄폐하고 참호 안에서 모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그런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참호전은 아니었고, 빠르게 만들어야 하는 까닭에 하체만 간신히 엄폐할 수 있는 전술적 참호에 불과했지만 페데리코 용병대 총병들의 화력은 일시적으로 급감했다.
유리한 지형에 참호를 이용한 진지와 토루를 구축하여 페데리코 용병대를 묶은 곤잘로는 용병대가 없는 나머지 지역에서 경기병 히네테를 앞세워 지속적인 기습과 약탈, 방화를 통해 그라나다 토후국의 전쟁수행능력 자체를 박살 냈다.
이 우아하며 세련되고, 또한 합리적인 군사적 전략에 상민은 자신의 팔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시대의 천재.’
화룡점정인 것은, 곤잘로 또한 발전된 머스킷을 세련되게 운용하기 시작한 것.
즉.
카스티야와 아라곤 또한 이제 대세라 평가받는 총창방진을 넘어 머스킷의 비중을 대폭 늘렸고, 거의 전열보병이나 다름없는 강력한 총병대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 또한 엄연히 영토 내의 산악지대에서 천연 초석을 캘 수 있는 국가.
화약이 고려 마냥 풍부하진 않았지만 모자라서 쩔쩔대진 않았다.
전열 보병의 압도적인 화력에 그라나다 토후국은 이즈나자(Iznájar)공방전에서 참패를 겪어야 했고, 동쪽의 아라곤과 서쪽의 카스티야를 동시에 힘겹게 막아내고 있던 그라나다의 방어선은 삽시간에 뚫렸다.
파죽지세로 수도 그라나다를 점령하여 나스르 왕조의 아미르와 그 가족들을 잡고 사실상 국가를 멸망시킨 곤잘로는 용병답지 않게 끝까지 버티고 있는 페데리코 용병대를 포위하고는 관대한 조건에서 항복을 유도했다.
알폰소 12세는 선대 ‘사생아왕’ 후안 3세와는 조금 달리, 외교적 해법을 찾길 좋아하는 인물이라는 평이 떠올랐다.
‘고려와 본격적인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이야기겠지.’
그는 이 레콩키스타의 칼날이 고려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제 사십 년만 지나면, 카디스는 그들의 품으로 되돌아오니까.
굳이 고려와 다시금 척을 져, 지난번의 굴욕을 또 겪고 싶지는 않은 모양.
게다가 처참하게 두들겨 맞은 잉글랜드의 선례를 따르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였다.
상민은 비공식적인 루트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그라나다 ‘재탈환’을 문제 삼지는 않겠다는 외교적 입장을 표명했다.
그 또한 편도 두 달이 넘는 유럽에 군대를 파견하여 전쟁을 치러 완벽하게 승리를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다.
그 상대가 그 유명한 곤잘로라면 더더욱.
왜 숭무감의 무장들을 믿지 못하냐고?
들끓는 해적이나 사략함대를 잡아 전술에 대한 경험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숭무감 해군부와 달리 숭무감 육군부는 북려의 평원부족동맹 같은 잔챙이 중 잔챙이들만 상대할 뿐, 경험치를 얻을 구석이 없었다.
제대로 된 회전은 먼 옛날의 아즈텍 정벌전이 전부.
괜히 아직도 시대가 지난 용병대에게 위탁교육을 보내고 있겠는가?
시대의 천재는 난세에 태어난다.
‘…그녀였다면.’
잠시나마 옛 아내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던 그는 이윽고 고개를 저어 상념을 끊었다.
그래도 이 레콩키스타가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선 안 된다.
나중에 카디스를 다시금 돌려주더라도 카나리를 빼앗겨서는 안 되니까.
카나리 제도는 대아프리카와 대유럽 대전략의 핵심이며, 지중해 무역의 기원이 되는 압도적으로 중요한 제도.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무조건적으로 사수해야 할 제도였다.
그리고 이 카나리 제도가 안전하기 위해선, 인근 앞바다의 세력 또한 고려의 영향권 아래에 있어야 했다.
옛날 해상십자군이 벌어질 적, 카나리 앞바다의 지역, 모로코와 서사하라에는 마린 왕조가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마린 왕조는 와타시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와타시 왕조는 고려가 그 특수제작한 폭약을 선물받아 술탄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리는 것에 성공했고.
그러나 이 와타시 왕조는 마린 왕조만큼이나 무능력했다.
유럽인이 이베리아의 마지막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는 동안, 이 베르베르계 이슬람 왕조는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것을 넘어 자기들끼리 집안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라나다 토후국이 멸망에 어떠한 대처도 하지 못한 이들은, 심지어 쫓겨난 그라나다의 에미르, 무함마드 12세와 무어인 난민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멍청한 놈들. 그 세력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니들이 다음 표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나?’
나스르 왕조는 비록 멸망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의 저항을 하던 가문이었다.
상민은 차라리 이 이베리아계 무어인(근본 자체는 아랍계와 베르베르계였지만 오랜 기간 동안 서고트와 주변의 피도 많이 섞여 독립적인 하나의 정체성이 되어가고 있었다.)들이 마그레브에 둥지를 틀고 주요 문화로 발돋움하길 원했다.
그동안 친한 것도 친한 것이고, 종교적으로 엄격한 베르베르인들과 달리 무어인들은 문화적으로 상당히 관용적이었으니까.
그동안 고려에게 입은 은혜도 있을 것이고, 관용적인 문화 기풍은 고려의 영향력을 많은 저항 없이 수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전명, ‘일어서는 거인’을 실행한다. 나스르의 무함마드 에미르가 마그레브의 술탄에 오르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도록.”
마그레브의 아틀라스 산맥에서 이름을 딴 와타시 왕조 전복작전.
비서가 사각거리며 명령서를 작성하는 것을 바라보던 상민은 지도 위의 팻말을 뒤집었다.
무함마드 12세는 북쪽의 이교도들에게서 쫓겨났지만 남쪽의 동포들이 잘 받아주지도 않으려 하는 이 절박한 상황에서 오직 믿을 수 있는 동아줄인 친고려에게 간절하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예전 자신의 딸을 황제의 하렘에 넣어달라고 보내오기도 했었지.
‘우리가 오스만인 줄 아나.’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상민은 내심 불안했었다.
오스만 제국이 실시하는 하렘 제도는 모든 남자의 로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당대 기독교 국가의 군주들도 앞에서는 열심히 미개하다고 씹어대었지만, 밤마다 온몸을 뒤틀어가며 부러움에 떨었을 것이다.
고려는 사실 따지자면 하렘이 가능했다.
아니, 고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권 또한 군주가 마음만 먹는다면 내명부의 숫자를 언제든지 늘릴 수 있었다.
서민들은 일부일처를 따르고 있었지만 인외인 황제는 달랐다.
고려 황제는 지고하며, 황실을 번영케 하기 위한 결혼이라면 숫자에 대한 제약이 아예 없었다.
위대한 두 용의 후손은 원한다면 백 명의 후궁이라도 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상민의 입장에서 관리해야 할 가지가 백 개로 늘어난다면 스트레스는 백 배로 늘어나는 것을 의미했기에, 뒤로는 상당한 수의 제약을 걸어놓았다.
방계 황족들은 당연스럽게 일부일처를 실시해야만 했고(그래도 이혼과 재가는 나름대로 관대하게 허락해 주었다), 황제 또한 두세 명이 넘어가는 후궁을 들이면(즉 누가 봐도 후계 안정의 목적이 아닌 말초 신경의 쾌락 목적이 분명하다면) 상민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현 황제 해건은 다행스럽게도 아무런 후궁이 없었다.
이 모범적이며 기특한 후손을 굳이 여난이라는 악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지 않길 원했던 상민은 무함마드의 딸을 해건이 아닌 그 아들 해선의 짝으로 점지었다.
그에 대한 반발은 꽤 있었다.
답답하니 지금은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하지만 해건을 위협했었던 여난은 한 명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