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98화 (198/653)

브란덴부르크

“자, 그럼 귀환하는 길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자동맹의 상인이 자신의 손 위에 올려진 금화를 보고 헤벌쭉 웃으며 대답했다.

소피아에게 서신과 선물을 무사히 전달한 그들은 다시금 답장을 가지고 온 경로대로 내려가고 있었다.

사실 발트해는 거의 초행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길잡이가 필요했다.

이자는 그동안 상당히 자주 리머릭을 들락날락하며 북유럽 상단의 인물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어 놓았던 상인이었기에 신용도가 충분히 높았었고 이번 일을 의뢰하기에도 제격이었다.

“깃발을 올려라!”

― 펄럭

선장이자 상인의 지시에 중범선에 고려의 해룡기가 펄럭였다.

올 때 어떤 공격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을 편히 놓을 순 없었다.

발트해는 지금 혼돈의 시대에 들어가 있었다.

그 덕에 일반적인 상행보다도 더욱 많은 전투병이 중범선에 승선해 있었지.

고려인 상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다는 일견 별 특색이 없어 보이지만 그 주변에 있는 항구들의 공기의 분위기를 읽으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

고려인 상인은 고개를 돌려 길잡이 한자 상인에게 입을 열었다.

“요 근래에 한자동맹이 아주 시끄럽다는 소문이 들려오더군요?”

바다를 통해 퍼져 나가는 소문은 무척이나 빨랐다.

“하하….”

상인은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다소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흘렸다.

“뤼베크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한자동맹의 중심거점이자 맹주인 뤼베크는 신성로마제국의 대표적인 자유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거대한 상인 세력은 심심하면 삥을 뜯는 가톨릭보다는 스스로의 개신교를 더욱 선호하기 마련.

이미 진작부터 그들은 배설주의를 믿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진 한창 벌어지고 있는 종교전쟁에 제대로 참여하진 않았지만.

그는 이윽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 누구도 아니라 바로 북유럽회사의 상인들께만 알려드리는 사항이니 꼭 비밀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비밀은 보통 저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퍼져 나간다.

고려인 상인은 상인 간의 비밀을 지키는 데 성공한 사례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보 수집 또한 그의 일이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알아서 나쁠 일 하나도 없었기에 그를 채근하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한자동맹 상인이 해준 말은 중유럽에 관한 중요한 정세를 담고 있었다.

* * *

진정한 로마의 후계자가 대서양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동쪽에서 로마의 후예를 자처하는 나라가 기지개를 켤 때.

스스로가 가진 이름은 대단해 보이나 오히려 가장 로마와 관련이 없는 나라, 신성로마제국은 끝도 없는 쇠락의 길로 빠져들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말이 제국이지, 수많은 봉신들의 눈치를 살피는 황제 한 명 밑에 일곱 선제후가 큰 영향력을 펼치는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중앙집권을 미덕으로 여기는 고려와 중원의 제국과는 상당히 달랐다.

선제후는 황제 선거권을 가진 제후를 일컫는다.

이들은 근처의 중소 제후들보다 확연히 강했으며, 정치적으로 상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 일곱 선제후는 세 명의 신정 선제후와 네 명의 세속 선제후로 이루어져 있다.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후가 세 신정 선제후의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보헤미아의 왕, 팔츠와 작센, 브란덴부르크의 제후들이 네 세속 선제후의 자리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황제를 견제하기도, 혹은 협력하기도 하며 나름대로 제국을 유지해 나갔다.

봉건제에서는 꽤나 괜찮은 정치제도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절대왕정의 시대와 더불어 종교개혁의 시대가 찾아왔으니, 이 흐름은 이들에게 변화를 강요했다.

1474년, 부르고뉴 대공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하며 시작된 종교전쟁은 차츰차츰 주변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은 세 명의 세속 선제후(팔츠의 궁정백을 제외한)들은 이때가 기회라 생각하며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가 공석이었던 대공위시대(Interregnum)가 끝난 이후, 처음으로 역사의 전면에 제대로 등장한 합스부르크(Habsburg) 가문은 그 등장 배경부터 상당히 근본이 없었다.

게르마니아와 바이에른 전역, 수많은 유력가문들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에서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근본이 없고 한미한 가문 출신의 바지사장, 루돌프 1세였다.

물론 가문 자체의 근본이 없는 것이 한두 번 바지사장 황제를 했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서, 그 이후 다시금 합스부르크는 룩셈부르크 왕가와 비텔스바흐 왕가에 짓눌려 있게 되었지.

하지만 운 좋게도 룩셈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황제 지기스문트 이후에 이들은 다시금 역사에 재등장할 기회를 잡았다.

지기스문트 이후 즉위한 황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 번째 군주, 알브레히트.

그러나 그는 오스만 술탄에게 전투 도중 살해당했으니 신성로마제국의 제관은 곧바로 프리드리히에게 넘어갔다.

합스부르크의 네 번째 군주 프리드리히는 즉위하자마자 온갖 곳에서 시달려야 했다.

북부에서 사사건건 딴지를 걸며 들이박는 선제후들도 있었고, 보헤미아 내부에서 퍼져 나가던 후스파는 이미 뿌리 뽑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상황인 데다가 공교롭게도 내부 구성원인 헝가리에는 그들의 최대 명군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마차시 1세가 등극하여 집요하게 신성로마제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그 이름만 들어도 우는 아이가 멈춘다는 대오스만의 술탄이 침을 뚝뚝 흘리며 달마티아 지방을 바라보고 있었고.

프리드리히 3세는 이 모든 것들을 다룰 정치적, 혹은 군사적 능력이 몹시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그보다 뛰어난 아들을 기를 수 있었는데, 아마 아들 막시밀리안이 아니었다면 신성로마제국은 그의 치세를 끝으로 다른 가문에게 넘어갔을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말년에 사실상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뒷방 늙은이로 잠적했다.

막시밀리안은 아버지 대신 국정의 전면에 나섰고 헝가리의 명군 마차시 1세가 사망한 틈을 타 수도 빈과 그들의 중심영지 오스트리아를 다시금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한계에 봉착했다.

아버지의 무능력함이 아직까지도 그를 옥좨서?

솔직히 말하면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도전받고 있었다.

그들은 가문에서 내려오는 선조들의 유지대로 수많은 곳과 결혼을 맺었다.

허나 돌아오는 세력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아니, 오히려 신성로마제국은 갈가리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

멍청하게 눈 뜨고 바라봐야만 했던 이탈리아 통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보다 한참 전에 부르고뉴 대공국의 마리 드 부르고뉴와 약혼하려고 했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었지.

마리는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팽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고려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놈팽이라는 평가는 정정하자.

남편의 군사적 역량 덕분에 그녀는 네덜란드라는 제대로 된 국가의 여왕으로 오를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가 즉위하자마자 스위스에서 골치 아픈 사건이 일어났다.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토마스 비텐바흐(Thomas Wyttenbach)는 배설 한스포르트의 영향을 짙게 받은 종교개혁가였고, 스위스의 반란을 주도하고 있었다.

험준한 알프스산맥의 산세에 기대 저항하는 이들은, 아무리 군사적 재능이 준수한 막시밀리안이라 하더라도 상당히 힘든 난관이었다.

1479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 폰 호엔촐레른이 총대를 메고 배설주의를 공언한 이후부터 우후죽순으로 개신교를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중소 봉신들(주로 한자동맹의 구성원들이 많았다.)은 149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자 이젠 대놓고 신성로마제국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후 브란덴부르크는 같은 선제후인 작센 공작 에른스틴의 동생 알베르트를 꼬드겨 형에게 저항하게 만들었으며 그들 스스로는 포메른 지방을 공격해나갔다.

그나마 선제후 중 황제와 친한 팔츠의 궁정백 루트비히는 영지 내의 개신교도들의 세력도 무척이나 강했고 바로 옆에 네덜란드라는 배설주의의 현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국가 때문에 돕지도 못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가는 말하고 있었다.

‘꼬우면 전쟁 함 하시든가.’

격노한 막시밀리안은 1496년 직접 친정을 나서 머리 굵은 봉신들을 공격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패퇴하다시피 그의 직할령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가장 큰 장애물, 보헤미아 국왕 예트르지흐 스 포데브라트가 황제의 야욕을 분쇄했다.

후스파의 수호자라 칭해지는 그는 아버지가 구축한 반(反)가톨릭 연합을 충실히 보호하고 있었다.

그래.

결국 고려의 과거 행동이 또 그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얀 지슈카 사후, 보헤미아 후스파를 이끄는 총사령관 프로코프 홀리는 교황령과 휴전협정을 맺으면서 온건파를 인정했다.

그리고 결국 협의에 의해 후스 온건파들의 귀족 중 하나인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Jiří z Poděbrad)가 보헤미아의 포데브라디 왕조를 열었다.

그는 꽤나 훌륭하게 통치를 이어나갔고, 당시 서쪽의 개신교 세력, 부르고뉴 대공국과 긴밀한 동맹을 맺으며 가장 강력한 선제후 브란덴부르크와도 인연을 유지해 나갔었다.

이르지의 이런 반가톨릭 연합은 막시밀리안으로서는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는 질긴 그물망과도 같았다.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대대로 신성로마제국의 카이저들은 하나같이 프랑스를 몹시 견제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의외의 일이었다.

혹은 그만큼 구석에 몰렸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몰랐지.

또한 막시밀리안은 이탈리아 왕국과도 화해의 손짓을 내밀었다.

전통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던 이 자그마한 도시국가들의 연합체는 눈길을 주지 않은 틈을 타 탐욕스러운 알렉산데르 6세와 그 저급한 사생아 체사레의 손에 빠르게 통일을 이루었다.

자존심 상하고 짜증 나기까지 하는 일이지만 적을 더 늘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북부독일의 이탈을 막을 충분한 대책이냐 묻는다면.

아마 막시밀리안 그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대답이 나올 것이었다.

* * *

“그렇게 됐습지요.”

“흐음….”

고려인 상인은 몇 가지를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우리가 이 북부 게르만 지역에 보존식량과 무기를 팔아 재낀 것이 큰 영향을 주었나?’

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찌 되었든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강대국이 휘청거리는 것은 국제정세에 상당히 큰 영향을 주었기에 그는 나중에 조직의 수뇌부들에게 올릴 보고서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돈했다.

대외적으로 기밀이지만 그 또한 정보총국 여의국의 요원이다.

‘상부에서도 정보를 들은 적이 있다.’

상부에선 이 거짓된 제국이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예견했다.

그 버티는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상인은 지금 이 순간 수뇌부들이 예견하신 것보다 더욱 빠르게 이들이 무너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울 존재는….

‘브란덴부르크라.’

제국의 일개 봉신이지만, 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을 다스리는 호엔촐레른(Hohenzollern) 가문은 어쩐지 일개 상인, 혹은 말단 요원일 뿐인 그의 뇌리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뤼베크 또한 이제 브란덴부르크와 보헤미아가 주도하는 반가톨릭 연합에 공식적으로 들어가려는 모양.

뤼베크가 들어간다는 것은 한자동맹이 들어간다는 뜻과 같았고.

이는 단순히 종교를 공표하는 것과도 달랐다.

자유시의 권한은 사실 황제에게서 왔다.

그렇다면 그에 대적하는 길을 택한 자유시들은 그들을 보호할 새로운 개신교 세속 군주를 찾아야겠지.

아마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는 그 자격을 충족할 유일무이한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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