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고려가 그들의 주요 관심사인 서유럽의 역량을 견제하고 있는 틈을 타, 그 반대급부로 동유럽과 중유럽, 북유럽은 각자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통일된 이탈리아.
그리고 같은 신성동맹으로 묶인 베네치아.
중유럽에 속하며, 고려와 동맹을 맺은 네덜란드.
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빠르게 변화하는 나라는 먼 북동쪽에 있었다.
한때는 유럽의 중심과 너무나도 멀어, 사람들의 관심에 없었던 지역.
동쪽에서 온 몽골의 칸이 남긴 억압의 굴레는 너무나도 심각하게 이들을 옥죄고 있었지.
그러나 몽골과 원, 그리고 그들이 남긴 칸국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몰락을 앞에 두고 있을 때, 이들은 반대로 서서히 기지개를 켰다.
루스(Rus)의 땅, 그곳의 주인공 모스크바 대공국은 현재 벨리키(Veliky, 위대한 군주)의 칭호를 받은 모스크바와 전 루스의 대공 이반 3세의 치세 아래에서 번영의 시기를 맞아가고 있었다.
이반 3세는 즉위 후 모스크바 대공국 근처에 있던 야로슬라블과 로스토프를 병합하고는 마침내 큰 라이벌이었던 노브고로드 공국까지 공격하여 합병하는 것에 성공하면서 일약 강력한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이후, 킵차크 칸국과의 전쟁을 통해 모스크바 대공국을 옥죄고 있던 타타르의 멍에 또한 완전히 벗어던지니 루스 차르국이라 불릴 강대국의 전신이 만들어졌다.
물론 이들의 승천하는 기세를 견제할 경쟁자가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서부에 위치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동유럽에서 아주 강력한 패권국으로 자리 잡은 상황. 이들은 사사건건 모스크바의 행보를 방해하고 있었다.
심지어 예전 킵차크 칸국과 연계하여 모스크바를 견제하려 시도하기도 했었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숙적은 대외적으론 여전히 모스크바보다 강성하다 평가받았다.
게다가 스칸디나비아와 덴마크 사이를 묶는 칼마르 동맹은 비록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으나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있는 북게르만과 튜튼 기사단 또한 심상치 않았고.
아직 모스크바 대공국이 열강으로 불리기 전까지 나아가야 하는 산은 충분히 높고 험했다.
그래도 이반 3세와 현 류리크 왕조는 잠재력이 충분했다.
군주 자신의 잠재력뿐만 아니라, 결혼을 통해 그의 아내가 가지고 온 잠재력과 영향력, 그리고 국가의 위신 또한 그것에 보탬이 되었다.
이반 3세는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한 상태였다.
모레아와 동로마가 멸망하고, 모레아 친왕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미망인 카테리니 자카리아는 당시 모스크바 대공인 바실리 2세에게 몸을 의탁했는데, 대공 바실리 2세 또한 조이가 가진 로마의 마지막 핏줄이라는 정통성이 무척이나 탐이 나, 당시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조이 팔레올로기나와 이반을 약혼시켰다.
여러모로 해건과 헬레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조이 또한 그녀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모스크바의 생활에 적응해 나갔고, 이름 또한 러시아식 소피아로 바꾼 뒤 대공으로 즉위한 이반 3세를 안팎으로 내조했다.
장모와 아내를 통해 동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인 이반 3세는 스스로를 로마의 후예(모종의 이유로 진정한, 혹은 유일한이라는 수식어까진 붙이지 않았다.)라 일컬으니, 팽창하는 국력에 맞는 국격과 위신을 가지게 되었다 평할 수 있겠지.
소피아는 헬레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사촌 동생이었다.
그녀의 소식은 꽤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남려와 모스크바의 거리란 실로 심각하게 멀어 제대로 된 교류를 하지 못했다.
내륙을 거쳐 지중해를 통한 연락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봐야 했고.
게다가 고려가 차츰차츰 북해에 손을 뻗던 와중,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일어나니, 소피아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소피아가 쓴 서신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잉그리아(훗날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이 붙여질 수도 있는)에서 상행을 하고 있던 한자동맹 상인의 손에 넘겨져 출발했다.
서신은 핀란드만을 지나 발트해를 거쳐 북해를 통한 뒤, 네덜란드의 수도 메헬렌의 항구인 안트베르펜의 항구에 있던 북유럽회사의 상인의 손으로 넘겨졌다.
북유럽회사는 곧바로 리머릭에 들러 본국으로 가는 상단에게 그 서신을 넘겨주었고, 그 상인은 또 기나긴 대동양에서의 항해를 마치고 창양으로 돌아와 황실에 서신을 바쳤다.
실로 끔찍할 정도로 기나긴 여정을 거친 편지를 받은 헬레나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서신을 열었다.
세월의 풍파를 받은 편지. 그래도 읽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자.
무려 그녀의 혈육, 사촌 동생으로부터 온 편지가 아닌가?
동로마가 멸망하고 이역만리 먼 곳에 떨어진 헬레나는 가족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친어머니 테오도라 아사니나도 그녀 자신이 진주의 여왕이 된 이상 단 네 번밖에 만나지 못했고, 심지어 그녀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었지.
물론 그녀는 많은 자식을 보았다. 훌륭한 남편도 있었고.
그러나 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은 자식에게 베풀어지는 내리사랑이나 부부간의 사랑과는 다른 점이 분명히 있었다.
헬레나는 다소 해진 소피아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대단하거나 중요한 것이 적혀있진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일국의 황후 혹은 대공비.
서로 간의 신분상 그 정도의 암묵적인 규칙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소소한 안부와 근황을 묻는 이야기라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이반과 소피아 부부의 사이에선 삼남과 일녀가 태어났단다.
남자 오촌 세 명의 이름은 각기 바실리, 드미트리, 안드레이라 한단다.
딸의 이름은 소피아가 서신에서 말하길.
― 언니, 언니를 그리워해서 막내에게는 헬레나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재지 넘치는 소피아의 농담과 필체를 읽고 눈물까지 흘려가며 깔깔 웃던 헬레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서둘러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해건이 내관이 가져온 뜨거운 차를 절반도 마시기 전에 순식간에 편지를 써 내려간 헬레나는 유성(油性) 먹이 빨리 마르도록 부채질을 하며 염원이 담긴 눈으로 남편을 바라봤다.
해건은 아내의 간절한 시선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언제든지 부탁하시오. 제국의 여력은 북유럽까지 닿으니 처제와의 편지가 끊길 일은 없을 것이오.”
“고마워요.”
헬레나가 해건을 꼭 껴안았다.
해건은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다, 곁눈질로 그녀가 내려놓은 책과 그 옆에 있던 책더미들을 보았다.
대부분은 문학적 소설들이었으나, 그중 이질적인 한 권의 제목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
그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지만, 이윽고 다시 풀어졌다.
* * *
“창양에서 답신이 왔다고?”
헬레나의 답장이 모스크바의 잉그리아 항구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3개월.
아득한 거리를 이동한 답장을 받은 소피아가 환하게 웃었다.
고려 황실에서만 쓰는 순백의 종이가 금박의 가죽 두루마리에 장식되어 펼쳐졌다.
그녀는 서둘러 그것을 읽어내렸다.
그녀 또한 눈시울이 붉어진 채, 사촌 언니의 편지를 읽었다.
두루마리를 소중히 간직한 그녀는, 모스크바의 궁정까지 온 이국적인 사람 세 명이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지시를 받으려 하는 것을 보았다.
‘형부가 선물까지 보내왔구나!’
온 것은 헬레나의 답신뿐만이 아니었다.
해건은 처제에게 몇 가지 물건들을 주었다.
조그마한 촌 성은 사고도 남을 알 굵은 보석이 박힌 장신구 세트와 향기로운 향수, 날이 잘 드는 명검과 활, 그리고 호신용으로도 쓰이지 못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수석식 권총까지.
그중 가장 압권인 것은 동일 무게의 금보다 천 배가 비싸다 평가받는 청자색(로열 퍼플) 염료 농축액이 담긴 병이었다.
“와아….”
제아무리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는 모스크바 대공국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변방에 위치한 조그마한 세력.
게다가 내륙이다 보니, 병합한 노브고로드의 땅에 있는 항구 잉그리아를 제외하면 마땅한 무역로도 없었다.
이곳까지 오는 사치품은 솔직히 일류라고 부르기엔 하자가 많았다.
겨우 상자 하나.
하지만 그것을 채운 선물의 진가를 파악한 소피아가 입을 차마 다물지 못했다.
“허어….”
그 옆에서 보고 있던 이반 3세 또한 혀를 내둘렀다.
“세계의 금을 전부 휘어잡는다는 고려라더니. 실로 대단하군.”
발트해의 상권을 가지고 치고받고 싸우는 한자와 칼마르 간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발트해로 진출하려고 이리저리 찔러보고 있던 이반 3세는 그 작은 내해 발트해가 아닌 대서양 대무역과 남아프리카 무역, 심지어 북해와 지중해의 이권까지 연계된 고려의 무지막지한 재력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저것들을 판다면 아마 적당히 무구를 갖춘 병졸 이천 명을 제약 없이 곧바로 전장에 내보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이반 3세는 로열 퍼플 염료를 팔고 싶진 않았지만.
하지만 그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은.
북해와 발트해를 지나는 이 서신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고려의 분함대를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거지.
심지어 그들의 숙적 폴란드까지도!
“크흠….”
꼴이 조금 우습게 되었다.
루스인들의 땅으로 퍼져나간 정교회를 이용하여 세력을 결집시키고 마침내 패권을 쟁취한 이반 3세는 그의 정당성을 아내의 명분, 즉 동로마에서 찾았다.
그러나 더욱 적합한 명분을 가진 자는 명백하게도 동로마 마지막 황제의 딸인 헬레나 팔레올로고스.
그리고 로마의 후신이라고 불릴 만큼 더욱 강력하고 적합한 세력을 가진 것도 고려.
대서양을 내해마냥 오가는 저 괴물 같은 국가를 두고 제3의 로마니 뭐니 허황된 주장을 하는 것도 꽤 우습지 않은가.
게다가 그가 상인들에게 듣기로는 대서양 서쪽의 북려에 위치한 진주라는 대공국(그들은 고려 연방의 구성원들을 대공국 정도의 개념으로 인지했다.)에 이미 테르샤로마라는 이름이 붙은 큰 도시가 있다 한다.
“그들에게 잘 보여야겠군.”
중얼거리던 이반은 해건이 선물한 명검을 뽑아 들고 괜시리 한 번 칼날에 손을 대보았다가, 그 날이 가진 섬뜩할 정도의 예리함에 놀라 거두었다.
손가락에 살짝 비치는 핏기.
이반은 시종이 가져다준 깨끗한 천으로 손가락의 상처를 슬며시 닦았다.
“전하. 곧바로 소독을 하셔야 합니다.”
그 순간, 선물을 가지고 온 일행 중 다소 완고하게 생긴 중년인이 다소 어눌한 그리스어로 말했다.
“그대는?”
그의 그리스어를 알아들은 소피아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소신은 황상의 명을 받들어 소피아 전하의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파견된 의원이옵니다.”
소피아는 약간의 항문성 질환을 앓고 있었다.
남들에게 말하기 다소 부끄러운.
그에 관해선 편지에 어떤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다만 몸이 약간 좋지 않다는 뉘앙스의 말만 살짝 흘렸는데, 언니는 동생의 건강을 걱정하다 숫제 의원까지 보내준 모양이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많사옵니다.”
중년인은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슬그머니 다가와 이반의 환부를 살폈다.
그 어이없는 모습에 이반의 호위가 황당해하며 칼을 뽑으려 하자, 이반이 스스로 제지했다.
“동서가 보낸 의원이 내게 위해를 가하겠는가?”
의원은 한동안 손가락을 보더니 말했다.
“송구하오나, 전하, 손을 좀 씻고 다니셔야 하겠습니다.”
평소 위생에 극도로 신경을 쓰는 고려의 황족들을 보다 모스크바의 군주를 보니 실로 꾀죄죄하고 불결했다.
사실 의원의 입장에서 방금 뱉은 말은 상당히 순화된 말일 것이다.
“…….”
소피아는 주저하다 그 말을 번역해주었다.
군주의 면전에 다소 모욕스러운 말이라 느껴질 수 있는 말을 내뱉고도 무척이나 당당한 고려인 의원을 보던 이반이 한동안 벙찐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호탕한 웃음을 내뱉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그는 그리스어를 알아듣지 못해 분노해야 하는지, 어째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부하들에게 굳이 그의 말을 설명해주진 않았다.
다만 그 자리에서 의원을 곧바로 자신의 궁중 의사로 삼았다.
“고려의 의술은 세계 제일이라 했지. 그대는 앞으로 나와 내 아내를 진료하라.”
가장 만족스러운 선물을 받은 이반이 이윽고 대소를 거두었다.
해건, 해건이라.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분명 가족이긴 하다.
처음에는 그 사실에 슬며시 자긍심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 또한 세기의 호걸인지.
고려의 황제에게 느끼는 묘한 경쟁심과 함께, 그의 마음속에서 열망이 피어올랐다.
“처형과 동서가 가진 테르샤로마가 서쪽의 로마라면, 당신과 내가 가진 모스크바는 동쪽의 로마라 불릴 것이오.”
해건과 같은 위치에 서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는가.
질투, 그 한 가지는 어떤 일도 해결해줄 수 없지만 야망의 원동력이 될 수는 있겠지.
‘이제 시작이다.’
굳은 결의를 한 이반이 주먹을 꽉 쥐었다.
세계를 호령하는 대국.
지금 당장은 갈 길이 멀고 험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루스와 그 땅, 러시아가 세계의 열강으로 우뚝 설 날이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