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2)
“마지막 방도는 무엇이오?”
니콜로는 그 대답에 앞서, 체사레에게 몇 가지 두루마리를 건넸다.
두루마리에 적힌 정보의 양은 상당히 방대했다.
“베네치아 도제,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가 우리에게 공식적으로 제안했습니다.”
대답을 하는 대신 두루마리를 읽어보고 있던 체사레가 이윽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니콜로는 진중하게 말했다.
“폐하께 상신하기 전, 소신 또한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를 먼저 만나 이 논의의 현실성과 허황됨을 검증해 보았습니다만, 그의 말로는 충분한 자본이 갖추어진다면 기술적으론 충분히 가능하다더군요.”
“나의 마에스트로(Maestro)가?”
방금 들은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체사레는 그 말을 듣고는 다시금 두루마리에 시선을 돌려 차근차근 그 내용을 살폈다.
두루마리엔 한 가지 정보가 적혀 있었다.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대사업에 관해서.
시나이반도 왼쪽의 도시에서 그 이름을 딴 수에즈 대운하의 공사를 제시한 이 두루마리는 지중해에서 곧바로 인도로 향할 수 있는 항로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체사레의 기술관료이자 총신인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즉 빈치 출신 레오나르도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고.
실로 가슴이 벅차오를 만한 대사업.
지중해에 갇힌 나라들이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른다는 인도와 교역을 할 수 있게 되는 절호의 기회였다.
‘성공만 한다면….’
이탈리아 왕국의 장밋빛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현 유럽국가의 대외무역은 이슬람을 통한 동방무역, 대서양 건너편의 고려와의 서방무역, 아프리카의 남방무역 총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다.
셋 모두 한계점은 존재한다.
이슬람 주도의 동방무역은 불확실성은 물론 중간에서 떼어가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오스만은 걸핏하면 무역로를 단절하기도 했고, 설령 무역을 하더라도 서방에 대한 교역에 무시무시한 관세를 부과했다.
그보다야 훨씬 적은 관세이긴 하지만 맘루크 또한 마찬가지였고.
대서양 건너편의 대고려 무역도 마찬가지.
고려는 카나리 제도의 무역을 촉진시키며 상당히 합리적인 관세를 부과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의 향신료는 너무 값이 비쌌다.
당시 기독교적 도덕주의를 가지고 있는 유럽인들이 보기에도 이상주의적인 정책을 꿈꾸는 고려인들은 노예제와 이를 이용한 대농장을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고, 이는 향신료를 비롯한 상업작물의 필연적인 가격 상승을 불러왔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이 주도하는 아프리카의 남방무역이 남겠지.
그러나 근래 들어서 포르투갈은 동맹 잉글랜드를 잃고 외교적으로 고립된 이후부터 이전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못했다.
또한 본질적으로 포르투갈의 인도 상로는 무지막지한 거리를 지나야만 이루어지는 무역이었다.
해적들의 공격이나 폭풍, 그리고 선상반란이나 기아, 질병 등으로 손실되는 확률이 상당히 높은.
고려의 향신료가 가격이 비싸더라도, 유럽 상인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사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반면, 이 수에즈 운하가 완공된다면 상황은 반전된다.
지중해에서 직접 인도로 향할 수 있다.
심지어 희망곶을 도는 항로보다 세 배 이상 짧고 쾌적한 항로는 불확실성을 줄여주며, 작물의 부패나 기타 여러 가지 손실을 방지한다.
“그래, 그 자자한 소문을 듣긴 했지.”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실제로 고려는 니카라오 운하라는 대사업을 완성했다.
아직 그 파장은 엄청나다고 말하긴 시기상조였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돈이 들어가는 치수 작업도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고려는 땅에 금화를 쏟아가며 만든 그 대사업에 몹시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니카라오 운하 건설엔 엄청난 자금과 엄청난 인부들이 소요되었기에 고려는 딱히 이를 비밀로 취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에 대한 선전의 일환으로 다른 곳에 열심히 소문을 퍼트렸지.
베네치아 상인들도 그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베네치아인들은 다른 나라와 달리 니카라오 운하에 대한 전반적인 청사진과 공사 기간, 소요 재정에 대한 자세한 계획도까지 받아낼 수 있었다.
물론 고려가 무상으로 이들에게 이것을 지급한 것은 아니었다.
베네치아가 먼저 고려에게 달마티아에서 나는 살충효과가 있는 식물, 제충국(除蟲菊 Tanacetum cinerariifolium)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귀중한 식물을 주었었다.
고려는 그에 대한 답례로 청사진을 준 것이었고.
청사진을 받은 이후부터 베네치아인들은 고려의 성공을 본받아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는 모양이다.
고려로서도 유럽의 지속적인 관심과 힘이 자국의 첨예한 이권이 달린 대서양이 아닌 북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로 뻗어 나가길 원하고 있으니 서로 좋은 결과가 아닐까.
“수에즈 운하를 만들기 위해 파야 하는 절대적 길이 자체는 니카라오 운하에 비해 일곱 배가 넘을 겁니다.”
니콜로는 부가적인 설명을 곁들였다.
“다만 말 그대로 작은 산을 깎아내야 했던 니카라오 운하에 비해 수에즈 운하는 평탄한 지형에 있지요. 게다가 지반이 무르니 공사하기도 나쁘지 않습니다.”
“건조한 기후상, 모기도 잘 없겠지.”
니카라오 운하의 최대 난관은 지형적 조건이 아니라 모기였다고도 했다.
체사레도 말라리아라는 것이 나쁜 공기로 인한 병이 아니라 사실은 모기로 인한 병이라는 것을 그의 궁정에 있는 고려인 출신 의원에게 배운 적이 있었다.
그 이후부터, 체사레 또한 제충국을 찧어 만든 반죽을 태우는 향을 피워놓곤 했다.
“게다가 여러 학자들에 따르면 바다와 바다 간의 해수면 차이는 상당히 미미하다 하니, 호수의 물을 끌어쓰며 갑문을 이용해야 하는 니카라오 운하의 설계보다 더욱 간단해질 것입니다.”
듣기에는 상당히 그럴듯했다.
정말로 우직하게 파기만 한다면, 그들은 인도로 향할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이런 대사업은 기술적 난관보다도 경제적 난관이 더욱 큰 법이고 경제적 난관보다도 정치적 난관이 더 큰 법이었다.
체사레는 마땅히 지적해야 할 사항을 손에 꼽았다.
“그곳은 남의 땅인데, 운하를 파는 일이 가능키나 하겠소?”
체사레의 말에 니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소신은 이 계획이 당장 실현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국은 베네치아와 함께 북아프리카의 영역에 대한 확장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베네치아는 맘루크의 현 술탄을 꼬드겨 지금 당장 운하를 건설하고 싶어 했으나 니콜로는 그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맘루크는 일반적인 유럽 왕조나 이슬람 왕조보다도 더욱 술탄 승계에 대한 원칙이 별로 없었다.
매번 오락가락 바뀌는 그들의 정치 상황을 볼 때, 일관성 있게 운하를 파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였다.
니콜로는 당장 이집트 운하를 파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으로 진출을 하기 위해 키레나이카와 트리폴리를 정복해 나가자는 이야기.
이미 튀니스의 하프스 왕조는 쇠락의 길로 빠져들고 있었다.
북아프리카.
체사레는 자신의 앞에 놓인 지도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수만 가지 이권이 팽배하게 얽히고, 또한 앞다투어 화약 무기를 만들어내며 강력한 중앙군을 보유하기 시작한 서유럽과 중부유럽에서 전쟁을 하느니, 차라리 모든 역량을 남쪽으로 투사하자는 니콜로의 대전략은 그의 마음에 쏙 든 것처럼 보였다.
그중에서도 트리폴리와 키레나이카.
이제 이탈리아의 힘은 그쪽으로 향할 것이다.
* * *
고려 황제 해건(解建)은 상당히 애처가였다.
어릴 적부터 짝지어진 황후, 헬레나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한 그는 슬하에 사남이녀를 둘 정도로 좋은 부부관계를 자랑했다.
후궁조차 들이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헬레나의 산실을 그녀의 안정(?)을 위해 보랏빛 벨벳과 천들로 꾸민 것은 대단히 유명한 일화였다.
본디 동로마는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이라는 염료를 만들고 있었다.
티리언 퍼플은 지중해 전역에서 자생하는 무렉스 뿔고둥을 원료로 해서 만드는데, 조그마한 천을 염색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고둥이 필요했다.
형편없는 경제성 덕에 이 색이 고귀해졌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결정적으로 티리언 퍼플의 최대 생산지였던 동로마가 마침내 오스만에 의해 멸망하자, 티리언 퍼플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로마가 이 염료를 만드는 비법을 국가 기밀 수준으로 취급한 탓에 오스만은 티리언 퍼플을 재현하는 것에 번번이 실패했고.
정작 유민들을 통해 티리언 퍼플의 제조법을 알게 된 고려는 지중해에 접근할 수 없다는 한계로 만들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이것이 정녕 인연인지, 고려는 헬레나가 오기 전부터 이미 카나리 제도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나리 제도의 특산물은 그곳의 자생 지의류로 만든 보라색 염료였고.
티리언 퍼플보다 약간 더 푸른 빛을 띠는 이 청자색(靑紫色)은 헬레나와 해건의 일화 덕분에 다른 말로 제자색(帝紫色), 유럽에는 로열 퍼플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티리언 퍼플과는 분명 색감적인 차이가 있지만, 청자색 또한 무척이나 아름답고 신비로우며 또한 티리언 퍼플 못지않게 값비쌌기에 헬레나는 남편의 성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의 아이가 이 먼 땅에 와서도 보라색 방 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만족한 듯싶었다.
청자색의 옷을 휘감고 있는 헬레나는 쉰이 넘는 나이가 무색하게도 기품있고 우아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점심을 먹은 오후, 나른한 기분이 들 때 정원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요즘은 그녀의 자유시간이 넘쳐났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은 이미 장성해 공무를 하거나 공부를 하고 있다.
아마 동일위계 능력주의 계승법상 셋째 해선이 보위에 오를 확률이 높았지만, 그녀는 자식들을 평등하게 사랑했기에 추후 남편 해건의 결정에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넷째 아들은 막둥이니 너무나도 어렸고.
첫째와 둘째 딸은 전부 다 시집을 가 버렸고.
자식들이 전부 떠나간 어머니는 절로 헛헛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녀는 애써 자신이 들고 있는 책에 집중했다.
평소 독서를 즐기는 그녀는 제국 학자들이 쓴 복잡하고 머리 아픈 책들도 가끔 읽었지만 그보다는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를 담은 책을 더 좋아했다.
고려의 소설 문학은 점차 그 저변이 확대되고 있었다.
헬레나는 특히 앙주에서 유행하는 로망스 풍의 소설을 좋아했다.
공주를 구하는 기사 영웅담.
항상 설레는 것이 있단 말이야.
“여기에 계셨구려.”
사실 헬레나의 인생에서도 황자님이 있었다.
책에 온 정신을 집중하던 헬레나는 익숙한 목소리와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중년인을 올려다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주위를 물리고 망측하게 보일법한 애정행각을 했겠지만, 이제는 그 젊을 때 특유의 풋풋하고 설레는 감정이 다소 바래진 느낌이다.
그래도 그녀는 항상 남편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최근에 벌어진 사건들이 아니라면 더욱더 고마워했을 텐데.
“즐거워 보이네요.”
어딘가 약간 뾰루퉁한 말에 해건이 껄껄대며 웃었다.
아내가 이렇게 심통이 난 이유는 뻔했다.
“중전. 짐이 그대에게 약조하기를 평생 그대 이외의 인연은 들이지 않겠다 하였는데 그새 잊으신 게요?”
분명 그랬다.
하지만 헬레나는 여인에 관한 한 사내들의 약속을 믿기 어렵다 생각했었지.
다행스럽게도 해건은 일반적인 사내들의 범주를 뛰어넘은 모양.
“…예.”
“그렇게 토라져 있지 마시오. 우리 나이쯤 되면 미간의 주름에도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한다오.”
헬레나는 남편의 농담 섞인 말에 차츰 얼굴을 풀었다.
최근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사절단이 창양에 왔었다.
온갖 미사여구로 황제를 알현한 그들은 앞으로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자 말하며 선물 보따리를 내밀었지.
문제는 동봉된 선물이 신기하고 호화로운 물건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절단과 같이 온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실로 유럽 최고의 미모를 자랑했다.
게다가 무려 ‘교황’의 딸이다.
비록 출생은 사생아였지만 성직자가 결혼을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냥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소한 문제였다.
이탈리아 왕 체사레 1세의 동복 여동생인 건 변함없기도 하고.
“짐이 기분이 좋은 것은 미인을 후궁으로 들이려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저 교만한 무리들이 이제 스스로 고려에게 그들의 금지옥엽을 바쳐야 할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요.”
오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교도니 악마니 하며 면전에 삿대질을 했던 교황령이 서서히 화해의 손짓을 내밀더니 이제는 숫제 그 사생아 딸을 보내 눈치를 본다?
해건의 기분이 날아갈 듯한 것도 당연했다.
물론 경계해야 했다.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미인을 바치는 일은 역사상 흔한 일이었다지만 미인에 홀린 강대국이 미인의 모국에 혜택을 주는 일도 흔한 일이다.
문제는 고려의 정치체계가 흔하지 않았고, 해건의 애처심도 흔하지 않았다는 것.
헬레나는 남편의 확언을 듣고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여인의 타고난 직감으로, 루크레치아가 가진 특유의 어둡고 음험한 내면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남자를 손에 쥐고 흔들길 원하는 여인이다.’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의 빼어난 미모를 이용할 줄 아는 여인.
아마 남편을 충동질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
헬레나는 콘스탄티노플의 대학살을 겪기도 했고 머나먼 타국으로 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은 덕에 일찍부터 성숙하여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했었지만, 루크레치아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자란 듯싶었다.
남편이 루크레치아를 거두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상, 다음 희생양은 그녀의 아들일 것이다.
첫째와 둘째는 이미 결혼을 했으니, 제외를 한다면….
“해선의 결혼은요?”
“예정대로 진행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듬해에 태자로 책봉될 셋째 아들 해선 또한 이미 혼처가 구해져 있었다.
헬레나는 예전에 그 혼처를 보고도 썩 내켜 하지 않았지만 지금 루크레치아와 비교한다면 그래도 더 낫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래도 서유럽회사와 대이탈리아무역을 생각해보면 교황의 서녀를 저렇게 대접하는 것도 격의에 맞지 않을 텐데요.”
해건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짐이 다 생각이 있소.”
해건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마침 적당한 것이 있었다.
그는 고급스러운 종이에 쓰여진 서신을 헬레나 앞에 내밀었다.
“중전께서 좋아할 소식이오, 모스크바에서 편지가 왔소이다.”
헬레나는 그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요?”
조이, 아니 이제는 소피아라고 불릴 그녀의 사촌 동생이 쓴 편지가 고려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