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혼란 속에서 코무네(Comune, 자치도시)들이 하나의 단일 군주 지배하의 시뇨리아(Signoria, 참주정)가 되면서 중앙집권적인 면모를 띄워가기 시작했었다.
크게는 두 시뇨리아들로.
북서 이탈리아에는 밀라노에 근거지를 둔 스포르차 가(家)가 롬바르디아와 피에몬테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그 동쪽에는 당연하게도 가장 고귀한 공화국 베네치아가 북동이탈리아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 아래, 중부이탈리아에는 그 유명한 피렌체의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를 위시한 메디치가(家)가 토스카나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그 바로 밑에 위치한 교황령은 당연히 알렉산데르 6세가,
교황령 아래에는 해상십자군 이후 아버지 알폰소 5세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페르디난도 1세의 나폴리가 위치해 있었다.
두 시뇨리아와 세 국가(교황령과 나폴리, 베네치아)들은 내부적은 물론 외부적으로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들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자는 단연코 베네치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해상십자군 이후 튀니스에 거점을 만든 베네치아는 북아프리카를 차근차근 입에 넣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하게도 대서양 최대의 세력, 고려와도 계속 우호적으로 지내 교역을 이어가니 적어도 지중해 내에서 자금력과 영향력으로 이들과 견줄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그들의 적수로 꼽힐만한 바르바리 해적은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오스만의 후원을 받는다 하나, 어디까지나 그들은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해적집단이었다.
안 그래도 근래에 해적에 대해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던 고려의 상단을 몇 번 턴 적이 있었던 것.
잉글랜드를 비롯한 북해의 문제를 상대하랴, 지중해 무역을 지키느라 바쁜 고려는 한창 잉글랜드와 전쟁을 하던 와중에도 지브롤터를 오가는 서유럽회사의 상선이 약탈당했다는 사실에 격노하여 몇 번 알제와 오랑, 멜리야 등 북아프리카 서부의 바르바리 해적 거점들을 포격하여 박살을 내 놓은 적이 있었다.
두 해양세력의 공격을 받은 바르바리 해적들은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베네치아의 확장을 저지하지 못했다.
1490년에는 튀니스는 물론이고 수사, 비제르트, 스팍스까지 베네치아의 세력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베네치아의 세력확장은 이탈리아 내부의 경각심을 크게 샀는데, 상당히 근처에 있는 밀라노와 피렌체, 나폴리는 베네치아의 팽창을 저지할 동맹, 즉 나폴리 동맹을 구축했다.
반면 알렉산데르 6세는 오히려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어, 신성 동맹(Holy League) 혹은 베네치아 동맹이라고 불리는 동맹을 만들어내었다.
공교롭게도 다른 강대국들은 이러한 이탈리아의 내부 사정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못했다.
이베리아의 서쪽은 고려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 아라곤 또한 반도 끝에 매달려 있는 그라나다를 정복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프랑스는 네덜란드의 브라반트 대공이자 당대 네덜란드인들로부터 용맹공이란 찬사를 받은 김홍에 의해 전황이 극히 불리하게 돌아가자 진지하게 휴전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신성로마제국 또한 외부적으로는 오스만을 막느라 여력이 없는 상태였으며 내부적으론 황제 프리드리히 3세 자신의 영지인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조차 헝가리 왕 후녀디 마차시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이탈리아의 일은 이탈리아의 구성원들이 해결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었다.
나폴리 동맹과 신성 동맹은 한동안 미묘한 균형을 지키고 있었으나, 이 균형은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균열은 밀라노에서 벌어졌다.
밀라노의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는 밀라노의 공작으로 즉위할 당시 나이가 어린 까닭에 야심많은 숙부 루도비코의 섭정을 허락해야만 했다.
세월이 지나 잔 갈레아초가 성인이 되었지만 루도비코는 조카의 친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약한 잔 갈레아초는 숙부의 감시 아래 반쯤 유폐 생활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밀라노의 전통적인 동맹, 나폴리와의 사이를 다시금 돈독히 하기 위해 그와 페르디난도 1세의 조카인 이사벨라 다라고나가 서로 정략결혼을 하기로 한 것.
이사벨라는 결혼 후, 남편이자 사촌(이런 개족보는 유럽사에서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인 잔 갈레아초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방법이 오직 루도비코를 축출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기나긴 섭정 세월 동안 밀라노는 사실상 루도비코의 손아귀에 떨어진 지 오래.
그들 부부는 정변에 실패하고는 밀라노에서 겨우 탈출해 나폴리로 도망쳐야 했다.
두 번째 균열은 피렌체에서 벌어졌다.
1492년, 인문학과 예술의 후원자이자 탁월한 외교관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망했다.
이탈리아가 아슬아슬하게나마 평화로운 시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로렌초의 역량이 컸다.
비록 그는 딱히 좋은 경영인은 아니었지만, 정치적, 외교적 역량은 대단했기에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나폴리와 양 시뇨리아의 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그러나 이 유능한 중재자가 사망하자, 나폴리와 밀라노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밀라노의 루도비코는 처음 프랑스의 샤를 8세를 충동질하여 이탈리아 내에서 전쟁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지만, 네덜란드와 기나긴 전쟁을 끝내고 휴전에 서명을 한 샤를 8세는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샤를 8세로부터 거절의 답신을 받은 루도비코는, 차라리 다른 생각을 꾸몄다.
이왕 틀어진 나폴리와의 관계는 그가 하야하지 않는 이상 개선될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신성 동맹에 가입하는 것이 어떨까.
루도비코는 조카이자 잔 갈레아초와 사이가 좋지 않은 배다른 동생인 카테리나 스포르차를 회유하여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자, 드 보르자 가문의 체사레 보르자와 정략결혼을 꾀했다.
세기의 결혼 이후 이탈리아 내부의 세력균형은 삽시간에 무너졌다.
밀라노가 교황령과 연결되자, 그 사이에 낀 피렌체는 당장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로렌초 데 메디치 사후 피렌체의 공작이 된 피에로 데 메디치는 아버지의 역량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물.
피렌체를 지키기에는 턱없이 무능했다.
그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체사레 보르자가 군대를 끌고 피렌체를 공격하자 변변한 저항조차도 하지 않고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젊은 체사레의 군사적 역량이 무척 뛰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 과정이 너무나도 비굴하고 굴욕적이었기에 사방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피에로를 위시한 메디치가는 순식간에 피렌체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선조들이 쌓아 올린 명망은 한순간에 몰락해버렸다.
메디치가가 제노바 혹은 아라곤 심지어 고려의 카나리에까지 피난한 이후, 나폴리 또한 위기를 맞았다.
게다가 당대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1세는 당시로서는 몹시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는 노인이었다.
일흔이 넘은 그는 심지어 아버지(알폰소 5세)와 삼촌(갈리시아의 엔리케)이 고려에게 패배하고 은거하는 것까지 본 인물.
공교롭게도 신성 동맹이 나폴리를 노리고 진격해 올 때, 그는 기력이 쇠한 것을 버티지 못하고 침대에서 운명을 다해야 했다.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 알폰소 2세가 황급히 나폴리의 왕위에 오르고 신성 동맹에 저항했으나, 그 저항은 불과 일 년을 넘기지 못했다.
베네치아가 도입한 최신예의 대포를 앞세운 신성 동맹은 뒤떨어진 사거리의 포병대를 개선하지 못한 나폴리군을 대파했고 마침내 1496년 알폰소 2세의 죽음으로 나폴리의 트라스타마라 가문이 멸망했다.
* * *
알렉산데르 6세의 야망이 드디어 현실로 다가왔다.
이듬해, 동맹인 밀라노의 루도비코마저도 야심많은 며느리 카테리나를 이용하여 축출한 그는 아들 체사레에게 거의 완벽한 하나의(베네치아를 제외하면) 이탈리아를 선물해 줄 수 있었다.
위대한 로마의 멸망 이후 다시금 이 반도에 새로운 통합 왕국,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되었다.
왕위에 오른 체사레는 이탈리아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통합 왕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여론을 모으고 있었다.
시뇨리아라는 것을 넘어 이제는 하나의 군주국가로 묶인 것이 영 익숙하지 않았던 여러 코무네들은 체사레가 어느 정도의 자치권과 세금 감면을 보장하자 서서히 그의 치세를 받아들였다.
체사레는 또한 수많은 인물들을 포용했다.
그는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와 무척이나 친밀했고 여러 교감을 하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악덕까지 전부 빼닮지는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반도 내에서 진행되고 있던 인문주의의 흐름을 읽어낸 그는 사회 전반에 감도는 혁신의 기운을 탄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촉진시켰다.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난민들이 신대륙으로 떠났다 하더라도, 애시당초 나폴리를 비롯한 남부 이탈리아 또한 긴 세월 동안 상당한 수의 동로마 난민들을 수용했던 상황.
한동안 주춤했던 르네상스는 젊은 그의 손에서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도처에서 숨죽이고 있던 건축가와 조각가, 발명가와 화가, 작가와 철학자들이 다시금 성군의 자질을 보이는 그의 궁정으로 몰려왔다.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와 위대한 화가 보티첼리, 그리고 아직 젊은 라파엘로까지.
수많은 예술인들은 체사레의 후원 아래 오히려 예전보다도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 * *
재지 넘치는 외교관과 정치가들 또한 그의 신하로 들어왔다.
젊은 체사레는 경험이 일천하다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으며, 그 한계를 유능한 신료들로 메꾸었다.
이들은 외부적으로도 내부적으로도 미약한 왕국을 견고하게 다듬어나가는 벽돌공과 같았다.
체사레는 이들에게 앞으로 이탈리아 왕국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물어보았다.
신성 동맹은 이미 반도를 손에 쥐었고 심지어 지중해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은 이미 강대국들이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신흥 왕국 이탈리아의 팽창을 경계하고 있는 상황.
숨이 턱 막히는 형세와 다름없었다.
체사레는 대전략이 필요했다.
그들은 대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왕의 질문을 받은 신료 중 한 명이 그에게 기탄없이 고했다.
“소신에게 세 가지 방도가 있습니다.”
체사레의 총신, 피렌체 출신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비록 교황이라는 유럽에서 가장 강한 후광을 얻었더라도 경외할 정도의 위업을 달성해 낸 젊은 군주에게 극도의 존칭을 붙였다.
로마 공화국에서 기원한 단어, Maiestas라는.
니콜로에 의해 유럽사 최초로 폐하라는 뜻의 존칭어가 공식 석상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폐하, 우리는 첫째로 고려를 어르고 달래야 합니다. 베네치아에 편중된 그들의 무역로를 유치하여 그 부의 일부분을 우리 왕국도 누릴 수 있게 하소서.”
비록 니콜로는 군사적 식견은 체사레 본인보다 못하더라도 정치적 감각은 엄청나게 뛰어났다.
특히 그는 서쪽의 해양제국 고려에 대해 스스로 ‘고려사 논고’를 편찬할 정도로 통달해 있었다.
그는 세습군주가 다스리는 제국이 그토록 중앙집권적이면서도 공공선을 위한 제도와 질서의 확립, 그리고 그 기반이 되는 평등주의, 능력주의를 비롯한 공화주의의 요소를 챙기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매료된 상태였다.
그에게 있어 좋은 정부란 군주정과 귀족정, 민주정이었고 이 셋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고려는 이상향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니콜로는 이탈리아인으로서 고려의 해양 팽창에 그 누구보다 크게 경각심을 느끼고 있는 자였기도 했다.
백년전쟁 당시 유럽 최고의 강대국 프랑스를 궁지로 몰아넣었을 만큼 강력했던 잉글랜드의 몰락.
그리고 그 이전에도 이베리아반도에서 한창 승천하고 있던 강대국들이 겪은 패배.
대서양은 비유를 하자면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와도 같았다.
성난 괴물이 난동을 부리는.
이탈리아는 아예 헤라클레스의 기둥 바깥으로 나갈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했다.
게다가 가끔씩 그 폭풍이 지중해를 통과해 로마에 상륙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바다 신 포세이돈에게 보낼 제물을 선택해야 했다.
기독교인으로서는 조금 괴상한 비유였지만.
체사레가 니콜로에게 그 자세한 방도를 물으니, 그가 즉답했다.
“아가씨를 보내시지요.”
체사레의 눈이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답지 않게 요동쳤다.
니콜로의 말은 그의 현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체사레의 여동생,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그 미모가 실로 하늘에 닿았다는 명성답게 불과 열여섯의 나이에도 이탈리아 최고의 미녀를 넘어 대륙 최고의 미녀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실로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인.
그 금발의 머리와 아름다운 얼굴, 빼어난 몸매는 동복 오빠 체사레 또한 삿된 생각을 품을 정도였다.
아마 체사레가 이미 기가 드세기로 유명한 미녀 카테리나 스포르차와 결혼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흉측한 꼴이 났을지도.
“…….”
체사레는 이 총명한 신료들의 눈을 언제까지나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좌중은 침묵에 휩싸였다.
과연 체사레 또한 그의 아버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음탕한 성욕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군주의 가장 큰 덕목은 영광입니다. 폐하. 고작 육욕과 같은 사소한 것으로 정직과 고결함, 그리고 앞으로의 위대함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니콜로가 간언하는 말을 듣던 체사레는 결단을 내렸다.
이는 어쩌면 사랑하는 여동생의 미래를 위해서였기도 했다.
체사레의 아버지이자, 루크레치아의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 또한 그 음탕하고 더러운 눈길로 딸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부녀지간, 혹은 남매지간의 근친상간을 저질러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비운의 운명을 살아가느니 차라리 머나먼 이국땅에서 황제의 여인으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긴 주저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마침내 이탈리아 왕국과 고려의 외교적 관계 개선을 위한 사절단에 여동생을 집어넣은 체사레가 어쩐지 다소 개운한 얼굴로 니콜로에게 물었다.
“두 번째 방법은 무엇이오?”
“오스만의 세력은 강성하니, 우리는 이에 맞설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양지로는 신성로마제국은 물론이고 맘루크와의 연계를 통해 우호세력을 확보하고 음지로는 이들에게 혼란을 불러와야 합니다.”
체사레는 이번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후에도,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같은 강대국들은 계속 이탈리아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 자꾸만 트집을 잡아 왔다.
전쟁으로 비화되진 않았지만 관계는 여전히 껄끄러웠다.
게다가 이탈리아 왕국의 왕으로서도 신성로마제국은 국명부터 걸림돌이었으니까.
그러나 니콜로는 그런 사소한 문제는 국가의 이권과 공동의 적을 위해 접어두라고 간언했다.
“이미 신성로마제국은 몰락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저지대와 한자동맹을 위시한 북부 게르만은 개신교로 바뀌고 있으며 황제의 세력에서 벗어난 지 오래, 헝가리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신성로마제국은 앞으로 한 세기를 채 버티지 못하고 그 이름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오스만이다.
체사레는 결국 이번 니콜로의 주장에도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음지의 모략은?”
“현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2세의 목덜미를 챌 족쇄를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젬(Cem)을 말하는 것이오?”
로마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젬은 바예지드 2세의 동생으로 술탄의 자리에 대한 적법한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는 비록 형과의 제위 쟁탈전에서 패배해 구호기사단을 통해 로마로 망명했지만 완전히 무능한 자는 아니었다.
기나긴 망명 생활, 그래도 젬은 형 바예지드 2세가 아버지 메흐메트 2세를 독살하고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는 증거를 확보해냈다.
아무리 술탄의 자리가 상당한 힘의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하더라도 아들이 아버지를 독살하는 것은 이슬람 율법에도 합치되는 바가 절대 아니었다.
“그런 그를 앞세워 오스만 내부에 큰 혼란을 일으킨다면, 오스만의 팽창은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현재 오스만은 국제적 왕따였다.
서양을 위협하는 두 거대 제국 중 다른 하나인 고려는 나름대로 유럽과의 인연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반면, 오스만은 오직 정복만을 우선순위에 놓는 난폭한 대외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니 당연한 소리였다.
심지어 유럽세력뿐만 아니라 같은 이슬람권 나라들에게까지 오스만은 적으로 인식되어지고 있었다.
당장 동쪽의 백양왕조(아크 코윤루)와 남쪽의 맘루크 또한 오스만을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들과 연계하여 내전에 휩싸인 오스만을 사방에서 짓쳐들어가면, 동방의 보석을 박살 낸 원죄를 물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