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40화 (140/653)

키닌

고려는 현재 한 달에 두 번, 보름마다 조보(朝報, 조정의 신문, 관보라고도 부른다)를 발간하고 있었다.

건국 초 창양에는 소식꾼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광장의 중앙에 서서 관의 입장을 군중들에게 설명하는 사람들이었다.

조정은 말재주가 있는 이런 소식꾼들을 고용한 후 일정한 봉급을 주고 인간 신문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했었다.

그 이후 방(榜)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조정은 조선시대와 같이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골목에 방을 붙여 정보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소식꾼과 방은 한동안 공존하며 조정의 입장을 대변하는 매체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 둘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인쇄술이 발전함에 따라 조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

두 매체의 한계는 명확했다.

방은 비바람은 물론 일부 사람들에 의해 훼손될 수 있었고 소식꾼은 조정의 입장을 왜곡할 수 있었다.

또한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는 것은 언제나 그러하듯 조금 위험한 일이다.

흉계를 꾸미는 자가 선동을 해서 민란을 일으킬 수 있었으며, 유행성 질병들이 모인 군중 사이에서 퍼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조보는 그럴 여지가 상당히 적었을뿐더러,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훨씬 적었다.

조보에 기록된 대부분의 내용은 고려글로 쓰였으며 가끔 동음이의어나 헷갈릴 만한 단어에 대해서는 한자, 혹은 라틴어(놀랍게도)로도 병기했다.

라틴어는 화주의 신민들을 배려하기 위함이었으나, 그때 조보의 초안을 받아든 상민은 솔직히 조금 웃어야만 했다.

‘정작 화주의 농민들 중 라틴어를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뭐, 어찌 되었든 라틴어 베이스의 귀화인들을 배려한다는 뉘앙스가 있는 것으로 만족하자.

라틴어를 안다 해도 일부 단어에 대한 병기일 뿐이니 조보를 제대로 읽기 위해선 고려글을 배워야겠지.

조보는 조선의 그것과는 달리 관직, 직업과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많은 백성들이 돌아가며 읽을 수 있는 조정의 매체였다.

읽기 위해선 오직 고려글만 알면 된다.

당금 고려는 제 이름은 물론 기본적인 글은 거의 대부분의 신민들이 읽고 쓸 줄 알았다.

놀라운 혁신이다.

상민이 괜히 이도를 불러 자꾸만 술을 권하는 것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이곳의 글은 그의 손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조보를 얻을 수 있는 가격 또한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조보 자체가 내무부에서 통합 발간하기 때문에 대량생산이 가능했으며, 금속활자로 인해 그 대량생산의 가격 또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컸다.

중상정책으로 인해 민간에서의 종이 생산량 또한 과거와는 달리 안정적이었다.

비록 우드칩과 새로운 펄프 종이가 나오기 전까지 종이 가격은 계속 부담스럽겠지만 어떤 정책은 비싼 예산을 감수하고서라도 해야 하는 법.

당연스럽게도 조보 정책의 제일 목적은 프로파간다였다.

조정은 제 할 일을 잘하고 있으니, 우리들의 노고를 알아달라는.

또한 조정이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에 대한 설득과 계몽도 있었고.

그 밖엔 교육적 목적이 있었다.

유행하는 역병과 증상들을 알리고 조심하라는 당부를 쓰기도 했고 냉해와 수해에 대한 예방법도 있었다.

새로운 농법과 목축법, 어업에 대한 논고가 실리기도 했다.

세 번째는 사회 통합적 목적.

외적으로는 주로 ‘미개한’ 유럽의 소식을 알려줌으로써 고려인으로서 이 풍요로운 고려의 땅에 사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에 대한 선전을 하는 것도 있었다.

동시대의 유럽인들은 이제 엄한 사람을 마녀로 몰아가며 꼬챙이에 꿰어댈 것이니까. 이를 보는 고려인들이 얼마나 그들을 한심하게 생각할지.

내적으로는 조정과 내방의 소식을 외방의 사람들에게 전달하여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고, 반대로 외방의 문제와 골칫거리를 내방 사람들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기타 소소한 소식들도 실어 나르는 면도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운동경기 소식(주로 축구)에 대한 칸도 있었고, 미풍양속을 증진시킬 만한 미담과 획기적인 발명품 등에 대한 것도 실렸다.

이는 꽤 주요했다.

물론 조보가 당장 지방에 즉각적으로 뿌려지는 것은 아니다.

엄청난 공간적 제약에 따라, 그들은 몇 달에 한 번씩 보급품을 수송하는 정기선을 통해서 그간 밀린 조보를 받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지금은 충분했다.

외방 사람들은 중앙 조정의 이야기를 가지고 삼삼오오 떠들며 고려의 정치를 칭송하거나 비판하며 동질감 혹은 정치에 참여한다는 소속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고(실제로 그들의 지방에서 선출된 중서성 의원은 중앙에 가 있으니까), 반대로 내방 사람들은 외방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들에 대한 지원을 당연시 여기게 되었지.

최근 들어 남려대륙 북부 정착지, 전주나 파남의 역병 재해에 대해 기부금이 크게 모였던 것도 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조보에는 음울함이 가시지 않았다.

이것이 어느 정도의 검열을 거친 결과물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대체 얼마나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지식인들도, 신민들도 고려를 휘감고 있는 학질의 공포를 모두 알고 있었다.

한 발자국 물러나 있는 창양과 경기 일대에서도 탄식이 터져 나오고 있었으니.

하지만, 영웅은 그러한 난세에서 등장하는 법.

이번의 영웅은 장군도, 학자도, 장인도 아닌 의원이었다.

어길은 마침내 키나나무를 발견해냈다.

사실 실제적인 탐사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키나나무 자체는 옛 타완틴수유 영역과 태동산맥 북부 쪽에 상당히 넓게 자생하고 있는 나무였기에.

오히려 임상 시험이 길었지.

꽤 명확한 근거로 태동산맥 동쪽의 열대우림에서 탐사를 진행하던 어길은 현지 부족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약재로 쓰는 나무들을 파악하고 기록한 후 숲속에서 껍질을 채취해 의무부에 보냈다.

의무부는 재빨리 병원의 환자들에게 시험을 실시했고.

키나나무 껍질 추출물을 시험한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시험 대상인 환자들은 대부분 학질로 이미 사경을 헤매던 자들이었다.

임상 시험이 실패해도 어차피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잡고자 시험에 자원한 자들은 미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쓰디쓴 키나나무 껍질 약물을 들이킨 이후 놀라울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임자, 세상이… 세상이 달리 보인다우.”

어마어마한 고열로 죽어가던 환자가 약물을 복용한 다음 날, 다소 또렷해진 눈동자와 더불어 메마른 입술로 말을 내뱉었을 때 환자의 아내는 남편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절망의 눈물이 아니라 희망의 눈물이었다.

누워있던 다른 환자들도 비슷했다.

머리가 그야말로 익어버릴 만큼 불타고 있던 체온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오한과 기침 그리고 발작을 보이던 환자들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둘씩 정신을 차린 환자들은 가족들과 시답잖은 농담도 나눌 정도로 호전되기 시작했다.

무엇이 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기적?

아니. 이것은 기적이 아니다.

우리가 일군 문명의 승리였다.

키나나무 껍질을 이용한 약재의 공식적인 이름인 키닌(퀴닌으로도 불렸다)은 인두와 우두 이후, 가히 제국 역사상 최고의 발견이라 지칭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거리에 울려 퍼지던 탄식은 탄성으로 바뀌었다.

북방의 도시들을 휘감은 죽음의 기운은 조금씩 걷혀져만 갔다.

울음과 신음 소리는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야생에서 자생하는 나무였기에 키닌의 가격은 ‘방울당’ 금화로 수원을 호가했으니 전면적인 보급은 아직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답을 찾을 것이다.

농무부의 학자들은 의무부가 거의 단독으로 이루어낸 성과에 마냥 부러움을 느끼고 있다가, 그들이 할 일을 마침내 찾아내었다.

어떻게 해서든 키나나무를 경제적으로 재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그들 앞에 놓였다.

제약은 아직 많다.

자생 요구조건이 열대 기후라는 점.

잘라낸 나무껍질이 다시 잘 자라야 한다는 점.

베일에 싸인 토지의 비옥도와 적절한 강수량의 요구조건 등.

물론 예전만큼 암담하진 않았다.

[의무부가 학질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다!]

어길은 보름마다 발간되는 조보의 일면에 장식되는 위업을 누렸다.

실사적인 화풍으로 그려진 그의 초상화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전국에 뿌려졌다.

황실에선 그에게 엄청난 포상금을 하사했고, 다음 연도의 주화에는 그의 얼굴이 새겨질 예정이었다.

‘아마도 사후 시호까지 받을 수 있겠지.’

잘된 일이다.

물론 어길의 공 이상으로 상민의 공도 클 것이다.

치료제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명칭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고 나무껍질이라는 아주 한정적인 부위까지 알려주었으니.

분명히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면 고려인들은 키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어길의 공은 이 시간을 극도로 단축시켜 주어 그 기간 동안 발생하는 부수적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준 업적을 가지고 있는 셈이지.

하지만 상민은 열대우림을 직접 헤치고 다녔던 그의 공로 또한 몹시 크다 생각했기에 자신의 공에 대해선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것이 나라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는 실제적인 주인의 마음가짐이노라.

훌륭한 의원임과 동시에 탁월한 생존전문가, 배어길이라는 자는 근래에 청해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남은 여생을 떵떵거릴 수 있을 정도의 부귀를 손에 쥐게 되었지만 여전히 모험심이 가득했다.

편안한 침대에 눕는 대신 그는 의무부의 다음 과제를 하기 위해 다시금 오지로 떠날 여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발견한 약재가 수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으니,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겠지.

상민은 그 범인(凡人)의 등을 보며 실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시대의 일반인들, 그러나 실로 위대한 자들.

‘그대의 공 또한 역사가, 그리고 내가 영원토록 기억할 것이오.’

상민은 보고 있던 조보를 접었다.

이제 도착하려나.

상민이 타고 있는 작은 쾌속정(요트)은 현재 청해 북쪽을 향해 항해하고 있었다.

이곳을 오갈 땐 가까워서 이런 작은 배를 타고 다니곤 했다.

청해에서 북쪽으로 대략 10km 떨어진 곳에는 녹유도(錄愈島, Ilhas do Arvoredo)라 불리는 섬이 하나 있었다.

행정구역상 청해에 속한 이곳에는 꽤나 큰 병원이 지어져 있었다.

물론 청해 본섬을 포함한 고려의 다른 지방에도 병원이 많이 있었지만, 이곳이 다른 곳과 차별화된 점은 멀리 떨어진 외지에 병원 하나만 달랑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시설은 마치 자신 혼자 18~19세기쯤에서 떨어져 나온 것마냥 몹시 훌륭하게 지어져 있었다.

이곳은 일반적인 병원이 아닌 질병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는 곳이기도 했다.

의무부가 우두와 두창을 연구하는 장소도 이곳이었으며, 기타 다른 유행성 질병들, 흉악한 역병들에 대한 연구를 하는 곳도 이곳이었다.

학질에 대한 임상 시험을 실시한 곳도 이곳이었고.

몹시 위험한 구역이라는 소리지.

실제로 의무부의 관리들과 의원들도 이곳에서 병을 연구하다 많이들 죽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다. 바로 상민이 그들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었다.

진보는 희생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개념.

그들은 국가를 위해 전사한 최고의 군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현충원에 매장되었다.

근무지인 이 섬에도 거대한 충혼탑이 세워져 있었다.

상민은 도착한 후,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쾌속정의 선장과 수행원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혼자 충혼탑에 가서 고개를 숙였다.

참배를 마치고 고개를 드니 충혼탑 뒤로 뻗은 길이 한눈에 보였다.

병원으로 가는 길을 천천히 걸으며 상민은 상념에 빠졌다.

거대한 하나의 질병을 정복한 이후에도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병은 하나가 아니며, 앞으로도 인류 역사와 함께 공존할 것이니까.

공존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지긋지긋한 놈이 떠올랐다.

지금 방문하고 있는 환자의 병명이기도 했고.

고려 역사와 함께 시작한 남려대륙 토착 질병, 매독이라는 병은 변화하고 있었다.

초창기의 매독은 몹시 사납고 난폭한 질병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강한 질병이었기에, 걸린 사람을 순식간에 죽여버렸다.

상민은 그 옛날 노영희의 자제 노성철이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영 좋지 못한 곳을 봐야만 했었다.

‘으….’

상당히 흉측한 꼴을 하고 있었지.

하지만 그가 걸린 매독과 백오십여 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매독은 약간 성질이 달랐다.

매독 또한 숙주와 타협하는 방법을 배운 것.

증상은 약화되었지만, 덕분에 전파는 더욱 광범위해졌다.

단번에 사람을 죽이는 대신 수년에 걸쳐 사람이 천천히 아파가는 것이다.

의학에 무지한 시절, 감염병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는 곳에서 적당히 운신이 가능할 정도로 아픈 사람은 주변에 병을 퍼트리는 숙주가 되어버린다.

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끈질긴 병은 자연치유가 쉽게 되지 않았다.

자세한 증상은 수년 뒤에 알 수 있다.

신체는 병들고, 외모는 추악해진다.

그것뿐이라면 어쩌면 견딜 수 있을지도.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 보이는 정신 이상, 치매 등의 질환은 환자의 마지막 존엄성까지 빼앗아버린다.

말 그대로 이 끔찍한 질병을 앓고 있다면 가슴 속에 시한폭탄을 달고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당장 내일 터질지도 모르고, 십 년 뒤 혹은 이십 년 뒤에 터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질병을 앓는 자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수치심과 자괴감을 안고 점점 미쳐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절망에 빠지는 거지.

고려에는 매독 환자가 많았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많은 세월 동안 축적한 증상과 발전하고 있는 연구방법 및 생물학과 병리학 덕분에 원인과 예방방법은 꽤나 자세하게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병에 걸린 환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방책도 없었다.

그런데.

‘과연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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