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어기릴스
의무부의 관리, 배어길(裵禦拮)은 남려대륙 최북단이라 할 수 있는 전주(電州, Maracaibo) 출생이다.
고려인과 칼리나인 혼혈인 그는 어린 시절, 마을에 유행했던 지독한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땐 병명을 잘 몰랐으나, 나중에 보니 황열병이라 했었지.
어린 시절이라 그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던 기억 자체는 또렷하지 않지만, 질병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이 질병 자체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최근.
면역력을 가진 사람이 적었던 도시는 말 그대로 거의 박살이 났다.
거의 총인구의 사분의 일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의 아버지 또한 이때 돌아가셨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시신들.
인세의 지옥이 이러할까.
제아무리 고려가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 인간은 감히 자연에 항거하지 못했다.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들을 개별로 화장하는 것조차 당시에는 몹시 힘들어 한곳에 모아 불태우고 공동으로 장례를 치러야 했을 정도였다.
첫 번째 재앙으로 인한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두 번째 재앙이 전주에 찾아왔다.
황열병 생존자들은 이번에 찾아온 학질에 또다시 무기력하게 굴복했다.
어길은 이번에는 어머니까지 학질에 잃어버려야만 했다.
학질은 황열과는 또 달랐다.
황열병은 앓고 나면 평생 면역이 된다.
따라서 무시무시한 병이었긴 했으나,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반면 학질은 황열처럼 끔찍한 고통을 선사하면서도 끈질김의 정도가 달랐다.
한 번 걸린 사람도 언제든지 다시 걸릴 수 있었다.
두 번째 죽음으로 전주가 또다시 수라장이 되었을 적, 살아남은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말 그대로 학을 떼며 다른 곳으로 떠났다.
혼자 남은 어길은 쓸쓸하게 버려지는 고향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어길은 그래도 장성할 때까진 고향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는 조금 독특했다.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딱히 건강한 분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평소 자주 심각할 정도의 빈혈 증상을 보이셨고, 어머니는 전부터 폐병을 가지고 있으셨으니.
그러나 어길은 두 거대한 역병에서 살아남을 정도로 건강했다.
대체 왜일까.
게다가 크게 앓았던 황열과는 달리 학질은 그의 몸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이 끙끙거리며 앓을 때, 그는 이리저리 분주하게 가족과 친지들, 친우들을 살리기 위해 뛰어다닐 정도로 건강했다.
물을 뜨고, 그들의 머리 위에 올려줄 수건을 빨기 위해 물가로 향할 때에도 거리에 자욱하게 깔린 죽음의 기운은 그를 마치 없는 사람처럼 스쳐 지나가기만 했을 뿐이다.
‘어쩌면 나는 학질과 싸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그가 학질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커 가면서도 그의 결의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건강이라는 가치를 위해 매일 노력한 어길은 예전의 앙상한 몸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굳건한 신체를 자랑하게 되었다.
의학이라는 학문 또한 그에게는 마치 몸에 딱 맞는 옷처럼 몹시 알맞았다.
다행스럽게 머리 또한 타고났는지, 어길은 중앙의 지원금(말은 생존 정착민에 대한 보상금이지만 전주에서 계속 살아가며 정착지를 유지해달라는 목적의 돈이었다)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의원이 되었을 때, 어길은 처음으로 내면에 그토록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던 결의가 심각하게 흔들리는 것을 깨달았다.
‘변방의 의원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해.’
의원이 된 후에도 하는 일은 예전 죽어가는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했던 일과 같았다.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의 머리 위에 젖은 수건을 올려주는 일.
이것이 과연 자신의 운명인가?
학질은 결코 정복되지 못하는 병인가?
아니다.
그는 의원이 되기 위해 공부한 서적들에서 아주 유명한 구절을 몇 번이고 읽어내었다.
이 글들은 어느 누군가에겐 지루한 역사서의 구절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자신에게는 글귀 하나하나가 반짝이는 보석과도 같았다.
― 태조께서는 친히 천덕태성황후(天德太聖皇后, 왕예)와 함께 인두를 실시하셨으니….
어느 날, 어길은 짐을 꾸렸다.
그는 전주를 떠날 생각이었다.
다른 이들처럼 고향을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 앞에 다시.
패배자가 아닌 정복자로서.
어길은 창양으로 향했다.
* * *
시중이 의무부와 농무부에 지시를 내린 후의 일.
의무상서의 얼굴은 말 그대로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농무상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하께서 정녕 우리를 모두 다 죽이실 생각이신가?”
과도한 업무에 대한 엄살이 반, 문자 그대로 죽을 위험성이 있다는 의미가 반.
의무상서 노상욱은 이제 손주를 볼 나이었지만 체면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집무실에서 숫제 울먹이기까지 했다.
“그 키나나무인지 뭔지 하는 나무를 남려대륙 전역을 뒤져가며 찾아야 한다고? 게다가 찾는 김에 남려대륙에 자생하는 모든 약재의 효능을 전부 다 정리하라고?”
시중이 말한 그 키나나무가 학질에 과연 특효약일까?
학질에 대한 수많은 민간요법들을 정리하며 단 한 번도 효과적인 치료법을 발견하지 못했던 관리들은 그동안의 경험 탓인지 시중의 말에도 일단 의심부터 들었다.
업무량도 업무량이지만, 직접 나무를 찾아다녀야 하는 관리와 의원들은 실제로 그 울창한 숲과 우림의 기후에서 죽을 수 있었다.
질병은 무적이다. 대자연은 신이고.
이 팽창욕 넘치는 고려가 어느 순간부터 동쪽 영토는 남회귀선 북방 위로 잘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다.
오히려 타완틴수유를 정벌하며 얻은 산악의 땅들은 높고 험하며 척박할지언정 감자를 심어가며 개간을 할 수 있었으며, 모기류 질병의 걱정에도 더 안전했다.
그러니까 중앙 조정에서도 태동산맥에 더 신경을 쓰고 있지.
이미 내려진 명령이고, 결국은 하긴 해야 할 텐데.
상욱은 절망했다.
안 그래도 의무부는 다른 곳에 비해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의무부는 과거로 인원을 확충하는 다른 일반적인 관청과는 달리 원칙에 따라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의원들을 특시로 뽑고 있었다.
비전문가가 전문가의 일을 할 수는 없는 까닭.
병리학과 의학에 대해 일자무식인 자가 의무부를 관할한다면 어떠한 꼴이 일어날지 익히 알고 있는 상민은 예전부터 이러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덕분에 관리들의 기본 자질은 몹시 좋았으나, 아무래도 의원들이라는 제한에 더불어 시험까지 있다 보니 전반적인 인원 확충은 조금 힘들었다.
절규하는 상관을 보던 의무시랑이 말했다.
“일단 시중께서는 두 번째 과업에 대해서는 아주 길게 기한을 잡아주셨잖습니까.”
별로 위안이 되진 않았다.
맨땅에서 저 괴상한 이름의 나무를 찾는 것은 어쩌면 후자의 업무와 비슷한 난이도일지 몰랐다.
“일단, 황열에 한 번 걸려 면역인 관리들을 우선으로 하여 인원을 추려보았습니다만….”
시랑이 건네는 문서를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상욱이 중얼거렸다.
“황열은 그렇다 치고, 그 극성스러운 학질이 몸에서 떠나질 않을 텐데.”
상욱은 의원답게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죽은 부하들의 일감이 자신에게 오는 것은 더욱더 싫은 일이었고.
“이건 뭔가?”
시랑이 뒷머리를 긁었다.
“특이한 자입니다. 이번 일에 대해 소문을 들었는지 직접 자신이 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자원?”
상욱은 당황했다.
대체로 의무부의 관리들은 열정과 자긍심, 그리고 의무감에 투철한 사람이 많긴 했다.
그러나 아무리 의원들이라고 해도 열대우림에 들어가 아직 문명화되지 않은 투피족 일부와 싸워가며 약재를 찾는 것을 즐거워할 리는 없었다.
“배어길이라. 이름이 독특하군.”
호기심이 든 상욱은 그의 이력을 면밀하게 살폈다.
“게다가 이름만큼이나 이력도 독특해. 의무부에 붙은 이후 타완틴수유 정벌 때 근위대 군의관으로 종군했다니.”
“우스갯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군의관임에도 다른 근위군과 수박을 해서 패배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합니다.”
시랑의 말을 들은 상욱이 실소했다.
근위군은 일당백의 전사들이라 하던데.
시랑의 말엔 다소 과장이 섞인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투피족 잔당들과 싸우는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나.”
상욱은 직접 어길을 불러 대담을 나누었다.
이자는 의원답지 않게 근육이 가득했으며 몹시 덩치가 커 마치 곰과 같았다.
그러나 순박하게 웃는 눈에서 책임감과 심성을 본 상욱은 그에게 이번 일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학질에 면역인 것 같다고?”
“예. 그렇습니다.”
“호오….”
학질 자체를 앓지 않는 사람이라니 실로 독특한 사람이다.
게다가 황열병을 이미 앓아 면역이고.
몸은 과연 묘사대로 강인한 전사와도 같았고.
눈동자에는 굳은 신념이 가득했다.
상욱은 악수를 청했다.
이 인재가 무탈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믿겠네. 우리를 모두 구원해주게.”
상욱의 말은 의무부의 관리들을 살려달라는 말이었지만, 어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의 비밀은 조금씩 풀려가는 법. 태조께서 두창을 정복하셨듯, 나 또한 그분의 신민으로서 학질을 정복하리라!’
* * *
사실 어길은 어디서 키나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키나, 혹은 퀴나.
산맥의 언어, 루나 시미로는 나무껍질을 말한다.
‘분명히 기억 속에 해열제로 쓰이는 나무껍질들이 몇 개 있었다.’
군의관으로 종군할 적, 태동산맥 북쪽에 있던 조그마한 부족들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열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게 자체적으로 나무껍질들을 우려내 약을 만들어 먹이기도 했었지.
그때 퀴나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물론 그 증상들은 명백히 학질이 아니었으나, 어쩌면 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키나나무라는 말 자체가 조금 말이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껍질나무라니.
하지만 어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수색 범위를 한정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사어화되고 있는 루나 시미를 쓰는 자들이 사는 곳.
그러니 태동산맥 부근을 찾아보면 될 수도 있다는 뜻.
어길은 특명을 받은 뒤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타완틴수유 정벌군이 북진하며 가설한 도로는 이미 조금씩 풍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가도를 걸었던 그 여정은 실로 안온한 축에 속했다.
아직 남려대륙에는 전인미답의 험지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태수 부근의 열대우림(Amazon Rainforest)만큼은 아니더라도 태동산맥 동쪽의 열대우림(Tropical Andes) 또한 울창한 험지였다.
열대우림에 들어선 후, 본인이 가진 의학적, 생물학적 지식으로 하나씩 자료를 수집해 나가던 그는 가끔 적대적인 원주민(주로 옛 동예에 시달렸던 투피족으로 보이는)과 마주해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원주민들이 아니었다.
어길 자신도 전주 사람이라 열대기후가 얼마나 잔혹한지 알고 있었지만, 전주는 엄연히 바다와 통해 있는 해변 개척지.
열대우림 내부는 차원이 다르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 대신, 끝도 없는 나무가 보이는 곳.
개미와 수많은 곤충들이 호시탐탐 자신을 죽이기 위해 도사리는 곳.
사람을 칭칭 감아 죽인다는 거대한 뱀과 살을 뜯어 먹는 피라나류 물고기들이 서식하는 곳.
수많은 모험심 넘치는 탐험가들의 피를 빨아먹은 이 열대우림은 아직 밝혀져 있는 곳도 무척 적었다.
그는 생존하기 위해 온갖 것을 집어 먹어야만 했다.
가끔은 적당한 수분을 구할 수 없어, 자신의 오줌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어길은 알고 있었다.
살아남는 것이 승리였고 살아남는 것만이 가치였다.
그는 적응해야만 했고, 결국 적응해 나갔다.
어길은 구운 뱀을 집어 들었다.
본래라면 그 뱀이 자신을 사냥하는 입장이겠지만.
“이제는 내 한 끼 식사일 뿐이지.”
어길이 한 입 크게 뱀 고기를 뜯어 먹었다.
그가 기대고 있는 나무가 그러한 그를 바라보며 얇은 분홍빛 꽃술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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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어기릴스 : 배어길의 학질 정복기를 뜻합니다.
누군가의 이름과 비슷하다면 착각입니다.
어길은 눈치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겸상 적혈구 체질(이형접합)을 가지고 있습니다.
헤모글로빈 변형 유전자를 타고나게 되면 말라리아에 몹시 강합니다.
물론 두 쌍이 전부 다 변이 유전자가 있다면 극심한 빈혈에 시달리다 단명하죠.
그러나 한 쌍만 타고나게 된다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말라리아에는 면역입니다.
이 유전자는 말라리아가 극심했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이긴 합니다만, 말라리아에 안전하지 않았던 다른 민족들에게서도 관찰된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