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열치열
조용한 섬, 녹유도의 병원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물론 미리 언질을 주긴 했지만 제국의 시중이 직접 이곳을 찾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는 비상사태가 선포된 지 오래였다.
도열해 있는 의원들을 바라보던 상민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부랴부랴 이리저리 쓸고 닦았겠지.
자신의 군 생활 경험으로 유추해 볼 때 몹시 뻔했다.
물론 이들이 일개 사병은 아니었지만, 자신도 일개 장군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리가 사람을 바뀌게 만드는 걸까.
아래에 위치해 있던 시절과는 달리,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게 되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이곳도 허술. 저곳도 허술.’
위생이 아주 엄격한 21세기에서 살아온 상민이니 눈이 높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이걸 시대상에 따른 역량 부족이라 봐야 할까, 아니면 그냥 할 수 있는데 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할까.
그래도 눈앞에서 딱히 억지 트집을 잡진 않은 상민은 무난히 시설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고생이 많소.”
근무자들의 표정에 감동이 떠올랐다.
상민이 금일봉을 하사하자 소리 없는 환호성이 퍼졌다.
물론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선 미리 사과하는 뉘앙스의 금일봉이겠지만.
‘그래, 나 같은 고위급 인사가 가끔은 이런 설비를 가 줘야 발전이 있겠지.’
초심을 잃어버린 상민은 과거의 자신이라면 치를 떨 생각, 즉 자신의 순방 이후 감사관을 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도열했던 의원들과 관리들을 격려한 상민은 병동으로 향했다.
그 전에 알맞은 복장으로 바꿔야 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얇은 고무장갑과 흰 복면을 쓰고 있었다.
고무장갑은 거의 예전 시대의 설거지용 고무장갑보다도 굵었고, 흰 복면은 KF 인증을 받은 마스크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어디까지나 현시대에선 최선이다.
자신은 입었던 옷만 태우고, 꼼꼼하게 몸을 씻으면 되니 필요가 없긴 하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 프로토콜을 세우고 엄격하게 준수하라 명령했던 자신이 그것을 앞장서서 위반하는 것도 보기에 좋진 않았기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옆에서 알려주는 절차에 따랐다.
성큼성큼 걷는 상민의 뒤로 의원들과 관리들이 뒤따랐다.
마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다.
새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아침마다 환자들에게 순회 진료를 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맨 앞에 보통 서열이 높고 권력이 강한 의사가 걸어가고 힘을 숨긴 주인공이 인턴 혹은 레지던트로 뒤따르는 그런 광경.
권력을 조금밖에 누리지 못한 자들이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겠지.
하지만 그에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줄줄이 소시지마냥 의료진들을 달고 다닌 상민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윽고 그의 앞에 작은 체구의 의사가 후다닥 다가왔다.
미리 병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
“당하, 부르셨사옵니까.”
“그래요. 그대가 성녀의 담당의라 들었소만.”
이 여의원은 근래에 실시되고 있는 여성 의원 확충 제도에 의해 뽑힌 자였는데, 실력이 상당히 좋았다.
질병이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일.
고려가 조선에 비해 아무리 성에 대해 관대한 풍습을 가지고 있다 하나 아무리 그래도 여성들의 병 혹은 부인병에 대해서는 남자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되긴 했다.
속으로 끙끙 앓으며 죽어가는 부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잔은 몹시 중요한 인물이라 따로 섬세한 관리를 받고 있었다.
의사는 그녀의 병실 앞에 서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천성적인 강골(强骨)이라 선천적인 면역력이 강합니다.”
그건 알고 있다.
저 사람은 수 미터 높이의 성벽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했고 화살이 어깨 부근에 박혀도 문제없이 움직이던 사람이었으니까.
“아직까진 괜찮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결국 병마와 싸우는 것은 환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는….”
“…….”
잔은 어떤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한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모로 누워 창밖을 보는 것이 일과의 전부.
평상시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의 변화였다.
자신은 버려졌다는 말을 거듭해서 말할 뿐.
의지력이 과다해 일견 광신적으로 느껴졌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하지만 의지력 자체가 사라져 절망에 빠진 사람을 보는 것 또한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한동안 유리창 너머로 병실 안을 바라보던 상민이 입을 열었다.
담당의를 보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 치료법은 어떠했는가?”
“…….”
등 뒤에 약간은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이윽고 서열이 가장 높은 총책임의원이 입을 열었다.
“상당히 위험한 치료법이지만… 예, 효과가 있었습니다.”
상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설명해 보시오.”
책임의원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보고서를 받아들곤 목을 몇 번 가다듬더니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논리만큼이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약 2할에 달하는 환자들이 치료용으로 쓰기 위해 유발한 학질로 인해 곧바로 사망했습니다. 또한 치료법을 적용한 환자들 중 거의 절반이 어떠한 외부 유입 없이 다시금 자체적으로 재발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따라서 통계상으로 실제적인 효과를 누린 환자는 오직 사 할 정도에 불과합니다.”
“사 할이라.”
상민은 다소 무감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치라 평가받는 병에 대한 사 할의 희망이라.’
물론 의사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러시안 룰렛 같은 치료법을 권장하기란 어려운 법.
그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기엔 그리 나쁘진 않아 보였다.
이독제독이라.
동양의학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치료 원리 중 꽤나 익숙한 것, 즉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원리는 분명히 후대의 의료진들이 보면 기겁을 할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었다.
대부분은 유사의학 수준에 불과하지만 가끔은 들어맞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
물론 이 같은 동종요법은 대부분 그릇된 것이니 성급한 적용은 상당히 위험스러운 행동이었으나 이번 한 번의 경우에 한해서는 꽤나 효과적이었다.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은 환자들의 사례를 정리하고 있던 동예의 의원에 의해 알려졌다.
옛 동예의 땅, 즉 태원이나 온주에선 매독이 고려의 땅보다 훨씬 심했다.
의료기술도 뒤떨어졌을뿐더러 방역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았던 탓에 매독은 수많은 사람들과 공존하고 있었다.
원주민들과의 무분별하고 비도덕, 비위생적 관계도 많았다.
오죽했으면 고려의 공창가에서도 동예 사람들을 아예 받지 않았을까.
그런 동예의 땅에 학질이 도달했다.
열대습윤기후니 역병이 날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더더욱 당연한 일이었고.
학질에서 살아남은(항상 그렇듯 어떤 병이라도 살아남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던 의원들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매독 환자가 학질에 걸리고 학질에서 생존했을 때, 일부 환자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매독 증상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것.
놀라운 발견이었다.
물론 학질은 매독보다도 더욱 무서운 병이었으니, 작은 병을 제거하기 위해 큰 병을 앓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최근까진.
키닌의 등장으로 학질은 그 공포스러운 면모가 상당히 가셨다.
항거불능의 적은 신약 앞에서 싸워볼 만한 적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니 어쩌면, 매독에도 이이제이의 계책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 인공열 치료법(Pyrotherapy).
매독 환자에게 의도적으로 학질을 앓게 해, 고열로 매독균을 죽이고 그 후 학질을 치료한다는 개념이었다.
“미친 건가?”
맨 처음 가설을 제시한 의사에게 보인 학계의 반응은 처음엔 딱 저랬다.
매독으로 고통받던 한 부자 부부가 그 의사에게 자신의 몸으로 실험을 해 달라고 간청했고, 의사는 그 부부의 몸으로 첫 실험을 했다.
학질을 통해 부부의 체온을 인위적으로 상승시킨 의사는 열이 통제를 벗어나기 전에 키닌을 복용시켜 열을 떨어뜨렸다.
결과는 반은 성공 반은 실패라 칭할 수 있겠지.
아내는 살아남았지만, 남편은 죽었다.
40도가 넘는 고열을 유지시키는 것도 힘들 뿐만 아니라, 신체가 원래부터 강건하지 않았다면 고열을 버티지도 못했다.
그 후, 그는 괴상한 의술을 선보였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사형까지 선고받을 뻔했지만 상민의 흥미에 의해 어찌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어떤 환자가 사 할밖에 되지 않는 치료법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매독은 내버려 두면 정말 낮은 확률로 자연치유가 될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더 오래 살 수도 있었다.
정신이 서서히 미쳐버려도 죽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상민은 저 안의 사람이 자신의 제의를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선택은 환자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
잔은 치욕스러운 죽음을 택하느니 도박을 원할 것이 틀림없었다.
“모두 수고들 하셨소. 일들 보시구려.”
상민은 담당의를 제외한 주변을 물리고는 병실 문을 열었다.
발걸음이 절로 무거웠다.
* * *
― 끼익
“오랜만이구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잔은 침대에 모로 누워 있었다.
윤곽만이 보일 뿐이다.
얼굴까지 반쯤 가린 그녀는 꽤나 친숙한 프랑스어를 알아듣긴 했는지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러나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상민은 의자를 끌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굳이 창가로 가 그녀의 시선을 가리지는 말자.
“몸은 좀 어떻소?”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무례라면 무례인데. 기분이 딱히 상하진 않았다.
고개를 돌린 얼굴을 보니 예전보다 턱선이 날카롭다.
살이 빠진 걸까.
아니 애초에 이 여자는 체지방과는 거리가 약간 멀었던 자였다.
저건 근손실이 분명했다.
‘중증이군.’
기사와 무사란 비슷한 부류.
상민 또한 시간이 몹시 부족한 와중에도 아침과 저녁때 매일 한 시간이 넘도록 육체적인 수련을 해왔다.
따라서 그녀가 근손실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침상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절망감이 그녀를 휘감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계기였다.
‘씁.’
그녀의 이용가치는 솔직히 로마로 보내는 것으로 다했다 생각한다.
평상시의 성품을 이용해 교황청과 기사단, 그리고 기독교 세계에 대해 불화를 조장할 불씨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기대보다도 훨씬 더 큰 결과물을 가져왔지.
그래서 이미 잔의 가치는 이미 끝났을 텐데.
상민은 자신의 가슴 속에서 맴도는 약간의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끼곤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교황에게 쓴 편지.
대체 어느 정도의 감정이 실려 있었는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누벨 오를레앙 소식은 들었소?”
상민은 팔짱을 끼며 소식을 늘어놓았다.
“아국의 과트라체 기병대가 파견된 이상, 누벨 오를레앙 부근의 적 세력은 크게 위축될 것이오.”
“…….”
“물론 여전히 우리는 전면적인 파병이 불가하오. 파병군에 대한 키닌이 충분히 확보되면 움직일 생각이지.”
어쩐지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하는 것 같았다.
“그대의 부하들이 그대의 소식을 궁금해하기에 대충 상황은 알려주었소. 물론 병명은 함구했으니 걱정 마시오.”
“…….”
‘엿 같군.’
“만약 그대가 직접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아마 그들 사이의 갈… 아니 그들의 혼란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게요.”
끝까지 대답은 없었다.
상민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에 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은 이 사람에게 동정심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