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
상민은 연화와 딸아이들을 성공회 교회에 세례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들 부부가 비밀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연극에 불과했으나)은 대외의 비밀이었으니, 연화와 딸아이들이 이 땅에서 정식으로 세례를 받는 첫 번째 케이스가 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창언은 우려스러운 얼굴을 했다.
“너무 위험부담이 큰 것 아닙니까?”
고려는 종교에 관대하다.
가장 최근의 신앙조사통계에 따르면, 고려인 중 36.3%는 특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무교였다.
불교는 절반 이상의 신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다시 34.1%의 조계종과 19.7%의 천태종으로 분류되었다.
만종의 교세는 아예 봉토를 하사한 이후 크게 줄어들어 3.4%에 불과했다.
나머지 6.5%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토속 종교였고.
조사 통계는 설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신뢰성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참고할 만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려가 종교에 관대하다 해도, 제국 재상의 가족이 새로운 종교를 믿는다는 사실은 조금 위험할 수 있었다.
“괜찮다.”
상민은 벗어놓은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초기 교회의 입지가 다른 종교를 가진 고려인들에게 침해당하지 않기 위해선 그들이 의지할만한 권력자가 있어야 하니까.”
자신은 여전히 무교로 남아 있을 것이니 불만이 폭주한다든가 그런 일은 딱히 일어날 것 같지가 않았다.
대체로 식자층을 구성하는 무교인들도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설령 불교도들이 폭주해도 뭐 어쩔 건데.
피바람을 일으켜?
누누이 말하지만 그에게는 이도라는 아주 날카로운 명검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민도 가족들에겐 조금 미안했다.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상민은 가족들을 항상 사랑했지만, 권리와 의무는 달랐다.
옛 자식들처럼 지고한 황족은 아니지만 이들 또한 엄연히 현 재상의 가족.
정녕당에서 푹신한 이불을 덮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의복을 걸칠 권리가 있다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도 있는 법이니까.
통치자의 가족이 지니는 의무라면, 결국은 통치자의 뜻에 따라야 하는 것일지니.
괜시리 가슴이 아팠다.
‘내 약속하건대, 너희들에게도 반드시 좋은 신랑감을 구해주겠다.’
상민은 저 멀리 모래밭에서 한창 꺄르륵대는 딸아이들을 보며 다짐했다.
그나저나.
“교황이 내 편지를 읽고 죽었다지?”
“예.”
“혈압이 치밀 정도로 그렇게 화가 많이 났나?”
상민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 일로 죽을뻔했던 창언은 헛기침을 해야만 했다.
“크흠, 흠.”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그대는 참으로 잘해 주었네.”
상민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창언은 황공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보였다.
“교황의 허무한 죽음으로 모든 것이 상당히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어이없는 죽음은 이 시대에 흔했다.
똥을 싸다 장이 탈장해서 죽는다든가.
복상사라든가.
계단에서 앞으로 넘어져 죽는다든가.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너무 흔하게 보다 보니, 이젠 별 감흥도 없었다.
교황의 죽음.
작지만 큰 변수였다.
이로 인해 세상은 휙휙 바뀌고 있었다.
“새 교황에 대한 정보는 수집했는가?”
“철수하는 과정이었기에 정확한 정보는 취합하기 어려웠지만 카나리에서 확보한 정보로는 궁무처장 알폰소 데 보르자가 갈리스토 3세에 오른 모양입니다. 그 후 가톨릭의 혼란도 조금씩 수습되고 있다 합니다.”
알폰소 데 보르자라.
휙휙 바뀌는 와중에도 능력자는 능력자인 모양.
결국은 그렇게 되었구만.
상민은 슬그머니 웃었다.
다른 가문들은 잘 몰라도 데 보르자 가문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배출한 교황들이 어떤 꼴을 불러왔는지는.
일단 지금은 펠릭스 5세의 치세를 정돈하며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곧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역시 역사는 게임으로 배워야 제맛….’
상민은 창언이 차고 있는 손목보호대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약간의 흠은 있다.
원본대로 손을 들면 검날이 툭 튀어나오진 않았다.
자신이 직접 칼날을 손으로 끄집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구질구질함이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실로 성공한 덕후가 아닌가.’
암살자의 결의라는 곳에서 등장한 메인 악역,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아들 체사레 데 보르자가 등장하려면 적어도 백 년은 더 지나야 했다.
지금은 등장할지도 의문이었지만.
기대가 크다.
“교황청은 우리 고려의 제안을 부정하고, 또한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이 아비뇽에서 벌였던 성녀의 구출 작전은 의도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인정하기도 싫고 싸우기도 싫다는 게로군.”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그들은 이쪽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고려도 이젠 그들에게서 관심을 끌 때가 되었다.
“당하, 베네치아의 사절에 대한 회답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베네치아는 튀니스를 점령하며 명실상부한 지중해의 패자로 거듭났다.
그들은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시키고 상호의 이득을 수호하길 원했다.
“긍정의 답신을 보내라.”
창언이 약간 놀라는 기색을 띠자 상민이 말했다.
“물론 제노바에게도 이를 알려주고. 우리에겐 경쟁구도가 더욱 바람직하겠지.”
그럼 그렇지.
창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의 상관은 기대에 어긋남이 없었다.
“성녀는 이제 상황을 받아들였다 했지?”
“예.”
“그리고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나?”
창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보고드린 대로, 육체적인 질병은 물론이고 심적으로도 큰 상실감과 절망감에 빠져 있습니다.”
“상황도 상황이고.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정신이란 오묘한 존재라 가끔은 육신보다 지독하게 강할 때도 있고, 가끔은 육신에 비해 몹시 약해질 때도 있었다.
이 시대엔 스무 살 중후반은 그리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상민은 적어도 지난 생에서의 자신이 살아온 나이보다도 어린 여자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던 짐이 과도했다는 걸 공감하고 있었다.
계시를 받아 조국 수복 전쟁을 이끌고, 교황에 의해 신대륙으로 넘어와 맨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다시 식인종과 맞서 싸우다 고국으로 돌아가니 믿어왔던 모든 것에 배신당한다?
정신이 반쯤 나갈 만했지.
게다가 그녀의 몸을 좀먹는 병이란.
상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직접 가보도록 하겠다.”
“당하, 그것은 위험하지….”
창언은 단호한 상민의 얼굴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걱정도 유분수.
상민은 할 말 다 했으니 가보라는 듯 다시금 검은 안경을 썼다.
“이 일은 새어나가지 않게 하도록. 특히나 누벨 오를레앙엔 더더욱.”
창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 * *
잔은 버려졌다.
믿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녀를 배신했다.
믿고 있었던 사실들은 부정당했고 그녀를 조롱했다.
선과 악은 예전과는 달리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었다.
순교를 각오했다고는 하나 막상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교황청 앞 광장에 설치된 화형대에 올라가는 것은 살아생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치를 떨 만큼, 그녀를 모독하는 교황청 사제의 말들.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사형집행인들.
자신을 안쓰럽게 쳐다보는 군중들.
피어오르는 연기가 그녀의 의식을 흐리게 할 때쯤, 그 짧은 시간에 그녀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교황을 비난한 내가 천국에 오를 수 있을까?
교회는 이후에도 계속 돈을 받고 신성함을 팔아넘길까?
동료들은 어찌 되는 거지?
그리고는 문득 느꼈다.
그녀의 삶이 행복하지는 않은 삶이었다는 것을.
* * *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국적인 풍경의 도시였다.
이름은 테네리페라 했던가.
잔은 처음엔 고개만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육신이 만신창이였다.
창문 밖은 그래도 아름답네.
몸은 천천히나마 회복되고 있었다.
평상시의 그녀라면 누워있는 기간 동안 벌어진 일들에 대해 걱정을 했겠지만.
잔은 어딘가 예전과는 자신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쳤어.’
온몸에 도는 무기력한 탈력감.
그래도 그녀는 희미해진 신앙심과 너덜너덜해진 책임감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몸에 학습된 근면함은 이토록 많은 사건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거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자,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어나긴 했는데 어쩐지 머리가 멍하고 반응이 느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고 겨우겨우 방의 입구로 다가간 그녀는 굳건하게 잠겨 있는 문을 열려 시도했다.
당연히 열리지 않았고.
― 쿵 쿵
잔이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문을 두드렸다.
차츰 그 세기가 거세지자 문밖에서 약간의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문의 들창이 열리더니, 맞은 편에 복면을 쓴 의원이 나타났다.
목소리를 보아하건대 여성이었다.
“환자분께서는 이곳을 나가실 수 없습니다.”
“…네?”
잔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고려어를 구사하고 있지 않았다면 바로 제압을 시도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재상님께 말씀드릴 테니 다시 돌아갈 수 있게끔….”
의원은 그녀를 보고 진정하라는 듯 말했다.
“일단 검사를 해야 하니 침상에 누워 보세요.”
잔은 억울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다시금 침대에 누웠다.
의원은 그녀가 다시금 침대에 눕는 것을 들창으로 확인하고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꺼운 노란 고무장갑과 입과 코를 전부 막은 복면을 쓴 의원은 얼굴을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흐음.”
그녀는 얇고 긴 막대기에 솜이 둘러져 있는 도구로 잔의 손바닥과 발바닥을 검사했다.
“…….”
― 쿡 쿡
“아프십니까?”
“아픈 것보다도….”
잔은 자신의 손바닥에 이상한 발진이 나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대체 언제?
의사가 면봉을 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는 쓰레기통에 집어넣고는 도구들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약간 안타까운 듯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상태가 썩 좋진 않아요.”
“무… 무슨 뜻이죠?”
“잘 들으세요 환자분.”
의사는 냉엄한 얼굴로 말했다.
“환자분은 매독에 걸렸습니다.”
“…….”
잔은 입을 벌렸다.
그리고는 다물었다.
“그것도 이제는 2기의 매독으로 진행 중이네요.”
같은 행동을 다섯 번 더 반복한 그녀가 의원이 덧붙인 말을 듣고는 갑자기 말도 안 된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뭐라구요?”
그러나 의원은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지그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은 애원하듯 말했다.
“제… 제가 잘못 들은 것이 맞죠? 고려의 언어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나 의원은 단호했다.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그녀는 야속하게도 잔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프랑스어로 다시금 또박또박 병명을 말해주었다.
“수많은 항구에서 퍼져나가는 병이지요. 환자분께서 걸리셨으리라 추측되는 마르세유 항구에서도 몹시 극성이라 들었습니다.”
“…하… 하지만.”
“환자분. 이 병은 환자분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마냥 성병인 것은 아니에요.”
잔은 덜덜거리며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반점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맙소사.
그녀는 떨리는 얼굴로 자신의 하복부를 바라보았다.
설마 자신이 의식이 없는 사이에….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안심하세요. 어떠한 흔적도 없었습니다.”
잔은 달래듯 말하는 의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었다.
유럽인들에게 매독은 음탕하고 방정맞은 사람만이 걸리는 질병이라는 의식이 강했으니까.
하지만 백오십 년 동안 매독과 싸워온 고려인 의원으로서는 한숨이 나오기 그지없는 반응이었다.
‘매번 이런다니까.’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제가 환자분의 행동을 전부 다 아는 것은 아니라 확답은 드리지 못해요.”
잔도, 의원도 알 수 없다.
그녀가 마르세유의 항구에서 단칼에 베어 죽인 염소수염 사내의 핏방울 안에 있던 매독균이 입술에 튄 것이 이 모든 상황의 근원이라는 사실은 아마 신조차도 모를 것이니까.
잔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울먹이는 그녀가 괴상한 말을 했다.
“주님이 저를 정녕 버리신 것이 틀림없어요.”
의원은 푹 쉬라 대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병은 현재 불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