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27화 (127/653)

동쪽의 악마와 서쪽의 악마(2)

이츠코우아티틀란(Reynosa)은 본래 멕시카족 영역의 최북단을 상징하는 도시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렇지 않게 되었다.

아즈텍은 누벨 오를레앙을 계속 몰아내며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마침내 비옥하며 강줄기도 보이는 적당한 곳에 도시를 건설한 다음 몬테수마우아칸(몬테수마의 도시, Houst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분명 땅은 남쪽에 비해 더욱 기름져졌고 날씨도 온화하며 비도 더 많이 내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바로 앞에 더욱더 좋은 곳이 있었다.

아차팔라야 습지(Atchafalaya Swamp).

누벨 오를레앙의 최서쪽인 생트라이유와 누벨 오를레앙을 구분 짓는 경계선.

텍스코코 호수와 버금가거나 혹은 더 크다고 볼 수 있는 거대한 아차팔라야 습지는 한눈에 보기에도 비옥해 보였다.

게다가 아즈텍인들은 일반적인 평야보다 호수나 습지를 훨씬 선호했다.

그들의 치남파 농업을 위해서는 물이 많은 환경이 적절했으니까.

“저곳이 아스틀란(Aztlān)이 틀림없다!”

물론 당연히 습지에도 모기가 많았다.

하지만 아즈텍인들은 의학에 대한 무지로 모기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동거한 이 곤충은 귀찮을 뿐 위험한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말라리아와 황열은 최근에 번진 질병이고.

그들에게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이어지는 소빙기의 추세에서 아차팔라야 습지에서의 말라리아와 황열의 위세는 텍스코코 호수가 자리한 저위도의 테노치티틀란보다야 한풀 꺾일 것이라는 점이다.

* * *

누벨 오를레앙의 최서단 생트라이유(Xaintrailles, Lafayette)는 결국 함락당했다.

한정된 인원 자체를 누벨 오를레앙에 전부 집중한 까닭에 어쩔 수 없었다.

영지를 빼앗긴 장은 안타까워했으나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덕분에 누벨 오를레앙의 성채에는 사람이 바글거렸다.

가뜩이나 좁은 요새.

넓게 퍼져있던 프랑스인들이 죄다 한곳에 모여 있게 되니, 수많은 불편함과 만성적인 식량 부족이 나타났다.

게다가 언제 역병이 퍼질지 모른다.

부랴부랴 확장공사를 시작했으나 언제 끝날지도 몰랐다.

확장공사를 하는 덕분에 인력들은 농업에 투입되지 못했다.

여러모로 항구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이제는 제법 뻔뻔하게 물자를 요구하는구려.”

농사마저도 포기한, 배 째라는 식의 누벨 오를레앙의 사람들을 보던 이유가 감상평을 내뱉었다.

화주에 있던 그가 직접 청해 함대를 끌고 누벨 오를레앙에 온 것은 아직도 칼리나해와 마야만에는 카스티야 해적들의 잔당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보급품을 실어나르는 것은 먹잇감을 자처하는 꼴이란 거지.

그는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했는지 추레하기 짝이 없는 잔과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보급물자의 양을 증가시키라는 말에 조금 화가 났는데 이들의 꼴을 보니 약간 마음이 놓였다.

감자와 구황작물, 그리고 밀가루와 기타 무구들이 가득 담긴 상자가 부두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 콧대 높았던 프랑스인들이 다른 것도 아니라 밀가루 앞에서 설설 기었다.

누벨 오를레앙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고려인 선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상자를 운반하기 시작했다.

잔은 그 규모를 보다 다소 놀랐다.

의외였다.

양이 평소보다 많아 보였다.

그녀는 이리저리 꼼꼼하게 숫자를 세어 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재상님을 만나볼 수 있나요?”

저 말은 과장을 좀 보태서 열다섯 번은 들은 것 같았다.

만날 때마다 들었다는 소리다.

“…….”

보통 때 같았으면 또다시 거절의 답을 하겠지.

그러나 이유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긍정의 고갯짓을 했다.

“참으로 꾸준하군. 축하하오, 그대의 짝사랑이 존귀하신 분에게 닿은 모양이니.”

여전히 빈정거리는 말투였지만 이유는 이번에 시중에게서 받은 명령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직접 기함을 보내주시기도 했지.

“저 배에 오르시오. 바로 창양으로 직행하는 배라오.”

잔은 항구의 가장 넓은 곳을 독차지하고 있는 배에 시선을 돌렸다.

보급물자에 신경을 빼앗겨 존재를 몰랐다.

뒤늦게 알아차린 배의 존재는 실로 압도적이었다.

고려의 저 커다란 누범선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함.

처음 보는 거대한 크기의 배는 또다시 사람을 질리게 했다.

고려인들과 마주하면 어째서인지 항상 놀라는 구석이 있었다.

이 배는 대체 어디서 만든 걸까?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마스트와 펼쳐진 푸른 사각 돛.

수많은 대포가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는 측면.

화려함과 위엄이 공존하는 검붉은 색의 중범선은 맨 앞의 푸른 용의 선수상이 유난히 돋보였다.

무언의 표정으로 재촉하는 이유에게 잔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주교 마티외만을 대동한 채 잔은 서둘러 거함으로 향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질이 황급히 달려와 그녀를 만류했다.

질은 사납게 고려인들을 노려보더니 그녀에게 고함을 질렀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구원을 받으러.”

“이 이교도들이 어찌 우리를 구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모습을 듣고만 있던 이유가 기가 차는지 쏘아붙였다.

“그동안 우리들에게 꼬박꼬박 철광석과 밀을 받아 처먹었으면서 이제 와 눈을 부라리는 것인가?”

이유는 질의 얼굴에 담긴 표정을 보았다.

그 자신도 아직은 어리기에 세상사 많은 일을 겪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내로서 저 얼굴에 담긴 감정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제발 좀.

잔 또한 고개를 찡그려 질을 노려보았다.

질이 그녀의 노기를 피했다.

나머지 기사들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고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거나 혹은 그럴 자신이 없으면 에티엔처럼 아예 어딘가에 처박혀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있었지만 질은 굳이 아득바득 이 자리에 나와 항상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녀는 걱정거리 둘 말고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부하에게 입을 열었다.

“장. 누벨 오를레앙을 부탁해요.”

“잘 다녀오시지요.”

이번에 받은 지원에는 놀랍게도 화약이 있었다.

장은 이 고려의 호의가 대체 갑자기 이렇게 증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질의 저런 반응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장의 시선이 선수상에 닿았다.

푸른 용이 뭘 보냐는 듯 그를 노려보고 있다.

난폭한 용의 아가리에 제 발로 들어가려는 행동이 아닐까.

* * *

막대한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잔은 고려의 배에 오르자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큰 중범선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거대한 무게만큼이나 흔들림이 적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마련된 선실을 찾아 들어갔다가, 그 안의 화려함에 놀랐다.

정돈된 집무실은 역시나 붉은 적강목으로 색이 통일되어 있었다.

배 후면과 좌우를 볼 수 있는 창틀.

금실이 수놓아진 고급스러운 깔개와 커튼.

큰 옷장과 넓고 안락한 침대 위에는 보랏빛의 이불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다.

잔은 책상 위에 있는 기물들을 보았다.

맑은 유리병 안에 찰랑이는 잉크와 독특한 모양의 펜과 같은 물건.

부드러우나 잘 찢어지지 않는 종이.

그 위에 올려져 있는 화려한 육분의와 기타 항해 물품들.

그리고 미적 감각이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잔의 눈으로 보기에도 탄성이 절로 나오는 도자기들.

‘오만해.’

잔은 그 도자기들이 진열된 선반을 보며 그렇게 내뱉었다.

격렬한 흔들림이 일어난다면 저 자기들은 땅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조각날 것이었다.

그러나 저리 당당하게 진열되어 있는 모습은 마치 어떠한 전투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는, 혹은 깨져도 상관없다는 엄청난 자신감의 표출이 아닐까.

두서없이 이곳저곳을 관찰하던 잔은 문득 벽면의 푸른 천 조각을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유리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거울이 있었다.

독특한 옆의 문양보다는 거울 자체의 품질이 너무나도 놀라웠다.

어찌나 맑고 투명한지 얼굴에 있는 모공 하나하나가 전부 다 보였다.

자신이 비록 상업에는 문외한이나, 이 정도의 거울을 구할 수 있는 곳은 단연코 프랑스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대체… 이것은.’

잔은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선명하게 바라보는 것은 실로 처음이었다.

손길을 뻗어 거울의 표면을 어루만지려던 잔은 이윽고 자신의 더러운 손길이 그 표면의 무결함을 해치지 않을까 저어해 다시금 손을 물렸다.

바라보기만 하자.

잔의 눈이 자기 자신을 응시했다.

동레미의 소녀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성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눈앞의 적과 싸워나가는 것뿐.

대체 저들을 이끄는 당위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잔은 깊은 회의감에 빠져 있었다.

차라리 모든 지휘권을 장에게 넘기는 것이 현명할지 몰랐다.

그녀가 한동안 거울을 바라보며 탄식을 삼키고 있을 때,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잔은 고개를 홱 돌렸다.

노크 소리가 들린 것 같긴 했다.

문에는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여인 한 명이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귀빈을 황성까지 모실 송월이라 합니다.”

“…….”

잔은 그들의 예법대로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프랑스인의 어색한 반응에 송월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민망한 듯 주변을 둘러보는 잔에게 나긋나긋하게 설명했다.

사실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려주어야 했다.

“이곳은 청해의 기함, 새벽호의 선실입니다.”

무려 제국의 시중이 머무르는 공간이라는 뜻.

말을 알아들었는지 잔의 몸이 약간 굳었다.

정녕당 소속 시녀들 두 명이 다가와 그녀의 물품을 정돈했다.

사실 별 건 없었다.

갑주 한 벌과 검 한 자루. 그리고 단검 한 자루와 성경책.

안에 갖춰 입을 옷가지 몇 벌 등.

고려어를 꽤 오래 공부했지만 아직 발음은 서투른 잔이 그녀들의 손길에 더듬거리며 말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존귀하신 분이라면 시중을 받는 것에 익숙해지셔야지요.”

그녀의 미간이 문득 찌푸려졌다.

“…시중을 받는다니요?”

“아, 죄송합니다. 동음이의어랍니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옷가지 정리가 끝나고 그녀는 방 한켠에 마련된 욕탕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하고 있는 상민은 배 안에 욕실을 넣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대단한 것은 아니다.

나무 욕조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것이 배 안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상당한 호사라 말할 수 있겠지.

잔은 옷을 다 벗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야 했다.

송월은 그 꾀죄죄하고 먼지투성이의 몸으로 시중의 침상에서 자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으니까.

시녀들은 잔의 옷가지를 벗겼다.

애초에 씻는 문화가 퇴보한 중세의 유럽인, 게다가 일개 농부의 딸이라는 출신 성분 때문인지 그녀는 이 상황이 몹시 어색했고, 조금은 수치스러웠다.

어쩐지 이 방에 들어온 이후 타성에 젖어버린 듯한 기분이 자꾸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의 알몸에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시녀들은 능숙하게 비누의 거품을 내 그녀의 몸에 발랐다.

향기롭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의 향기가 나기도 했고, 은은하게 벌꿀의 냄새가 나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곤욕의 순간이 지나가고, 잔은 머리를 말려준다는 제의를 거절하고 침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푹신푹신한 침상 위에서 부드러운 면 이불을 덮은 그녀는 멍하니 선실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될까?’

누벨 오를레앙은 위기에 빠져 있는데, 자신만 이렇게 편하게 있어도 될까.

물론 그 생각은 20초를 넘기지 못했다.

그동안 하루에 채 다섯 시간 이상 자지 못했던 그녀는 부드러운 이불을 껴안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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