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의 악마와 서쪽의 악마(1)
고려가 카스티야와 한바탕 전쟁을 벌이기 전의 일이었다.
누벨 오를레앙의 기사들은 조제프 사제의 흔적을 뒤쫓다 마침내 그가 남쪽의 거대한 원주민 제국에 의해 잡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결국 조제프가 그놈들에 의해 뜯어먹혔다는 사실도.
“신이시여!”
“맙소사.”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옛 페니키아인들이 발록을 숭배하며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은 아직도 유럽 사회에서 많이 회자되곤 한다.
로마의 도덕적 우월성을 선전하는 도구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인신공양은 수백 년 전에 끊긴 악습이었다.
후대의 기독교적 관념에서도, 아니 불교나 이슬람 같은 주요한 종교들을 모두 통틀어 어떤 관점에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당사자들은 으레 그렇듯 희생자들의 유골로 촘판틀리(해골탑)을 세워 놓고 축제인지 제사인지 도통 모르는 행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잔이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뻔했다.
머리끝까지 분노한 잔과 기사들은 군마를 타고 이제 꽤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는 아즈텍의 도시를 공격했다.
“이럇!”
보통 사람보다 적어도 두 배가 되는 키.
강철의 갑옷을 두른 기마들은 오직 일백 기에 불과했으나, 인마의 육중한 무게와 속도를 이용한 파괴력으로 마치 먼 미래에나 나올만한 전차처럼 적들의 대열을 부러뜨리고 박살 냈다.
광폭함에 빠진 그들은 반나절 동안 자신보다 족히 열 배가 넘는 자들을 죽이고 그보다 많은 숫자를 무력화했다.
얼마나 길게 정신없이 싸웠는지, 그 노련한 기사들 모두 팔에 근육 경련이 와서 무구를 잡기 힘들어할 정도.
그러나 아즈텍도 충격을 이겨내었다.
새벽녘이 다가오고 공황상태에서 벗어나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몬테수마와 주변에 있다 늦게나마 합류한 틀라카엘렐의 지도 아래 아즈텍은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반격하기 시작했다.
“저들도 우리가 먹었던 인간과 다름없다! 위험한 맹수들도 결국 모여서 사냥하면 죽일 수 있으니, 모두 그대들의 아틀라틀(투창)을 던져 저들을 잡아라!”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재규어 전사들의 공격에 누벨 오를레앙의 기사들은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려 있던 요리가 되지 않은 조제프의 머리와 그의 유품들을 수습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다시 누벨 오를레앙에 온 기사단원들은 뒤늦게 혼란에 빠졌다.
기사들뿐만 아니라 마티외 주교를 위시한 기사단의 사제들도 크게 당황하고 분노했다.
잔은 분노를 토해내는 와중에도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고려는 내가 꿈에서 본 서쪽의 악마가 아니었어.’
이 이십 대의 여인은 전장을 그토록 많이 다녔었지만 이렇게 끔찍한 광경은 실로 처음이었다.
가로로 꼬챙이처럼 꿰어져 부패되고 있는 수천 개의 머리를 본다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겠지만.
예전에 본 고려의 재상의 후광과도 맞물려 그녀는 이제 완벽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누벨 오를레앙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일반 농부도 아닌 무려 사제가 죽었다.
그에 따른 복수와 징벌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누벨 오를레앙은 그 자리에서 아즈텍이라는 악의 제국을 박살 낼 것이라 결의했지만 이 악의 제국은 그리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본국으로의 항로가 고려에 의해 끊겨버린 누벨 오를레앙이 더욱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잔의 지휘 아래, 기사들은 수없이 많은 전장에 나섰고 그럴 때마다 피바다를 만들어냈지만 몰려오는 파도는 손바닥으로 막을 순 없었다.
죽이고 죽여내도 이 자들은 꾸역꾸역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기마로는 한계가 있었고 그마저도 차츰 두려움을 이겨낸 아즈텍 전사들이 원거리 무기로 말을 노리는 전술로 선회하자 프랑스 기사들 또한 더 이상 적들을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멍청한 허수아비 베어내듯 죽일 수는 없었다.
화약은 몹시 부족했고, 이제 끝을 보였다.
식량도 극도로 부족했고 수확을 해야 할 성 밖의 농작물들은 저들의 침입에 짓밟혀 있다.
게다가 본국과 누에바 갈리시아에서는 어떠한 도움도 오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 있어서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으나 잔의 제안 이외의 별다른 해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서기로 했다.
유럽으로 향할 생각은 없었다.
시간은 너무 오래 걸리고 상황은 어찌 될지 모른다.
그들이 마야만으로 출발하기 무섭게 며칠 뒤 어디선가 고려의 함대가 나타났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속도였다.
어디선가 자신들의 항구를 계속 정찰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알고 있는 항로라 해보았자 꽤 제한적이라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
잔은 머뭇거리지 않고 백기를 올렸다.
* * *
가장 근처에 있는 고려 세력은 누에바 갈리시아였다.
이제는 그들의 언어로 화주(花州, Florida)라 불려야 하겠지만.
고려도 나름대로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서, 누벨 오를레앙과 아즈텍의 충돌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협상을 하자?”
화주의 점령군을 이끄는 이유가 그녀에게 되물었다.
전에 봤을 때는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여인답게 매사에 확신과 신념에 차 있던 그녀는 몇 달 사이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재상님을 뵙길 원합니다.”
“시중께서는 바쁘시오.”
원정 준비에 한창인 시중이 이런 소소한 일에 근심을 끼쳐드리게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보고를 하겠지만 자신의 선에서 잘라야 하는 일도 있었고.
게다가 근래의 악연도 있었으니.
잔은 두 손을 모아 이마에 가져다 대며 신음을 흘렸으나 이윽고 이유를 바라보며 간청했다.
“그분께서는 저희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으실 겁니다.”
“글쎄? 시중께선 몹시 흡족하게 외면하실 텐데.”
상대방의 빈정거림에도 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를 도와준다면 우리 기사단은 고려에 적대하지 않을 거예요.”
조소를 날리려던 이유는 갑자기 짧게 고민에 빠졌다.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는 건지, 혹은 이미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이 여자가 어느 순간부터 태도가 영 요상해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을 알고 있긴 한 게요?”
“무슨 사실을 말씀하시나요?”
“그대들의 그 잘난 교황청이 우리에게 해상십자군을 선포했다는 사실.”
잔의 동공이 일순간 크게 흔들렸다.
“대체 언제?”
“조금 되었지. 그대들이 모두의 관심사 밖으로 밀려난 이후 고려와 카스티야―교황청 세력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접어들었소.”
지금 그대와 이야기하는 것조차 솔직히 조금 미덥지 않군.
이유는 그렇게 말했다.
잔은 부인할 수 없었다.
만약 그녀 또한 고려의 재상을 직접 대면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다르게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본 광경만을 신뢰했다.
두 의미를 모두 내포했다.
상민이 보여준 성스러운 광경과 아즈텍의 위험성과 잔혹성에 대한 광경 전부를.
“…약속하겠어요. 누벨 오를레앙은 이번 상황에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을.”
“그대가 기사단장이라 하나 과연 휘하의 기사들을 제대로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일 때도 있죠.”
이유는 헛웃음을 지었다.
“당신, 많이 달라졌구려.”
그는 날카롭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수척해진 것과는 별개로 그녀를 맴도는 분노의 기운은 그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유 또한 아즈텍의 문화를 어찌 들어 알고 있었다.
마야인들은 자신들의 좋지 않았던 과거의 문화에 대한 자격지심을 풀고자 그것보다 더 심한 대조군을 원했다.
그리고 아즈텍은 예상했던 대조군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마야가 신마야글(고려글의 한 갈래)로 상세하게 기록한 그들의 야만적인 행동은 고려인들에게도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었다.
겪은 잔혹함에 대한 충격이 컸던 모양인지 잔은 이전과는 인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저 서쪽의 악의 제국이 정녕 뻗어 나가게 두실 겁니까? 누에바 갈리시아, 아니 화주는 바로 옆에 있어요.”
잔의 날카로운 말에 이유는 반론하려다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도 아즈텍의 이름은 몇 번 들어보았으나 그리 경계하지 않았었다.
다른 모든 고려의 무장들과 비슷하게.
고려의 군대가 투입된다면 패배는 불가능했다.
타완틴수유 원정이 힘들었던 것은 태동산맥이라는 유례없는 험준한 산맥의 지분이 9할은 넘었으니까.
반면, 중려대륙은 그런 험준한 지형이 없다.
남부 아즈텍에 깔린 밀림은 동맹국인 마야가 자신 있어 하는 전장이었고. 북부 아즈텍은 평평한 대지라 봐도 무방했으니.
그러나 요즘의 아즈텍은 이유에게도 슬슬 경각심이라는 것을 심어주고 있었다.
위부터 아래까지 하나 된 저 군국주의적 사회는 옛 고려의 무신정권이나 그리스에 존재했다는 스파르타보다도 더욱더 극단적이었으며 훨씬 더 광신적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멈춰질 필요성이 있다.
타완틴수유 원정 이후 유럽까지 신경 써야 하는 고려는 당분간은 뭘 할 여력이 별로 없었다.
재정을 걱정하는 시중을 가끔 본 적이 있었다.
정치력도 기주를 제외한 동예의 병합을 추진하며 그들이 내재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곳에 쓰이고 있었고.
“본인의 재량으로 저번에 요구한 퇴거 명령은 무기한으로 연기하도록 하겠소.”
“퇴거 명령은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그럼 우리가 뭘 어째야 하오? 해상십자군에 대항할 군대를 이곳으로 보내 본국이 불바다가 되는 것을 봐야 하나?”
“제가 교황청을 설득하겠어요. 진정한 악의 제국은 고려가 아니었으니.”
“이미 에우제니오 4세는 교황위에서 쫓겨났소. 그리고 펠릭스 5세가 그대의 말을 들어줄지는 솔직히 의문이 드는군.”
이미 벌어진 십자군을 중단시켜?
설령 저들이 믿는 야훼라 하더라도 못 할 것이다.
이권에 몹시 민감한 펠릭스 5세는 더더욱.
이유는 일단 자신의 재량으로 그들에 대한 예정된 공세를 연기했다.
말이 통하는 나쁜 놈과 말도 통하지 않는 나쁜 놈 중 고르라면 전자가 더 낫겠지.
그리고 잘 싸우라며 식량과 기타 자원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그것만으로 한숨 돌린 누벨 오를레앙은 아즈텍을 다시 어찌 막아낼 수 있었다.
물론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형국이라 겉보기엔 영락없는 폐허 꼴이었다.
“상황은 딱 적절하다.”
방파제의 역할을 그럭저럭 수행하고 있는 누벨 오를레앙을 보며 이유가 나름대로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그 형세는 고려군의 귀향 시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 * *
‘아즈텍이라….’
말라리아와 아즈텍의 북진과의 연결성은 상민이 찾아내지 못했지만, 현재 진행 중인 중려의 상황은 상당히 의외였다.
제아무리 아즈텍이라 할지라도 개개인이 인간병기와 다름없는 기사단국이 저리 고전할 줄은 몰랐다.
원 역사에서 그들이 소수의 에스파냐 침략군에게 얼마나 유린당했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조금 생각해보니 답이 보였다.
누벨 오를레앙의 기사들과 훗날 코르테스가 이끄는 콩키스타도르는 무슨 차이점이 있을까.
상민이 생각하기엔 둘 사이 어떠한 냉병기적 기술과 전술 차이는 별로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화약은 몹시 다르겠지.
콩키스타도르는 거의 한 세대가 지난 이후의 자들이기에 화약에 훨씬 더 숙달되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도 나빴다.
‘아즈텍은 고려의 영향으로 초기철기를 수용하며 고대 국가 수준으로 올라온 것이 틀림없다.’
문명 발전을 이끈 요인은 후대의 역사학자나 인류학자가 발견해낼 것이다.
어찌 되었든 잠재력이 터진 아즈텍은 비유를 하자면 옛 반도의 동예 옥저와 마한 진한 변한, 그리고 부여와 같은 나라들의 문명 수준에 도달한 모양.
당연히 고려는 물론이고 동시대의 프랑스나 심지어 이 시기의 조선에 비할 바는 전혀 아니겠지만, 누벨 오를레앙은 프랑스가 아니었다.
프랑스의 일개 백작령만 못할지도.
천연두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코르테스는 총과 화약을 앞세워 이곳을 침범했지만, 시기적절하게 퍼져나간 천연두의 혜택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미 이들에게 대역병은 과거의 일이었으며 극복 가능한 상처 중 하나였다.
게다가 이 시기 아즈텍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명군을 가진 상태였다.
몬테수마와 틀라카엘렐.
특히 틀라카엘렐이라는 자는 자신도 처음 듣는 자였지만, 그 잔인함과 끔찍함만큼이나 엄청난 능력을 가진 명재상이라 했다.
후대에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농락당한 몬테수마 2세를 명군 몬테수마 1세와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었고.
인조와 선조를 이성계와 비교할 순 없잖은가.
이는 타완틴수유에서도 여실히 느꼈다.
고려에 의해 붙잡혀 최후의 잉카로 기록될 위라코차 또한 그렇게 능력이 출중하진 않았다.
원 역사의 마지막 잉카의 이름까진 모르겠지만 그 또한 암군이라 했었지.
반면 고려는 파차쿠티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상대해 고전을 면치 못했으니까.
보급 문제도 클 것이다.
유럽으로의 교류가 전혀 되지 않는 지금의 누벨 오를레앙은 비축해 놓은 물자가 극도로 부족할 것이다.
고려가 없었으면 오히려 존속이 위태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유의 결정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단순한 감정에 의해 좌우되지 않았고 이용가치를 면밀하게 살펴 지원을 해준 모양.
상민은 문득 잔을 떠올렸다.
희미해진 기억 너머로 프랑스인 특유의 흑발과 다부진 얼굴, 그리고 숨기지 못한 아름다움이 먼저 떠올랐다.
무술과 승마로 다져진 훌륭한 신체도.
그리고 역사적으로 유례없이 축복받았다던 가슴도.
‘크흠.’
그는 쓸모없는 생각을 중단했다.
어찌 되었든 이 여인은 쓸모가 있었다.
예전 자신의 손을 붙잡고 괴상한 말을 뱉어내던 그 꺼림칙한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직도 등골에 조금 소름이 올라오긴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자신을 믿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이용가치라….’
그녀는 원 역사보다 더 교육받았다.
교황청에서 몇 년간 신학자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으니.
따라서 본래보다도 더욱 능력이 출중해진 사람이겠지.
그러나 아직 이십 대.
충분히 어렸다.
자신이 지하 교회를 이끈다느니, 머리 뒤에 휘광이 있다느니 이상한 헛소리를 치워보자.
상민은 성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을 기억해내었다.
긴 고민 끝에 상민이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나쁠 것 하나 없다.
사람 하나 구워삶는 것 치고는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어마어마했다.
만약 그가 정말로 그녀를 감화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실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좋아.’
내가 네 성인이 되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