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의 악마와 서쪽의 악마(3)
배 위에서의 생활은 무척 지루하다.
이미 보름하고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갔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그동안 잔의 일과는 무척 단조로웠다.
일어나자마자 침상을 정리한 그녀는 부드러운 깔개 위에서 아침 기도를 올린다.
이윽고 식사를 한 뒤엔 성서를 읽어 마음가짐을 바로 한 뒤, 가볍게 산책과 바다 구경을 한다.
오후가 되면 실내에서 가볍게 운동과 수련을 한다.
저녁 식사 후에는 다시금 기도를 드리고 성서를 읽는다.
누가 봐도 끔찍할 정도로 지루한 일상.
그 신앙심 깊은 잔 또한 자신의 이러한 일상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성자와 천사들과 영적인 교감이라도 나누기도 했을 텐데.
잔은 이윽고 흘러가는 시간을 조금 더 알차게 쓰기 위해 송월에게 부탁하여 고려말과 글을 속성으로 배우는 시간을 자신의 일과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물론 하루 만에 후회했지만.
* * *
“읽어보세요.”
송월의 말에 책을 들고 있던 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최신의 책이란다.
“맑디맑은 창수, 드리워진 낚싯대엔….”
고역이다.
고려어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긴 했지만, 그녀는 전혀 문학이라는 분야에 소질이 없었다.
게다가 이런 어려운 수사법이 장황하게 쓰여 있는 시조(詩調)란.
귓가에 들어오는 것 중 태반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어휘였다.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은 연마다 발간되는 시집이었다.
계속하여 발전하고 있는 인쇄기로 인해 출판의 장벽은 많이 낮아졌다.
이제는 문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시집을 발간할 수 있을 정도.
하도 온갖 곳에서 시를 써 대니, 문학성을 겨루고자 대회 같은 것도 많이 열리기도 했다.
길이길이 회자되는 명시를 남긴 자들은 많은 존경을 받았고, 황상이 친히 선물을 내리기도 했다.
심의를 거쳐 학생들이 배우는 서적에 적히기도 했으며 이는 문인 스스로에게 더할 나위 없는 영광 중 하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명시들은 누적되고 누적되어 후대의 학생들에게 큰 문학적 자부심과 즐거움을 선사해 줄 것이었다.
물론 잔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으음, 조금 더 흥미가 생길만한 책으로 하지요.”
송월은 잔의 표정을 보더니 들고 있던 시조가 적힌 책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평소에도 시를 읽기 좋아했으나, 외국인에게 그러한 문화를 강요하기란 조금 어려운 면이 있었다.
‘이 재미있는 것을….’
고려의 현재 시조는, 과거 전조의 경기체가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경기체가는 본디 무신정권 이후 뒷방으로 물러나게 된 문인들의 여흥거리로 출발했었으니 아무리 호탕하고 풍류를 즐기는 태도가 시구에 녹여져 있더라도 본디 내재되어 있는 자조적 어조를 읽어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려가 이 땅에 자리잡은 이후, 경기체가의 기풍은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경기체가라고 부르지 않는 당금의 시조는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첫째로, 한문학을 동경하여 만들어진 기존의 경기체가에서 탈피해 고려글적 운율요소와 문법을 따른다는 것.
이두도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겠다.
송사(宋詞)의 기풍이 거의 사라졌으며 불교적 색채도 많이 옅어졌다.
두 번째는 몹시 호쾌하고 특유의 기백이 있었다.
고려 내에서 대두되는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생각과, 국가에 대한 자부심 및 나라에 대한 충성의 일로로 쓰이기도 하는 시조들은 대체로 사내의 기백을 노래하거나 국가에 대한 찬사, 그리고 황실의 은혜를 찬미했다.
태동산맥과 창강, 광하와 태수 등의 거대한 강, 광활한 영토에 따른 천혜의 절경에 대한 예찬과 통치를 해야 하는 지성인들의 의무를 부각시키기도 했으며, 교훈적이며 서사적인 내용을 담기도 했다.
어쩌면 그러한 면에서는 유교적 면이 꽤 남아 있다 볼 수 있겠지.
세 번째로는 민중의 시가인 고려가요와의 확연한 분화 추세였다.
민중 사이에서의 속요(俗謠), 즉 고려가요는 생각보다 몹시 풍속적이었다.
즉 백성의 삶 자체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현 시기, 백성의 삶은 먹고 자는 것과 번식하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
축구와 같은 오락거리야 생겨났지만, 그래도 남녀상열지사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따라서 지식인들의 오락거리인 시조가 그들과 떨어지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송월이 잔의 앞에 고려가요가 적힌 책을 꺼낸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지.
“포목점에 면포 사러 가니 포르투갈 상인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
잔은 순결했지만, 마냥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몇 구절을 읽자마자 잔의 얼굴이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부끄러움인지 당최 알아차릴 수 없는 감정으로 붉으락푸르락해지자 송월은 어마 뜨거라 하며 책들을 치워야만 했다.
‘유교 소녀도 아니고 뭐야.’
“그냥 마지막 책이나 주세요.”
고려의 역사책을 집어 든 잔이 열심히 책들을 읽어나갔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편해진 느낌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송월이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후, 몇 개의 책을 역사서 뒤에 넣어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새벽호는 창강에 들어섰다.
본래 군선은 해문에서 멈추고 내지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모든 면에서 새벽호는 예외였다.
호위하던 누전선들이 전부 물러나고 혼자만 미끄러지듯 잔잔한 창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새벽호는 노을이 서서히 저무는 무렵 아슬아슬하게 창양의 나루에 도달했다.
여의나루에 발을 디디며 잔은 크게 놀랐다.
이제 어스름이 짙게 깔려 명확하게 주변을 구분할 수 없었으나 이곳이 얼마나 크고 발달한 곳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엄청나.’
갑주를 차려입고 마치 전장으로 향하는 듯한 기백을 일신에 담은 채 꼿꼿하게 걸으려던 잔은 이윽고 정신을 차려보니 목이 빠져라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주교 마티외 또한 거듭 탄성을 내지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한 그들에게 수도의 경비병들이 다가왔다.
기함의 모습과 그들 뒤에 시립해 있는 청해 군관들의 모습을 보면 어차피 알겠지만, 경비병들은 규칙상 무조건적인 검문을 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오히려 상관에게 종아리를 걷어차일지 모른다.
특히나 시중은 특유의 짓궂음으로 가끔 경비병들에게 전혀 유쾌하지 않은 경각심을 심어주기도 했으니까.
송월은 잔의 앞을 막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신원부와 재상의 증서를 내밀었다.
“…실례했습니다.”
서류에 하자가 없음을 확인한 경비병들이 군례를 올리고는 다시금 순찰 경로로 돌아갔다.
송월이 아직도 멍하니 도시를 바라보는 잔을 이끌었다.
“기함이 도착했으니 세간의 이목이 많이 끌릴 겁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사람의 이목을 피하려 들어간 골목에는 검게 칠한 수수한 마차가 있었다.
어둠을 질주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게 생겼다.
“…?”
그녀는 다소 의아해했으나 곧이어 해상십자군과 고려가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잔과 송월이 마차에 오르자 뒤이어 기함에서 내린 청해의 군사들이 그들을 엄중하게 호위하며 빠르게 정녕당으로 향했다.
* * *
또 하나의 도시라 볼 수 있는 창천궁 앞, 옛 고려의 일개 궁궐에 버금갈만한 커다란 재상의 처소는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마차가 관저에 다가가자, 미리 말이라도 되어 있었는지 곧바로 문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차에서 나오자, 한 아름다운 여인이 우아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쩐지 전 주군 샤를 7세의 아내인 마리 드 앙주가 떠올라 잔은 먼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여인 또한 그녀와 마티외에게 목례로 화답했다.
송월은 훨씬 더 격조를 올린 인사를 건네었다.
“마님.”
연화는 송월을 바라보더니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자신의 명령 덕에 그리 먼 길을 갔다 왔으니 미안하기도 했다.
“시녀장은 먼 곳에서 오느라 피곤할 텐데 먼저 들어가 쉬도록 하세요.”
“제가….”
“내 나름대로 충분히 잘할 수 있어요. 나의 출신을 익히 알고 있지 않나요?”
송월은 옛 부하이며 지금의 주인인 연화의 말에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고는 이윽고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정녕당의 안주인이자 상민의 처인 연화는 잔잔하게 웃으며 그들을 안으로 인도했다.
“들어오세요.”
잔은 입고 있던 갑주를 만지작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차라리 남자를 상대하는 것이 편했다.
이러한 우아한 귀부인 앞에서는 어쩐지 자꾸 주눅이 들었다.
방금 대화상으론 출신이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았으나, 사람은 본래 자리가 높아지면 그에 어울리는 격식을 가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키도 컸다.
잔 또한 상당히 키가 컸는데, 이 여인 또한 자신과 버금갈 정도.
시선이 마주하니 어쩐지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리 말을 해서 주위를 물렸는지도 몰랐다.
밤이 깊어가기에 주변이 약간 어두운지 손에 든 램프로 복도의 초를 몇 개 켜는 광경을 바라보던 잔이 입을 열려 시도했다.
그러나 연화가 조금 더 빨랐다.
“시중께서는 항상 늦게 들어오시지요.”
“바쁘십니까?
“저는 일개 아낙으로 감히 그분의 업무를 헤아릴 수 없어요. 얼마나 많은 짐을 혼자서 짊어지고 계시는지.”
연화는 약간 안쓰러운 얼굴을 하며 복도를 거닐었다.
잔은 머뭇거리다 말했다.
“만약 재상님께서 늦게 오신다면, 저도 이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귀빈들께서는 해 주실 일이 있어요.”
연화는 그녀치고는 꽤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장담하는데 귀빈들께서도 무척 반가워하실 거라 생각해요.”
잔은 약간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뒤의 마티외를 바라보았다.
마티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으쓱해 보였다.
* * *
재상의 사적 응접실.
연화는 해태라고 하는 신수를 조각한 독특한 석재 조형물을 더듬었다.
이윽고 무슨 장치를 작동시켰는지 돌과 돌이 작게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밀 문이 열리고 어두컴컴한 통로가 드러났다.
연화는 머뭇거림 없이 등을 들고 앞장섰다.
다소 불편한 긴장감을 안고 그녀를 따라 걷던 잔이 짧은 통로를 빠져나온 후 보이는 지하실의 풍경에 탄성을 내질렀다.
“역시!”
그곳에는 기도실이 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십자가.
제단에는 묵주(Rosarius)가 있었고 양초가 가지런히 놓여 있기도 했다.
꽤 많이 사용한 흔적이 이곳저곳 남아 있었다.
마티외는 경외하는 얼굴로 제단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곳에는 상당히 크고 익숙한 성경이 있었다.
군데군데 세월의 흐름에 다소 빛이 바래고 헤진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숭고함을 더했다.
“불가타(Vulgata)….”
그는 상당히 놀란 얼굴로 성경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주교인 만큼 당연히 라틴어 성경을 읽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문맹이었고 식자들 또한 프랑스어로 된 성경을 읽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였다.
로망스어가 라틴어에서 분화된 것은 5세기 서로마 멸망 직후였다.
이미 수백 년도 전에 프랑스어는 라틴어와는 많이 달라졌다.
이탈리아어도, 카스티야어도, 잉글랜드어도.
857년, 샤를 1세는 왕명으로 대중들을 위해 로망스어로 법령과 성서를 번역하라 명령했었다.
그 이후 순식간에 사어화된 라틴어는 종교계와 학계에서만 쓰일 뿐이었다.
순수성에 극도로 민감했던 탓에 일반 대중들에게 전혀 친절하지 않았으니 예견된 결과였다.
물론 그 순수성 덕분에 뜻이 잘 왜곡되지 않아 학문적, 종교적으로는 훨씬 더 좋아졌지만.
그러니 지금의 라틴어는 유럽의 지식인 중 지식인들만이 구사하는 고급스런 언어였다.
불가타라니!
마티외는 실례인 것을 알면서도 성서를 조심스럽게 넘겨보았다.
들어오는 구절들은 몹시 익숙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절대적인 정본이라 볼 수 있는 이 라틴어 성경, 베르시오 불가타(Versio Vulgata)는 왜곡될 여지가 전혀 없는 가장 권위 있는 성경이며 신의 말씀 그 자체였다.
마티외와 잔은 제단에 꿇어앉았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기도를 드리는 모습에 연화가 어쩐지 애매한 얼굴로 같이 따라 했다.
마티외와 잔은 곁눈질로 연화를 슬쩍슬쩍 지켜보았다.
연화의 얼굴에 조그맣게 땀이 생겼다.
* * *
잠시 후.
“정말로 사실이었군요.”
한 점 의심조차 지워진 잔이 초롱초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시중께서는 고려의 지하 교회를 이끌고 계십니다.”
“역시 성녀께서 맞으셨군요.”
마티외가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잔은 그동안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상민의 휘광과 같은 일을 제외한 고민을 마티외에게 일부 털어놓았다.
그녀의 말을 약간 회의적으로 듣고 있었던 마티외는 그녀가 말한 박해받는 고려 교회의 흔적을 발견하자 자신의 어리석음을 참회했다.
“제가 믿음이 적었던 탓입니다.”
재상의 아내라는 연화 또한 익숙하게 기도를 드렸다.
의심할 여지 없는 부부의 신앙을 확인한 마티외 주교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밝은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형제 자매여. 어려운 사항이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라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연화는 능숙하게 마티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후우, 어쩐지 폐부 깊숙한 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저보다 시중께서 그대들을 필요로 하실 거예요. 이제 곧 오실 시간이 다 되어가니….”
연화는 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마침 위에 올라간 응접실에는 업무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상민이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