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을 위협하는 첫 번째 적
병사도 사람이야 사람.
카스티야 원정이 끝나고 상민은 그들을 모두 고국으로 돌려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재편된 근위군이 상대적으로 젊었다지만 그들도 이미 2번의 원정을 겪은 상황.
이들을 다시 가정으로 복귀시키는 것이 맞았다.
안그러면 선상반란이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간 김에 겸사겸사 출산율도 올려 주고.
긴 원정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온 상민은 책상 위에 한가득 쌓여 있는 서류를 보고 확 정녕당에 불을 지를까 하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파괴욕을 억눌렀다.
‘고르고 고른 현안들이 이만큼?’
황제의 건강 관련 서류들과 기타 시급한 처결을 요하는 서류 더미를 미친 듯이 처리한 상민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의무부에서 올라온 마지막 서류를 들고 불안감에 젖었다.
이 부서의 소식은 무소식이 희소식이었으니까.
역시나 보고서를 열자, 끔찍한 소리가 한가득 튀어나왔다.
* * *
고려와 카스티야의 전쟁이 있기 전, 이미 두 나라는 물건과 금 이외에도 여러 질병들을 옮겼다.
카스티야는 고려에 의해 매독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매독은 고려 내에서 이미 익숙해진 질병이었으나 당하는 카스티야인들 입장에서는 치가 떨릴 만큼 무시무시한 새로운 병이었다.
“빌어먹을 고려 놈들. 그렇게 음탕하고 무절제한 놈들이니 당연히 이런 병이 생겼겠지!”
카스티야는 매독을 고려병이라는 멸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물론 그 후에 이 ‘고려병’은 수많은 바리에이션을 낳았다.
카스티야를 싫어하게 될 미래의 잉글랜드는 이것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카스티야병이라고 불렀고, 아라곤을 싫어하고 있는 제노바는 아라곤 상인들에 의해 전염되자 아라곤병이라고 불렀으니까.
심지어 튀니스의 아랍인들은 이것을 베네치아병이라 부르게 되었다.
받은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는 법.
카스티야와 유럽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 또한 고려에게 선물을 주었다.
어느 누구도 바라지 않을.
지금까지 고려는 몇 가지 주요한 역병과 전쟁을 치러왔다.
두창(천연두)와 홍역, 염병(장티푸스) 등.
물론 옛 고려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이미 존재가 알려진 병이다.
한자어로 된 병명이 있으니까.
그중 가장 위험하며 가장 악명높았던 두창은 기존의 지위를 빠르게 잃어버리는 중이었다.
옛날의 태조가 실시한 인두법의 기록도 여전히 존재했고 유럽의 소를 가져온 지 벌써 수십 년이 흘렀다.
우두를 이용한 우두법은 의무부에서 심혈을 기울이는 사업 중 하나였고, 이미 전체적으로도 빠르게 보급되어 있었다.
목축업 또한 몹시 번성하는 사업이라 소가 부족할 일은 없다.
사람들이 황실과 조정을 그렇게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결국은 두창의 공포에서 해방되었다는 것도 있겠다.
피부로 여실히 느껴지는 위대한 업적이니까.
염병(染病), 혹은 장티푸스와 온역이라고 부르는 발진티푸스, 이질과 기타 여러 가지 질병은 시대적 한계상 사방에서 빈번하게 발병했다.
그러나 위생 상태와 직결되는 병이기에 전염병 치료에 앞서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많은 효과를 보기도 했다.
개인 위생점검과 조리 시 충분한 가열을 하는 것 등등.
만약 이 같은 병들이 일어나면 항생제가 없는 시대에서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빈도 자체를 줄일 수는 있었다.
상대적으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다음으로 꼽을 만한 것은 홍역.
현대인으로서는 백신 이후 체감하기 힘든 질병이나 전근대 사회에서는 상당한 사망률을 보였다.
그리고 전염성이 여태껏 경험했던 어떠한 질병보다도 압도적으로 빨랐다.
진짜 놀라울 정도로.
태수(아마존) 지류 안쪽에 위치해 아직까지도 고려와 교류를 하지 않는 자그마한 원주민 부락들이 손 쓸 틈도 없이 쓸려나간 이면에는 홍역도 한몫을 했다.
문명이 발달된 고려의 입장에서도 홍역은 여전히 두려운 질병이다.
국가의 잠재력이라 할 수 있는 어린아이일수록 위험했으니 통치자 된 입장에서는 참으로 야속했다.
그러나 동쪽에서 건너온 두 질병은 앞선 질병들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집요했다.
공통점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작고 조그마한 동물.
치를 떨 정도로 짜증이 나며 성가신 가려움을 선사해주는 동물.
하지만 위험성은 압도적이라 지구상에서 인류를 단연코 가장 많이 학살한 동물.
모기.
상민은 모기를 극도로 혐오했다.
구질구질하게 살던 예전 생애에서부터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된 지금까지.
지금은 물려봤자 부기도 나타나지 않으며 가렵지도 않다.
병도 걸리지 않을 테니 모기에게서 해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한번 뿌리 깊게 내재된 혐오감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이 엿 같은 동물은 도움 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네.’
사실 모기는 남려대륙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그들이 옮기는 바이러스와 열원충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지.
그러나 유럽 상인들에 의해 전파된 이 병들은 언젠가는 고려에 도달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정말로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모기에 의해 전파되는 첫 번째 질병은 황열병(黃熱病)이었다.
얼굴이 노랗게 뜬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황열병은 몹시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치사율도 상당했다.
적어도 2할에서 많게는 5할에 달할 정도라 치사율 자체는 그 극악무도한 두창과 견줄 수도 있었다.
두창은 이미 쇠락하고 있으니 이제는 그 불명예스런 왕좌를 황열병이 대신 차지하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창처럼 한 번 걸리면 다시 걸리지 않는 질병이라는 것 정도.
치료 방법은 연구 중이나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모기에 의해 전파되는 두 번째 질병.
그 이름도 유명한 말라리아.
아프리카의 해안에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은 열원충은 매개체인 모기의 몸에 들어가 사람의 몸속으로 순식간에 전파된다.
그리고는 사람 간 속에서 성장하며 때를 기다리다 난동을 부린다.
고열로 사람을 박살 내버리는 이 흉악한 질병은 사실 옛날 고려가 위치했었던 한반도에서도 꽤나 익숙한 질병이었다.
다른 말로 학질(瘧疾)이라 불리며 전조와 그 이전의 왕조에서 신분 고하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병이었지.
그러나 적어도 신대륙에서는 관측되지 않았던 병이 틀림없었다.
물론 추측일 뿐이지만 거의 이백 년간 잠잠하다 이제 와서 극성스럽게 난리 칠 이유가 하나밖에 없지 않겠나?
마야와 아즈텍, 그리고 타완틴수유 문명의 기록에서도 그 병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고려인들도 가지고 온 것 같지가 않았고.
한동안 잠잠했던 이 신대륙에 아프리카에 발을 디뎠던 유럽인들이 오게 되자 말라리아 또한 자연스럽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고려에 퍼진 이 학질은 고문서와 대조를 해 보아도 증상 자체가 예전의 학질보다도 더욱더 강력했다.
‘어쩌면 열원충의 종류가 다른 것일지도.’
상민은 미래적 지식으로도 대충 짐작이 가능했지만 열원충의 종류와 증상을 알지도 못했으니 예방과 치료에는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자신은 이미 황열병과 말라리아가 적어도 모기에 의해 전파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이 하나의 지식만으로 엄청나게 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그는 몰랐으나 말라리아라는 이름 자체부터가 나쁜(Mal) + 공기(Aria)라는 괴상망측한 생각에 의해서 나왔으니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따라서 이전부터 모기를 줄이려는 노력은 참 많이 했었지.
수경식 논에 장구벌레를 잘 먹는 물고기를 풀어놓는다든지.
하지만 물웅덩이가 있는 어디에서도 잘 자라는 장구벌레는 도저히 인간으로서 막을 방도가 나지 않는 생물체 중 하나였다.
웅덩이를 전부 다 갈아엎게?
다행스러운 점은 처음에 걱정한 것처럼 고려를 먹여 살리는 곡창지대인 창강대평원에서 사태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진 않았다는 것 정도.
발생 자체는 일어나지만 열대지역마냥 무시무시한 속도로 번져나가진 않았다.
양수 정도의 도시에만 가도 말라리아는 다소 힘을 잃었다.
의무부의 관료들과 학자들은 학질모기의 기후적 한계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겠지만 고려는 이미 북쪽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북진은 우리의 숙명이자 DNA였으니.
학질은 남려대륙 북부와 칼리나해의 섬들에서는 엄청나게 심각했다.
파남과 전주, 마제도와 만궁 열도.
동시다발적으로 보고되는 학질은 그조차 암담한 기분이 절로 날 만큼 절망적이었다.
‘이렇게 북부개척이 고꾸라진다고?’
유럽인들은 총탄과 대포로 쫓아낼 수 있다.
그러나 모기는 어쩔 건데.
예방?
불가능하다.
단언할 수 있었다.
21세기에조차 완전히 막지 못하는 질병이니 중근세의 기술과 지식으로는 감히 항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치료?
그나마 조금 가능성은 있었다.
어디서 역사에 관심이 있다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말라리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함께 떠오르는 약이 있다.
퀴닌(Quinine).
키나나무에서 추출하는 이 약은 근대에 개발되어 여러 사람 목숨을 살린 약이라 들었다.
한자로는 금 뭐시기였는데.
상민은 이름을 기억해내려 한참 동안 머리를 굴리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금계랍.
여튼 키나나무 자체는 남려 자생종이 틀림없다.
원역사에서 남미의 원주민들이 어찌 예전부터 쓰고 있는 약재였다 했으니.
하지만 문제는.
‘이 말라리아라는 병이 최근에서야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병이란 말이지.’
지금은 원주민들이 자연적인 치료법을 개발하기보다도 전의 일이다.
게다가 '키나'라는 이름이 어디 부족의 명칭인지 도무지 알 겨를이 없었다.
돌아버리겠군.
고려가 이 땅에 들어서고 이백 년 동안 영향을 확대해 나가자 신대륙 원주민들의 사회 속엔 고려글과 고려어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언어체계가 몹시 원시적이라 당연한 소리였다.
이제는 그 키나나무라는 것이 제대로 키나나무라고 불릴지부터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쩔 수 없다.
상민은 고민하다 다소 무식한 방법을 사용했다.
“농무부에 명을 내려 키나나무라 불리는 나무를 찾고 이왕 찾는 김에 남려 전역의 나무들을 종류별로 분류한 뒤 의무부와 함께 그 껍질을 약재로 이용할 수 있는지 실험하라 하거라.”
명을 받아 적는 관리가 자신의 부서 일이 아님에도 파랗게 질렸다.
“예?”
이해는 한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 네가 하리?”
“아…아닙니다!”
어차피 이것도 다 약재 데이터베이스가 된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랜 상민은 보고서를 닫아 치웠다.
그날 밤, 농무부와 의무부에서는 구슬픈 곡소리가 새어 나왔다.
* * *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러한 모기를 매개체로 삼는 질병은 고려에게만 큰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옛 동예의 땅과 기주, 그리고 중려대륙의 상황도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울창한 열대우림 안에 있는 마야는 또다시 큰 고통을 받았다.
이번에는 고려가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다.
대체적으로 고원 및 건조 기후에 있던 아즈텍은 상대적으로 마야보다는 피해가 적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테노치티틀란은 거대한 호수 위에 건설된 도시.
수도는 지속되고 있는 냉해와 기근은 물론 이제는 모기 질병에게까지 큰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기가 질병의 매개체가 되는 것 자체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팽창기 동안 점유한 북부 멕시카 영토에 있던 사람들만이 건강하게 살아남는 것을 보고 무언가 배운 것이 틀림없었다.
올라가자 위로.
조금 건조하지만 그만큼 질병도 덜한 그러한 땅으로.
냉해와 수해가 없는 땅으로.
몬테수마와 틀라카엘렐의 북진정책은 다시금 힘을 얻었다.
아니 이번에는 북진 수준이 아니었다.
엑소더스.
그들의 옛 땅인 아스틀란(Aztlān)으로 향하는 아즈텍 버전의 엑소더스가 바야흐로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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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니신은 지금은 등장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중국 고문서는 알 리가 없을 것이고 동의보감도 나오지 않은 시대이며
유기용매로 알칼로이드계인 아르테미니신을 추출하여 독성을 제거하는 과정은 음….
문돌이통치자 하의 고려에겐 적어도 몇백 년은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