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24화 (124/653)

예상치 못한 결과(지도 첨부)

그라나다―마라케시 연합함대가 탄자와 말라야에 모였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팔레르모의 2차 십자군 본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뚫고 지나갈 수는 있습니까?”

알폰소 5세의 사생아이지만 유일한 아들인 페르디난도는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섭정이며 두 번째 십자군의 총괄을 맡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제네랄리시모(원수) 알비세 로레단은 사태의 심각성을 들며 그에게 독대를 요구했다.

지금 회의실에는 오직 두 명만 있을 뿐이었다.

“지금 당장 출발하면 충분히 뚫고 갈 수 있습니다. 아군의 함대가 훨씬 강할뿐더러, 저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지요.”

심각한 상황이라면서 독대까지 요구했던 알비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오자 페르디난도는 미간을 꿈틀거렸다.

알비세의 표정은 영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페르디난도 자신에게 있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가능하다는 확답을 들었음에도 페르디난도는 영 얼굴이 좋지 않았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질적인 감정에 휩싸여 있었기에.

‘아버지….’

자신의 아버지 알폰소는 너무나도 호인이었다.

형제들에게 자신이 가진 왕국을 분할해주는 것을 어떤 자식이 찬성하겠는가?

페르디난도는 그 이유를 자신의 혈통에서 찾았다.

시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자신이 그의 적법한 자손이었다면, 아라곤도, 발렌시아도, 마요르카와 사르데냐도 그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었을 것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적법한 부인이자 계모인 마리아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증명된 사실이지만 다른 사생아의 문제도 있었다.

아버지는 여자관계에서도 몹시 호탕해 수많은 여인을 품었다.

자신의 어머니인 지랄도나는 물론 또 다른 정부 루크레치아와 수많은 미녀들을.

그래서 그는 십자군 본대를 도와주는 것을 꺼렸다.

잠재적 경쟁자들도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무슨.

‘빌어먹을 삼촌을 내 손으로 구한다고? 말이 안 되지.’

사절이 오고 가는 시간과 보안의 제약으로 고려의 함대가 카디스에 둥지를 틀었다는 것만 알고 있는 페르디난도는 엔리케와 알폰소 간의 밀서의 내용을 알 리가 만무했다.

삼촌이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 또한.

안다고 달라졌을까.

“돌아오는 것은 힘들겠지요?”

“뭐,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은 그 경우보다 훨씬 더 급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급한 일은 오직 십자군의 성공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성전이 승리로 끝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낚싯대에 감촉이 왔다.

알비세가 능청스럽게 코끝을 훔쳤다.

“승리라… 전하께선 고려를 공격하는 것이 실패하리라 생각하십니까?”

페르디난도가 빈정거렸다.

“그럼 제네랄리시모께선 달리 보십니까. 이 원정의 운명을?”

알비세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제가 지금 독대를 청한 이유를 아십니까?”

“나를 어찌 이용해 먹으려는 심산이시겠지요.”

베네치아인들은 타고난 상인들이며 사람의 심리를 읽는 것에 몹시 능했다.

그에겐 이 어린 청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쯤은 너무나도 쉬웠다.

페르디난도는 이 능구렁이들에게 표정 관리나 기타 허세를 부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젊은 나이에도 익히 알고 있었다.

“……제안할 것이 있으면 하세요. 들어보겠습니다.”

알비세는 웃음을 지우고 진중한 얼굴을 보였다.

“십자군의 목표가 꼭 고려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충격적인 말.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크흠.”

페르디난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아무도 없었다.

“못 들은 것으로….”

“기회는 단 한 번입니다. 전하.”

페르디난도는 얼어붙은 알비세의 얼굴에 눈을 질끈 감았다.

청년은 괜히 어색해 다시 여러 번 헛기침을 했다.

그래, 이들은 못된 놈들이지만, 이 순간이 무의미하게 지나간다면 다시는 잡기 힘든 기회일지도 모른다.

페르디난도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굴기로 다짐했다.

“지도가 필요하겠군.”

그들은 자그마한 탁자로 가 지도를 펼쳤다.

시간은 짧았고 논의할 사항은 많았다.

그들은 쉴 새 없이 토의를 했다.

팔레르모에서 이제 곧 출발할 함대의 경로.

그리고 북아프리카 이슬람국가들의 동향.

해상십자군 선봉대의 패배.

고려의 강함.

그리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매몰 비용.

그리고 유경험자인 베네치아.

그들이 결정할 것은 몹시 괴상한 일이었지만 전례가 있었다.

“마라케시는 여전히 정치적인 혼란기에 빠져 있지요. 게다가 최근 와타시 가문이 그들의 함대를 죄다 탕헤르에 모아놓고 있으니 군사적 공백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술탄은 세우타를 치려 준비 중입니다.”

“멍청한 놈이군. 그러나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게 그 멀리 떨어진 마라케시가 아니잖소.”

“튀니스의 하프스 왕조가 틀렘센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정말로?”

“예전부터 분쟁이 있었는데 마린 왕조가 군사를 빼 엄한 곳에 돌렸으니 틀렘센은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지요.”

튀니스의 하프스 왕조는 마라케시의 마린 왕조에게 두 번이나 수도를 털린 경험이 있다.

같은 이슬람 세력이라도 눈에 불을 켜고 서로 싸워댄 사이.

이웃의 혼란기를 틈타 북아프리카의 영향력을 다시금 되찾으려는 하프스 왕조는 중흥기에 들어서 엄청난 팽창욕을 보이고 있었다.

첫 번째 희생양은 마린 왕조의 속국인 자얀 왕조인 모양.

따지고 보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적대하기 위해 지브롤터로 모이고 있는 마라케시를 오히려 도와주는 셈이 된다.

그러나 물론 전혀 상관없었다.

“맘루크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알비세는 웃었다.

“맘루크는 우리 베네치아와 친합니다. 오스만 때문이라도 더더욱 친할 수밖에 없지요. 게다가 요즘 그들의 행보가 맘루크 또한 한창 자극하고 있었으니.”

페르디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확인받고 싶었던 것뿐.

“튀니스의 군사 공백이라.”

페르디난도는 군침이 떨어진다는 얼굴로 튀니스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천혜의 요지로 북아프리카의 모든 물산을 통제할 수 있는 귀중한 곳이었다.

“물론 그들도 바보는 아니라, 팔레르모에 있는 우리의 함대가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속 시원하게 말해 보세요. 제네랄리시모. 뭐 어쩌잔 겁니까?”

“칼리아리, 알게로를 지나쳐 사르데냐를 한 바퀴 돕시다.”

“그리고….”

“그리고 직선으로 곧게, 튀니스로 향하는 겁니다.”

“…….”

“항로상의 거리는 우리가 발렌시아에 도착할 정도의 거립니다.”

“시간상으로 딱 알맞다라….”

“또한 칼리아리를 무심하게 지나친다면 저들의 경계 또한 풀릴 테니.”

이미 이들에겐 고려의 문제는 논외였다.

알폰소와 엔리케의 문제도.

페르디난도는 만약 자신의 원정이 성공한다면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프스 왕조가 몰타에 저지른 학살. 만약 이것을 다시 되돌려 줄 수만 있다면. 내 몸에 흐르는 피가 설령 하녀의 피라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확고부동한 시칠리아의 왕이 될 수 있었다.

“교황청을 설득하는 문제는 어찌하시려구요?”

“알폰소 폐하에 반대하는 추기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침 그분이 성하의 최측근이지요.”

“그자가 제가 생각하는 그 동명이인입니까?”

“맞습니다.”

페르디난도는 약간 질색하는 얼굴을 해 보였으나, 이윽고 신색을 회복했다.

“그 음흉함이 때로는 쓸모가 있는 순간이 있군요.”

“만약 우리의 공격이 성공을 거두기만 한다면, 오히려 교황청은 우리의 행동을 지지할 겁니다.”

페르디난도가 갑자기 짐짓 경건한 얼굴을 보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면이다.

“우리는 신념으로서 실패할 운명에 처한 해상십자군을 성공으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알비세 또한 거들었다.

그 가면은 조금 더 두껍고 화려했다.

“맞습니다. 설령 이것이 당장은 지탄받을 일일지언정 훗날 모든 크리스천들은 이 결단을 두고두고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 * *

베네치아의 흉계는 항상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상식의 틀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었다.

팔레르모에서 칼리아리를 향해 나아가던 2차 십자군 본대는 마요르카로 도착하지 않았다.

심지어 발렌시아에도, 타라고나에도, 바르셀로나에도 도착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도착해야 하는데?”

아라곤과 카스티야 세력은 당황했다.

그들이 빠르게 도착해야만 뭐라도 해볼 상황이 온다.

오지 않는다면 택할 방법은 하나였으니까.

알폰소가 직접 추한 꼴을 보며 협상을 질질 끌고 있지만 고려는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엔리케의 목숨은 절체절명.

카스티야 남해안의 도시들은 정체를 쉽게 알 수 있는 이양선(Barco extraño, 다른 나라의 배)의 출몰과 그 포격 연습에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고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최후통첩을 던졌다.

엔리케를 카디스의 대중 앞에서 화형시키겠다는 소리에 여러 사람들이 기함했다.

물론 2차 십자군 본함대의 소식은 그 기간까지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이슬람의 배들이 지브롤터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체 없이 빠르게 왔다면 저들이 전력을 갖추기 전에 도착했을지 모른다.

대체 왜 미적거리는 게냐.

‘설마 그 후를 걱정하는 거냐? 아들아? 고려를 패퇴시킨 이후의 일은 상관없다. 우리는 이 괴물을 이곳에서 막아야 해!’

* * *

그러나 그의 아들은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센 엔리케가 고려의 손아귀에서 풀려 세비야에 도착했다.

비틀거리는 동생은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엄청난 심력을 소모한 듯 몸을 가누지 못했다.

“대체 저를 왜 버리지 않았던 겁니까, 형님!”

알폰소는 동생의 원망 섞인 눈을 보다가 오히려 미소를 띠었다.

아들이 오지 못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그의 형제는 살아남았다.

‘차라리 이 길이 유일하게 동생을 살릴 수 있던 길이었을지도.’

알폰소는 엔리케를 마차에 앉혔다.

“비… 비야돌리드로….”

“아니.”

조약을 알지 못하는 그는 의아한 얼굴로 형을 바라보았다.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났어. 이제 그만 가자꾸나.”

알폰소는 어찌 후련한 것처럼 보였다.

“사라고사로 가자!”

그의 외침에 사람들이 출발했다.

아라곤―카스티야 연합군은 카디스 전투 이후, 단 한 번의 추가적인 전투 없이 해산했다.

카디스에는 약속대로 페데리코 용병대가 둥지를 틀었으며 고려의 관리들과 상인들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불과 며칠 뒤 교황청―시칠리아―베네치아 연합군은 튀니스를 공격했다.

왕조의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던 이 북아프리카의 왕국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튀니스를 무력하게 내주었다.

세상에 지브롤터에 한가득 집결한 마라케시―그라나다 함대와 필연적인 전쟁을 앞두고 있을 십자군이 갑자기 그들과 싸우지 않고 오히려 잠재적 동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자신들에게 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 놀라운 것을 베네치아는 해내고야 말았다.

적대적 관계에 들어선 마라케시와 틀렘센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자세한 사항을 알고 나니 오히려 기뻐했다.

맘루크는 묵인했다.

먼 옛날, 8차 십자군의 복수를 완수한 이번 해상십자군은 후대에 성공으로 끝났다.

상민은 생각했다.

기묘한 일이다.

참전국은 고려와 기독교 세력이었는데.

둘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진정한 패배자는 엉뚱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이었고.

그라나다는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지만 이베리아의 기독교 왕국에 추가적인 흠집이 전혀 나지 않은 이상 어차피 멸망할 운명이었고.

마라케시 또한 알아서 자멸할 것이었으니.

상민은 단순히 이 해프닝을 표면적으로만 읽으려고 하진 않았다.

틀렘센과 맘루크, 마라케시가 모르는 것들.

유럽의 잠재력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하다는 점이다.

북아프리카는 앞으로 절대 북쪽의 이웃들을 막을 수 없었다.

토양의 생산성이 떨어졌다.

밑에는 녹지 대신 거대한 사막이 있다.

몹시 보수적인 문화와 종교를 가졌다.

부족 문화가 강한 이들은 유럽보다도 더 분열되어 있었다.

“유럽의 잠재력이 아프리카로 뻗어 나간다….”

이는 분명하게 고려 때문이었다.

서쪽으로 도달하려는 흐름 자체를 박살 낸 고려에 의해, 유럽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그리고는 다시금 뒤로 돌아가 옛 숙적을 바라보고 있었지.

고려가 이끄는 대서양의 바다는 앞으로도 유럽의 접근을 거부할 것이다.

고려는 유럽을 최대한 바다에서 막을 것이니.

그들에게 고려 버전의 ‘먼로주의’에 대한 관념을 계속 불어넣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유럽은 다시금 그 꿈틀거리는 힘을 어디엔가 풀어야 할 것이고.

당장 흘러들어오는 강물을 막을 방법이 없다면 흐르는 줄기를 바꾸는 것이 제일 현명하겠지.

지금은 조그마한 땅덩어리인 튀니스에 불과할지라도, 앞으로의 전개는 더욱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었다.

그래, 가라 가.

서쪽이 아니라 남쪽과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거라.

그동안 유럽의 부는 카나리를 통해 고려에게 천천히 흘러올 것이니.

그리고 그 부와, 시간을 통해 우리는 더 강해질 것이고.

마지막 씨앗은 천천히 발아할 것이다.

확인은 본국에 가서 해도 되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