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23화 (123/653)

예상치 못한 상황

십자군이라는 세기의 거대한 이벤트는 많은 나라들에게 중대한 문제였다.

특히 이슬람은 더더욱.

레반트에 있는 나라들만 PTSD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알 안달루스에 있는 나라들 또한 그랬다.

레콩키스타(Reconquista)도 교황에 의해 십자군적인 행동으로 인정받았다.

수백 년에 걸친 레콩키스타는 후우마이야 왕조와 그 후예들을 박살 냈다.

이슬람세력은 밑으로 조금씩 쫓겨났고 이제는 북아프리카에 맞닿은 조그마한 영토만 점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베리아의 끄트머리에 간신히 매달려있던 그라나다 토후국(Emirate, 아미르국)은 그 시대 흐름의 마지막 잔재였다.

옛날 카스티야에 신속하는 것으로 다소 불명예스럽게 건국된 나스르 왕조는 끊임없는 주화파와 주전파 간의 내분과 기독교 왕국들 간의 필연적인 마찰로 몰락해 가고 있었다.

밑의 마린 왕조와 긴밀히 연계한 적도 있으나, 그 동아줄은 많이 썩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 동아줄이 내려왔다.

물론 이들은 이 동아줄도 약간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현재의 상황이 다소 잘 납득이 가지 않았기에.

세 왕국, 즉 아라곤과 카스티야 그리고 포르투갈이 얼마나 강한지 익히 알고 있던 그들은 심지어 그 세 왕국(물론 이들은 포르투갈과 고려 사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몰랐다.)에 나폴리며 지중해의 일부 세력들까지 합세한 힘이 바다 건너의 한 나라에게 박살이 났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저들이 정녕 바다의 몽골이란 말인가?

“서고트 놈들이 그리 무력하게 패배했다고?”

“예. 아미르.”

“…이리 주거라. 자세히 읽어 보겠다.”

카스티야의 장난질로 옹립된 유수프 4세에게서 자신의 정당한 아미르의 자리를 다시 탈환한 나스르 왕조의 무함마드 9세는 본능적으로 이 상황이 큰 기회라고 느꼈다.

자신과 왕조의 권위에 대한 상승도 상승이지만 그라나다가 다시 부흥할 수 있는 문제였다.

카스티야의 후안 2세는 반쯤 폐인이 되어 있었고, 아라곤도 크게 타격을 받았다.

그들의 레콩키스타는 지금 당장은 진행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기독교 세력과 무르시아에 대한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던 그라나다는 이제는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

무함마드 9세는 바로 밑, 마린 왕조의 술탄 압둘 알 하크 2세에게 연락하여 고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보자는 전언을 보내었다.

“그래, 그들 말대로 단지 지브롤터에 가는 길목만 막으면 된다. 십자군의 몰락과 실패는 우리에게 정말 다시없을 기회일 거야.”

여기까지는 상당히 상식적인 계획과 결과였다.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던 그라나다는 지푸라기 손이라도 잡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빠져 있었다.

악마도 괜찮은데 바다 건너의 제국이야 어떠하리.

하지만 상민이 간과한 것도 있었다.

항상 유능했던 사람은 무능한 사람의 속사정을 잘 모르기 마련이다.

게다가 솔직한 말로 상민에게 있어서 유럽사는 익숙했지만 이슬람사, 그것도 북아프리카 역사는 상당히 동떨어진 세상에 있었으니.

기독교 세력의 내분만큼이나,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은 너무나도 큰 정치적 혼란기에 빠져 있었다.

군주 개인의 무능이든, 민족적 충돌이든.

게다가 심지어 왕조와 왕조 사이까지 좋지 않았다.

마라케시(모로코)를 지배하는 마린 왕조는 큰 혼란기에 빠져들어 있었다.

포르투갈이 주요 도시인 세우타를 꿀꺽 삼킬 만큼 술탄은 힘을 잃었으며 재상(Vizier)의 권한은 막대했다.

압둘 알 하크 2세는 이러한 병폐를 해소하고자 재상 가문인 와타시 가문의 힘을 제약시키고자 했으나 그 방법 자체가 문제였다.

이베리아에서 내쫓긴 유대인들을 중용한 것.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이슬람과 유대교도 서로를 그리 좋게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보다 민족적 모순이 격화되고 종교적인 충돌까지도 빈번히 일어나는 마라케시는 전형적인 망국의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페스에 도달한 고려인 사절은 심지어 성문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어이가 없는 그들이 중얼거렸다.

거리는 스산하고, 신민들의 눈동자엔 희망이 없다.

“이게 무슨 나라 꼴인가?”

치안조차 좋지 않았다.

성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일행들을 털어먹으려는지 강도 몇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호위가 있었지만 상대보단 적었다.

강도들은 마치 벌떼처럼 수적 우위를 앞세워 달려들었다.

심지어 성문에 있는 경비병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게 조정의 권위라고?

낯선 외국의 수도 성문에서 한동안 혈전을 벌이던 고려인 사절들은 수적인 열세 끝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자들에 의해 포박되어 질질 끌려갔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생각에 모두가 절망할 무렵 그들은 의외로 몹시 화려한 저택으로 안내되었다.

심지어 술탄의 왕궁보다도 더욱더 화려한 듯한 이곳은 온갖 보물들이 여보란 듯 장식되어 있었다.

“고려의 사절이라고?”

그 저택의 주인.

재상에서 쫓겨났지만, 아직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와타시 가문의 수장은 자신들의 술탄에게 온 사절을 가로채고도 전혀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와타시 가문이기에 대낮에 수도의 정문 앞에서 강도 떼를 보내 외국의 사절을 가로챌 수 있는 것이니까.

“…그대들의 술탄에게 인도하시오. 그대와는 아무런 할 이야기가 없소.”

수장은 코웃음을 쳤다.

“우리 가문이 곧 알―마그레브이며 알―마그레브가 곧 우리 가문이다. 그대들 또한 재상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를 가지고 있으면서 사고가 그리 유연하지 않구나.”

사절단 중 나이가 가장 어린 이가 그 말을 듣고 화를 내려다 다른 자에 의해 가로막혔다.

“지금 감히 누구를 누구에….”

물론 화가 나는 말이긴 하다.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

법치라는 단단한 반석 위에 확고한 관료제라는 기둥으로 올려져 있는 제국과 어디 봉건정의 멍청한 것들을 비교한단 말인가?

심지어 같은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과도 비교하기 민망할 수준의 문명을 자랑하고 있는 놈들인데.

속 생각이야 어떻든 와타시 가문의 수장, 아부 자리카 아햐 알 와타시는 제안했다.

“만약 그대들이 페스에서 현 술탄을 몰아내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우리 가문 또한 그대들의 호의를 잊지 않을 것이다.”

사절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낮에 이곳까지 끌려오는 사람들에게 뭘 기대하나?

게다가 고려는 한창 바쁜 상황에 놓여 있었으니.

상부상조를 하자고 이곳에 왔건만, 오히려 이렇게 강짜를 부리다니.

약간의 억하심정을 담아 사절은 반문했다.

“저희는 사절일 뿐인데, 뭘 어찌할 수나 있겠습니까?”

“고려인들이 계산에 능하다더니, 과연 정확한 대가를 요구하는구나. 좋다.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해주지.”

아부 자리카는 적어도 현 술탄보다는 시세에 밝았다.

그는 탄자(탕헤르)에 있는 그들의 선단과 지브롤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사절에게 알려주었다.

“대서양에 있는 우리의 함대와 지중해에 있는 우리의 함대가 좌우로 지브롤터를 틀어막는다면 고려에게도 분명히 이득이 되겠지. 그 제안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얼굴을 하던 고려의 사절은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속내를 읽어내는 그에게 한 번 놀랐고, 상상외로 강력한 와타시 가문의 힘에 두 번 놀랐다.

옛 고려의 최씨정권마냥 이미 대부분의 실권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셈이었던 것일까.

“탄자와 멜리야에 있는 본 가문의 선단이 활약한다면 지브롤터 해협을 얼마 동안 틀어막는 것엔 아무런 무리가 없지.”

“그 대가로 아국이 지불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아부 자리카는 음흉하게 웃었다.

“내 듣기로 고려는 화약과 폭탄 무기에 능하다 들었다. 간단히 말하지. 그 유명한 고려의 도자기 안에 들어갈 수 있을 크기의 정밀하며 질 좋은 화약이 들어있는 폭탄을 주문제작하고 싶다.”

방 전체를 확실히 죽일 수 있는 강력함은 당연히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되겠지?

사절들은 꿀꺽 침을 삼켰다.

어디에 쓸지는 뻔했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논의를 통해….”

“전권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었나? 당장 이 자리에서 결정하라. 비밀을 안고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다소 강압적인 아부 자리카의 말에 고려의 사절들이 미간을 찡그렸으나, 어찌 되었든 그들은 지금 포로의 신세와 다름없었다.

흉흉한 칼날이 주변에 어른거렸다.

대답할 말은 뻔했다.

‘함대를 빌리는 것치고는 값싼 가격이지만, 한 나라의 국왕을 암살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디 시중께서 노하지 않으셨으면.“

* * *

그라나다와 마라케시에 갔던 사절들의 보고를 들은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예상대로 몹시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이놈들이 문젠데.

‘모로코….’

마라케시의 와타시 가문이 한 제안은 몹시 거슬렸다.

자신들에게서 받은 폭탄을 술탄 암살에 쓸 것이 뻔했기에.

물론 이 폭탄 제조를 한다고 해서 제국의 권위에 어떠한 흠결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칼을 만든 대장장이는 죄가 없으니까.

그냥 기분이 나빴다.

‘개인적으로 조금 짜증이 나는데 말이야.’

폭탄 ‘테러’는 상민 자신의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몹시 꺼림칙한 행위였다.

내심 술탄의 편을 들고 싶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술탄은 와타시 가문 함대의 십 분의 일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쓸 수 있는 패를 안 쓰는 것도 미련한 짓이다.’

고려가 아무리 근접 해상전에 자신이 생겼다 하나, 모든 병법서가 공통적으로 일컫는 것처럼 전투 없이 치르는 승리가 가장 값지다.

상민은 몹시 고민하다, 결국 이향을 불렀다.

거래에 응해주지.

그러나 고려는 이 일들을 기억할 것이다.

‘어차피 망할 나라들은 제각기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건가.’

유럽에 대한 견제책으로 북아프리카의 이슬람을 생각하던 상민은 생각을 접었다.

역사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나라들은 제각기의 이유가 있었다.

이 나라들은 고려의 존재 유무와 그에 파생되는 영향과는 별 관련 없이 언젠가 서서히 스러져갈 나라들이었으니.

그들은 자신의 장기말로 올릴 패로서도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오스만과 맘루크는 공간적 제약이 너무 크고.’

지엽적인 이이제이는 성공을 거두겠지만, 거시적인 이이제이는 실패할 것이다.

상민은 본래의 노선을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주문한 폭탄을 손에 얻은 와타시 가문은 약속을 지켰다.

그들은 탄자와 말라야에 함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물론 고려가 보면 쓰레기 같은 배에 불과했다.

유럽의 배보다 훨씬 더 낙후되고 구린.

그러나 엄연히 갤리였기에 갤리와 갤리 간의 전투가 성립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라나다 또한 말라가에 함대를 집결하니, 세 도시의 함대는 서로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어 몹시 큰 스케일의 덫이 되었다.

하지만 마라케시 마린 왕조의 술탄은 과욕을 부렸다.

그 덫 안에 이미 걸린 존재가 있었다.

포르투갈의 세우타는 지브롤터의 밑에 있었지만 현재는 포르투갈의 영토.

기독교 세력이 일순간 거세된 이 해협에서 그들은 다소 무방비하게 놓여져 있었다.

물론 세우타의 주둔군 또한 만만치는 않았기에, 마라케시는 큰 군대를 모아야만 했다.

술탄은 이 세우타를 정벌하여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수만 있다면 술탄위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칭송과 세우타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세력을 일구어 와타시 가문과 대적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것은 분명한 과욕이었지만, 여파는 영 엉뚱한 곳에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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