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09화 (109/653)

카스티야와 아라곤

사제 조제프.

가스코뉴 지방의 미미장에서 태어난 그는 긴 전란 동안에도 신앙의 빛을 지키며 살았다.

그의 독실함은 널리 알려져 사제로서 높은 곳에 오를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러나 조제프는 외지에 나아가 선교를 하는 것을 택했다.

어떠한 우여곡절이라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고된 길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는 방향을 짐작하자면 남서쪽으로 끌려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정체 모를 이 원주민들은 이상했다.

다른 원주민들은 언어조차 세밀하지 않았고 옷도 잘 입고 다니는 바가 적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개의 문명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확실했다.

거대한 나라가 밑에 있었던 것이다.

‘순교자의 피가 아키텐의 들판을 적시더라도….’

조제프는 엄습하는 공포에 떨면서도 기도를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마침내 거대한 야영지의 한가운데에 도달했을 때 그는 주변에서 끔찍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입에 재갈이 묶인 사람들은 등짐을 메고 수많은 물자를 나르고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헐벗은 누군가가 풀썩 쓰러지면, 채찍을 들고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원주민 하나가 등짐을 벗긴 뒤 능숙하게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간다.

“…….”

“[email protected]#$%#?(배가 고프냐?)”

그를 끌고 가던 자가 키득거리며 조제프를 때려 앞으로 똑바로 걸어가게 하기 전까지 조제프는 멍하니 저자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끔찍한 불길함이 머리를 감돌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 감정도 없어질 것이니.)”

철제 무기를 허리에 찬 독수리 전사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치치멕강 유역에 세워지고 있는 도시.

옛 왕 이츠코우아틀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이츠코우아티틀란(Itzcōhuātitan, Reynosa)은 북부의 중요 거점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남부에서 전쟁 물자들이 원활하게 오고 가기도 했고 이 땅에서 난 식량도 이제는 꽤 넉넉하게 산출되고 있었다.

물자 운송은 대게 틀라메메(짐꾼)들과 해안의 카누를 통해 공급되었다.

꽤 먼 길이지만 아즈텍인들도 마야인처럼 도로를 깔 줄은 알았다.

틀라메메들은 인간목장의 포로들을 잘 이용해 이곳을 오고 갔다.

그들은 가축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그 효용성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것이었다.

수송에 투입될 대형가축이 없으면 인간을 쓰면 되지 않는가?

중요한 일을 하다 지쳐 쓰러지면 식량이 되는 것은 동일하니까.

몬테수마는 틀라토아니가 된 이후 대체로 이곳에 머물렀다.

그의 형이자 무척이나 유능한 재상 겸 장군인 틀라카엘렐은 그에게 나아갈 길(비전)을 제시했다.

“북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 도시에 기거하시는 것이 주요할 것입니다.”

“테노치티틀란의 주민들이 화가 나지 않겠소?”

“성스러운 아즈틀란의 옛 땅에 다시금 되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니 그들로서도 마냥 반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북방에서 기원한 아즈텍은 다시금 북방으로 돌아갈 숙명을 지녔다.

전설의 땅, 아즈틀란(Aztlān)으로.

틀라카엘렐의 정치력과 연설력은 상당했다.

북진(北進)은 그들의 종교적 교리가 되었고, 곧 거부할 수 없는 신앙이 되었다.

근래 그들은 북쪽 해안가를 따라 포치테카를 파견했다.

카누를 타며 북쪽을 정찰한 포치테카들은 이쪽 유역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땅이 북방에 펼쳐져 있다고 보고했다.

아마 그들의 선조가 발원했다는 아즈틀란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침 그곳에 먼저 자리를 잡은 자들이 있었다 했지.

포치테카의 말로는 그들 또한 외부에서 온 민족이란다.

그 부족은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상당히 강한 전사들이라 했다.

실제로 선발대를 파견해 본 결과 무기나 기타 여러 가지의 전투 능력은 아즈텍인들을 압도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다소 멍청한 듯하군.’

포치테카들을 무방비하게 받아들인 덕분에 많은 희생에도 정보는 캐올 수 있었다.

때마침 그곳에 갔던 정찰대가 포로까지 잡아 왔다 했지.

― 무릎 꿇어라. 틀라토아니의 앞이다!

모진 고초를 겪은 듯 흰색 피부의 인간은 여러 군데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발길질에 쓰러진 조제프가 땅바닥에서 고통을 참고 있는 것을 바라보던 몬테수마가 입을 열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지?”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협조를 할 기색은 있나? 길 안내라든지 말이다.”

재규어 전사가 입을 씰룩였다.

“몸은 허약하나 정신력은 참 타고난 놈입니다. 순순히 협조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흐음.”

사실 무언가 중요한 정보를 캐기 위해서라기보단 보고의 신빙성을 증명하기 위한 포로였겠지.

그를 별 감흥 없이 바라보던 몬테수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간 자체보다도 입은 옷과 가진 물품들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이건 뭔가?”

“장난감 아니면 뭐 싸울 때 휘두르는 무기 비슷한 것이겠지요.”

철제 십자가를 던져버린 그가 자리를 떠나기 직전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형제여, 오랜만에 가족들을 불러모아 같이 식사나 하자고.”

틀라카엘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사 두 명이 조제프를 끌고 일어섰다.

틀라카엘렐 뒤에 있는 시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방식으로 요리합니까?”

“틀라카틀롤리(tlacatlolli, 틀락스칼라인을 이용한 요리)와 비슷하게.”

“알겠습니다.”

“또한 고기를 잘게 다져 틀라토아니께서 흡족해하실 만큼 부드러워야 한다.”

미식가인 틀라카엘렐은 그것 말고도 많은 요구사항을 주문했다.

익힘의 정도와 기타 육질과 같은 사항들.

“명심하겠습니다.”

“아, 참.”

보고를 받고 돌아서는 시종에게 틀라카엘렐이 말했다.

“넓적다리는 최대한 틀라토아니께 드리는 것을 잊지 말고.”

그들이 이색적인 재료로 만든 푸짐한 국물 요리를 즐기고 있을 때.

누벨 오를레앙의 기사들은 한창 카누의 흔적을 발견하고 배를 이용해 그 뒤를 쫓고 있었다.

* * *

알바로와 카나리 그리고 고려는 복잡미묘한 관계를 가졌다.

지금 그들은 무역으로 큰 이득을 누리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서로를 우호적인 세력이라 인식하지 않았다.

고려의 존재를 처음 알자마자 알바로는 포르투갈의 사절단과 토르데시야스 궁정에서 만나 고려를 견제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가 희망곶 조약으로 선수를 쳐 포르투갈의 이목을 동쪽으로 고정시키자 알바로 또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화해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 뒤로 두 세력 사이는 별로 나쁘지 않았다.

서로는 전쟁을 벌일 만큼 이권이 첨예하게 대립하지 않았으며, 아직 그럴 만한 발전도도 가지지 않고 있었다.

정치적인 문제도 있었다.

알바로는 자신의 파벌에 카나리 대공을 끌어들여 돈줄을 쥔 김에 자국 내의 권력투쟁을 정리해나가고 있었고 상민도 해제와 기타 등등의 이유로 여러모로 바빴으니.

한숨을 돌린 이후에도 상민은 굳이 알바로를 적대하지 않았다.

인간성을 차치하고 그는 꽤 다루기 쉬운 인물이었다.

부패한 관리는 그 노골적인 욕망을 채워주기만 한다면 배신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상민은 은근히 그의 집권기가 조금 더 오래 가기를 원했지만….

결국 간신은 간신다운 최후를 맞는 법인가.

알바로는 예전보다 훨씬 더 강성한 세력을 자랑했으나, 그의 오만은 그 능력보다도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주군 후안 2세의 왕비 마리아를 독살했다.

독약을 마신 마리아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며 알바로를 범인으로 지목했으나, 어떠한 조치도 없었다.

이미 카스티야의 군주는 사실상 알바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그러나 알바로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힘에 더욱 심취해, 마침내 저 먼 바다 너머의 땅에 던진 갈리시아의 엔리케조차 살려두지 않기로 한 것.

엔리케에게 선물을 보내는 척하며 보낸 하수인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는 계략을 꾸민 그였지만 공교롭게도 엔리케는 코앞에 위치한 동예와의 분쟁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히스테릭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잠을 설치던 엔리케는 명색이 산티아고 기사단장답게 한밤중 침실에 잠입한 알바로의 자객들을 어찌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제압하는 것에 성공했다.

엔리케는 마침내 이 지긋지긋한 땅을 벗어날 명분을 얻었다.

“알바로의 만행이 도를 넘었다!”

포르투갈 왕실의 피가 흐르는 마리아의 죽음과, 아라곤 왕실의 피가 흐르는 엔리케의 암살미수.

한미한 가문의 한낱 사생아 출신의 사환이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저지른 이 패악에 이베리아반도의 모든 왕실이 분개했다.

카스티야를 사이에 두고 아라곤과 포르투갈이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그들까진 어떻게 막을 궁리를 해 보려던 알바로는 마침내 대고려 정책에 큰 관심을 지니고 있는 에우제니오 4세가 그를 공식적으로 파문하자 눈앞이 어두컴컴해지는 것을 느꼈다.

혈통과 가문, 혹은 성품의 고귀함이 아닌 오직 왕의 총애에서만 기원했던 그의 권력은 열심히 쌓아 올린 기간이 허무하도록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알바로는 후안 2세와 그의 아들을 인질로 삼고 저항을 벌이는 등 끝까지 추태를 일삼다 결국 측근의 배신에 제압당했고 마침내 1438년 비야돌리드의 광장에서 목이 잘리고야 말았다.

그가 남긴 역사의 흔적은 상당히 깊었다.

후안 2세는 연약한 정신에 일련의 사건을 버틸 수 없었는지 칩거를 선언했고, 인질이 되었던 그의 아들 또한 그때 입은 상처로 시름시름 앓다 며칠 뒤 죽었다.

갈리시아의 엔리케는 귀국을 하여 후안 2세의 섭정이 되었고 노골적으로 친 아라곤 정책을 폈다.

아라곤의 행보가 카스티야의 행보였으며, 그의 반대도 성립했다.

후안 2세가 더 이상의 후사 없이 죽는다면, 그 왕위 또한 같은 트라스타마라 가문에게 돌아올 것인즉.

만약 시칠리아와 나폴리 쟁탈전에 참여하고 있는 아라곤의 현 왕 알폰소 5세가 승리한다면 그 직계는 시칠리아 왕위를 다스릴 것이고.

둘째 형은 아라곤을 다스릴 것이고.

자신은 카스티야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

원래부터 형제들 간의 우애가 나쁘지 않았고 적어도 즉위 전까지는 잘 보여야 할 동기도 있는 까닭에 그는 가문에 한동안 충성을 다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첫 목표는 고려였다.

뜬금없는 말은 아니었다.

대고려 무역을 주도하던 카나리를 소유하고 있는 테네리페 가문은 몇 번 가주가 바뀌었지만 대체로 알바로에게 충성을 했던 자들이었다.

또한 아라곤은 제노바와 샤르데냐 건으로 한창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은 누에바 갈리시아의 총독으로 가 있을 시절부터 동예와 그 배후에 있는 고려를 좋지 않게 보고 있었으니.

여러 이익을 고려하고 또한 후에 왕관의 권리를 인정해줄 교황과의 사이를 위해 그는 반고려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카나리의 고려 거류지를 폐쇄하는 것은 물론 부유한 상인들의 재산까지 압류해 버린 것.

상인들은 재산을 버리고 홀몸으로 떠나거나, 혹은 기독교로 개종한 뒤 카스티야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해야만 재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물론 후자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약속이 어느 정도까지 지켜질지는 몰랐다.

눈물을 머금고 전자를 선택한 자들도 있었고, 막연한 기대로 후자를 선택한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 일련의 행위는 서쪽의 나라들을 크게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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