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십자군(1)
토르데시야스 궁전.
비야돌리드.
카스티야.
텅 빈 궁정, 빈 옥좌 밑에는 옥좌보다 더욱 사치스러운 자리가 있다.
전에 그 자리에 앉은 자는 알바로 데 루나였지만, 그는 이미 목이 뎅겅 잘려 저 성 밖에 걸려 있을 것이다.
엔리케는 그 사치스러운 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빙글빙글 은제 고블릿을 돌렸다.
목 뒤로 한 모금의 붉은 액체가 넘어갈 때의 그 떫은맛 특유의 매력을 천천히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다.
흡족한 표정으로 자신이 앉은 의자를 어루만지던 엔리케가 다시 한 모금 와인을 마셨다.
하지만 더욱 욕심이 난다.
와인의 맛도, 그리고 또 다른 것도.
그는 옥좌를 올려다보았다.
수수하지만 장엄했다.
동물의 모피나 가죽 그리고 부드러운 천을 깔지 않으면 딱딱하고 서늘할 것이다.
하지만 그 가치는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와 비교할 수 없다.
아직은 건드릴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할지도 모른다.
잠시지간 옥좌를 훑어보던 그가 다시금 잔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아주 약간 풀어진 맛.
포도주라는 것도 시간을 두고 마시면 맛이 더 달콤해지듯.
옥좌 또한 마찬가지겠지.
엔리케는 껄껄 웃었다.
후안 2세는 마치 등딱지에 몸을 숨긴 거북이처럼 칩거를 했고, 왕국의 모든 사안은 이제 자신에게 올라왔다.
이것이 권력의 맛이냐?
알바로 네놈은 이 달콤한 맛을 혼자만 느끼고 있었구나?
엔리케는 패자를 비웃었으나, 그 자신의 눈동자 또한 예전의 알바로와 비슷하게 변해가는 것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왕국의 재정을 맡아보는 재무관이 그의 곁으로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측근 출신의 믿음직한 놈이었다.
“무슨 일이냐.”
“고려의 항의 서한이 왔습니다.”
마치 이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을 한 듯, 고려의 사신을 태운 협저선 한 척이 빠르게 세비야의 항구에 기항해 외교 서한을 건넸다.
“그래?”
엔리케는 고블릿을 든 손을 내려놓으려는 시늉조차 없었다.
따라서 재무관이 크흠, 큼 몇 번 목을 가다듬은 후 서한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렸다.
“…….”
“…….”
외교적 예법에 충실한 고려의 서한은 노골적인 도발은 없었으나 빈정거림과 힐난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
당장 조치를 취하고, 또한 받은 피해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원하는 그들의 말에 엔리케는 그저 콧방귀만 뀌고 있었다.
재무관이 불편해 보이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근조근 말했다.
“구류된 고려의 상인들을 풀어주시는 게….”
엔리케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황금은 실로 달콤했다.
“내가 갈리시아에 있을 때나 참았지, 본국의 힘을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이상 저들은 한낱 멍청하고 무도한 사라센들과 다를 바가 없는 놈들이다.”
“…심사숙고하셔야 합니다.”
그는 그저 빙글빙글 웃었다.
“재무관, 걱정이 되는가?”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을 고하는 것이 되겠지요.”
이대로라면 누에바 갈리시아가 위험합니다.
재무관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엔리케는 정권에서 축출당할 때 알바로에 의해 알부르케르케 등 많은 봉지를 빼앗겼다.
규모도 그렇고, 권리도 그렇고 사실상 그의 메인 봉지라 할 수 있는 누에바 갈리시아를 걱정하는 재무관의 모습에 엔리케가 웃었다.
“누에바 갈리시아에 뭐가 있나?”
“…소신은 아라곤에 위치한 암푸리아스 영지를 관리하느라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아, 그랬었지.”
그는 씩 웃었다.
“요새가 있을 것이고, 방어설비도 있을 것이고, 애써 개간한 농경지도 조금은 있을 것이고.”
교회도, 접안시설이 마련된 항구도, 또 무엇도 무엇도.
재무관이 더욱 의문이 생긴 얼굴로 쳐다보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던 엔리케가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다.
“제아무리 맹수라 하더라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던져주면 시선이 돌아가기 마련이지.”
금은은 전부 내가 가져왔다 하더라도 말이야.
엔리케가 입술을 씰룩였다.
“하오시면.”
엔리케는 쭉 보고서를 훑었다.
고려의 동향에 대한 정탐자료가 가득 담긴 그 보고서는 그들의 강력한 해군에 비해 보잘것없는 육군의 취약점을 노골적으로 적어놓고 있었다.
대부분 원정을 떠났다 하던가.
그 원정이 거의 몇십 년 동안 진행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래 걸린다는 것은 분명했다.
“방어할 곳이 많은 짐승이야. 참으로 욕심이 가득한 놈이지.”
영토에 비해 인구는 너무나 적다.
저들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남들은 그 가시 때문에 상당히 강해 보이는 착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갈리시아의 엔리케는 누에바 갈리시아에서 그동안 꽤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저들이 왜 저들의 탐욕스러운 영토욕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지.
그들의 한계가 무엇인지.
약점이 무엇인지.
‘고슴도치는 그 가시에 손을 뻗어 잡는 것이 아니다.’
그 따가운 위를 뒤집고, 말랑한 배에 비수를 들이밀어야 잡을 수 있는 법.
엔리케는 포도주를 전부 마시고는 손을 튕겼다.
― 챙그랑
고블릿이 허공을 날았다.
비싼 공예품이라, 하인 하나가 몸을 날려보았지만, 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잡아낼 수 있었다.
“카스티야 의회를 소집하라.”
병사 하나가 명을 받고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재무관이 기함했다.
“전쟁을 하시려 합니까?”
엔리케는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만약 그것이.
“신께서 원하신다면(Deus Vult)!”
엔리케의 입가에 피처럼 붉은 포도주가 몇 방울 흘러내렸다.
* * *
카스티야 회의는 엔리케의 뜻대로 흘러갔다.
알바로에 관련한 자들이 죄다 숙청당한 이후 그 자리에는 엔리케의 측근들이 곳곳에 심어져 있었기에.
“우리는 바다 건너의 악마를 칠 것이다!”
성녀 잔 다르크가 말했다고 칭해지는 서쪽의 악마 제국.
남쪽에 황금과 수많은 자원, 그리고 풍요로운 대지를 품고 있다는 제국.
고려에 검을 뽑은 카스티야는 대외의 동맹국들의 힘을 빌리기 시작했다.
비야돌리드 궁정에서 수많은 전령들이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카스티야는 교황청, 아라곤과 프랑스, 나폴리와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잉글랜드와 제노바, 베네치아 등에 도움을 청했다.
한바탕 진통을 앓았던 교황청은 떨어진 교황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도 명운을 걸어야 했다.
대립교황 출신이었지만 바젤 공의회를 뒤에 업고 에우제니오 4세를 밀어내며 새로 선출된 펠릭스 5세는 큰 지지의 뜻을 표하며 수많은 콘도티에로(용병)와 자금을 제공했다.
“주님께선 해상십자군 또한 축복하실 것이다!”
백년 전쟁의 후유증이 짙게 깔려 있는 프랑스는 아직 골골대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많은 도움을 준 우방에게 군사적 지원을 결정했다.
“신께서 원하신다(Dieu le Veut)!”
신성로마제국도 아직도 후스파와의 전쟁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 오스만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황에 직접 군사를 보내진 않았지만 지지를 표하며 세금을 더 걷어 금전적 지원을 해 주었다.
“로마는 히스파니아의 간청에 마땅히 응답하리라.”
알폰소 5세가 장악한 나폴리와 아라곤은 적극적인 참가 의사를 밝혔다.
“트라스타마라의 명예를 위해!”
베네치아는 엄청난 금을 약속했다.
“또한 금과 은을 위해!”
물론 이리저리 통수를 맞은 제노바와 잉글랜드는 도착한 서한을 찢어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미친놈들, 제 스스로 무덤에 기어들어 가는구나.”
사태를 관망하는 자들도 많았다.
부르고뉴와 브르타뉴, 나바라와 북이탈리아의 작은 나라들은 능력이 되지 않거나, 대국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기울이고 주판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유럽의 절반의 힘이 모였다.
강대국 포르투갈은 참전하지 않았다.
명문화된 조약을 깨기는 몹시 두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고려가 그 큰 함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이기에, 그들에게 취약한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유린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기독교인이기에, 교황의 명령을 거부하진 못했다.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면 함선을 판매해 줄 수는 있소. 다만 우리의 깃발을 걸지 마시오.”
포르투갈은 가장 노후화된 것들을 위주로 선박을 판매해주기로 했다.
* * *
유럽에는 영지와 가문에 따라 수많은 문장과 깃발들이 난립해 있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그러했으며, 프랑스도 그러했다.
하지만 국적기와 왕실기는 분리될 필요성이 있었고 대항해시대가 열리며 국가 단위의 해상기를 이용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그들은 제각기 해상기와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카스티야와 포르투갈부터 시작이었다.
고려 또한 국기를 제정했다.
본디 황실의 깃발은 쌍룡지손이라는 이명답게 두 마리의 오조룡이 서로 또아리를 틀고 동과 서를 향해 울부짖고 있는 쌍룡기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국적기에 신성한 황실기를 쓸 수는 없는 법.
비록 철학의 흐름이야 상당히 달랐지만, 대중들에게 있어서는 불교와 도교, 그리고 유학의 풍습이 약간은 남아있기에 상민은 고려국기를 제정함에 있어 별 고민을 하지 않았다.
삼태극(三太極).
제각기 천지인을 상징하는 동아시아의 상징이다.
유교와 도교, 그리고 불교의 법륜 가운데에 보이는 간킬(gankyil)이기도 했다.
심플함이 최고인 법도 있지.
옛 한국의 태극기에 달린 사괘의 방향조차 읽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민은 굳이 국기를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여겼다.
동예는 달랐다.
삼재와 태극을 채용한 상국의 국기를 본 그들은 주역의 팔괘를 인용해 자신들의 국기를 만들었다.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패턴이다.
만종 교국은 보기엔 흠칫 놀라는 문양을 사용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지금 이 시기의 이곳에서는 알아볼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 * *
고려는 빠르게 행동을 했다.
“엄마!”
“쉿, 조용히 해!”
갈리시아의 엔리케가 휘하 산티아고 기사단을 이끌고 떠난 이후 그의 봉역, 누에바 갈리시아는 무책임하게 버려졌다.
왕위쟁탈전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기에 엔리케는 오로지 소수의 인원들만 선별한 후 개척지를 떠나버렸던 것이었다.
이후에도 고국으로 다시금 돌아가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물론 배는 한정되어 있었다.
떠난 자들보다 남은 자들이 훨씬 많았다.
적어도 여섯 배는 더 많았다.
이들은 마치 제집 안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행동하는 고려인들을 불안에 떨면서 바라봐야만 했다.
― 저벅저벅.
위풍당당한 삼태극기가 하늘에 펄럭였다.
저항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
개척지에서 나름대로 인망과 공로가 있어 보이는 늙은이 하나가 점령군을 지휘하는 이유의 앞에 끌려왔다.
마치 오줌이라도 지릴 듯 덜덜 떨며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늙은이의 모습에 이유가 짧게 혀를 찼다.
“이곳의 주민은 몇 명인가?”
“총 이만 삼천팔십육 명입니다.”
“꽤 많군.”
누벨 오를레앙보다도 개척한 시기가 길었기에, 떠난 사람도 계산해보면 원래부터 주민의 숫자 자체는 상당히 많았다.
조금 더 환경이 꾸질꾸질한 것이 문제였지.
모두가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배고픔과 불안함에 휩싸인 이국적인 유럽인들.
피부색도, 언어도 다르다.
“본 제국은 제국에 귀화하는 이를 박해하지 않는다!”
이유의 말이 카스티야어 통역에 의해 크게 울려 퍼졌다.
“너희들이 제각기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황상 폐하가 있는 남쪽으로 절을 한다면, 그대들은 목숨을 부지할 것이다!”
“우리들의 믿음은 어찌 됩니까?”
누군가 물었다.
남아있던 사제로 보였다.
참 간덩어리가 부은 놈이로다.
“개종합시다! 회개는 나중에 해도 되잖소!”
옆에서 배가 튀어나온 사제 한 명이 그의 옆구리를 치며 말했지만, 말한 당사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코란과 초승달같이 휘어진 검을 들고 진실된 믿음을 믿으라며 개종을 협박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건 한 곳으로 모아 분리수거, 아니 격리시킨 만종 교국이나 하는 행동이고.
어떠한 믿음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
점령군 장수 이유처럼.
그는 놀라운 대답을 했다.
“너희들의 신념은 박해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제국의 법과 관습은 성역이 없으니. 너희들이 먼저 제국에 충성을 다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또한 황상에 의해 존중받으리라.”
“……!”
당시로선 꽤나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남아있던 사제는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남쪽 어디로 하면 됩니까?”
고려인 병사 한 명이 시범을 보였다.
사제는 어설프게 그를 따라 했다.
유럽에 오래 자리하고 있었던 봉건제는 이제 조금씩 끄트머리가 닳아 없어지고 있었지만 일반 평민의 삶이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비로소 고려인들이 칼을 들고 가족을 해하는 무리들이 아닌 것을 확신하게 된 누에바 갈리시아의 주민들은 사제를 따라 남쪽으로 엉거주춤하게 절을 다섯 번 올리고 세 번 조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