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08화 (108/653)

누벨 오를레앙(3)

고려의 재상이 화가 난 듯 떠났다.

잔은 그를 쫒아가거나 만류할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닥친 일에 당혹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에.

그녀는 서둘러 참회실로 향했다.

그러한 그녀의 뒤에 대고 마티외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문을 잠갔다.

― 달칵

“…아무도 들이지 말게 해 주세요.”

문 너머로 전한 소리에 마티외의 희미한 대답이 들렸다.

“알겠습니다.”

귀에 들리는 그의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지자 동레미의 처녀는 신체적, 심리적 갑주를 벗어던지고 차디찬 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그녀를 인도했던 천사와 성인들의 목소리는 이미 사라졌다.

다시금 계시를 받기 전, 그 옛날로 돌아가 버린 듯한 공허하고 끔찍한 느낌에 그녀는 자꾸만 애원했다.

‘제발….’

하지만 아무리 애원해 보아도 그분의 굳게 다문 입은 열리지 않는다.

어떠한 전령과 사절도 찾아오지 않았다.

울다 지친 잔은 힘이 다했는지 차가운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머리는 핑핑 돌고 있었다.

열이 나는 듯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강인한 사람이었지 육체적으로 강인한 사람은 아니었다.

계시가 없다면 나아가질 못하는.

서늘한 돌바닥의 냉기가 이마를 타고 들어와 그녀의 열을 조금 가라앉혔다.

― 쏴아아

자못 사나운 빗소리 속에서 잔은 천천히 다시금 그녀의 계시를 돌아보았다.

‘나는 분명히 교황청에서 계시를 보았어.’

동쪽과 서쪽의 악마가 유럽에 불을 뿜고 있는 그 광경은 정말 아직도 뇌리에 남을 정도로 끔찍했다.

전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그 악마가 오스만과 고려라 단언했다.

그 믿음은 잔도 공유하고 있었다.

고려, 고려인, 고려인 재상.

그리고 그 악마의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자는 자신의 앞에 와 무릎을 꿇고 십자가에 기도했지.

‘악마의 간계일까?’

하지만 성수를 찍고 성사를 올리는 적그리스도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있을 수 있어.

사악한 잉글랜드인들처럼.

초창기의 백년전쟁은 단순한 왕위계승전쟁에 불과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그 의미는 상당히 변질되었다.

같은 신앙을 공유하는 두 나라는 길어지는 전쟁의 진흙탕 속에서 추악하게 변모해갔다.

그녀가 살던 동레미는 성 게오르기우스의 십자가(잉글랜드 기)를 든 주교와 군인들에 의해 불타올랐다.

그들은 정녕 사특한 자들이었다.

천사와 성인들께서도 몰아내라고 하셨을 만큼.

그 이후, 그녀는 계시에 따라 그 사악한 자들을 고향과 프랑스의 땅에서 몰아내는 것에 인생을 바쳤다.

그러면 저 고려인도 마찬가지의 사람일까?

앞으로는 저리 행동하지만 뒤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처음 마주했을 때는 잔은 그자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영혼과 신념을 본다는 그녀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느낄 수 없어.’

그가 자신의 앞에서 행한 미사 이후에.

돌고 돌아 그녀는 또다시 풀 수 없는 의문에 휩싸였다.

― 똑 똑

비는 그쳤다.

해답은 여전히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덧 날이 밝아왔고 잔은 정신을 깨우기 위해 차가운 물만을 마신 채 다시금 그와 대면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마티외조차도 대동하지 않았다.

그와 할 말이 참 많다.

‘보고 들을 수 없더라도 내가 할 일은 자명해.’

잔은 다시금 단단한 갑주를 뒤집어쓰고 그를 불렀다.

이제는 어떠한 혼란에도 머뭇거리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가 다시금 회의실에 모습을 비춘 순간, 잔은 까무러칠 듯 놀랐다.

‘……!’

고려의 재상의 등 뒤.

그녀는 거대한 후광(後光, Halo)을 보았다.

‘맙소사.’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그 빛은 그녀가 동레미의 들판에서 보았던 성 미카엘과 다른 천사들의 그것들과 같았다.

따스하고 경이롭다.

신성하며 영험하다.

아름답고 경건하다.

그의 머리 뒤에서 뿜어지는 황금의 거미줄과 같은 실타래.

너울거리는 그 빛의 아름다움은 마치 수확을 앞둔 보리밭과 같았으며, 어쩌면 넓게 깔린 황금의 들판일지도 몰랐고, 비밀리에 내보이는 천국의 파편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몸을 휘감고 있는 빛에도 불구하고 그 고려인 재상은 태연자약하게 입을 열 뿐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소, 밤새 쉬지 않으신 겝니까?”

그는 아직은 어조가 독특하지만 발음과 문법상으로는 흠결 없는 프랑스어로 질문했으나, 그녀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 * *

“어제는 실례가 많았소이다.”

“…아닙니다.”

의례적인 사과를 건네고, 상민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째 그녀의 상태가 좀 이상해 보인다.

“북려 대륙 남부는 아국의 법과 제도와 그리고 관습에 따라 적법한 고려의 영향권이 닿는 지역이오. 따라서 누벨 오를레앙에게 정식으로 선언하는 바이니, 내년 1월 1일 전까지, 즉 2개월 이내로 이곳을 떠나기 바라오.”

“…그랬군요.”

뭐라고 했지?

상민은 꽤 오랜 시간 공들여 배운 프랑스어의 지식이 잘못되지는 않았는가 순간 고민에 빠졌다.

순순히 제 발로 나가겠다는 것인가?

광신도 집단과의 한바탕을 준비하던 상민은 다소 놀란 채 말했다.

“방금 내 말에 대답하는 것이었소?”

잔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망측스러운 행위에 상민이 순간 대응하지 못했다.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이.

“재상께선 고려 지하교회(église souterraine)를 이끌고 계십니까?”

지하 뭐요?

상민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자신의 손을 꽉 잡고 기도하듯 눈을 감은 잔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은 수많은 전장을 거닐었던 사람답게 꽤 거칠었지만 모순적이게 부드럽고 따뜻했다.

음, 역사적 인물의 손은 이랬군.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그가 서둘러 대답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

“이해합니다. 고려라는 거대한 나라 속에서 살아남으시려면 어쩔 수 없겠지요. 저 또한 순교만큼이나 진실된 믿음을 이어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녀가 눈을 떴다.

이제는 솔직히 무서웠다.

따스한 감촉에도 불구하고 상민은 서둘러 손을 빼려 시도했다.

“…아니 지금 무슨….”

잔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건지, 자신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인지.

“주님께서는 굳이 성 미카엘과 성자들을 저에게 내릴 필요가 없으셨어요.”

“뭐라는 거야, 이 사람이.”

“당신이 저에게 주어진 계시로군요?”

“좀 놓고 말하자니까, 진짜….”

“하지만 저는 언제든지 순교를 받아들일 생각이 있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와 우리의 믿음은 당신께서 지켜주시겠죠?

그녀의 덧붙이는 소리는 이제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미친.’

좀 놔!

아니 무슨 여인의 악력이 이렇게 세?

상민은 순간적으로 그 강력한 자신의 힘을 받아넘기는 잔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 * *

“저게 미쳤나, 진짜.”

한참 뒤 상민은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저렇게 또라이일 줄은 몰랐는데.

이제 성녀인지 나발인지는 모르겠고, 이제는 그냥 귀신들린 괴팍한 존재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내 안의 작은 아이가 말하는 대로 시키면, 그게 귀신들린 놈이 아니고 뭔가.

아직도 손이 얼얼하다.

솔직히 말하면 이곳에 떨어진 이후 두 번째로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 바로 지금 자신의 손에 찍힌 저 여인의 악력이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문명국으로서 외교적 관례를 어길 생각이 없다. 두 달 뒤, 이번 연도가 끝나고도 이들이 이 땅에 남아있다면 그때 다시금 찾아올 것이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함선에 화약과 포탄을 가득 실어서 오리라.

이유는 시중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얼굴을 지었다.

그럼에도 약간은 안타까운 마음을 흉내라도 내는 듯 속없는 말을 내었다.

“시간이 다소 짧군요.”

유럽까지 가는 데 한 달은 족히 넘는다.

그들은 본국과 교황령으로부터 회신을 받을 시간적 여유도 별로 없었다.

물론 그거야 알 바 아니고.

“굳이 재정비할 시간을 주는 배려를 할 필욘 없겠지.”

― 땡 땡 땡

일행이 모두 함대에 오르고 출발하려는 순간 누벨 오를레앙의 종탑에서 맹렬한 소리가 났다.

그 모습에 고려의 선원들이 흠칫 놀라 주변의 포대를 두리번거렸으나 어떠한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은 그들을 무시하고는 이리저리 급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뭐지?”

“어찌 되었든 우리는 이제 이들의 적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늦장을 부려봤자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아.”

― 출항하라!

상민의 손짓에 선장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선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외적이라도 침입했다면 상황이 격해지기 전에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상민과 일행은 간밤의 폭우에 시달린 듯 비에 젖은 나무 특유의 냄새가 잔뜩 나는 누범선 선미루에 올랐다.

만은 빠르게 멀어졌다.

“누에바 갈리시아는 어떻게 합니까?”

“흐음….”

순수비에 대한 클레임으로 누벨 오를레앙에 최후 통첩을 한 이후, 누에바 갈리시아에도 똑같은 명분을 적용할 수 있었다.

아니 적용해야만 했다.

당연스럽게 카스티야 본국과의 갈등은 유발되겠고, 무역은 끊길 것이다.

“하지만 명분이라는 것이 말이야.”

카나리 공국에 있는 고려인 거류지는 폐쇄되었다.

그곳의 비공식 외교관과 부유한 상인들은 구류되었지만 일부 상인들은 불길한 낌새를 눈치채고 서둘러 빠져나오는 것에 성공했다.

그들을 통해 조그마한 정보를 알게 된 상민은 피식 웃었다.

“이젠 오히려 저쪽에서 우리에게 주는 것 같구만.”

* * *

고려는 누벨 오를레앙에게 1441년 1월 1일까지 퇴거하라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 부근의 순수비는 누벨 오를레앙에서 북쪽으로 대략 14킬로미터 동쪽에 있었다.

꽤 먼 거리에 달랑 비석 하나를 세워놓고 거주민 하나 없이 일대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고려의 강짜는 프랑스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맞서 싸워야 합니다.”

기사들은 전의를 다졌다.

이교도와의 협상은 없어야만 했다.

잔은 계속 분위기가 이상했고 오직 침묵만을 지키고만 있었지만, 이미 좌중의 여론은 결정 난 듯싶었다.

그녀라도 상황을 계속 반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급변했다.

“단장님!”

밖에서 병사 한 명이 회의실을 노크하지도 않고 후다닥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깊은 상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잔을 대리해 에티엔이 물었다.

“생트라이유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생트라이유는 누벨 오를레앙의 최서단에 위치한 영지였다.

해변을 따라 좌우로 길쭉한 영지의 특성상 서쪽의 적들을 방어하기 위한 간략한 목책이 지어져 있었다.

물론 누벨 오를레앙과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생트라이유의 영주, 장이 놀라며 일어섰다.

“누구에게서? 고려인들인가?”

이 인간들이 최후통첩을 날리고 바로 공격을 해?

기사들의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병사가 숨을 고르고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분명히 적대적인 원주민이 틀림없습니다!”

고려인들은 아니라 했으나 그래도 행여나 흉계를 꾸밀까 질과 일단의 병사들을 남겨둔 기사단은 서둘러 서쪽으로 향했다.

가는 데 시간은 딱히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반나절도 안 되어 도착한 곳.

한동안 원주민들을 받아들인 탓인지 가문 이름을 딴 장의 영지 생트라이유(Xaintrailles)는 조금 비대해진 촌락이었다.

누벨 오를레앙의 구성원들은 현재는 기사수도회에 속해 있지만 제각기 이미 가족과 영지를 가진 고귀한 신분임을 참작하여 이곳에서도 영지와 가문을 이어갈 권한을 가졌다.

하지만 말만 영지였지, 아직 아무 기간 설비가 들어서지 않아 흙바닥에 나무 벽을 세우기만 한 군영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촌락에는 이미 한차례 전투가 벌어진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피해는?”

핏물을 뒤집어쓴 병사 몇 명이 간략하게 피해를 보고했다.

적의 선발대 겸 척후대로 짐작되는 인원은 상당히 많았다.

거의 기백에 달했다 한다.

반면 프랑스인들은 오직 여덟 명이 죽었고, 스물다섯 명이 다치는 것이 전부였다.

수의 열세에도 무구와 훈련도의 우세 그리고 가지고 있던 화기를 이용해 적을 효과적으로 몰아낸 모양.

그때 저 멀리 가장 먼저 지어진 교회 건물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잔이 말을 타고 서둘러 가 보니, 수련사제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조제프 사제가 저들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밖에서 원주민들에게 선교하던 조제프 사제는 안전한 목책 뒤로 대피하지 못한 모양.

장이 혀를 차고, 에티엔이 화를 내었다.

“우리의 척후는 저들을 발견하지 못했나?”

잔은 자책했다.

혹시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 고려와의 만남을 위해 중앙으로 병력을 모아 놓기로 한 것이 실책이었다.

교환비는 우수했으나, 기껏 원주민들이라는 것을 감안해보면 희생을 더욱 줄일 수도 있었다.

에티엔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한동안 수비군이 두텁게 있을 동안은 아무런 기색이 없다가, 중앙에 병력을 뺀 이후 급습한다?

“분명히 이들 중에 첩자가 있을 게요!”

에티엔은 사방을 들쑤시고 다녔다.

솔직히 말이 되지 않았다.

정확한 내부 사정을 알며 어느 정도 시험을 해보는 듯 피해를 입자마자 빠르게 도망가는 것은 이 주변의 야만인들답지 않게 상당히 전투와 정보에 능한 자들이라 생각이 되었다.

전장을 많이 겪은 다른 장수들 또한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지 그를 말리지 않았다.

본래부터 이곳의 원주민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그는 이번에는 그 놀라운 직감을 이용해 무언가 다른 자들과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원주민 무리들을 발견했다.

나와틀어를 쓰는 자들은 다른 원주민들과 다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언어의 분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거리감.

“네놈들, 분명히 이들과 억양과 말하는 것이 다르다!”

포치테카(Pochteca).

상인 중에서 충성심과 외교적 능력이 뛰어난 자들을 가려 뽑아 통상을 빌미로 상대의 부족에게 심어놓는 아즈텍 스파이를 칭한다.

본래는 꽃전쟁을 위해 마련한 제도였지만, 이미 인간목장 체계가 자리 잡으면서 그들은 조금 더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존재들이 되었다.

이제는 일신의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포치테카는 숙적 마야에 침투해 있었지만, 최근에 뽑힌 자들은 대부분 북쪽으로 파견되었다.

여러 제약 속에서도 천천히 꾸준하게 확장하고 있는 아즈텍의 선봉에 서 주변의 부족을 정탐하는 역할을 하는 셈.

그리고 한 무리의 포치테카들이 우연히 이 누벨 오를레앙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 괴상한 생김새의 이방인들은 무척 강력해 보였지만 주변 부족에 비해서도 오히려 침투하기 쉬웠다.

결국 들키긴 했지만 이미 포치테카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한 상황.

기사단이 크게 분노하며 그들을 끌고 성채로 돌아갔다.

“이곳을 비우고 모든 인원은 본성과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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