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려대륙(1)
중려대륙은 파남(派南, 파나마의 변형어) 이북부터 치치멕강 유역까지의 영토를 일컫는 학술적 말이다.
본래는 파남 이후의 땅은 북려로 총칭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세력의 다원화로 인해 그 구분이 세밀해졌다.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하기 전, 이 중려대륙에는 분명히 터줏대감들이 있었다.
칼리나해의 그 수많은 섬들의 원주민 문명을 일컫는 말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의 문명을 형성하기에는 너무 낙후되어 있었고, 너무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반면 마야와 아즈텍은 달랐다.
원래부터 가진 문명도 상당했으며 이제는 하나의 ‘국가’를 형성할 만큼의 정치적 역량을 보유한 상태였다.
그 기원을 따져보자면 결국은 고려였다.
고려는 이 땅에 개천전 6년, 즉 유럽력 1270년에 도달한 단체였다.
그 세력의 영향은 비단 본거지인 창강 대평원 유역에 한정되지 않았다.
바이러스와 철기는 천천히 대륙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아무래도 전자가 더 빨랐다.
고려인 몸에 실려 새로운 대륙을 건너온 대역병, 두창은 마야의 인구수를 절반 이하로 감소시켰다.
아즈텍 또한 그 역신을 피해갈 수는 없었으리라.
그들은 칵틀 루임같이 외부 문명의 혜택을 받은 곳조차 없었으니, 인구의 낙폭이 더욱 극심했다.
그러나 중려대륙은 그 규모와 환경에 비해 극도로 인구가 과도했던 땅이었다.
기후는 남쪽에 비해 좋았지만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대체로 건조했다.
부양가족은 많은데 먹을 것은 별로 없는 상황.
철기의 도래 이전이니, 그들은 땅을 깊이 갈지 못했고, 농업용, 수송용 가축 또한 몹시 제약이 많았다.
오히려 이 대재앙은 그들이 다시금 새로이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어마어마한 수의 인명이 죽어 나갔지만 아직은 조직적인 유럽의 침략이 없는 시절.
그들은 백 년도 넘는 시간 동안 천천히 그 피해를 복구해나가기 시작했다.
* * *
마야 세력은 대역병 이후 오히려 부흥기를 맞았다.
이는 칵틀 루임의 주도하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려인의 도래 이후 철기와 가축이 들어오며, 농경기술과 식생활이 개선되었으며 정주민 국가의 기틀이 확고해졌다.
1대 카롬테, ‘그분의 절름발이 시종(바다새의 부리)’의 후손들은 군주국을 건설하고 중앙집권적 요소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야판과 치첸 이트사, 즈비차툰, 칼라크물 등 수많은 도시들이 그들의 손에 떨어졌다.
그들은 칵틀 루임이라는 말만으로 자신들을 칭하기엔 부족하다고 느꼈다.
마야는 느슨한 연합국가에서 한 발 더 나아가길 원했다.
신생 왕조의 권위는 보통 대외 관계에서 오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 해권의 치세 말에 그들은 고려에 입조하게 되었으며, 정식으로 마야(摩倻)의 국호를 받았다.
마야국의 이상은 당연하게도 고려였다.
문화, 종교적으로 가장 친숙하며 주변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
자신의 피에 고려인들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마야 귀족들은 그들의 풍습을 무리 없이, 혹은 오히려 열성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군주는 카롬테이지만 왕이라고 달리 표현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사잘은 공으로 혼동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들의 정부는 고려를 본떠 3부 10조의 체제가 되었고, 지방 행정조직도 나름대로 모방한 흔적이 보였다.
고려풍(高麗風)으로 한정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풍습이 전래되기도 했다.
정치체제와 문화가 발달되는 만큼이나 종교적 교리 또한 변화되어갔다.
그들은 예전 마야의 도시국가들과는 달리 개혁된 쿠쿨칸 신앙{고려의 학자들은 이를 후납 쿠(Hunab Ku)적 쿠쿨칸 신앙이라 부른다}을 믿고 있었는데, 이는 원래 형태와는 상당히 바뀐 신앙이었다.
실제적인 인물의 위업을 통해 일신론적 요소를 받아들인 개혁 쿠쿨칸 신앙은 뜬구름 잡는 듯 모호한 예전의 신앙과는 달리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도덕적 규범은 잔혹한 풍습을 빠르게 바꾸었다.
애초에 전 지구적으로 인류의 문명은 잔혹한 쪽에서 그렇지 않은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였으니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다 좋은데, 골치 아픈 일도 있었다.
고려의 세계일주가 끝나고 그들이 해문에 대규모로 참배를 왔는데, 그 이유가 사뭇 독특해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우리가 옛 고려의 고서들과 성현들의 말씀을 연구한 결과, 그분께서 창양에 나라를 건국하시고 홀연히 해문에서 자취를 감추신 이래, 청해의 통령이 되셨다가, 아국에 와 성스러운 말씀을 전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뭔 괴상한 말인가.
주어는 분명히 그들의 신, 쿠쿨칸을 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 행적 자체를 태조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태조께서는 청해의 초대 통령과 동일인이라는 것이 아닌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첫 통령의 재임 기간을 고려해보면 태조께서 백이십 세도 넘게 사셨다는 것이 되네!”
비밀은 오로지 황실의 한정된 인원만이 공유하고 있었으니 역사학자들은 코웃음을 칠 수밖에.
“당신들은 그분의 신성함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흰 옷을 입은 사제단들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자 반론을 제기했던 학자가 움찔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니오.”
여기서 믿는다고 하면 그들은 동료 학자들에 의해 멍청이 취급을 받게 될 것이고, 믿지 못한다 하면 그들은 아직도 학술적으로 쉽게 건드릴 수조차 없는 태조 개천제를 모욕하는 것이 된다.
역사학자들은 냅다 꽁무니를 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사제단들의 말은 은근히 설득력이 있었다.
해민이 사라진 이후 청해가 곧바로 세워졌고, 청해의 통령은 심지어 얼굴을 인식할 수 없도록 가면을 쓰고 다녔다.
또한 그들은 맨땅에서 도시를 만들 정도로 유능했으며, 무력적 능력까지 겸비한 자들이었다.
충분히 가능한 소리.
여태껏 그 사실에 관한 고려 안의 이야기들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혼란을 주는 듯 빠르게 사라졌었지만, 칵틀 루임의 신학자들은 그러한 방해 없이 진득하게 하루 종일 쿠쿨칸의 말씀과 행적을 담은 경전을 읽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그 언어적 수사법과 문체, 필체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의 사적 습관까지 모조리 분석하여 자신들의 신이 이곳의 태조라는 거의 확정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고려 내의 민간설화와 전설들, 그리고 개국신화를 모조리 분석할 정도로 열의가 넘치는 그들은 심지어 현 시중에게 알현을 요청하기도 했다.
정녕당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상민이 펄쩍 뛸 정도로 놀라며 온갖 핑계로 한동안 공식 석상에 자리하지 않고 그 지독한 스토커들이 고려를 떠나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소한 일화에 불과했다.
* * *
부흥을 맞이한 마야의 북서부엔 삼각동맹(예시칸 틀라톨로얀)이 있었다.
아즈테카와 텍스코코, 틀라코판이라는 세 알테페틀(민족적 도시국가)이 연합해 세운 이 나라는 대역병 이후 삼각동맹의 균형추가 사실상 아즈테카로 쏠리게 되며 아즈텍이라는 국명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거대한 텍스코코 호수의 늪지대를 개간해 효율 높은 치남파 농법을 실시하던 아즈텍은 극심한 두창의 후유증에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인구를 복구할 수 있었고 텍스코코와 틀라코판을 완벽히 흡수했다.
치남파 농법은 중려대륙의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꽤 혁신적인 농법이었다.
그 개별의 요소를 뜯어보면 고려에겐 사뭇 일반적인 이치를 담고 있었다.
비료의 사용.
이앙법과 같이 모판을 이용해 노동력을 절감하는 것.
민물고기와 수상 생명체를 이용한 공생법.
물을 가득 채운 곳에 작물을 기르는 수경(水耕)적 요소.
대체적으로 습지가 대부분인 양강도(광하와 창강의 가운데 지역을 이른다)의 쌀 농법과 몹시 흡사했다.
고려인들에겐 별다를 것이 없었지만 분명히 철기도 없는 땅 치고는 상당한 농업적 역량을 가진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야가 철기 제련을 시작하고 수십 년이 흐르자 그들 또한 철기시대로 진입했다.
이에 따라 그들의 문화 또한 극심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본디 아즈텍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치치멕과 톨텍은 마야와 비슷한 인신공양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꽃전쟁’은 셋 모두에게 해당되는 전쟁의 일환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포로를 잡아 심장을 뽑거나(마야) 혹은 심장을 뽑고 먹어버리기(아즈텍) 위해 만들어진 이 전쟁은 종교적 관습으로 인한 것인지 이들의 군사 기술적 한계로 인한 것인지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며 얼추 짐작할 순 있었지.
대역병 이후 그들은 치첸 이트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종교적 광신주의에 매몰되었다.
인신공양과 식인풍습은 전보다 성행했다.
먹여 살릴 인구가 예전보다 오히려 줄어들었고, 철제 농기구와 발달된 농업을 통해 풍부한 곡식을 산출할 수 있으며, 심지어 섭식할 단백질을 제공할 동물들도 그리 부족하지 않았던 그들의 환경을 고려해본다면 아마 종교적 이유를 제외하고 식인풍습을 설명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꽃전쟁을 하기엔 아즈텍인들의 기술력이 예전과는 달랐다.
철기의 생산성은 귀중한 흑요석 칼보다 압도적이기에 그들의 무력집단인 재규어 전사들과 독수리 전사들은 흑요석 날붙이 대신 철제 무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무기는 수월하게 적대 세력을 제압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너무나도 쉽게 저들의 두개골을 부수고야 말았다.
“사람이 이렇게 약한 존재였던 건가?”
석기에서 철기로 오니, 꽃전쟁을 하기엔 그들이 너무 강해져 버렸다.
활발한 정복전쟁과, 풍부한 인신공양 제물을 동시에 얻으려면 그들은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해답을 주변의 적성 알테페틀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는 틀락스칼라 연맹에서 찾았다.
사실 예시칸 틀라톨로얀과 틀락스칼라 연맹은 서로 비슷한 부류들이었다.
비슷하게 잔혹했으며 비슷한 종교를 믿고, 같은 나와틀어를 쓰는 자들이기도 했다.
비슷한 기술 수준과 비슷한 체급을 가지고 있었지.
그러나 대역병 이후, 그들은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항구적인 수원지인 텍스코코 호수를 끼고 치남파 농법을 쓰며 농업에서 확실한 우위에 있던 아즈텍이 피해복구에 전념해 수십 년 만에 예전의 성세를 되찾았다면, 틀락스칼라 연맹은 아직도 인구의 오분의 사가 죽어 나간 그 후유증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손쉽게 이들을 제압한 아즈텍은 이곳에 ‘인간 목장’을 세웠다.
굳이 꽃전쟁으로 인력을 낭비할 필요가 있는가?
인간을 가축화하여 기르면 되는 걸.
마구니(魔仇尼)도 한 수 배워야 할 끔찍한 생각을 하게 된 그들은 저항하는 다른 부족들도 그 인간 목장에 집어넣고 열심히 정복전쟁을 하고 다녔다.
개천 126년(CE 1401) 그들은 남쪽으로 진군해, 한창 번성하는 마야와 제대로 마주했다.
첫 번째 마야와 아즈텍의 전쟁이 일어났다.
마야 왕국의 네 번째 카롬테, ‘맞서 지킨 자’는 아즈텍의 두 번째 틀라토아니(군주) 우이칠리우이틀과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본디 마야와 아즈텍의 관계는 복잡했다.
둘 모두 도시국가, 혹은 부족 연합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전까지만 해도 큰 세력과 큰 세력 간의 직접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화적, 종교적 교류는 활발했다.
이쪽의 신이 저쪽에 가서 비슷한 지위를 가지게 된 것도 있으며, 반대로 저쪽의 신이 이쪽의 신으로 된 것도 있었다.
역병과 철기도 아래에서 위로 퍼져나간 것이 분명했다.
물론 문화가 친숙하다고 그들 구성원이 친밀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마주하면 소소한 전투를 치렀으며, 진 사람들은 가차 없이 심장을 잃은 상태의 고깃덩어리로 변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들은 서로를 잡아먹을 것이었다.
우이칠리우이틀은 아즈텍의 기틀을 잡은 명군이었다.
그는 인간 목장을 제외한 다른 알테페틀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중부를 통일해나가고 있었다.
이에 남부의 제법 덩치 큰 마야 또한 정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아즈텍은 대패했다.
새롭게 바뀐 마야는 이전의 어리벙벙한 부족들과는 매우 달랐다.
‘맞서 지킨 자’는 전 마야의 군세를 끌고 가 미나미틀란의 작은 강에서 그들을 물리치는 것에 성공했다.
그 작은 강은 한동안 붉게 물들었고, 시체 썩은 내가 심하게 날 정도로 부패해 사람들이 한동안 접근을 꺼려했을 정도였다.
대승을 거둔 마야도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아즈텍은 그들의 틀라토아니까지 전사할 정도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패배는 뼛속 깊이 각인될 정도였다.
이후 그렇게 호전적인 아즈텍이 남쪽으로 뻗어 나가려는 생각을 그만둘 정도로.
전사한 우이칠리우이틀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자는 우이칠리우이틀의 이복동생이자 아즈텍의 명장 이츠코우아틀이었다.
중앙의 피해로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권위가 흔들리자 사방의 점령지와 인간목장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츠코우아틀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고, 마침내 남아있던 귀족과 전사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권좌를 잡은 그는 남쪽 대신 북쪽과 그 위를 노리는 일에 주력했다.
대체로 아즈텍 북중부의 기후는 건조하고 작물을 기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해안가를 이용하여 북으로 뻗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