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03화 (103/653)

화학

기술선도국엔 장인 장영실 말고도 많은 공인들이 있었다.

장인 여섯에 전문공 열일곱.

이들 모두 시중에게 은혜를 받은 자들이며, 입이 무겁기로 손꼽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기술선도국의 공인들은 저택 안의 개인적인 작업실조차 철저한 보안으로 관리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 지하실은 가족까지도 들어올 수 없는 구역이었다.

영실은 작업대를 바라보자 천천히 술기운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완성품들이 아름다워 그럴지도 모른다.

작업대 안에는 며칠 전 완성한 총들이 몇 정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예전의 수석식 총과 다를 바가 없이 생겼다.

위에 달린 이상한 것만 제외하고는.

이 괴상한 것은 망원조준경(望遠照準鏡)이라 불렸다.

그 길이는 상당해 총열의 길이와 비슷할 정도였다.

아직 유리정 자체의 제조 공정은 물론 유리정에 십자선을 새기는 공정의 정밀도도 낮았기 때문이었다.

그 오차를 시차의 증가로 해소하려 한 것이다.

따라서 전술적으로 볼 때 몹시 불편했다.

한눈에 봐도 일반 총병들에게는 매우 부적합한 무기가 틀림없었다.

아마 들고 다니라 하면 바로 떼어버리지 않을까.

그냥 망원경의 부착으로 총을 들고서도 꽤 멀리까지 볼 수 있다는 개념 자체는 확립한 상황에 의의를 두자.

어느 정도의 써먹을 만한 조준경을 만들고 나서는, 이제는 반대로 총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

관측의 정확도보다 총탄의 정확도가 낮은 것.

그것을 보고받은 시중은 영실에게 총열에 강선이라는 것을 제조하라고 명했다.

강선의 개념은 다소 어색했지만, 간략한 설명을 들으니 금방 이해가 되었다.

‘정말 절묘한 이치로고!’

정구 경기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회전하는 물체는 나아가는 경로가 그렇지 아니한 것보다 더 안정되는 법.

총열에 홈을 나선형으로 낼 수 있다면 쏘아지는 탄환은 인위적으로 휘어지게 될 것이고 탄도 또한 안정될 것이었다.

실마리를 얻은 그는 제작에 착수했다.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총기에 관련한 기술 자체를 많이 축적했던 고려였기에 강선(腔線)의 개발 자체는 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결과물을 완성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는 기존의 활강식(강선이 없는 총을 뜻한다) 총기의 경우보다 재장전속도가 훨씬 더 증가했다는 것이다.

가끔씩 현장에 와 오류 사항을 직접 보고받는 시중의 조언에 따라 특제 탄을 따로 만들어 실험하니, 해결책의 실마리가 보였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는 답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한 정의 총기를 만들려면 숙련공 이상의 공인 둘이 달라붙어 절삭날을 가지고 끙끙거리는 과정이 필요했다.

기술선도국 내의 장인의 숫자가 서른이 안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문제였다.

공인들을 더 모집하고는 있었지만 엄격한 보안절차에 맞는 인원들은 그리 많지 않은 모양이다.

“공돌이들은 귀하다니까.”

시중의 혼잣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노동력의 귀중함을 빼고 논하더라도 이 시대의 총기 자체의 연약함도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열심히 만든 총열도 금세 화약의 압력에 못 쓰게 망가져 버리는 일이 상당히 흔했다.

경제성이 한층 더 곤두박질친다는 말.

그러나 소량을 생산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이 일은 자신의 손을 떠났다.

모든 단점을 알고 계심에도 이리 만들라 명하신 까닭이 따로 있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총기제작 경험 축적이라 생각하든가.

“영차.”

그는 총기들을 얌전히 보관함에 수납하고는 지정된 잠금장치로 꼼꼼하게 잠갔다.

과업 하나를 완수하면 기분이 상쾌하다.

* * *

하지만 그는 다음 과업을 하기에 앞서 또다시 방금의 문제에 발목이 잡히는 것을 느끼고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야금술에 모든 것이 달렸구나.’

총기도, 그리고 그다음의 일도.

영실은 허기가 졌는지 주방에서 감자를 얇게 썰어 튀긴 과자를 가지고 와 서책을 펼쳤다.

이번 과업은 시중께서도 단시일에 만들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셨는지 적정 기한 자체가 꽤나 길었다.

실제로 과연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과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다시금 그 문제의 학문을 복습하는 것이 현명하겠지.

야금술은 또 다른 학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문제를 풀기 위해선 다른 문제를 풀어야 하는 이 감자 뿌리 같은 상황에 짜증이 날 법해도 영실은 꿋꿋하게 그 서책들을 살펴보았다.

이미 몇 번 읽어내렸는지 책에는 빼곡하게 주석이 적혀 있었다.

― 화학개론(化學開論)

그가 들고 있는 책의 제목이었다.

당대 야금술과 연금술은 아랍이 확실히 다른 세상보다 뛰어난 면이 있었다.

애초에 유럽에서 쓰는 단어 알케미(Alchemy)의 어원은 아랍어의 알키미아(Al―kymiya)에서 오기까지 했으니까.

아랍이 유럽과 아시아의 기술을 모두 받아들이며 이슬람 과학을 꽃피울 동안 고려는 고립되어 외부와의 교류가 끊겼던 것도 컸다.

과거 동아시아에서도 원래 서양의 연금술과 비슷한 연단술(練丹術)이 있긴 했다.

다만 그 특유의 불확실성과 애매모호한 논리, 비과학적이며 비기록적인 실험 결과로 인해 극도로 편협한 길을 걸어 나가게 되었고 도교적 원리를 내재하고 있다 보니 유학의 나라들에게서 그렇게 우대받지 못했다.

‘애초에 명과 조선 모두 장인들을 천시하지 않았는가?’

상업의 힘이 강했던 예전의 고려는 망했고 사농공상이라는 허울 아래 장인과 상인들을 천시하고 있는 조선.

몰락해가는 주가 그 수명을 다한다면 중원의 명 또한 변할 것이었다.

‘이곳에 온 것은 역시나 행운이구나.’

반면 새로운 고려는 달랐다.

유럽과 아랍의 학문을 수집하기 이전에도 그들은 경험주의 철학의 기틀 아래 합리주의가 공존하고 있었다.

과학은 이 중에서도 증학의 영향인 비판적 사고방식에 몹시 익숙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태조 해민이 제시했던 ‘과학적 방법론’은 모든 학문 연구자들의 기본 소양, 혹은 자격과도 같았다.

어떠한 가설을 발표한 후 과학계의 비판을 반박하지 못한다면 그 가설은 빠르게 폐기되어야만 했다.

또 모든 자료와 연구, 실험방법은 철저하게 기록되어야 했으며 동료 과학자들에 의해 교차검증을 받아야 했다.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만 느끼는 자연과학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과학적 진리는 어느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모두가 보편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살아남는다면 그 결과물은 이론으로서 정립되었지.

이런 풍토 속에서 비밀스럽고 비과학적이며 미신적인 연단술과 연금술은 점차 바뀌었다.

화학은 이제 연금술과 연단술을 대체하였으니 모든 물질세계의 표준적인 학문이라 칭해도 될 것이다.

화학의 성립과 발전을 통해, 야금술도 발전했다.

금속의 성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이루어졌으며, 철과 구리는 물론 새로운 합금들에 대해 광범위한 실험이 실시되었다.

영실은 금속 기술의 발전이 총기를 더욱 진일보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뿐이랴.

‘그러면 이것도 더욱 쓸만해 질 터인데.’

그는 둥글게 말린 물건을 몇 번 가볍게 쳤다.

― 퉁

그것은 그 힘에 반발하여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금속이 탄성이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 탄성철(彈性鐵).

재미있고 신기한 물건임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천하의 장영실이 아이들이나 가지고 놀 법한 장난감을 만들기 위해 탄성철들을 발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탄성철은 종류가 많았다.

용의 콧수염처럼 둘둘 말린 용수철, 여러 판들이 모여 만든 판 탄성철(그의 마차에 설치된)이 있었다.

또 금속 기구의 안에 넣는 나뭇잎처럼 얇은 태엽도 있었으니.

태엽 탄성철, 즉 뒤틀린 금속의 탄성을 이용해 동력을 얻는 물건이며 그의 주요 목표였다.

영실은 태엽 탄성철을 손에 쥔 채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자신의 예전 경험을 떠올려보자.

길고 길었던 그 바다 위의 기억을.

* * *

고려의 항해술은 세계 제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상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이유는 다양했다.

난파와 조난, 그리고 태풍을 만나는 등의 일이 있겠지.

까딱 잘못하면 무풍지대에 갇히는 수가 있었고, 질병과 기아가 그들을 감쌀 수도 있었다.

괴혈병과 각기병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선단들은 제각기 김치와 여러 발효 식품 등을 가지고 다녔다.

물론 장거리 항해 시 그 숙성의 정도가 높아져 나중에는 몹시 시었지만 그래도 잇몸에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보다야 훨씬 좋았다.

또 열대기후 연안을 항해하는 선단들은 고려의 거류지에서 기르는 거북열매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거북열매는 피자 위에만 안 올려 먹으면 참 맛있는 과일이다.

어찌 되었든 사고의 원인을 종합해 보자면 결국은 선박 위치 파악의 문제였다.

물론 고려는 육분의를 요긴하게 써먹고 있었다.

그러나 육분의는 현재 위도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였을 뿐 아직 선박의 정확한 경도를 알려주지는 못했다.

정확한 장소를 알아야 정확한 목적지를 갈 수 있는 법.

육분의로 선박의 온전한 위도와 경도를 모두 측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물건이 필요했다.

항해용 시계.

특히 출발했던 항구의 시간과 오차가 적은 정밀한 시계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고려 시계의 역사를 논해보자.

해시계와 물시계는 태조 시기부터 존재했다 한다.

그러나 한층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 고려의 물리학자이며 고전역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임광재(林匡渽)였다.

그는 상당한 괴짜였다.

방 안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도 않는 광재는 수염과 머리가 엇비슷한 길이일 정도로 봉두난발이었는데 그 모습이 실로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외모와는 별개로 그가 가진 지적인 번뜩임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광재는 고려 창양의 중앙 종탑에 올라 실험을 했다.

같은 모양의 나무공과 쇠공을 동시에 떨어뜨려 어떤 것이 먼저 도달하는 것에 대한 실험이었지.

광재는 두 공이 동시에 바닥에 도달할 것이라 주장했다.

사람들은 물론 무거운 것이 먼저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누가 옳았는지는 고려인이라면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고려인들의 상식을 파괴했던 그 실험은 한동안 집현전에서 떠들썩한 화제가 되었다.

물론 광재는 그 전부터 사고실험만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를 비판하는 동시대 학자들의 입을 다물기 위해 한 실험에 불과했으니.

이 괴짜는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는 다시금 연구실에 처박혀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나왔을 땐, 자유낙하에 대한 실험만큼이나 대단한 결과물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진자(振子).

견고한 끈에 무거운 추를 매단 이 물체는 아주 일정한 주기로 왕복하는 성질(등시성)을 가지고 있었다.

― 진자(단진자)의 주기는 진자의 길이에만 영향을 받으며 진폭과 추의 질량과는 무관하다.

이 발견은 동시대의 공인 유각현(劉覺賢)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는 진자의 등시성을 이용하여 진자시계를 제조하였는데, 그 시계의 정밀성은 당대의 어떠한 물시계와 해시계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정확함을 자랑했다.

곧이어 각현의 진자시계는 전국의 항구와 대도시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첫 번째 과제는 완료가 되었다.

항구의 시계가 정확해졌으니, 이제는 선박 내부의 시계가 정확하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확도가 높다고 하나 진자시계를 선박 안에서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배의 움직임은 파도에 따라 몹시 거칠었고, 추는 외부의 환경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물건이었으니.

그래서 영실은 중대한 과제를 해내야 했다.

‘휴대할 수 있는 정확한 시계를 만들어야 한다.’

― 팅

영실의 손 위에서 작은 금속 조각이 하늘을 날았다.

태엽시계.

고려의 항해기술을 한층 더 완벽으로 끌어올릴 물건이었다.

=====

장영실이 추구하는 태엽시계의 끝이 크로노미터긴 하지만 현시점의 태엽시계는 크로노미터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을 겁니다.

고려는 지금까지 경도와 정확한 위치를 몰랐기에 그동안 북려대륙을 오가는 유럽의 무리들을 찾고 추적할 수 없었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