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신분의 관계에 상관없이 모든 계층을 휘어잡은 축구는 운동의 왕이라는 명칭까지 얻었다.
골목마다 심심치않게 공을 차는 아이들이 보였을 정도.
물론 고무는 비쌌다.
고무나무는 고려 북방, 칼리나해 부근의 아주 일부 영토에서나 기를 수 있었으니 대부분의 고무는 동예에서 수입할 수밖에.
하지만 고려인들이라고 모두가 가난한 것은 아니었기에 부모는 아들을 위해 고무 공 하나 정도는 사줄 수 있었고 그 하나의 공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같이 어울리니 실로 경제적인 놀이라 할 수 있겠지.
하도 골목에서 공을 차대니 낮은 층수의 창문은 때아닌 봉변을 당하는 일들이 생겨났다.
반면 고려의 상류층에서는 다른 운동 또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축구야 재미있지만 직접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단지 관람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모양.
그들에겐 조금 더 품위있으며 약간 더 사적인 운동이 필요했다.
정구(庭球),
즉 테니스가 그들의 요구에 부응했다.
유럽과 교류가 이어지며 들어온 프랑스의 쥬 드 폼(Jeu de paume, 테니스의 원형)은 상민의 주도로 개량되어 고려의 정구로 변화되었다.
채로 고무 공을 그물망 너머로 보내는 이 운동은 시작하기 위해선 돈이 조금 들었다.
고급스러운 목재로 만든 채와 여러 도구들을 사기 위해서.
돈을 지불한다는 것 자체가 서민들과는 조금 떨어지는 것이니 특별함이 더해지기 마련.
또 내실 혹은 작은 안마당에서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을 요구했기에 남의 눈에 띄지 않고 하기도 좋았다.
문반 무반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집에 정구채를 사 놓기 시작했다.
호쾌한 휘두름과 빠른 몸놀림이 요구되는 정구는 꽤 역동적이며 재미있는 운동이었다.
남성들에게 인기가 생기는 것은 특이한 일은 아니리라.
하지만 의외로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양갓집 규수는 물론이고 이미 결혼을 한 아녀자들에게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사생활이 보장받는 실내에서 눈치 볼 것 없이 다른 여인들과 사교적인 모임을 가지기 좋았던 것이다.
게다가 여인들에겐 마땅한 운동거리가 없었으니 정구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지.
만민에게 체육이 골고루 전파되길 원하는 상민은 이와 같은 분위기를 장려했으니 도성에서 교양 좀 있다는 여인들 중 정구를 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구를 도입한 상민 또한 그 선봉에 서 있었다.
정녕당에도 정구장이 세워졌으며, 주말마다 정구장에선 채에 공이 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구나!”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운동이라는 것도 결국은 선천적인 재능이 큰 요인이라 매 경기는 양민학살에 불과했다.
적어도 정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선수가 오지 않는 이상 그에게서 승리를 따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리라.
상민은 몇 번의 위기를 겪긴 했지만 노련하게 상대방을 패배시켰다.
뛰어난 무장이었던 상대방 역시 찬탄의 기색을 띠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당하.”
무장들은 패배에 깔끔하게 승복하고 떠났다.
인간관계에서 이런 사적인 면도 소홀히하지 않는 상민은 매번 이러한 자리를 마련하여 부하들의 충성심과 친밀감을 고양시켰지.
그러나 조금은 기운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은 여가시간까지도 다 업무의 연장선이니.’
소란스러운 사내들의 외침이 사라진 공간에는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햇살이 비치는 잔디밭에 털썩 누워 있으려니 이윽고 하녀 연화가 다가와 뒷정리를 시작했다.
“고맙구나.”
정구장 안에는 아무도 없기에 땀에 젖은 가면을 벗고 물을 마시던 그가 기지개를 켰다.
“당하께오서도 참으로 잘치십니다….”
공을 주워담던 연화가 쑥쓰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상민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연예인을 본 듯한 표정과 기색으로 저리 말하니 나름 기분이 좋다.
“그러냐?”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살풋 기대감이 떠올랐다.
자신은 정녕당의 하인들에게 상당히 많은 관용을 베풀고 있는 상관이였다.
그들의 식사와 잠자리를 신경 쓰고 휴가까지 권장해주는 사람이 고려 천지에 누가 있겠는가.
또한 정구장이 비고 일이 바쁘지 않다면 고용인들끼리 정구를 칠 수 있게 배려를 해주기도 했지.
연화는 남부인답게 키가 크고 늘씬한 데다가 체질이 건강하니 아마 정구를 잘 칠 것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잘 쳤던 것 같다.
자신이 지나가며 본 바로는.
“너도 좀 친다고 들었다.”
좀 친다.
이 표현은 이제 고려에 있어서 상대방이 무엇을 잘한다는 관용적 표현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상민의 칭찬에 배시시 웃던 그녀가 조금 머뭇거리더니 눈을 꼭 감고 물었다.
“당하와 감히 겨루어 봐도 될런지요?”
그 당돌한 말에 상민이 피식 웃었다.
비록 그녀가 평소의 야무지고 진지한 성격에 상민의 신임을 얻었으나 일개 하녀로 세계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 중 하나에게 스스럼없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상민은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
연화가 몹시 기분이 좋은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는 것이 보였다.
까짓거 한 판 하는 것이 뭐 어렵다고.
그리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친목의 연장선으로 정구를 해 왔던 그로서도 오랜만에 여러 계산이 없는 순전히 즐거운 정구를 쳐 보고 싶었다.
시합이 시작되었다.
심판은 없었고, 각자의 재량으로 점수를 기억하기로 했다.
물론 진지하게 덤비자면 신체적, 역량적 차이에 경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코트를 확장하는 등 몇 가지 패널티를 가지고 경기를 시작한 상민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정구를 치는 연화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 타앗
빠르고 정교했다.
아마 21세기에 태어나 제대로 된 엘리트 스포츠인의 길을 걸었다면 마리아 샤라포바나 세레나 윌리엄스 뺨쳤을지도.
다소 넓은 상민의 코트 뒷부분을 공략한 그녀가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그 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던 상민이 불에 타올랐는지 진지하게 게임에 임했다.
승부욕 하나는 끝내주는 인간.
친목의 정구라도 지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는 인간인 만큼 패배는 염두에 두지 않는 성정다웠다.
다만 능숙하게 완급을 조절해 가며 적당히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해 알맞은 점수차로 이겨버린 상민은 갑자기 울먹이는 연화를 당혹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설마 져서 저렇게 우는 것은 아니겠고.
“……흐흑, 흑.”
“왜 그러느냐?”
연화의 흐느낌이 조금씩 커졌다.
“아… 아니옵니다.”
재밌고 설레이며 소중한 정구장에서의 추억은 그녀 안의 복합적인 감정을 꺼내어 내고 있었다.
감히 상관의 앞에서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과 연화 자신의 절제력에 대한 실망, 그리고 상민에 대한 갈 곳 없는 원망과 갈망.
그 갈망 깊숙한 곳 언뜻언뜻 보이는 욕망.
물론 그 또한 이유는 알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자신은 미혼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하기엔 조금 이상했으나 상민 자체도 상당히 매력적인 사람이 분명했기에 방년 열아홉의 꽃다운 소녀에게는 저런 감정이 들 수밖에 없겠지.
문제는 자신이었다.
비록 백여 년 전 왕예와 사별한 이후 한 번도 '진지한' 관계를 가진 적이 없던 상민은 의식적으로 여인을 상당히 멀리하고 있었다.
책임감이란 그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도덕적 가치관이었다.
아이를 가지고는 신경 쓰지 않는 곳에 두고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 또한 고아 출신이기에 부모의 사랑과 관심, 그리고 지원이 얼마나 필수적인 요소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제위에 있을 때에도 황후와 여러 비 출생의 아이들에게 모두 관심을 쏟았으며 그들이 살아갈 방법을 제시하고 마련해 주기도 했지.
또한 지금까지 혈족들을 돌보며 제국을 지탱하는 것만 봐도 그의 책임감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또한 바뀌어야 할 때.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게 있어서 첫 번째의 대업은 국사(國事)니라.”
다소 엄중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얼굴로 상민이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 같은 여자가 감히 시중을 독차지하겠나이까?”
약간은 슬픈 얼굴로 상민이 말했다.
“너는 시들어갈수록 고통받게 될 것이다.”
연화가 몇 번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는 대답했다.
“해바라기가 해를 보는 까닭은, 오로지 그곳에 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민이 미소 지었다.
중려대륙에서 고려에 전래된 식물 해바라기는 일관된 마음의 상징이었다.
이에 빗대어 마음을 고백한 연화는 말을 할수록 결의가 세워지는 모양.
그 시선에서 오로지 열망만을 느낀 상민이 미소 지었다.
정구장의 끝과 끝에서 남녀는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그녀로서도 짧지 않은 세월이겠지만, 자신으로서는….
참으로 긴 세월이었지.
* * *
자세한 것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날 오후는 사실 별일이 없기도 했지만, 아예 일정을 뺀 뒤에 주변을 멀리 물리고 출입을 금했다.
아마 욕탕으로 가 같이 씻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함께 사랑을 나눴던 것은 선명하게 기억났다.
‘…….’
후회는 딱히 하지 않았다.
자신은 방탕한 성격은 아니었으나, 금욕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책임감이 좀 강한.
이 시대의 피임방법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기에 맞추는 것과, 하늘에 기도하는 것.
하지만 고무로 만든 피임낭(콘돔)이 등장하고 나서는 조금 달라졌다.
위정자의 입장에서 피임도구는 계륵이다.
고려는 이 시점에도 만성적인 인구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자신만큼은 이 피임도구를 애용하고 있었다.
‘나는 특수한 경우잖아?’
자신은 적어도 피임도구를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생식세포와 온몸에 각인된 DNA의 임무는 이미 완수한 지 오래.
황후 왕예 말고도 동시대에 여러 후궁들을 거느렸던 군주.
여러 부인들과의 사이에서 이미 키울 자손을 다 키운 상민은 더 이상 수많은 자식들을 키울 이유도, 의지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새근새근 잘도 자는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이 초기의 고무 피임낭의 신뢰성은 후대의 그것보다 현저히 떨어지기에 관계를 계속 가지다 보면 언젠가는 연화 또한 아이를 가질 수 있겠지.
그러나 그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었다.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부담스럽게 많이 낳는 것을 멀리한다는 생각이었으니까.
영원토록 살아야 하는 처지이니 자식들로 일개 사단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두 명 정도면 딱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맞댄 살결의 온기가 새삼 따뜻했다.
세월이란 오랜 길을 걸어야 하는 방랑자의 입장에서 가끔의 동반자는 나쁘지 않겠지.
* * *
최초의 도서관은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에 있었다고 추측되어진다.
그 말고도 아시리아에 도서관 유적이 있었으며, 시간이 흐른 뒤 그리스의 땅에도 여러 장서들을 보관한 도서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치세 하의 이집트가 알렉산드리아에 거대한 대도서관을 만드니, 이것의 찬란함은 세상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집트는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그 와중에 이 아름다운 문명의 보석은 소실되었다.
그 후, 아랍의 문명에서도 또 한 번 도서관을 세웠다.
바그다드에 세워진 지혜의 집(بيت الحكمة)은 중세의 학문의 중심지로 꼽혔으며 당대 이슬람이 세상을 호령했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 또한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불타버렸지.
약 이백 년이 흐른 뒤, 고려인들이 마침내 그 보석의 명맥을 다시금 되살리기 시작했다.
세종 해권은 관제를 정비하며 국자감에서 순수학문을 연구하는 곳을 빼내었고 그 빼낸 부서를 태조가 기존에 설치한 문서 보관 관청인 보문각(寶文閣)과 통합하여 집현전(集賢殿)을 세웠다.
집현전은 비단 순수학문의 요람의 기능만 하지 않았다.
부속 건물에는 서책과 그림들, 도안들과 여러 중요한 기록들이 보관되었으니 도서관의 기능까지 겸하게 된 것.
하지만 세종 이후 성종과 현 황제를 거치며 이 부속 도서관은 그 규모가 증가하다 못해 집현전 본래의 건물들보다 더 커지기 시작했다.
해윤은 집현전과 도서관을 포함한 건물들에게 새로운 명칭을 하사했다.
지혜의 궁전, 즉 연서궁(延㥠宮)이라고.
궁궐이라는 이름까지 받을 정도로 거대한 연서궁은 동에서 서까지 걷는 시간만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렸으며 남북으로도 그만큼이 걸렸다.
연서궁엔 고려의 서책만 기록되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럽과 이슬람의 책들 또한 건너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상민은 굳이 그 기독교와 이슬람 서적들을 금서로 지정하진 않았다.
번역을 시도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이미 학자들 사이에서 저들의 종교는 매우 미혹스러운 미신에 불과했으니.
옛 그리스의 서책 또한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고졸기와 고전기, 헬레니즘 시기와 로마 시기를 통틀어 수많은 시대의 명서들이 고려로 건너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비싸게 샀으니까!
상민은 청해의 상인들을 통해 그리스의 고서들을 수집하게 명했고, 가치가 높은 책이라면 사본이라도 수백 금을 주고서라도 대가를 치렀다.
덕분에 고려 상인들의 수집 욕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별 같잖은 위서를 그럴듯한 고서로 속여 파는 일도 벌어졌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도 했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안목이 쌓이자 빛이 가려져 있던 서책들과 보물들이 고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430년대, 이미 발칸반도의 끄트머리와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그리스의 모든 영토는 오스만의 손에 떨어졌다.
그리스 난민들은 이탈리아반도로 흘러들어갔으나 가진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먹고 살기 위해선 책들이라도 팔아넘겨야 했다.
당금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는 나라는 아직 고려가 유일했기에 그들은 제노바―카나리―고려 상인 연결망에 책을 팔아치웠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와 같은 문학적으로 엄청난 가치를 가진 책들은 물론이고 이오니아학파, 아카데메이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 소크라테스 및 스토아학파 등 그리스의 정수를 담은 책들이 사본 진본을 불문하고 넘어오기 시작했으며, 연서궁에서 기존의 학문들과 융합하여 새로운 학문들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융합된 학문은 이제 다시 유럽으로 향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