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95화 (95/653)

축구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스포츠.

국민의 건강을 증대시키고 유흥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근대적 문화의 산물.

그 근원은 고대의 그리스에서 찾을 수 있겠으나 그 전후로 지구 각지의 인류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고려만 하더라도 수박희나 격구, 축국 등을 이미 즐기고 있었으니 따지고 보면 자신이 이것을 ‘발명’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자신이 이 운동경기에 거대한 진보를 이루어 낸 것은 틀림없으리라.

잔디가 깔린 마당.

상민은 황색 둥근 공을 만졌다.

“탱탱하구만.”

여러 번 차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도를 강하게 주문했지만 특유의 물렁함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고무공.

축국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물건이었다.

기존의 가죽으로만 만든 공은 반탄력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가죽 주머니에 털이나 쌀겨를 넣어 만들어 힘껏 차도 그렇게 멀리까지 나가지 않아, 보는 재미가 없었다.

운동이 조금 다이나믹해야지.

그래도 돼지 오줌보로 만든 공은 가죽 공보단 멀리까지 나갔으나, 얇아서 날카로운 것에 찔리면 터지기 일쑤였고.

뭣보다 폼도 나지 않았고.

그러니 고무에 가죽을 덧대 만든 공은 현대의 공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엄청난 진보였다는 것이지.

― 쾅

힘껏 찬 공이 저 멀리 떨어지는 것을 본 관리가 손뼉을 쳤다.

“과연 대단합니다!”

고무의 발견은 꽤 전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생고무, 즉 라텍스 자체의 내구력은 정말 눈 뜨고는 못 봐줄 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현대인이 가진 기본적인 상식, 즉 일반적인 노란색의 ‘가황’고무를 알고 있는 상민이 황을 첨가한 고무를 만들라고 지시한 덕분에 고무 이용의 폭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가황 고무는 내구성과 강도, 탄력성 모두 기존의 날것 그대로의 고무보다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연필이 만들어진 시기, 오로지 지우개로밖에 쓸 수 없었던 애물단지였던 고무가 순식간에 고려에서 가장 뜨거운 상품으로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고무공도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것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

여인들은 머리끈을 묶을 수 있게 되었으며, 장화도 만들어지고, 방수물품도 개발되기 시작했다.

또….

흠흠, 그것은 이런 벌건 대낮이 아닌 나중에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말랑말랑한 황금이라는 명칭을 얻을 정도로 값이 비싸긴 했으나, 활용도는 실로 무궁무진해 수많은 학자들이 주목하는 신물질이었다.

상민은 손에 들고 있는 공을 빙글 돌렸다.

유명한 리그들의 공인구들을 봐 왔던 자신의 시선에선 조잡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것들보다 더 아름다운 물건임은 틀림없었다.

* * *

개천 158년(CE 1433), 첫 공식 축구경기가 열렸다.

창양에는 커다란 경기장이 세워졌다.

지금은 도성과 경기 일대를 먼저 건설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중에는 지방에도 이런 경기장들이 세워질 것이었다.

엄청난 시설이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시대적 한계로, 잔디가 깔린 구장과 대중들이 볼 수 있을 정도의 스탠드를 설치하는 것 정도.

그리고 창양과 청해와 같은 부자 도시에서는 비를 피할 수 있는 가림막을 위에 올리는 것 정도.

그러나 그것만 해도 상당한 비용을 지출해야 했던 조정이었다.

대중들의 반응이 미지근하면, 확실히 실패한 정책이겠지.

그러나 첫 축구경기를 관람한 대중들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보게!”

3대째 신발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최찬수는 신발 공방의 구석진 곳에서 자신의 친구 오영달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다.

“최가 놈 자리에 있는가?”

현관 근처에 있던 자신의 부하 직원에게 사장을 저리 애타게 찾아대는 인간은 뻔한 인물이었다.

이제는 다소 무심하게 이 구석을 가리킨 부하 놈 덕분에 영달은 찬수를 향해 직진하고 있었다.

‘또 무슨 피곤한 일을 가져왔기에….’

내심 투덜거린 찬수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는 만무했다.

“네놈은 이 대낮에도 일을 하지 않고 맨날 엉덩이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쏘다니기만 하는 것이냐? 그러니까 제수씨가 항상 우리 안사람을 붙잡고 그리 하소연을 하는 것이지!”

하지만 영달의 가문이 자신만큼 한미하진 않은 것을 알고 있기에 찬수의 말에는 약간의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무려 삼 대째 중앙 조정의 관리가 된 집안이며, 심지어 영달의 부친은 내무부의 원외랑까지 지낸 적이 있는 고관이었다.

잠시 투닥거린 그들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내, 어제 처음으로 축구 경기를 보러 황립 중앙 경기장에 갔다 왔네.”

영달의 말에 찬수가 빈정거렸다.

“그놈의 축국….”

영달이 발끈했다.

“아니, 축국이 아니라니까?”

그는 곧이어 자신이 어제 본 ‘시범경기’의 광경에 대해 떠들었다.

“그 재미없는 축국과 비교하지 말게.”

“축구와 축국은 다른 것인가?”

한 글자만 다른 두 구기종목은 사실상 같은 것이라 해도 무방했다.

공 구냐 공 국이냐가 달랐지만.

그러나 이전의 요소와는 너무나도 달라진 탓에 중앙에서는 이름을 다르게 한 모양이다.

“가 보자니까? 오늘 별로 손님도 없어 보이는데?”

“거 참, 이 사람이….”

친우의 채근에 만들고 있던 신을 내려놓은 찬수는 그의 우악스러운 손에 이끌려 경기장으로 향했다.

경기장은 창양 남부에 위치하여 있었다.

시범경기 이후 유료로 입장이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입소문을 제대로 탄 것인지 표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 모양.

심지어 대기하는 줄도 몹시 길었다.

가격대가 그리 비싸지는 않은 모양이다.

“여기 있소이다.”

그러나 영달은 기다리는 줄이 아닌, 옆에 따로 있는 조그마한 통행로로 갔다.

근무하는 사람 한 명이 다가와 그에게 용무를 물었다.

영달은 미리 사 놓은 것이 있는지 품에서 네모난 은색 패를 꺼내 보였을 뿐이었다.

“예, 확인했습니다. 가 열 사 번 자리에 가시면 됩니다.”

귀빈 전용 통로였던 모양이었는지 영달을 따라 물 흐르듯 입구를 통과한 찬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의 크기며, 규모며, 실로 대단했다.

“하하, 미적거리지 말고 얼른 오게나!”

그들은 경기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 귀빈석에 앉았다.

“우리가 여기 앉아도 되는 것인가?”

“물론이지.”

찬수는 껄껄 웃었다.

“딱히 좋은 자리는 아니야, 오히려 저 맞은 편 삼층의 누대 비슷한 곳이야말로 신분이 귀한 분들이 가는 곳이지.”

경기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는 행여나 이곳에 방문할 수 있는 황제의 자리도 설치되어 있었다.

영달은 저 근처의 자리의 말석을 어찌 구하려면 구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말했다.

이렇게 가장 앞에서 보는 경기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곳에 있으면 꼭 내가 저 사람들이랑 같이 뛰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영달은 손 위에서 은색의 패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건 또 뭐고?”

궁금증이 차오른 찬수가 물어보았다.

패에는 동그란 구 모양의 조각이 음각되어 있었다.

“이곳의 건립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주는 이용권이네, 이렇게 남들보다 일찍 이용할 수 있고 자리를 선점할 수 있지.”

그는 흐뭇하게 패를 바라보았다.

“이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경기장의 표는 자리를 구분하여 가격이 천차만별이라 했다.

‘그깟 자리가 뭐라고.’

찬수는 친우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냥 그러려니 생각했다.

푸른 잔디밭,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 선선한 바람들.

외출하기에 나쁘지는 않은 날씨.

일하는 아이를 불러 먹을 것을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덧 자리가 거진 다 차 있었다.

“…그래도 군데군데 경관들이 보이는구만.”

많은 군중들이 모이는 곳이니만큼 위에서는 치안의 문제도 많이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모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누대에 사람이 올라왔다.

옥좌 앞에 선 외침꾼은 목소리를 드높여 장내의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본인은 창양에 사는 정 아무개라 합니다!”

정 씨라 불리는 저 사람은 상당히 언변이 좋았다.

요즘 화두가 되는 주제와 가벼운 농담으로 대중들의 웃음을 터트린 그는 한 차례 목을 가다듬고는 유려하게 축구경기의 규칙을 설명했다.

“이 축구라는 것은 말이지요!”

그의 듣다보면 딱히 어렵지는 않은 규칙이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그나저나….’

찬수는 상당히 놀란 얼굴로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땐 그 넓이에 놀라긴 했지만, 그냥 규모에 찬탄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곳이 오직 한 경기를 위한 곳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에는 솔직히 미심쩍음이 있었다.

“공간의 낭비가 아닌가?”

영달이 바로 부인했다.

“잠자코 지켜보면 아니라는 것을 느낄 걸세.”

당연하게도 이 넓은 경기장을 분할하여 쓸 줄 알았던 찬수는 흥미가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고생이야 선수들이 하는 것이겠지.

우리야 편히 보면 되는 것이고.

그 당사자들이 입장하자 경기장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기대감과 어색함이 공존하는 이 순간만큼은 찬수의 가슴도 내려앉았다.

“얇은 옷만 한 겹 입은 것인가?”

최고의 활동성을 위해 면으로 된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선수들은 분명히 예전의 축국과는 확연하게 다른 차림새였다.

“저러면 다툼이 일어날 때, 몸을 보호할 수가 없잖은가?”

“이 축구라는 것은 말일세, 단순히 힘과 어거지로만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렇다면?”

“유려한 몸놀림! 민첩하고 빠른 반사신경! 그리고, 그 뭐냐, 저 둥근 공을 발로 어찌 잘 다루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란 말이네.”

그 말과 동시에 노란 면옷을 입은 자들이 선수들 뒤를 따라 경기장에 입장하고 있었다.

상당히 엄격하며 완고한 얼굴들을 하고 있는 저자들을 일컬어 심판이라 했다.

“보세, 저 치들이 운동장에 같이 뛰어다니며 불필요한 공격이 가해진다면 벌칙을 수여할 자들일세.”

찬수는 인상을 썼다.

“피튀기지 않는 운동이 무슨 재미가 있는가?”

― 삐익

마치 그 말을 지적하듯 호루라기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 뻐엉

그리고 선수가 신호에 맞춰 그 괴상한 재질의 공을 차는 순간, 찬수의 인생은 180도 바뀌게 되었다.

‘맙소사.’

그렇게까지 거칠지는 않았다.

그러나 너무나도 빨랐다.

푸른 잔디밭에서 저 작은 공은 가죽공에 비해 수 장을 더 날아갔고 그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파도치듯 움직였다.

열한 명과 열한 명이 몰려다니는 경기.

저 작은 공을 상대방 진영의 그물망에 차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그 단순한 규칙 안에서의 경기는 너무나도 보기에 즐거웠다.

넓은 경기장은 다양한 상황에서의 변화가 일어나게 만들었다.

구석에서 차올린 공을 머리에 맞춰 상대방의 그물망에 집어넣고 환호하는 선수를 바라보던 찬수가 주먹을 꽉 쥐고 환호를 질렀다.

“옳지!”

찬수는 왠지 저 푸른색의 옷을 입고 있는 자들에게 조금 더 정감이 가는 모양.

그러나 영달은 흰색 옷의 사내들을 응원하는지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시범경기에서도 죽을 쑤더니만….”

* * *

집에 돌아온 찬수는 한동안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관중들은 마치 혼이라도 나간 듯 귀가했으며, 그날 후, 창양 내에선 하루 종일 축구경기에 대해서 떠드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미치겠군.’

머릿속에서 축구 생각이 도통 떠나지 않는지 찬수는 만들고 있던 신발을 만지작거리며 상상에 빠져들었다.

자신은 이미 늙은 데다가 몸 쓰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었으니, 이렇게 상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멋들어지게 다리를 휘둘러 득점을 하고는 가까운 관중석으로 달려가 신나게 뽐내는 것이지.

‘부질없구나.’

그는 불현듯 처량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저렇게 땀을 흘리고 뛰어다니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부러운 것인가.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는 결혼한 뒤로 도성에 와 있었지만 본디 청해에서 나고 자랐다.

멋들어진 푸른 용을 상징으로 삼은 청해 축구단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었다.

게다가 좋아하는 색깔도 파란색.

어찌 운명의 축구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경기를 계속할수록 청해 축구단은 실로 병동이라 불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반면 황실 인사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흰옷의 창양 축구단은 선수들의 층이 두터워 기세가 등등한 모양.

그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우리 선수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아무것도 껴입지 않고 면으로 된 얇은 상하의만을 입고 들어갈 수 있는 탓에 이 축구경기는 실로 공정한 경기라 할 수 있겠지.

공이야 양 측 모두 쓰는 것이고.

그렇다면 오직 하나가 남을 뿐이다.

‘…신발.’

찬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신발장이가 신발 생각을 지금까지 못 하고 있었나?

그는 자책의 의미로 머리를 한 대 때렸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고무로 된 신발을 만들어보자.

찬수는 뭐에 홀린 듯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고무라는 물건은 매우 비쌌지만, 어떻게 자금을 융통하여 첫 제품을 만든 찬수는 그것을 신고 집 안을 정신산만하게 돌아다녔다.

“뭐하는 거예요!”

아내가 뾰족하게 고함을 지를 때까지.

“내자, 한번 신어 보겠소?”

찬수는 놀라움을 삼키며 그렇게 권했다.

아내의 반응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불퉁한 얼굴로 청소를 하려던 아내는 그래, 한번 궁금하니 신어나 보자 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어, 어머머!”

한 번 신어보았을 뿐인데 아내는 거듭하여 놀라움을 표현했다.

짚신과 가죽신, 나무신들이 전부였던 시대에는 고무신이란 실로 놀라운 발전이었다.

그러나 찬수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고무신은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으나, 축구경기를 하는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약간은 미끄럽고 내구력이 약했다.

‘밑에 돌기를 넣어보자.’

우둘투둘한 표면을 만들었으나, 그래도 재질의 한계가 있었다.

찬수는 연구를 계속했다.

‘내구력을 향상시킬 방법이 있을 거야.’

하지만 여전히 감은 잡히지 않았다.

* * *

그러나 진보는 우연한 발견에서 오는 법.

일을 하던 아내가 문득 비명을 질렀다.

남편이 선물해 애지중지하며 보관해놓고 있던 신을 물고 달아난 개가 그것을 난로불 속에 던지는 것이 아닌가.

“이놈이!”

개에게는 응징을 했으나 이미 돌이킬 수는 없었다.

신발은 불 안에서 활활 타고 있었다.

서둘러 집게를 가지고 와 그것을 건졌으나 이미 고무신의 겉에는 흉한 그을음이 잔뜩 깔려 있었다.

찬수는 침울해하는 아내를 달래주었다.

“내 그깟 신은 수십 개를 만들어 줄 수 있으니, 괘념치 마시오.”

흉한 몰골의 신발을 버리려 집어든 찬수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만져지는 질감.

‘…….’

특유의 무른 표면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탄력기는 느껴졌다.

그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려던 신발의 운명을 조금 미루기로 작정했다.

* * *

수개월 뒤.

상민은 자신에게 온 물품을 받았다.

관직에 있으면서 어마어마한 상납품들이 왔었지만, 그는 받을 이유도, 성격도 아니었다.

돈이라면 제국에서 자신보다 위에 있는 자가 없을 것이고, 권력이야 두말하면 입 아팠으니.

가문의 명예와 번성? 그것만큼 실로 웃기는 소리가 어디에 있겠나.

당연스럽게 그는 청탁 물품을 전부 돌려보내거나, 심하면 보낸 인간을 조지기까지 했었다.

그 이후로 그에게 청탁과 뇌물을 바치려는 자는 별로 없었지.

하지만 상민은 몇 가지에 대해서는 공적으로 선물을 받긴 했다.

선물이라고 해야 할지, 시제품을 받는 투자자라 해야 할지.

청해의 통령직까지 겸하고 있는 이상 기술자들의 후원자로서 받는 이 선물은 그들이 자신의 투자를 이끌어내려는 포트폴리오와 다름없었다.

실로 고려 기술자들의 수호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검고 탄력있는 밑창,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위를 장식한 신발을 뜯어본 상민이 조그맣게 감탄성을 내었다.

모습은 놀랍게도 현대의 캐주얼 가죽 구두와 비슷하게 생겼다.

자신에게 진상할 것이니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었겠지.

그러나 가진 역량 자체가 빼어나니 이 시대에 이런 물건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

상민은 신발을 책상에 올려놓고 음미했다.

최찬수가 올린 투자요청서는 이미 서명이 끝나 있었다.

“…내가 어찌 우리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민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렇게 보람찬 일이 있겠는가.

자신은 분명히 이 시대에서 가장 독특하며,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이끌고 있는 이 나라의 백성들 또한 마냥 우매하고 미몽에 빠져 있는 자들도 아니었다.

보라.

단 한 번의 진보와 그에 파생되는 수많은 결과물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자신이 아는 한 수많은 노력과 수많은 생각을 해 이렇게 조금씩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단 말이지.

그는 신발을 신어보았다.

발이 큰 탓에 조금 작았다.

“조금 작구나, 내 개인적으로 하나 제대로 주문하고 싶다.”

돈을 두둑히 줄 테니, 괜찮게 하나 만들어 보라 전해다오.

상민의 말에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당하.”

“아, 참.”

명을 받고 물러나려는 관리의 등에 대고 상민이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그 신발의 상징 같은 것을 겉표면에 부착하는 것을 고려해보라 일러다오.”

“상징이라 하오시면?”

“뭐가 되었든간에.”

씩 웃은 상민은 말꼬리를 흐렸다.

“초승달 문양이나, 뭐 그런 것도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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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고무 = 가황 고무

검은 고무 = 카본 블랙 고무입니다.

보통은 타이어와 신발 밑창으로 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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