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1)
해윤은 충녕대군 이도를 공(公)의 위에 봉했다.
고려의 법제상 봉지는 줄 수 없는고로 명목상의 지위에 불과했지만 어찌 되었든 한 나라의 왕족이 귀화한 전례가 없는 대사건이라, 품위 유지와 여러 명목으로 금전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상민 또한 개인적으로 그의 저택을 사주는 등 불편함이 없게 해 주었다.
이도는 매우 고마워했다.
마음을 놓고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셈.
안정된 여건 위에서 그는 불과 일 년 만에 국자감시에 붙을 수 있었다.
상민은 그 소식을 듣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유학을 비롯해 수많은 학문에 모두 능하다더니 과연 대단한 인재다.’
군주의 업무에 치이지 않아서 그런지 오히려 여러 가지 잡학(조선의 입장에선)에 능했다던 이도는 산학과 여러 과목에서 상당한 재주를 드러내었단다.
반면 그렇지 않은 분야도 있었다.
정치철학에 관하여 이도는 좋지 못한 성적을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합격은 했으나 어쩌면 당락이 갈렸을 수도 있었다.
철학과 기타 사상이 배점이 낮아서 다행이지.
유학자로서 사서 오경을 배우며 주자의 이기론(理氣論)과 심성론(心性論), 거경궁리론(居敬窮理論)등을 공부했던 이도는 고려의 대세 학문에 아직 익숙해져 있지 않았다.
학자로서의 자부심에 약간의 상처를 입은 이도는 더욱 공부에 매진했다.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먼저 행정교육기관인 국자감으로 가 배운 것들을 되새겼고 오늘의 실무 학습을 준비했다.
오전과 오후의 교과과정이 끝난 이후에도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만 연서궁으로 향했다.
공의 신원부와 더불어 상민의 추천서까지 제시하니 일부 공간을 제외하고는 이도가 가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배움에는 실로 끝이 없구나.”
이도는 자신이 고려에 온 것을 매우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이 나라는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비록 그가 꿈꾸는 유학의 이상적인 나라는 아니었고, 굳이 따지자면 극한으로 법가를 추구하고 있는 사회였지만 배울 것은 참으로 많아보였다.
첫 번째는 단연 글자였다.
이 신묘하면서도 어딘가 몹시 익숙한 글자는 고려말과 조선말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실로 적합한 문자였다.
어쩐지 시중은 국문에 대한 언급을 할 때마다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아낙은 물론 어린아이와 늙은이까지 모두 읽고 쓸 줄 아는 나라가 천하에 어디에 있겠는가?’
아무리 이도의 머리가 명석하다 하더라도 생전 처음보는 글자에 빠르게 숙달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만에 고려글(혹은 국문, 한글)을 읽고 쓰는 것에 무리가 없게 되니 참으로 대단했다.
‘이 나라의 태조가 만들었다 했지.’
그분의 얼굴을 한번 뵙고 싶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
두 번째는 이 연서궁 자체였다.
이도는 연서궁을 처음 봤을 때, 처음 그 거대함에 놀랐다.
다음은 그 서책의 방대함에 놀랐고, 보존상태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경악한 것은 연서궁 안 집현전에서 벌어지는 자유로운 토론이었다.
국자감이 실무행정을 가르치는 곳으로 바뀐 뒤, 불비불문의 현판은 이곳으로 옮겨졌다.
‘참으로 광오하지 않은가.’
고려의 학풍은 다른 곳과는 너무나도 달라, 학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으며, 다소 급진적인 발언이라 할지라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학자들은 모두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러한 학풍 속에서 이도의 사고방식은 서서히 개방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젊다고 보긴 어려운 나이지만 이미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 특유의 완고함이 사라진 이 문일지십(聞一知十)의 재능은 실로 하늘이 내렸다 평할 수 있을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국자감에서 공부를 한 지 불과 이 년 만에 대과(동당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관리로서 등용될 자격을 갖추었다.
이후 상민의 안배로 국자감의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어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으니.
이 천재가 가장 먼저 하게 된 것은 불교에 대한 칼날을 제련하는 것이었다.
“국자박사, 그대는 사적이지만 공적인 일을 해야만 하겠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2의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집필하시구려.”
“……!”
이도는 다소 놀란 얼굴로 상민을 바라보았으나, 그 얼굴에서 한 점 망설임을 찾아볼 수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삼봉의 불씨잡변은 대체 어찌 알고 계신 것이지.
사소한 의문보다는 일단 대답을 해야 할 때.
“마땅히 따라야 할 일입니다.”
비단 이도가 지금부터 상관인 상민의 명을 따라야 한다지만 그는 이 명령에 어떠한 불만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좋아했을 뿐.
이도에게 불교란 타파해야 할 대상이었으니까.
* * *
상민은 이도에게 고려 불교의 변천사에 대해 말해주었다.
고려의 불교는 처음에는 조계종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지눌의 불계를 이은 보성과 보성의 제자였던 해심, 그리고 그들의 제자들로 이어지는 계보를 가진 조계종은 처음에는 가장 정통적이며 권위가 높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 사이에서도 분파가 갈리기 시작했다.
백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 불교는 여러 가지 계파와 산문들이 있었으나 크게 전통적인 조계종(曹溪宗)과 다시 부활한 천태종(天台宗),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만종(滿宗)으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의천으로 대표되는 천태종과 지눌로 대표되는 조계종은 고려에서 그리 특별할 것이 없었으나, 만종은 그 둘과 현저하게 다른 면이 있었다.
호국불교라 하면, 대체로 한반도의 불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성격이었다.
삼국시대부터 불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고려에 들어와서도 거란과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그 성격이 크게 두드러졌다.
단지 그것까지만 했으면 전혀 상관이 없었다.
위정자의 입장에선 오히려 괜찮았기 때문에.
그러나 항상 과도하게 오버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
창양 고려는 전통적으로 승병을 운용하고 있었다.
원래는 이들이 직접 나가 싸우는 자들은 아니었고 다만 병사들에게 종교적인 안온함을 주는 역할에 불과했으나, 이들은 차츰 식인문화를 가진 위협적인 원주민, 정확히 말하자면 투피족과 과라니족들을 마주하였을 때부터 변질되기 시작했다.
제국의 백성들 사이에서 서서히 싹트는 선민의식과 융합된 이 종교적 우월주의는 미개한 원주민들을 무력을 통해 계도할 수 있다는 교리로 변하기 시작했고 무장과 살계를 옹호하는 것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어찌 불자가 나아가서 저들을 도살한단 말인가!”
중세의 혼란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무장 자체는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그러나 나아가 저들을 공격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에 조계종과 천태종의 종단에서는 만종을 크게 비판했으나, 만종 교단의 세력은 더욱 확산되었다.
“너희 고리타분한 것들은 가만히 앉아 골방에서 헛된 경전을 읽는 것이 전부이니 그렇게 눈이 좁은 것이다. 직접 저들이 사람을 죽이고 식인하며 제물로 바치는 것을 본다면 너희들의 그 좁은 생각이 어찌 바뀌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만종의 행보는 투피족과 과라니족의 정벌 이후엔 한동안 잠잠했으나 마야의 등장 이후 중려대륙의 극도로 잔혹한 종교에 충격을 받았는지 교리가 강화되었으며, 해윤의 타완틴수유 정벌기에는 세력 자체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해윤의 입장에서는 잘 싸우고 열의가 높은 승병들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처음으로 상민과 해윤의 의견이 불협화음을 내었다.
상민은 계속 반대하였으나, 엄연히 고려의 황제는 그였고 해윤은 그 이름도 유구한 항마군(降魔軍)을 편성했다.
스스로 금헌칙서를 통해 제한시킨 황권이지만, 군권 자체는 황제가 가지고 있었으니 법리상으로도 대항할 방법도 없었고, 직접 전장에서 뛰는 무장들과 병사들을 전부 적대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꽤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항마군들은 여러 여건의 제약으로 비록 화기를 숙달하지 않고, 총창방진을 익히지는 않았으나 냉병기에 관해서는 실로 무시무시한 자들이었다.
승갑옷을 입고 단창을 휘두르며 활을 쏘는 승병들은 날씨와 지형의 험함에 구애받지 않는 훌륭한 전투자원이었으며, 험한 안데스 산맥에서의 유격전에도 긴밀하게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산속에서 수련만 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의 전투적 유능함은 당금 황상 해윤의 마음에 쏙 들었다.
많은 지원을 받기도 했으며, 정복한 땅을 조금 떼어주기도 한 모양.
만종의 그 무력적 성격에 쐐기를 꽂아버리는 일도 일어났다.
서양과의 공식적인 통교가 열린 이후, 그들은 기독교와 정교, 유대교와 이슬람 등 아브라함계의 종교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게다가 지금 시점은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십자군이 한창 일어났던 시기와 그리 멀지 않으니.
그들에게도 ‘성전’의 개념이 생긴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불교의 성전이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일이란 말일세.”
제자리에서 펄쩍 뛴 이도의 반응이 딱 처음 보고를 받은 자신의 반응이었지.
상민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타완틴수유의 정벌이 거의 마무리되며 항마군은 편제에서 사라졌으나 딱히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아예 상설화가 된 것.
기독교의 십자군(十字軍)에 영감을 받은 그들은 해윤의 재가를 받아 종교적 수도사들로 이루어진 무력단체를 정식으로 만들었다.
고려에 적대적이며 잔혹한 외방을 정벌할 권리를 지닌 자들.
그 이름은,
만자군(卍子軍).
자칭, 이단을 심판하는 부처의 석장(錫杖)이었다.
* * *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실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도 또한 선종(조선에선 유교에 의한 강제적 종교통합으로 천태종과 조계종 모두 선종이라 칭했다.) 불교에 굉장히 비판적이었으나, 만종의 교리를 듣다 보면 선종이 선녀처럼 느껴졌다.
세상에, 아무리 미개하다지만 원주민들도 하나의 생명체지 않는가?
석가모니가 주장한 자비는 어디로 간 것인가?
‘악한 자들을 죽이면 선업을 쌓는 것이라고?’
구역질이 났다.
이도는 서둘러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기본 골자는 삼봉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따 왔으나, 논의의 초점 자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불교 종단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과 만종에 대한 세밀한 공격.
전자는 개성 고려의 최후를 서술하며 불교의 폐단을 논하는 불폐논변(佛弊論辯)이었으며,
후자는 만종의 사특함을 비판하고 쟁론하는 만사비변(滿邪批辯)이라 불렀다.
유학뿐만 아니라 경험주의적, 합리주의적 관점을 섞은 이 두 서책은 불교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사람은 진실을 통해 비판을 받으면 더욱 아프고 화가 나는 법.
틀린 곳 하나 없는 논리는 그들의 불룩한 배에 큰 상처를 내었다.
처음 이들을 접한 각 종단들은 이도를 거의 씹어먹을 정도로 적대시했지.
그러나 차츰 종단 내부에서도 여론이 극명하게 갈리기 시작했다.
조계종과 천태종 내에선 종단 내의 자체적인 자정작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제2의 태보가 참으로 많은 것이 당금의 현실이다!”
해제가 폐위되는 것에 일조한 요승 태보는 황금으로 가득 쌓인 방이 있었고, 스무 명이 넘는 여인들과 정사를 나눴다고 한다.
태보가 처형되고 나서도 비슷한 일은 생겨났다.
시중이 매번 잡고 강하게 처벌을 했지만, 종교란 것은 참으로 미혹적이라 한계가 있었다.
신도들을 통해 경자유전의 원칙을 훼손하는 곳도 있었으며, 고리대를 놓는 곳도 있었다.
창양 한가운데에 큰 저택을 몰래 가지고 있는 자도 있었으며, 상단을 운영하는 자도 있었다.
승려들의 배에 기름이 끼기 시작한 것.
아마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던 상민이 아니었다면, 고려 말기의 일이 그대로 반복되었을 수도.
물론 승려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
진실로 석가모니의 뜻을 좇는 자들은 그들을 부끄럽게 여기고 불적에서 지우기 시작했다.
갈등이 시작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파문’하고 공격하니 실로 불교계에 큰 혼돈이 벌어졌다.
‘결국은 법과 행정으로 공격을 하는 것보다 논리로서 공격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구나.’
상민은 자신에게 신학적 논리와 재주가 딱히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도가 그에게 온 것은 실로 하늘이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만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