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쿨칸
하늘은 계속해서 비를 퍼붓고 있었다.
지상의 참상엔 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달아난 전사들을 잡긴 무리였다.
청해 해군은 질척이는 진흙탕으로 변한 도시의 길을 따라 걸으며 남아있는 자들을 포박했다.
전사들은 황급히 달아났는지 도시 안에는 거동할 수 없는 노인들과 아녀자들밖에 없었다.
“모두 포박하라!”
포로들은 줄줄이 굴비같이 도시의 지하 감옥으로 보이는 곳으로 인도되었다.
그들은 도착한 곳의 입구에서 놀라 울며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고려인들은 그냥 우격다짐으로 지하 감옥에 밀어 넣을 뿐이었다.
상민은 그 광경을 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벽에 그려진 석화를 보았다.
‘역시나.’
입구에서 좌측으로 쭉 그려진 엄청난 길이의 석화.
분명 이런 화려하고 자세한 석화들을 그릴 정도로 뛰어난 문명이었지만.
느껴지는 것은 오직 거대한 악의, 그뿐이었다.
석화는 끌려온 포로들이 어떠한 취급을 받게 되는지 마치 친절하게 속삭이듯 새겨져 있었다.
승리에 환호하는 툴룸의 전사들과 울부짖는 나체의 포로들.
강인한 전사들은 그들을 이곳으로 인도한 후 축제와 제사의 날까지 그들을 가둬 놓는다.
하루하루 공포에 떨지만 결국 운명의 날은 다가오기 마련.
한 무리의 여인들이 다가와 포로들의 몸에 푸른 염료를 바른다.
마치 신들에게 자신의 공물을 자랑하는 듯이 꼼꼼하고 아름답게.
그 파란 인간들은 지하 줄에 묶여 거대한 흰색 사원의 뒷계단을 오른다.
밑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기도하고 있다.
석화에는 마치 그 장엄한 광경을 자랑하듯, 예찬하듯 찬미한다.
마침내 가장 높은 곳, 하늘의 신에게 가장 잘 보일 수 있는 제단에 눕혀지고야 마는 포로들.
긴장과 공포에 쿵쾅대는 푸른 빛 피부를 가진 제물의 심장.
제사장은 능숙하게, 마치 가축을 도축하듯 늑골 부위를 예리한 흑요석 칼로 자른다.
날카로운 비명.
제사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안에서 붉은 생명력이 넘치는 심장을 꺼낸다.
심장은 따뜻한 가슴 속에서 나와 밖에서도 몇 번이나 맥동하고,
그 옆에 자리한 차크몰(Chacmool)에 올려져 신에게 진상되는 것이다.
아아, 아름답지 않은가.
위대하신 쿠쿨칸께선 성스러운 제물에 만족하시니.
우리는 계속하여 제물을 바칠 뿐이다.
그리고 높이 올라간 심장과는 대조적으로 힘없이 계단을 굴러떨어지는 시체.
[계속하여, 계속하여.
그 피는 계단을 적시며 흘러내려
마침내 대지를 비옥하게 만들리라.]
‘…….’
상민은 도저히 그 광경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마치 이 모든 광경을 블루레이로 보는 듯 생생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겨움.
구역질.
오장 육부가 거세게 뒤틀렸다.
물론 알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머나먼 과거에 인신공양이 있었다는 것을.
한반도에서도 순장의 풍습이 있었지.
유럽과 중동,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문화 상대주의에 의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의 문명은 특출나게 잔혹했다.
이유는 도통 알아차릴 수 없었다.
단백질의 부족 때문에, 대형 가축 때문에, 열대 기후 때문에, 종교 때문에.
그놈의 때문에.
때문에!
‘염병할.’
그렇다고 자신보고 이 광경을 이해하라고?
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당장 입을 열면 역겨움에 토할 것 같은데.
에르난 코르테스.
역사서에 적혀있기로는 잔혹한 원주민 학살자이며, 비겁한 문명의 파괴자라 한다.
‘…아니야.’
그러나 자신은 지금 이 부조를 보며 그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상민은 자신을 따라온 기록관에게 이 모든 광경을 상세히 기록하라 명했다.
그가 단죄하기 전에.
* * *
상민은 석화에서 눈을 돌리고 지하 감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막상 안에 들어가자 진득한 피비린내에 여인들이 겁에 질려 있었다.
이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풀려고 하지는 않았다.
비록 부족의 일원들이지만 이 철저한 계급 사회에서 농사를 짓는 가축에 불과했을 그들은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너희들의 의식이 옳다는 것은 아니지.’
정예한 청해 해군은 딱히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나, 일반 선원들은 상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포로 중에는 꽤나 아름다운 여인들도 있었다.
장거리 항해에 성욕이 폭발할 만한 선원들은 도저히 참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상민은 무심히 입을 열었다.
“함부로 행동해서 선내에 매독이라도 퍼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신대륙의 풍토병, 전염성 질병이자 성병인 매독의 악명은 고려 전역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개방적이었던 고려의 성문화가 다소 보수적으로 바뀌는 것에 매우 지대한 역할을 했지.
어쩔 수 없다. 항생제라도 개발되기 전까진.
성별을 가리지 않고 아랫도리를 잘못 놀리는 자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기에 사회 구성원 모두가 조심하는 편이었다.
조심할 수 있었던 행동으로 인해 다른 자들에게 전염병을 옮기는 자는 가차 없이 상어 밥으로 던져주겠다는 암시에 선원들이 모두 안색이 새파래진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차라리 위생과 치안 두 분야 모두 엄격한 관리하에 운영되고 있는 고려의 공창가(公娼街)에 가서 회포를 푸는 것이 나을 것이다.
상민은 비쩍 마른 원주민 아녀자들을 바라보았다.
식량은 넉넉하다 하더라도.
왠지 모르게 그냥 짜증이 났다.
“굶지 않을 만큼만 건량을 배급하라.”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건넨 건량이 가득 담긴 포대자루를 연 여인들이 서둘러 그것들을 입으로 가져갔다.
굶어 죽지 않게끔만 준다는데 그것조차 평소에 먹던 양보다 많은 것 같았다.
열심히 먹으면서도 여인들이 자신을 힐끔힐끔 바라본다.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제물로 바쳐질 날짜는 언제냐고 물어보듯.
상민은 그 광경에 혀를 차며 밖으로 나갔다.
* * *
지하 감옥에서 나오자 좌측에 거대한 사원이 보였다.
처음 볼 때에는 그저 이 문명의 사원이라 여겼었는데.
‘진실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지.’
이제는 피비린내 나는 의식이 거행되었던 악의 소굴처럼 보이는구나.
그는 천천히 그곳을 한 바퀴 돌았다.
심리적 거리낌을 뒤로하면 건축물 자체는 참으로 볼만했다.
물론 노예들을 갈아 넣어 건설한 건축물이겠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그 잔혹함 위에서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어가겠지.
#마야 사원에서 한 컷
해시태그를 달면서.
쏟아지는 비에 푹 젖어버린 그가 관광을 중단하고 무구들을 말리려 거처로 돌아가려는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살아온 세월이 지날수록 상승하고 있는 청력은 사방이 빗소리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그 아주 가냘픈 비명을 선별해 낼 수 있었다.
상민은 약간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툴룸의 북쪽, 해변가 근처의 성벽 뒤에 작은 건축물 같은 것이 있었다.
건축물 앞엔 꽤 커다란 구덩이가 있었다.
마치 우물처럼 보이는 그곳은 식수용이라 보기엔 목적에 비해 상당히 입구가 컸다.
‘설마….’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관람할 수 있게 지어진 듯 한쪽이 뚫린 작은 건축물 안에는 의자들이 놓여져 있었다.
주변에도 마치 원형처럼 쳐다볼 수 있게 관람석 비슷한 것들이 있었다.
파도 파도 끝없이 나오는 괴담.
상민은 이 천연 구덩이 같은 곳이 또 마야의 인신공양을 위한 시설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비를 피할 수 있게 지어진 작은 관람석에서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구덩이 밑에 여자의 울음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지표면에 한 남성이 끙끙거리며 밧줄을 당기고 있었다.
장소의 목적과는 다르게 지금은 분명히 인신공양의 장면은 아니었다.
원주민 남성은 간절하게 소리치며 밧줄을 당기고 있었다.
비가 자꾸만 우물 안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상민은 하늘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 철퍽 철퍽
빗물에 잠긴 땅을 걷는 소리는 선명했다.
원주민 전사가 그 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싸웠던 원주민 전사의 복식이 분명했다.
하지만 원주민 전사는 옆에 놓여진 자신의 창을 집을 수 없었다.
밧줄에 조금이라도 힘을 풀면.
‘아기 울음소리.’
도집에 손이 걸쳐진 채로 상민은 망설였다.
힘이 없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여성의 비명 소리.
이름 모를 원주민 전사의 간절한 눈.
상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모든 끔찍한 문명이 있다면 변하지 않을 가치도 있기 마련이지.
빌어먹을 동정심.
상민은 천천히 도집에서 손을 떼었다.
자신이 수많은 원주민들을 죽였다 하더라도 눈앞의 필사적인 광경에 도를 휘두를 위인은 아니었다.
상민이 팔짱을 꼈다.
그 암묵적인 모습에 잔뜩 긴장한 원주민의 맥이 탁 풀리는 것이 보였다.
― 꺄악!
아래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나자 황급히 그가 다시 밧줄을 손에 쥔다.
하지만 힘이 빠진 것인지, 다리가 불편한 것인지 그가 오히려 밧줄에게 질질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상민은 빠르게 다가가 발로 움직이는 밧줄을 밟았다.
마치 거목에 묶인 것마냥 내려가던 밧줄이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엉겁결에 뒤를 돌아본 원주민 전사가 상민의 발에 시선을 돌렸다.
“날 볼 때가 아닐 텐데.”
알아듣기라도 한 듯 그가 다시금 힘을 수습하고 끙끙거리며 여자를 들어 올렸다.
아 답답하네.
뭐 먹지도 못했나.
상민은 은근슬쩍 그 밧줄을 손에 쥐고 당겼다.
살짝 잡아당긴다고 했는데 상당한 힘이 실렸는지 원주민 전사가 뒤로 벌렁 넘어질 정도였다.
덕분에 여인은 아이를 안고 올라올 수 있었다.
“[email protected]#%!”
아름다운 원주민 여인이 자신의 남편을 껴안았다.
원주민 전사도 엉엉 울면서 아내를 쓰다듬었다.
아이도 자신이 죽었다 살아난 것을 아는지 우렁차게 운다.
그 광경을 보던 상민은 말 못 할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 * *
툴룸의 부족장의 방.
꽤 넓고 화려한 이 방은 도시의 지도자다운 생활을 영위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놈이 어디로 도망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전투 이후 이 방은 휑 비어 있었다.
상민은 데려온 원주민의 전사에게 질문하기 위해 청해의 대학에서 원주민들의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를 데려오게 시켰다.
마야어를 알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언어에 재능이 있으니 시간을 준다면 빨리 몇 가지 단어는 알아낼 수 있겠지.
고려인의 행방을 알아내야만 한다.
그 전에.
자신이 그에게 베푼 은혜를 알긴 아는지 원주민 전사는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풍기진 않았다.
단지 아직까지 있는 저 경계심을 허물어뜨리긴 해야 하는데.
상민은 빗물을 머금어 축축한 허리띠와 무구들을 풀기 시작했다.
보통 때와 같이 자신이 직접 하지는 않았다.
* * *
구원받은 여인, 달의 꽃은 지시에 따라 마른 면포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무구들을 닦았다.
품 안에 소지하던 단도와 투척 무기들을 닦는 달의 꽃이 덜덜 떠는 바람에 예리한 날에 손가락에 살짝 생채기가 났다.
그래도 새로운 정복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바다새의 부리는 눈앞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성 앞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직도 그 광경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해변가에서 무심히 전사들을 도륙하는 모습.
심지어 재규어 같은 맹수도 그렇게 쉽게 먹잇감을 사냥하지 못했다.
예상외로 미친 듯이 퍼붓는 날씨.
츠누트에 가족을 피난시킨 것은 그의 인생 최악의 선택이었다.
물이 불어나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츠누트에 있는 달의 꽃을 구하러 달려갔을 때.
다시금 이 맹수를 만난 자신은 꼼짝없이 죽을 운명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일말의 자비를 베풀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구원을 받았다.
그때 그가 그 밧줄을 당기지 않았더라면 그의 아내는 죽을 운명이었을지도 몰랐다.
과거처럼 또 한 번 저 저주받을 구덩이 안에서.
모순적이다.
부족의 원수와 자신의 은인.
대체 저자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바다새의 부리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냉막한 가면.
저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번쩍거리는 것이 상당한 위압감을 주었다.
처음으로 저 가면을 마주한 순간 바다새의 부리는 엄청난 공포감에 잠식당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영영 이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할 정도로.
하지만 두 번째 마주했을 때 저 냉막한 가면 안의 눈동자에서 그는 동정심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역설적인 모순.
혼돈의 감정이 그의 눈동자 뒤에서 느껴졌다.
눈앞, 마치 맹수처럼 거대한 키, 탄력 있는 근육을 가진 남성이 겉옷을 벗었다.
그는 완벽한 전사의 표본처럼 생긴 그 육신에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물에 젖은 갑옷 안에선, 반짝거리는 비늘이.
마치….
뱀의 비늘같이.
바다새의 부리는 멍한 눈초리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갑주걸이에 두정찰갑이 걸리는 그 순간까지.
남성이 또 자신이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놓는다.
그 투구 위에는 붉은 수실이, 비에도 불구하고 꼿꼿이 서 있었다.
마치….
화려한 새의 깃털같이.
바다새의 부리는 마치 머리에 둔중한 충격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어린 시절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려온 자신들의 신들.
하지만 수많은 위기에도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으셨던 저들의 신들.
무능한 제사장과 더 무능한 지도자들에게만 신탁을 내려주신다는 그들의 신들.
정녕 저에게는 그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으십니까?
그는 그리 물었었다.
불신의 늪에 조금씩 빠져가고 있던 바다새의 부리는 지금 이 순간 바야흐로 진정한 자신의 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뱀의 비늘과 화려한 깃털.
엄청난 힘과 강력한 육체.
잔혹함과 자비심을 가지신 모순적인 존재.
아.
서쪽에서 건너오신 이방인의 왕이시여, 우리들의 신이시여.
저들의 케찰코아틀(Quetzalcoatl)이시여.
또한 우리들의 쿠쿨칸(Kukulkan)이시여.
저희들을 단죄하고 또한 저희들을 구원하러 오셨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