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첸 이트사(1)
쿠쿨칸(Kukulkan),
또는 구크마츠(Gucumatz),
혹은 케찰코아틀(Quetzalcohuātl).
날개 달린 뱀 신에 대한 숭배는 대륙 가운데 땅의 유서 깊은 신앙이었다.
비록 그것이 먼 과거 올멕과 동시대의 톨텍, 그리고 훗날 톨텍의 후예를 자처할 아즈텍의 케찰코아틀 신화와 혼합되어 많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애초에 그것은 고대 마야의 신앙이기도 했다.
옛 부족의 원로들은 항상 어린아이들에게 말했었다.
그분은 자비로워 우리에게 옥수수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그분은 지혜로워 우리에게 날씨와 시간을 알려주셨다.
그분은 마야인들에게 베를 짜는 법과 사냥하는 법, 불을 다루는 법도 알려주셨다.
하지만 그분은 또한 잔인하시어 언젠가 자신들을 파괴하실 분이었다.
또한 잔혹하시어 어린아이의 피와 제물들의 심장을 바치길 원하시는 분이었다.
또한 훗날 이 세계를 멸망시켜 그분이 스스로 그러셨던 것처럼 폐허에서 새로운 씨앗을 발아할 수 있게 하실 것이었다.
그 존재를 바로 앞에서 바라보게 된 바다새의 부리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신께선 인간의 말을 하시지 않는다.
신께선 옆에 자리 잡은 늙은이를 통해 말씀하셨다.
이 땅에 먼저 도착한 자들이 어디로 갔느냐고.
바다새의 부리는 천천히 대답했다.
파괴의 신께 감히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 * *
언어학자는 이튿날 눈이 시뻘겋게 변한 채로 나타났다.
최초로 조우한 문명의 언어를 최초로 번역하여 연구할 수 있는 영광을 가진 언어학자는 나이가 조금 되어 보였지만 자신이 시키지 않아도 밤을 꼴딱 새운 것 같았다.
그는 그 바다새의 부린가 하는 원주민을 취조해 정보를 캐내었다.
그 원주민의 경계심 가득한 눈이 갑자기 온순해졌고, 나중에는 숫제 경외와 공포심이 섞인 눈으로 바뀌는 과정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 잘된 것이 잘된 것이겠지.
여튼 어제 바다새의 부리가 말한 근처 마야의 대도시가 그들의 주요한 목표로 바뀌었다.
문제는 그게 딱히 근처라고 보기 어려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거지.
“그곳은 이곳으로부터 사흘에서 닷새 동안 걸어야 도착한답니다.”
‘대충 백오십 킬로미터라….’
상민은 머릿속에서 계산을 해 보았다.
녹록지 않은 거리였다.
게다가 덥고 습하며 알지도 못하는 동물들과 씨름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처럼 열대우림을 헤치며 나아가야 하나.’
상민이 혀를 찼다.
자신이 아무리 특출나다 하나 혼자 갈 수는 없는 노릇.
갈 수 있다고 하나 애초에 이 작전은 작전명 ‘고려인 선원 구하기’가 아닌가.
모두 귀환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으니.
가기 힘들다고 밍기적거릴 시간은 없었다.
비는 그쳤다.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바다새의 부리가 한 말에 따르면 의식은 화창한 날에 진행된다 한다.
핏물이 대지를 적시는 순간, 그리고 제물이 신에게 바쳐지는 순간이 태양신께 똑똑히 잘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틀 동안 툴룸을 대충 안정화시킨 상민은 작전을 빠르게 강행하기로 했다.
청해 해군은 그 규모가 작았지만 실로 정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몸이 건강한 병사들을 선별해 그중에서도 상당한 훈련을 겪은 자들이다.
저 조금의 병력을 위해 얼마나 많은 재물을 썼는지.
돈값을 해야지.
‘사실 실전경험의 측면에서 이 기회는 꽤 괜찮을지도 모른다.’
에스파냐의 콩키스타도르에 견주려면 많은 실전이 필요했으니까.
날씨는 열대기후답게 비가 그치자마자 순식간에 덥고 습해지기 시작했다.
비전투손실이 일어날 수 있는 기후.
고려 제식 두정갑을 입고 있었으면 더위에 머리가 익어버렸을 수도 있겠다.
다행스럽게도 넓은 영토와 그에 걸맞는 수많은 기후로 진출하게 된 고려는 열대기후에 특화된 개량 두정갑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 부착물들을 많이 생략하고 오직 필수 부위만을 방어할 수 있게 간소화된 두정갑은 상당히 독특했다.
팔 부위와 견갑을 생략, 허리 밑 라인까지 길게 내려오던 것을 허리 위로 올리며 축소.
그냥 외견상으로는 두정흉갑(頭釘胸甲)과 다름없다.
다른 부위는 오로지 날카로운 식물과 곤충에게 보호할 목적의 얇은 면 옷만 입었을 뿐.
최소한의 무게로 핵심 장기만을 보호하려는 이 목적의 갑옷은 분명히 투사무기나 근접 공격에 방어력 자체는 낮겠지만 열대기후에서 행군하다 픽픽 쓰러지는 경우를 예방할 수 있겠지.
투구 또한 많이 바뀌었다.
투구를 논하려면 헤어스타일의 변화 또한 일어나야 했겠지.
그 사건의 발단은 고려가 아닌 번국이었다.
열대 기후에 살게 된 동예인들은 온화한 기후를 자랑하는 창강 유역의 대평원에 살고있는 고려인들과는 다르게 서서히 상투의 풍습이 사라지고 있었다.
머리를 단발 정도로 깎아버려 풀어헤치거나 건을 쓰는 그 풍습에 고려인들이 야만적이라 비웃었지만, 상민은 그것을 보고 무릎을 쳤다.
이거지.
상투의 풍습이 예전 삼한 시절부터 내려온 문명인의 상징과 비슷한 개념이었지만 분명히 위생상 좋지 못했다.
또 뭐같이 답답하고 더운 것은 사실이었다.
상민은 창양에 한정하여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단발을 장려했다.
처음에는 물론 저항이 있었다.
아무리 유교적 문화가 많이 희석되었다고 하나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관습이다.
그러나 환경의 격변은 옛 관습만을 고집할 수 없게 만들었지.
북부 동해안의 열대 기후를 겪은 선원들은 머리를 바짝 깎아버렸고 머리를 깎지 않은 선원들보고 애송이라 놀리는 문화가 생겨났다.
아들, 해진도 거들었다.
위생개념의 전파로 인해 머리에 살고 있는 이가 풍토성 온역(발진티푸스)을 유발할 수 있다는 말도 의무부에서 나오고 있는 상황, 고려 군인들도 단발을 강제적으로 실시해야 했다.
게다가 상민의 뒷공작으로 상투가 탈모의 주된 이유라는 사실이 떠돌자 순식간에 문화가 바뀌었다.
역시 탈모 협박은 치트키야.
자신의 모근은 멀쩡했으나, 해진은 지레 겁을 먹은 것인지 고려 황실 중에서 가장 먼저 머리를 짧게 깎은 사람이 되었다.
고려의 황제까지 단발을 했으면 상황은 종결이다.
이젠 그냥 그 문화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만약 탈모 걸려도 그건 아빠 유전자가 아니다. 네 엄마를 탓해라.’
짧게 단발로 친 머리 위에는 예전 군 생활 때 보았던 수색대의 정글모 비슷한 것이 있었다.
햇빛에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각진 챙도 만들어 놓은 이 가벼운 모자는 분명히 방호력 자체는 철제 투구에 비해 형편없었다.
하지만 존나 편하다.
군 생활 동안 함께한 방탄모도 얼마나 무겁고 답답하고 짜증이 났는가.
귀까지 덮는 철 투구는 장담컨대 그것의 배 이상 사람 화나게 만들었다.
투구는 거점에 보관해 놓고 행군용 모자를 쓰라 지시하니 모두가 내심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상의 갑주는 꼭 챙기도록 하라.”
방패수들은 방패와 근접무기, 소총병들은 화약낭, 소총과 총검.
장창병들은 존재하지 않으니 생략.
개량 총방진을 구성할 수 있는 인원 백이십여 명.
그래도 이 정도면 매우 훌륭하게 개별 군장의 무게를 줄인 것이겠지.
상민은 병사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시발, 더워 뒤지겠네.
상민은 실전용 두정갑 대신 배의 선실에서 그저 장식품쯤으로 걸려 있었던 휘황찬란한 의장용 전신 어린갑(魚鱗甲)과 화려한 붉은 수실이 높이 솟아 있는 투구를 쓰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오롯이 자신의 선택이긴 했지만.
‘이게 다 이놈 때문이다.’
자신의 말, 뉴 적제를 끌고 가는 마종(馬從)은 바다새의 부리였다.
이놈이 물론 자신에게 이 옷을 입으라 직접 말한 것은 아니긴 했다.
조금, 아니 매우 복잡하다.
그는 자신을 쿠쿨칸이라는 마야의 뱀 신으로 여기고 있었다.
대충 듣기로는 뭐 깃털이 달린 커다란 뱀이란다.
전지전능한 마야의 신.
왜 그리 여겼냐고 물어보진 않았지.
다만 상민은 그 신화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야만과 광신의 땅에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고려에서는 그렇게도 하기 싫었던 짓을 해야만 했다.
‘그래, 내가 신이 되어주마.’
그래서 너희들을 이 역겨운 종교에서 꺼내주겠노라.
상민은 불교의 성지로 꼽히는 해문의 해룡사를 떠올렸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반쯤 그리 여겨지고 있기도 했다.
위대한 존재로 취급당하는 것은 나름 익숙하다.
번쩍거리는 황동 비늘갑옷, 붉은 수실의 투구.
사람보다 더 큰 짐승을 탄 거대한 사람.
상민은 의도적으로 자신에 대한 신화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잘 적고 있지?”
“예….”
그의 곁에서 언어학자가 땀을 흘리며 판서했다.
* * *
마야의 도로, 사크베(Sacbe)
다행이었다.
영화나 기타 매체만을 봤던 그의 상식상으론 치첸 이트사라는 도시까지 열대우림을 돌파해 나가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툴룸에서 멸망한 코바의 폐허로 도착한 이후 목적지까지는 사크베(Sacbe)를 통해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사크베는 폭이 이삼 미터가 되는 꽤 넓은 흰색 흙의 도로였다.
물론 썩 관리 상태가 좋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대체 어떻게 이 문명으로 이 정도의 도로를 건설했는지 참으로 대단하다.
나무뿌리를 밟고 이상한 뱀을 밟아나가는 것보다야 이억 배는 나으니까.
보병들이 열을 맞추어 행군했다.
이동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이 정도면 소문이 도착하기도 전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겠다.
바다새의 부리가 계속 중얼거린다.
“뭐라는 거야.”
“위대하신 분을 뫼시게 되어 영광이랍니다.”
다리 다쳤는데 그냥 툴룸에 있지.
자신이 목숨을 구해줘서 그런가.
저 원주민 바다새의 부리는 그리 싫게 다가오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싸운 기억도 없다.
일방적으로 존숭하는 태도.
지금도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노력하고 있지 않는가.
“고개를 들어라.”
언어학자가 통역하니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네가 말한 도시가 저곳이냐?”
눈앞, 사크베의 끝에 희미한 도시가 보였다.
그 조그마한 외형으로도 직감할 수 있었다.
천천히 그 도시의 문에 접근하면서 상민은 순수한 감탄성을 내었다.
툴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엄청난 규모의 도시는 진실로 옛 개경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다.
거대한 흰색의 건축물들.
수많은 사람들, 노예들.
뛰어난 염료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다채로운 색깔의 의복들.
한바탕 이 대지를 휩쓴 대역병(천연두로 추정된다)에도 불구하고 결국 살아남은 자들의 집합소.
치첸 이트사(Chichen Itza).
* * *
치첸 이트사의 아하우(Ajaw, 왕)는 궁전에서 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그쳤지만 아직 구름은 살짝 남아 있었다.
대제사장이 머리를 숙였다.
“날씨가 머지않아 완전히 풀릴 것입니다. 그때 화려하게 의식을 거행한다면 신들께서도 노여움을 푸실 것입니다.”
“알겠다.”
거대한 궁전 밖에는 굶주린 치첸 이트사의 평민들이 보였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면 사방의 도시에서 바치는 제물들이 그 사이를 지나 수용소로 들어간다.
대역병이 돈 후에도 치첸 이트사의 권위는 예전보다 오히려 더 강해졌다.
압도적인 권위에 마침내 경쟁자 마야판조차 복종하는 상황.
유례가 없을 정도의 거대한 의식이 거행된다면 신들께서도 만족하시며 기근을 끝내 주시리라.
“툴룸의 노예들도 잘 있겠지?”
그중 남동쪽 항구도시 툴룸에선 이상한 피부와 생김새의 사람들을 보내왔다.
머리는 위에 이상한 꽁지머리를 한 자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이 반항심이 넘쳐 보였지만 그만큼 이색적이며 생동감 있는 제물을 바칠 수 있다는 것에 그들은 기꺼워했다.
확실히 상등품의 제물이긴 하다. 영양 상태도 좋은 것을 보면.
“그렇다고 해도, 그놈들이 제멋대로 공물들의 숫자를 줄인 것은 괘씸하단 말이지.”
백 명의 공물들은 그 자체의 가치도 있었으나 주변 도시들의 힘을 빼놓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툴룸의 사잘(Sajal, 지도자, 공작)로 임명된 그놈이 처음부터 전투를 치르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밑으로 기어들어 왔다고 하지만 이렇게 명을 어겨서야 곤란하다.
자신의 뜻에 거스른다면 코바의 전례를 따르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어야 했다.
“그들을 인솔해 온 전사들도 모두 공물로 삼아라.”
공물 스무 명과 전사들 스무 명이면 본래 명했던 공물의 수보다는 적지만 조금의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그가 다시금 여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음식을 먹으려 할 때, 저 멀리 한 전사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아하우! 아하우!”
“무슨 일이냐!”
“사크베에!”
헉헉대며 잠시 숨을 고른 전사는 다소 멍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사크베에 지금 괴상한 존재가 나타나 이리로 오고 있답니다.”
“괴상한 존재?”
전사는 벌벌 떨고 있었다.
특출난 전사인 그가 이리 떠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았기에 아하우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쿠쿨칸! 쿠쿨칸께서 이 도시로 오시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