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5화 (65/653)

마야(2)

병권이 정박해 놓은 두 척의 협저선.

그곳에 남아서 배를 지키고 있던 선원들은 송병권 제독이 떠난 직후 멀리서 망원경으로 그 도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별일 없어?”

“그래 보이는데.”

몸에 걸친 것 하나 없고 대체로 성기를 드러내놓고 다니는 칼리나족과는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었다.

나름대로 의복까지 갖추어 입는 문명답게 협상이 통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밤에 환하게 모닥불을 피워 놓고 연회를 벌이는 모습에 선원들은 투덜거렸다.

“젠장, 저놈들이 여인들 손목을 잡을 사이 우리는 닻줄을 만지작거려야 한다니!”

장기간의 항해에 심신이 지쳐 있던 선원들이 심통을 부리며 선실에 있는 술을 마실 때 갑자기 도시에서 긴박하게 횃불들이 오가고 어렴풋이 싸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협저선의 선원들은 아까 했던 말을 취소해야만 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너무나도 궁금했으나 날도 늦었고 모두가 잔뜩 술에 취한 탓에 아무도 저 괴상한 원주민들의 도시에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불가능하기도 했고.

제독 놈이 모조리 가져간 덕에 하선할 나룻배가 있어야 말이지.

며칠 동안 고민한 그들이 이윽고 반쯤 포기하며 닻을 올릴 때 저 멀리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푸른 해룡.

청해 통령의 깃발이 꽂혀 있는 함대가 보였다.

* * *

사실 구원의 손길인지, 심판의 손길인지.

“그래서, 저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예.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본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송 제독을 얼마나 열심히 말렸…!”

“그만! 내가 묻는 말에만 짧고 간결하게 답하라.”

취조관과 병사들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그들이 문득문득 꺼내는 고문 도구에 선원들이 앞다투어 일어난 일들을 술술 불기 시작했다.

― 똑똑

나포한 배의 선원들을 취조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상민이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데려온 청해 해군의 장교가 다가와 말했다.

“두 선박 합쳐서 총원 스물한 명의 신원을 확보했습니다.”

“스물하나라….”

그렇다면 적어도 스무 명의 선원들이 저 땅에 떨어진 셈이다.

‘짜증 나네.’

마음 같아선 확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은 저곳의 위험함을 영화나 기타 여러 매체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피의 대지라는 말이 적절하겠지.

마야 문명은 떠오르고 있을 멕시카의 문명에 비해 이미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겠지만 그 야만성과 잔혹성은 아직도 건재할 것이다.

‘살아는 있으려나.’

사실 그것도 장담하지 못했다.

빨리 따라잡긴 했지만 아직 닷새 정도의 시간 차가 있었다.

장기자랑이 이미 끝났을 수도 있었다.

이상한 깃털 모자를 한 채 시뻘건 심장을 높게 치켜드는 제사장이 생각나 약간 구역질이 일어났다.

“돌아가심이 어떠합니까.”

그 기색을 읽었는지 주형이 그렇게 물었다.

주형으로서도 자신의 옛 동료인 병권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긴 했지만 괜한 곳에서 위험을 자초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그래도 해놓은 말이 있으니.’

상민은 대꾸를 하지 않은 채 맨 밑 단단히 잠긴 서랍장을 열어 질 좋은 종이와 도장을 꺼내었다.

일필휘지로 서신을 작성한 그는 금으로 장식된 통령의 직인을 꺼내 찍은 후 단단히 봉인했다.

“배 한 척으로 청해에 갈 수는 있겠지?”

“저 말씀입니까?”

“그래. 윤 항해사 말이야.”

주형은 다소 머뭇거렸다.

자신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걸까.

상민은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돌본다고.

상민의 재촉에 마지못해 서신을 받아든 그가 밖으로 나가는 상민의 뒤꽁무니를 졸래졸래 쫓아왔다.

상민은 선미루의 문을 열고 나왔다.

갑판에 꿇어 앉혀진 항명 선원들, 그리고 그 옆에서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 청해 해군들이 보였다.

“저들은 분명 죄를 지었다. 상관의 명령과 군율을 거스른 자들이니.”

몇 명이 그 말을 들었는지 몸을 움찔 떨었다.

선장과 주동자들은 아마 교수형에 처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죄는 고려에서 논할 것이고 그 처분도 고려의 법에 의해 내려질 것이다.”

야만인들에게 뜯어먹히는 고려인은 자신이 용납할 수 없다.

병권, 그자가 결국 차디찬 시신으로 변할 운명이라 하더라도.

“제국은 제국인을 버리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모두 죽었다면, 적어도 저 도시만큼은 우리의 복수의 대상이 되리라.

* * *

제사장은 전리품을 보고 싱글벙글 웃었다.

포로들은 치첸 이트사에, 이 전리품들은 자신들에게.

번쩍거리는 무기들은 이 땅의 어떠한 흑요석 돌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엄청나게 예리해 손을 가져다 대면 금방 피가 배어 나오기도 했다.

“이것으로 배를 가르면 조금 더 수월하게 심장을 뺄 수 있겠다.”

흑요석 칼 대신 작은 철제 소도를 챙긴 제사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그가 포로들을 치첸 이트사에 보내면서 제일 아쉬워한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

직접 포로들의 심장을 신께 바치는 기회가 사라져 버렸으니까.

입맛을 다시는 제사장 옆으로 전사들도 그 탐욕의 현장에 참가했다.

그들은 무구들을 챙겼다.

이방인의 갑옷들은 독특하게 생겼으나 질겼으며 튼튼했다.

수가 적은 것이 흠.

한 전사가 손에 무엇인가 들고 살폈다.

“이건 뭐지?”

길쭉한 막대기는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렇게 잡고 휘두르는 건가?”

끝부분이 넓고 뭉툭하여 휘두르는 둔기로 보였다.

작은 장식들이 달려 있었는데 무슨 의미로 달아놓았는지는 몰랐다.

어색하게 그 둔기를 휘두르다 자신의 손에는 딱히 안 맞는 것을 느낀 전사들이 소총을 내려놓고 다른 것을 뒤적거렸다.

* * *

― 쿠르릉

천둥 번개가 치며 비가 쏟아져 내렸다.

바다새의 부리는 하루 종일 잠에 들지 못하고 며칠 동안 계속 해변을 맴돌았다.

비구름에 해가 가려 사방이 어두웠다.

지도자와 제사장들은 이 외지인들로 백 명의 공물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고 전사들은 전리품에 눈이 먼 것 같았지만 자신은 이것이 잘못된 결정이라고 느꼈다.

‘신들께선 언제나 대답하지 않으셨다.’

대역병이 온다고 말도 하지 못했고 기근이 온다고 말도 하지 못했잖아.

삶은 예전보다 나아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피폐해져만 갔다.

거짓말쟁이 신들.

그는 의식적으로 불경한 생각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

저번에 보았던 수평선에 떠 있던 거대한 존재가 사람이 만든 배의 일종이었다는 사실은 가까운 해변에 대어진 작은 나룻배를 보고 나서야 납득할 수 있었다.

이 나룻배는 자신들의 카누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짜여져 있었다.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차원적인 문명.

그 일이 일어났던 밤, 분명히 저 배 위에서도 빛이 보였다.

저들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었는데.

바다새의 부리는 이왕 저지른 일을 돌이킬 수 없으니, 카누를 끌고 저 배를 어떻게 해 보자고 의견을 내었지만 그것도 묵살당했다.

그리고 두 척의 배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제사장은 봐라, 별거 아니지 않는가 하며 다행으로 여겼다.

며칠을 해변에 기웃거린 그도 마침내 거북한 마음을 안고 돌아서려는 사이,

저 멀리 수평선에 다시 그 배들이 보였다.

그 크기가 역시나 거대해서 나무로 만든 성채와 같았다.

그리고 두 척이여야 했을 배가 계속 늘어났다.

‘하나, 둘, 셋….’

총 일곱 척의 배.

거대한 나무 성채들은 분명히 자신들을 향해 직진하고 있었다.

‘이런!’

큰 배에서 작은 배들이 내려졌다.

이윽고 수많은 사람들이 해변으로 다가오는 것을 바라본 바다새의 부리가 서둘러 부족장에게 달려갔다.

“적들이 침입해 옵니다!”

승전을 기념하며 이상한 가루에 취해 신을 영접하고 있었던 부족장은 흔들어 깨워도 정상적인 사리 분별이 불가능한 상황.

그나마 빨리 정신을 차린 제사장이 그를 대리하여 남아있는 전사들의 통제권을 쥐었다.

바다새의 부리는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뜻에 따라 줄 믿음직한 동료들은 모두 공물들을 이끌고 치첸 이트사로 갔다.

사실 자신도 다리만 멀쩡했으면 그곳까지 같이 갔어야 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저 멍청이가 전사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준비해라!”

포로들에게 분명 날카로운 금속제 무기들을 얻었었다.

하지만 전사들은 평소와 같이 제각기 둔기와 그물 등을 들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땅의 민족들은 전투를 치를 때 그리 격렬하게 다른 부족을 공격하지 않았다.

전쟁은 포로를 잡기 위해 치루는 의식이다.

신에게 바쳐질 제물, 아이를 낳기 위한 여인, 일꾼이 될 노예들.

상대방을 죽이면 오히려 자신들에게 손해였다.

따라서 공격하는 자들은 마치 성난 짐승을 포박하듯 그물과 돌을 던져 잡는 경우가 흔했다.

‘하지만 그 인간들, 기습당했다고 하나 무섭게 반격했어.’

제대로 무장을 갖춘 외지인 한 명이 활을 맞기 전까지 무려 일곱 명과 대치하던 것이 떠올랐다.

바다새의 부리는 패배를 직감하고 제사장에게 가서 주장했다.

평소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편에 속했으나 그래도 전투에 대해선 자신의 말을 어느 정도 들어주는 듯했으니까.

“여자들과 아이들만이라도 숲에 대피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저번의 승리에 기고만장해졌는지 제사장은 자신도 현명한 전사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겁쟁이 같은 놈! 전투가 바로 앞으로 다가왔는데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구나!”

바다새의 부리는 제사장을 설득했지만 오히려 겁쟁이라는 경멸만을 받으며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매번 듣던 소리긴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못했다.

질질 끌려나가는 와중에도 그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으나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결국 임시 감옥으로 끌려가게 된 그가 절뚝거리다 길바닥의 돌에 걸려 넘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하나 있었다면.

넘어진 상태로 바다새의 부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테치치의 발톱, 날 풀어줘. 이대로는 위험해.”

테치치의 발톱은 그의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전사들은 모두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몇 번 사지에서 목숨을 구해준 친구의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주변의 시선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바다새의 부리를 슬그머니 풀어주었다.

“조용히 있어야 해, 나중에 제사장님이 혼을 내신다면 네 힘으로 빠져나갔다고 하고.”

테치치의 발톱은 주섬거리며 자신의 창을 챙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바다새의 부리가 근처의 돌을 챙겨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 퍼억

“넌 나중에 내게 감사하게 될 거야.”

허물어지듯 쓰러진 친구의 등 뒤에 씁쓸한 말을 남겨놓은 바다새의 부리는 서둘러 아내에게 달려갔다.

그의 가족은 주변의 소란 속에서도 무사히 잘 있었다.

바다새의 부리는 가족들을 이끌고 인근의 천연동굴, 츠누트에 데려갔다.

달의 꽃은 츠누트를 보고 반쯤 정신을 잃을 듯이 두려워했다.

예전의 악몽 같은 기억이 떠오른 것이 분명했다.

부족 구역 안에 있는 이 츠누트도 수많은 의식이 치러진 장소였다.

“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리 애를 생각해.”

옥수수 가루 자루를 들고 밧줄에 매달려 츠누트에 내려간 달의 꽃은 내리는 비에 허리까지 차오른 물과 그 밑, 자신과 비슷한 또래였을 여인들의 유골이 느껴지는지 이윽고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진정을 시키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빗소리에 그녀의 울음소리가 묻혔다.

그는 그 광경을 애써 무시하며 빠르게 걸었다.

그래도 그의 부족이다.

적어도 한 사람이라도 살리긴 해야지.

절뚝이며 최선을 다해 달린 그는 해변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벌어진 끔찍한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 * *

해변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색깔은 선명하여 얼마나 많은 피가 동시에 흘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가장 강력한 무기인 화기를 쓸 수 없는 날씨였다.

때문에 고려의 선원들은 내려서 싸우기를 약간 껄끄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상민은 기어코 상륙을 강행했다.

선원들에겐 알지 못하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 커헉

장인에 의해 수십 번 담금질한 명도(名刀)에 적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적의 갑옷은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다.

고려의 갑옷.

그것을 눈치챈 뒤, 분노를 동력 삼아 상민은 혼자서 적의 절반을 죽였다.

두정철갑과 도 한 자루만으로 보여주는 신기에, 적뿐만 아니라 아군까지 얼어붙었다.

한 번의 휘두름에 한 사람이 죽는다.

간결한 움직임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돌과 화살, 창들 사이로 춤추듯 움직였다.

무려 오십여 년간 늙지도 않고 도를 수련해온 사람이 보여주는 경지는 범인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고려인들도 그럴진대, 저 원주민들이야 어련할까.

불가해한 존재의 등장은 원주민들의 사기를 바닥으로 처박히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린 선원들도 이윽고 거세게 호응했다.

선원들도 화가 잔뜩 나 있었다.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한솥밥을 먹던 동료였긴 했다.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진 선원들은 맹렬히 원주민들을 공격했다.

애초에 철기의 끝자락에 있는 자들과 철기를 처음 본 자들의 만남은 예정된 결과였다.

한 병사가 내지른 총검에 꿰뚫린 원주민을 마지막으로 남은 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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