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4화 (64/653)

마야(1)(지도 첨부)

마야라고 칭해지는 문명.

이 땅에서 가장 번성한 문명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문명은 얇디얇은 초에 희미하게 붙여져 있는 불꽃과 같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토지가 황폐화되며 매년 반복되는 기근이 나타났으며, 외지인들의 침략도 빈번했다.

그렇게 스스로 무너져 내려가는 마야의 후손들에게 마지막 비수를 찌른 것은 그들로서는 경험하지조차 못했던 불가해한 존재였다.

유례가 없는 대역병.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는 몰랐다.

남쪽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북쪽의 무시무시한 부족들이 가져왔다는 사람들도 있고 신들께서 그들에게 분노해 내린 벌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온몸에 수포가 난 사람들은 순식간에 죽어갔으며 거의 수백만에 달했던 마야 전체 인구의 숫자는 오분의 일, 혹은 그 이하로 줄었다.

한때 화려하게 번성했던 도시들은 붕괴했으며 남부 산맥 고지대에 있는 옛 마야의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북부 저지대, 즉 반도의 윗부분으로 올라와 연명해 나가야 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남에도 이 여파는 쉽사리 수습되지 않았다.

마야의 제사장들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에 그 권위를 상당 부분 잃었다.

수많은 도시들이 몰락해가기 시작했다.

몇 개의 도시들 빼고는.

저지대 마야의 도시들은 더욱더 많은 제물과 더욱더 많은 피를 하늘에 바쳐 이 위기를 극복해 내려 했다.

가장 유명한 도시, 치첸 이트사는 이 참혹한 시대를 극복하고자 위대한 신 쿠쿨칸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유례가 없을 정도의 제물을 바치기로 결정했다.

그 강대한 치첸 이트사로부터 남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한 도시가 있었다.

바다와 접한 도시, 툴룸은 강대한 도시들 사이에서 연명해가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나름대로 살아남았던 가장 큰 이유는 옛 선조들이 지어 놓은 거대한 성벽 덕분이었다.

앞으로는 거대한 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높은 성벽이 방어하는 툴룸은 작지만 단단한 도시였다.

그러나 바로 옆에 동맹관계에 있던 코바가 치첸 이트사의 공격에 몰락해가자, 그 여파는 툴룸에게도 미치기 시작했다.

툴룸의 지도자는 시세를 판단해 치첸 이트사의 왕에게 고개를 조아리기로 했으나, 항복에 대한 그의 요구조건을 듣고 절망에 빠졌다.

“무려 백 명의 사람들을 바쳐야 한다니!”

대역병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 전성기에 비해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툴룸의 인구수로는 백 명의 공물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무언가 해결책이 필요했다.

* * *

툴룸의 전사 바다새의 부리는 독특한 전사였다.

솔직한 말로 전사답게 용맹하지는 않았다.

상당히 냉소적인 성격이어서, 처음에는 자신들의 용맹함을 과시하기 위해 온갖 괴상한 짓을 다 하는 동료 전사들에게 겁쟁이로 비웃음을 당했다.

하지만 몇 차례 외부 부족과의 전쟁에서 영리한 판단으로 큰 공을 세우자, 시선은 달라졌다.

지혜로운 전사.

그렇게 불리게 되었지.

하지만 바다새의 부리는 그 호칭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야의 풍습에는 신께 바칠 제물을 정함에 있어 일신의 고귀함이 최고의 조건으로 꼽혔다.

자신이 위로 올라갈수록 신에게 자신의 피를 바쳐야 하는 것이다.

장담컨대, 그는 자신의 피가 신을 기쁘게 하기는커녕 노하게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옛날의 일 때문에.

남서부 작은 부족은 연례행사로 부족 중에 흠결이 없는 아름다운 처녀를 츠누트(Tsʼonot; 지하수로 생긴 천연 우물)에 던져 신에게 바쳤다.

자신의 부족원들을 이끌고 그 부족을 공격하여 자원들과 사람들을 납치하던 바다새의 부리는 츠누트에 던져지기 직전의 여인을 보았다.

그리고 숨이 멎을 듯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 그는 자신의 부족원들이 신께 바쳐질 제물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말리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녀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와 아내로 삼은 그는 당연하게도 지도자와 제사장, 그리고 원로들 모두에게 크게 혼났다.

― 신들께서 진노하시는 것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제사장은 바다새의 부리의 피를 신께 바쳐 노여움을 달래기로 결정했다.

툴룸의 방위에 상당히 중요한 전사였던 만큼, 목숨을 빼앗아 갈 수는 없었다.

허벅지를 베어 피를 거의 한 접시나 흘린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름답고 어린 아내의 간호를 받았다.

결론적으로 충분히 감내할 만한 고통이었다.

그와 아내는 상당히 사이가 좋았다.

달의 꽃, 이름처럼 아름다운 아내는 이제 막 두 살이 된 어린 아들을 기르고 있었지.

그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한번 발을 디뎌본 사람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남편에게 매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부부간의 사이가 좋아도, 삶의 역경은 여전히 무자비했다.

“오늘 식량이야.”

보름 넘게 버텨야 할 옥수수 가루를 받아든 달의 꽃은 그 무게에 조금 실망스러운 기색이었다.

“너무 적은 양이에요.”

그녀는 곤히 자고 있는 아들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친구에게 부탁해 볼게.”

아마 힘들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달의 꽃에게 그리 둘러대었다.

자신이 유난히 적은 양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동료 전사들도 버티기 힘들 정도로 적은 곡물을 받았다.

부족 전부가 지금 기근에 신음하고 있으니 전사 계급이 아닌 일반 평민들은 굶주려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잠시 그 끔찍한 광경이 가족에게 닥치는 순간을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떤 바다새의 부리가 고민에 빠질 때, 밖에서 그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침입자다!”

도시의 경계를 맡고 있는 전사로서 빠르게 대응해야 했다.

절뚝거리면서도 빠르게 돌창을 챙기고 면 옷 위에 두꺼운 가죽을 입고 나간 그는 서둘러 도시를 둘러싼 성벽으로 향했다.

“그쪽이 아니야!”

동료의 외침에 그가 어리둥절했다.

침입자들이 대체 어디로 왔다는 건가.

“바다! 바다를 보라고!”

바다새의 부리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저 바다 너머로 엄청난 크기의 무엇인가가 떠 있었다.

“대체 저것이?”

* * *

병권은 근처의 바다에 정박하고는 나룻배들을 내려 직접 물가로 상륙했다.

“원주민들 중에선 여태껏 이 정도의 문명을 가진 자들은 보지 못했다.”

푸른 바다에 지어진 원주민들의 도시.

눈앞의 거대한 도시는 열대우림에서 헐벗은 채 움막 안에서 살아가는 투피족과는 차원이 다른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

흰색, 혹은 회색의 돌들.

질서정연하게 쌓아 올린 석조건축물들은 수많은 경험을 했던 병권과 휘하의 선원들의 입을 도통 다물 수 없게 하고 있었다.

다층으로 짓기 시작하는 고려의 일반 건물들과도 비교해 볼 때 그리 낮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어렴풋하게 보이는 정체불명의 높은 건물은 제일 번화한 창양에서도 단일 건물로만 보았을 때 꽤 큰 축에 속하지 않을까.

“맙소사.”

처음으로 만나는 이 거대한 문명의 도시 앞에서 그들은 전율했다.

병권은 손바닥을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갑주는 모두 잘 챙겨입었지?”

제각기 피갑을 챙겨 입은 선원들은 무구를 점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는 고요했다.

갈매기들이 끼룩대는 맑은 날씨, 챙겨 온 청옥같이 푸르른 바다.

눈부신 백사장과 어울리지 않는 정적인 고요함.

외견상으로는 상당한 숫자가 거주하는 번성한 도시였다.

하지만 거리에 다니는 사람은 그의 십분의 일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도시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기력하며 절망적인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원주민들은 그들을 보고 놀라더니 이윽고 아이들을 챙기고 가옥이나 건물로 들어갔다.

비쩍 마른 자들. 죄다 굶주린 것이 분명했다.

피골이 상접해 있는 주민들은 불안한 눈빛과 절망이 두 눈 깊이 침잠해 있었다.

반면 도시의 전사계급인지, 저 멀리 일단의 무리들이 무어라 외치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원주민 전사들을 본 선원들이 제각기 도집에 손을 올려놓았다.

전투교육을 이수해도 아직 이러한 큰 규모의 수적 열세에서 싸우는 전투는 경험이 없다.

뜨내기 선원 하나가 덜덜 떠는 모습이 보였다.

“이 기회를 섣부른 행동으로 망치지 마라! 모두 침착해!”

삽시간에 감도는 적대적인 분위기에 병권이 소리 질렀다.

절호의 기회다.

첫 만남의 인상이 중요했다.

‘이 정도 문명이면 그리 야만스럽지 않을 것이다.’

거래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고려의 북쪽에 사는 치족들과의 첫 만남도 사서에 적혀 있지 않은가.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면 언어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터

다가오는 자들이 어느덧 자세하게 보일 때.

복식이 놀랍다.

무려 면 옷을 입고 있지 않은가.

그 위에 동물 가죽 갑옷을 받쳐 입고 석창을 든 자가 황급히 달려왔다.

원주민 장수와 전사들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에 빠진 듯 보였다.

“[email protected]#%^$!”

저자가 바다와 병권의 일행을 계속 번갈아 가리켰다.

그들은 한동안 시끄럽게 떠들더니 이윽고 천천히 병권에게 다가왔다.

전사들의 목에 걸려있는 돌멩이들.

‘전부 옥이야!’

품질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일개 전사들로 보이는 자들이 모두 옥 장신구들을 가지고 있다니.

병권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반면 선원들은 이 땅에 이렇게 무방비하게 내린 자신의 미친 상관에 대해 드디어 경각심이라는 것이 생겼는지 자꾸만 뒤에 있는 나룻배를 흘깃거렸다.

탐욕과 경각심이 오가는 가운데, 뒤늦게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 보이는 부족장이 천천히 다가왔다.

“@^%$&!”

그 노인의 호통에 전사들이 모두 겨눈 창을 들어 올렸다.

부족장의 모습을 보며 희망의 불꽃이 조금 밝아지는 것을 느낀 병권이 등 뒤의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수하들은 머뭇거리다, 재촉하는 그의 말에 서둘러 나룻배로 가 끙끙거리며 건량 자루와 술통을 들어 올렸다.

“당신들에게 주는 것이오.”

병권은 천천히 그들의 앞에 물품들을 내려놓도록 지시한 후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먹을 것을 주는 것, 그리고 무기를 쥐지 않는 손바닥을 펼치는 것.

둘 모두 인류의 문화권을 통틀어 싸우지 않으려는 뜻을 나타내기 마련.

부족장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부하들을 시켜 식량 자루를 열어보고는 한 개의 건량을 들고 잠시 노려보다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던 부족장의 얼굴에 이윽고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병권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의외로 첫 만남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 * *

그날 밤, 원주민들은 고려인 선원들을 위해 큰 연회를 열었다.

준 식량도 꽤 되어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뒤숭숭한 이때에 이런 독특한 외형, 다소 이국적인 이방인들을 이용해 지배계급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들과 먹고 마시며 경계심을 허물어뜨린 지도자는 제사장에게 속삭였다.

“저자들이 누군가?”

괴상한 옷을 입은 자들.

무기는 번쩍거리고 키는 크다.

피부는 자신들보다 옅었고 비슷하게 생긴 것 같으면서도 조금 달랐다.

지도자는 말로만 듣던 북부의 민족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선 괴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동쪽에서 온 신의 사자라는 둥, 쿠쿨칸께서 다시금 이 땅에 오셨다는 둥.

하지만 누가 봐도 깃털도 없었고 비늘도 없는 그냥 평범한 자들이다.

지도자의 질문에 제사장이 고개를 찡그렸다.

광신적이며 잔혹했지만 그래도 제사장의 위에 그냥 오른 자는 아니다.

그는 첫 만남에 탐욕에 사로잡힌 고려인 선장과 선원들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신, 혹은 무엇인가 대단한 존재라고 하기엔 저자들은 너무 천박했다.

“저들이 상당히 독특하고 특이한 존재임은 틀림없으니 치첸 이트사의 왕께 보내시지요. 그분이 매우 흡족해할지도 모릅니다.”

치첸 이트사에는 온갖 종류의 옥이 모여든다.

색깔과 크기가 모두 다양한 옥들, 그 종류는 가히 대단했다.

옥의 질 또한 엄청나게 좋아 굉장한 보물도 있었다.

이것은 너비가 성인 남성의 손바닥 길이만 한 구형의 옥으로 매우 푸르고 투명하며 흠집조차 없어 쿠쿨칸의 눈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신물이었다.

몇 다리를 걸쳐 어렵사리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게된 제사장은 그들이 옥을 얻기 위해선 내륙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듣고 주저하는 것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방인들은 제사장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다소 경계심을 샀는지, 그들 중 몇 명이 계속 타고 온 넓은 카누를 힐끔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제사장은 그날 밤, 결단을 내렸다.

술과 여인들로 그들의 주의를 흐트러트린 후 고려인 선원을 급습하기로 한 것.

― 와아아!

병권은 술 취한 채 원주민 여인과 동침하다 머리에 둔기를 맞고 기절했으며, 다른 선원들 또한 거세게 저항했지만 풀려버린 방심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물론 툴룸 전사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전사들 열여덟 명이 죽었으며 그보다 더 많은 수가 부상당했다.

‘낮에 싸웠으면 우리가 졌어.’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아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바다새의 부리는 순간 오싹한 마음이 들었다.

뒤통수에 끈적한 느낌이 자꾸 들었다.

이 느낌은 숲속에서 사냥할 때 가끔 느꼈던 징조였다.

사냥꾼이라 생각한 당사자가 사냥감으로 전락해 버리는 그 순간에.

바다새의 부리는 그런 느낌이 들자마자 숲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 뒤에는 여지없이 노란색 눈을 빛내는 재규어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지.

하지만 지금의 느낌은 예전보다도 더욱더 무서웠다.

그는 자꾸만 바다를 바라보았다.

동료들이 성공적으로 그들을 포박해 대나무에 묶고 치첸 이트사로 향할 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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