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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8화 (48/653)

천문

태자가 이번에는 호기심이 생겼는지 물었다.

평소 자식을 교육시킬 때 매사 질문을 자주하라 한 까닭에 오히려 이런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다른 것들 좀 관심가지면 좋겠구만.

“어찌 그리하셨사옵니까.”

제삼자가 보기엔 스스로 황권을 약화시키는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은 행동이었다.

“진의 영정은 서책을 불지르고 유생을 파묻어 전제군주의 입지를 다졌으나 정작 그의 황조는 불과 두 세대를 지나지 못했지. 이 아비는 그러지 않길 바랄 뿐이다. 자유롭게 떠드는 자들은 다른 떠드는 자들에 의해 비판받고 견제당하며 결국은 합되어 나아갈 것이니, 학문과 진리의 수호자라는 지위는 오히려 이 아비와 네 후손들을 공고한 반석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상민은 방금 시험장에서 만나 토론한 유원을 떠올렸다.

네가 과거 세대의 인물인 고자(告子)정도의 윤리적 사상에서 멈출지, 혹은 고려의 존 로크(John Locke)가 되어 유학의 한계를 깨부수고 경험론의 토대를 만들어나갈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

그래도 그의 의도는 천천히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옛 고려 문벌귀족의 시기에 융성했던 유학은 고려에 이미 꽤 널리 퍼져있는 사회 규범적 정치철학이었다.

그는 이 인식을 서서히 바꿀 생각이었다.

유학이라.

동아시아의 한때 위대했던 사상이며, 나중에는 딱히 위대하다고 보기 힘들어진 사상.

초창기엔 동시대 서양, 중동, 인도 등의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합리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상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한계는 시대가 발전해 나가는 와중에도 해결책을 찾은 서양과 달리 결국 넘어서지 못했지.

하지만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모든 원인을 유학으로 돌리는 것은 조금은 가혹한 평가일지도 몰랐다.

게르만, 앵글로색슨, 프랑크, 라틴, 카스티야, 카탈루냐, 노르만, 노르드, 헝가리, 루스 등등 정말 셀 수 없는 민족과 나라들로 쪼개어져 서로 견제하고 연합하고 결혼했던 유럽과는 달리 중원, 중국이라는 너무도 거대한 나라는 주변 나라들의 역동성을 전부 집어삼키는 고래였다.

유목민들은 중원의 수도를 범하는 것에 성공했어도 그 자리에 눌러앉아 새로운 중국이 되는 것에 그쳤을 정도였으니까. 정녕 마가 낀 땅이라 칭해도 될 것이었다.

또한 희대의 어리석은 법이라 평가받는 해금령은 당장의 중원 국가의 안보에는 소소한 도움이 되었으나, 경제와 기술의 분야에서는 스스로 땅을 파고 얼굴을 묻어버리는 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학은 그 어느 시기에도 지식인들에게 날카로운 통찰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교조적인 성격이 강한 성리학으로 들어가며 오히려 더욱 더 쓸모가 없어지게 되었으니.

너무나도 형이상학적이며, 비논리적이다.

과거 논리학이라는 학문의 씨앗을 발아한 다른 제자백가, 묵가나 법가, 명가들은 모두 땅에 묻혔고 오직 유학만 지배층의 필요성에 의해 살아남았으니.

심지어 조선에서는 환국과 같은 사건들 때문에 더욱 뒤틀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자신은 이 땅에서 기존에 존재했던 유학의 권위를 끌어내리고 학문의 자유를 천명한 것이다.

이것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교조화되지 않은 다원적인 사상들은 후대에 서양의 세력들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 자체적으로 문화적 방파제가 되어 그들의 파도에 무력하게 쓸려 내려가지 않게 해 주리라.

또한 오히려 그들을 감화시킬 수도 있겠지.

상민의 뜻이 참으로 굳건하여 당장 지금처럼 나라의 국본이 유학이 아닌 별자리에 매몰되어 있어도 신하들은 끙끙거릴 뿐, 차마 반대하지 못했다.

형과는 달리 여러 방면에서 고루 소질있는 차남 해진(解溱)을 기대하고 있는 모양인데.

하지만 현제(現帝)의 시대는 그대들의 생각보다 오래 갈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이제 나이가 사십이지만 자신은 이십대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일부러 늙어 보이게 수염을 길게 길렀으나, 면도하고 본다면 자식들과도 조금 나이 차가 나는 형제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젊게 보일 것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다면 어느순간 그 관계가 뒤집히는 시점도 오고야 말겠지.

불현듯 상민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치세동안 그대로 태자로 남아야 할 아들들.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

그는 애써 상념을 끊고 말을 돌렸다.

“그래, 태자는 국자감에 어인 일로 왔는가?”

이 놈, 사실 오늘 국자감에 시험이 있다는 것도 모른 거 아닐까.

매사에 관심이 없어 그럴 만도 했다.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회피한 태자는 결국 이실직고했다.

“천문각에 새로운 물건이 만들어졌다하여...”

오호라, 상민이 궁금한 듯 감탄사를 흘렸다.

그 아들에 그 아빠다.

“망원경 말이냐?”

“예, 그렇사옵니다.”

망원경을 만드려면 유리가 필요했다.

유리 원료로 쓰일 좋은 품질의 규사는 창강변의 모래사장에서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

문제는 기술.

적어도 삼국시대까진 한반도의 유리 제조 기술은 꽤 융성했었던 것 같았다.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융성한 유리문화는 고려로 들어오며 도자기에 밀려 서서히 등한시되고 있었던 것은 맞으나 아직 기술 자체는 실전된 것은 아니었다.

근래까지만 해도 사리 그릇과 같은 불교적 제기를 만들 때, 유리가 가끔은 쓰이기도 했다.

도공들 중 몇 명이 유리공예를 아는 자들이 있기에 다행이다.

조금 시간이 더 지난다면 점차 그 명맥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지만 상민의 후원 아래 이 땅에서 다시금 발전하기 시작했다.

유리의 가치는 동시대의 지식인들조차도 알아차리기 참으로 힘들지 않을까.

단순히 값비싼 식기와 잔을 만드는 것 정도가 아니었으니.

빛의 굴절을 조절할 수 있다는 면에서, 그것의 가치와 활용도는 실로 무궁무진했다.

사람의 선천적, 후천적 시력을 보완하는 것도 있겠지만 사람의 전통적인 인식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세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작은 세계와 불가사의하게 큰 세계 모두.

모양이 이리저리 아름다운 유리 자기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뭉툭한 유리 렌즈를 만드는 것은 의외로 빨리 성공했다.

투명도는 아직 썩 만족스럽지가 않았지만, 대략적으로 적의 존재와 규모를 알아차리기만 할 수 있어도 그 효용을 다하는 군용 망원경의 용도로는 나무랄 데 없었다.

반면 천체를 관찰할 정도로 흠 없고 투명한 유리는 그 수가 무척이나 귀했다.

공예의 기술력이 세월에 의해 축적되거나 혹은 상당히 드물게 투명한 유리가 만들어지는 수밖에는.

이번에 진상된 유리정(琉璃晶, 렌즈의 고려말)은 그것을 만든 유리공이 스스로 놀랄 정도로 투명하고 곡선이 잘 뽑혔단다.

태자가 괜히 이리 신나하는 것이 아니다.

궁금증이 생겨 같이 천문각에 가보니, 생각보다 큰 천체 망원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빈 구리 원통이 거치대에 올려져 있고, 그 옆에는 유리정이 탁자에 올려져 있었다.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있던 유리공은 황상까지 온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지 넙죽 엎드렸다.

상민은 손의 때가 묻을까 고개를 쭉 빼고 그것을 살펴보았다.

대단하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리 기대하는 것이 없었는데.

“정녕 대단하구나, 네 재주와 결과물이 참으로 좋으니 이 유리의 무게만큼 금을 하사하겠다.”

”화...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물론 운칠기삼이겠지만 이런 것에 포상을 아끼지 말아야 앞으로 좋은 질을 만들기 위해 애쓰겠지.

태자가 익숙하게 유리정을 망원경에 연결했다.

망원경과 같은 과학적 기구들의 기초 개념은 자신이 알려준 것이지만, 정작 만든 것은 대부분 태자와 그를 따르는 한림원의 신료들이 많았다.

그들이 짧은 시간에 낸 성과는 꽤 대단했다.

측우기, 송의 지남철을 개량한 정식 나침반 등이 있었고 심지어 해시계와 물시계도 그 중 하나에 속했다.

해시계의 모양은 옛날에 박물관에서 보았던 앙부일구와 비슷했다.

그러나 물시계는 상당히 복잡한 구조라 아직 여러 부분에 있어 개량이 필요했다.

예전에 본 장영실 관련 사극이 기억이 떠올랐다.

이보다 더 크고 더 복잡했던 것 같았는데.

‘어떠한 원리로 작동하는지까진 보질 못해서 아쉽구만.’

독촉은 하지 않았지만 이리 한 번 얼굴을 비춤으로써 장인들은 조금 더 서두르겠지.

사단장이 헛기침 몇 번 하면 산이 옮겨지는데, 황제는 어떻겠나.

장인과 하급 관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의 눈치를 보았다.

태자와는 오래 보아 친해진 것이지만 상민은 아니니까.

잠시 하늘을 보자 그새 밤하늘의 구름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그 사이로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공기가 맑으니 보기도 아름답다.

남반구에서는 은하수가 참 잘 보였다.

낭만이 사라진 것 같은 태자는 한창 별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한 관원은 옆에서 잘 보이게 그려진 고려의 천문도(天文圖)를 들고 있다.

좋아.

잘 되가는 모양이군.

저 일련의 행동들이 고려의 새로운 역법(曆法)의 기틀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쓰고 있던 당의 선명력은 한반도와도 오차가 있었는데 심지어 이곳은 지구 반대편의 남미였다.

그로 인한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역법은 농업사회에서 상당히 중요했으니까.

기술이 발전했으니 조금 더 자세하게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아리스타르코스와 피타고라스에 뒤이어 오직 자신만이 알고있는 세상의 진리, 지동설과 지구구형설까지 누설해주었는데.

자리를 비켜주자.

어두워져야 제 일을 하는 관청이기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늦게는 자지 말라 하고 상민은 처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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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 문득 출출한 것이 심해져, 그는 고려의 전통 면요리를 가져오라 시켰다.

무역로를 통해 고려는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지.

모두 식생활과 식탁의 차림새를 변화하는 것에 공헌을 세웠다.

호박, 주키니, 옥수수, 감자 등등등.

그 중 감자는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습성으로 인해 거름을 뿌리기 어려운 미개간지를 개척하는 시기에 훌륭한 식량자원이 되어주었다.

최근들어 고려로 새롭게 전래된 작물이 있었는데, 먼 북쪽의 언어로는 시토마틀, 혹은 토마틀이라 부르기도 하였단다.

상민은 정식으로 이를 토마토라 명명했다.

고려의 식생활과 영양소를 개선한 작물 중 하나였다.

토마토를 이용한 면 요리, 거기에 감자튀김과 빵을 얹으면 훌륭한 고려의 전통요리가 되는 셈.

중전이 몹시 좋아하는 요리 중 하나였다.

그도 그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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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그렇지 않은 작물들도 있었으니.

안데스 산맥에서 기원한 이 작물들은 이 땅 원주민들의 샤먼들이 애용하는 기호식품이었다.

몽롱한 정신세계에 들어가 접신이 잘 된다나 뭐라나.

고려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인 술이 그리 잘 팔리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작물들.

효능만 들으면 좋은 작물들이겠지만 상민은 그것들을 죄악의 작물이라 불렀다.

첫 번째 작물은 담배였다.

생각할수록 스트레스를 받는 작물이다.

그도 몇 번 피워보긴 했지만, 입에 자주 대진 않았다. 중독되기 전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도 있었고.

그러니 비흡연자라 칭해도 무방하겠지.

비흡연자의 입장에서 담배연기는 매우 고통스럽다.

백해무익하며 세수를 걷는 것 이외에는 존재가치가 없는 이 작물은 가공하여 만드는 것 조차 인적, 자원적 낭비가 아닐까.

흡연자들조차 그것이 사랑스러워 피는 자들은 별로 없었다한다.

끊을 수가 없기에 피는 것이지.

잠시 이 작물이 고려에 퍼져,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 곰방대를 물고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끔찍하기 짝이 없구나.

상민은 종교적 힘을 빌려 이것을 피우는 자는 극락에 발도 디딜 수 없다 말하기도 하는 등 온갖 공작을 펼쳤다.

발기부전이 된다느니, 대머리가 된다느니, 병에 걸려 죽는다느니.

사실 따지고보면 모두 맞는 말이네.

흡연문화가 자리 잡기 전 강력하게 단행되었던 규제로 사람들은 담배에 대해 금방 흥미를 잃었다.

만약 이것이 문명이 조금 발전된 곳에서 넘어와 공작이 먹히지 않았다면 조금은 힘들었을지도.

그러나 이것마저도 두 번째 작물에 비해선 선녀와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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