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제 개편
개천 5년(CE 1280), 고려의 관제가 정비되었다.
자신이 불로불사라 하나, 불의의 사고로 칼이라도 맞으면 저 세상 가는 것은 분명하기에 군주된 입장으로서 후손을 위해 효율적이고 건전한 행정조직을 만들어야 했다.
본디 고려는 당의 3성6부제를 본떠 고려의 실정에 맞게 2성6부제를 쓰고 있었다.
이후 무신정권이 시작되고 새로운 땅에 도착한 이후까지 사실상 유명무실한 처지로 전락했다.
칭제건원 후, 서고려와 동고려로 분할되었다 하더라도 동쪽은 아직 관제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동쪽 놈들의 사정이야 별 관심은 없었고, 상민은 효율적인 관료제를 도입하기 위해 조직도를 개편했다.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여 관의 편제는 과거의 제도를 많이 참고했다.
괜히 기획재정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이런 식으로 미래적 부서를 만들고 미래적 감성으로다가 이름을 붙인다 하더라도 동시대 사람이 갑자기 계몽되는 것은 아니니까.
익숙한 말로 붙이는 게 낫지.
첫 번째.
고려의 적폐기구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을 없애고 비상설기구의 상설화를 극히 경계하라는 윤음(綸音)을 내렸다.
교정도감(敎定都監), 동고려의 보위도감, 고려 말의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훗날 조선의 비변사(備邊司)까지.
저런 기구가 한 번 자리 잡으면 그 폐단이 만만치 않아 정부의 기강이 흐트러지는 것이다.
또한 재추회의같은 귀족적 성격의 회의체를 모두 없애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도입했다.
두 번째, 허직(虛職)들을 대부분 청산했다.
하는 일이 없으면 관리라고 부를 수 없는 거 아닌가.
너무 당연한 소리. 하지만 시대는 당연하지 않은 일을 그동안 해 왔었으니.
본디 고려에는 검교(檢校)의 지위가 있었는데, 간략히 설명하자면, 실직(實職)의 숫자 자체가 부족하여 관리들에게 포상을 해야 할 경우 명목상의 허직을 줘 달랜 것이다.
이 폐단은 만만치 않았는데, 검교직의 남발이 있어 국가 재정이 문란해졌고, 군역, 노역을 피하는 도구(避役)로 이용되기도 했다.
또한 고려의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명예직으로만 존재하는 삼공(태위, 사도, 사공)과 삼사(태사, 태부, 태보)의 지위도 폐했다.
이런 것이 있으면, 권신이 어떤 지랄을 할 지 모르기에 태조인 자신이 앞장서 없애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관제 그 자체.
2성 6부를, 3성 10부로 바꾸고 원시적인 삼권분립을 꾀했다.
가장 중요하고 사실상의 행정부의 역할을 할 상서성(尙書省)의 우두머리는 종1품 상서령으로, 허직을 실직화 했고, 실직이었던 정2품 좌우복야(左右僕射)로 그를 보좌토록 했다.
영의정과 좌우의정에 해당할 것이다.
그 밑에는 내무부, 외무부, 군무부, 재무부, 법무부, 교무부, 상무부, 공무부, 의무부, 농무부를 두어 상서(종2품)들이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본디 존재했던 판사(判事)는 중서문하성의 변화로 사라지고, 평장사나 참지정사같은 복잡하고 쓸모없지만 자리만 차지했던 관직들도 혁파했다. 다만 부서 최고 장관이 된 상서의 직급은 정3품에서 종2품으로 한 단계 올렸다.
한 개 부의 구조는 상서 1인, 시랑 1인, 낭중 2인, 원외랑 2인을 두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중요하고 강력한 부서와 덜 중요하고 강력하지 않은 부서의 차별점은 있었다.
내외군법재와 교상공의농은 그 속관 규모의 차이가 있었으니.
10개의 부라도, 현대인으로서는 상당히 적은 부서라 인식을 하고 있긴 한데, 동시대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6부의 숫자에서 4개가 더 늘어난 까닭에 우려하는 시선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도 관직의 자리가 늘어나긴 했으니까 그들로서도 나쁘진 않겠지.
나중에 필요해질 부서들은 천천히 추가하면 된다.
관리 봉록도 다 돈이야 돈.
남은 것은 중서문하성.
당에서는 별개의 기구였으나 고려에서는 나라의 규모로 인해 합쳐진 기구였다.
중서문하성의 행정적 파워는 오히려 상서성을 능가했다.
어찌 보면 중서문하성이 의정기관이고 상서성은 종속기관이라 볼 수도 있었으니까.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행정부가 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상민은 이들을 분리했다.
중서성(中書省)의 경우에는 본디 성재(省宰)들이 가지고 있던 행정, 의정적 권한을 대부분 상서성의 실무자들에게 넘기고 성랑(省郞)의 간관 업무는 사헌대와 어사대에 많이 넘긴 이후 본래보다 상당히 약해진 기구가 되었다.
하지만, 황제의 조칙을 내리고 조언하며 법률을 입안을 하는 고유의 역할은 부각되어 사실상의 입법부의 기능을 하였다.
먼 훗날, 아주 먼 훗날 드디어 시민들에게 제대로 된 시민의식이 생긴다면 이것은 의회의 역할을 할지도 몰랐다.
문하성의 경우에는 이름을 바꿔 집법성(執法省)이라 칭한 후 사법부의 기능을 부여했다. 사실상 없애고 새로 만들었다 봐야 할 수도.
집법성의 어린 관료들로 하여금 전문적인 법의 교육을 받게 한 후 지방에 나가 수령을 견제토록 하며 공명정대한 법이 집행될 수 있게 기틀을 만든 것이다.
조선의 율관이 역(譯, 통역), 의(醫, 의학), 음양(陰陽, 천문, 지리, 명리)과 뭉뚱그려 네 개의 잡과라 칭할 정도로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던 것과 다르게 지금은 명실상부한 정식 관료로, 상서성의 관료들과 그 직책만 다를 뿐, 봉록이나 대우, 인식은 모두 같았다.
게다가 사법권까지 쥐고 지 맘대로 처벌하여 온갖 소란이 끊이지 않았던 조선의 수령과는 다르게 전문성도 확보할 수 있지.
그 외에는 황제의 직속 기구로 추밀원(樞密院)을 두어 황명의 시행과 정보의 수집, 숙위과 군기를 맡아보게 했다.
본디 재추(재신과 추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추원의 추밀(樞密)은 재상과 맞먹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지위였으나, 그 행정적 권한이 도를 지나치다 판단한 상민은 양지에서의 권력은 제한하고, 오직 황제 직속의 자문기구와 정보처로서의 본질을 부여하였다.
또 애초에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 없어진 이상 추신(樞臣) 힘의 근원은 사라진 셈이니.
결국은 행정부, 상서성만 떡상이다.
나머지의 기구로는 어사대와 삼사(三司)가 있을 것인데.
삼사의 경우 본래의 행정, 곡식의 출납과 회계를 담당하는 업무에 걸맞게 재무부의 휘하로 배속시켜 그 역할을 재부에서 따로 총괄토록 하였다.
어사대의 경우 둘로 나뉘어 사헌대(司憲臺)와 어사대(御史臺)를 구별하였다.
사헌대는 중앙 관료에 대한 감찰, 어사대는 지방 관료에 대한 감찰이 주된 업무였고 예전과 업무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없어지고 사라진 기구들이 많았으나 새로이 만든 것도 있었다.
내장원은 그 중 하나였다.
군주국가라면 군주의 사유 재산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는 군주의 권력을 보장하여 황권을 강화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명한 군주 아래에서는 필요악이라 부를 수 있겠지.
조선에서는 내수사의 역할을 할 내장원(內藏院)을 만들어 그의 수장을 내장원경(內藏院卿)이라 하였다.
‘황실 토지는 따로 마련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앞으로 신경 써야 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정책에 황제 스스로 할 말이 있으려면 적어도 대규모의 내장전이나 궁방전은 존재 자체가 좋지 못했다.
조선시대 내수사의 토지에 관련하여 여러 폐단이 존재했다 배웠으니까.
또한 과도한 군주의 사유재산은 국가의 재정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자신은 오직 상업을 통한 이윤을 추구할 예정이었다.
현 고려는 소금길과 무역로를 운용하고 있었고, 상민은 그 곳에서 얻는 이윤을 통해 내장원의 운용기금을 충당하였다.
훗날 체급이 더 성장하면 여러 나라들과 무역을 통해 얻는 이윤으로 내장원을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군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군대는 편제 상 삼천 오백의 병력.
그 중 처음부터 자신을 따랐던 자들, 서로군이 있을 것이고,
부족이 복속되어 여러 이유로 군역에 종사하게 된 강족병 오백여명이 있을 것이고,
경별초의 신분이었다가 귀순하여 같이 수성전을 치룬 천오백의 병사들이 있을 것이고,
수도에서 합류한 오백여명의 옛 신의군 출신 금군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수성전 때 꽤 많은 이들이 희생되어 그 수는 완편 부대의 편제 인원 수보다 적었다.
이들을 통폐합하고 빈자리를 채운 뒤 서로 출신이 다른 자들을 섞어 부대들을 창설하니 세 개의 령(領, 1000명)급 부대가 나왔다.
지근거리에서 자신을 호위하는 금군 천 명을 별도로 편제하고 나머지 2개의 령을 그 이름을 유서 깊은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으로 편성하니, 이는 딱히 특이한 사항은 아니었다.
다만 교육은 특이했다.
상민은 사관학교의 제도를 만들어, 그 지위를 앞으로 설치할 중앙 교육 기관, 국자감(國子監)과 비슷할 정도로 끌어올리기로 결정했다.
재위 이후 무신정권을 비판하고 줄곧 문치(文治)의 우위를 천명하며 행정적 개혁을 해온 상민으로서는 이례적인 경우였다.
자신이 강력한 장군이고 유능한 지휘관이기 때문에 휘하의 무장들의 반발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지금껏 무신정권 이후 누려왔던 무신들의 마땅한 권리를 제한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을 리가 없었다.
별감이 백내장이라는 신체적 허점을 가지자마자 평소 불만을 품어온 심복에게 칼을 맞은 이유도 비슷하겠지.
매번 채찍만 주면 탈이 난다.
또한 송나라의 사례와 고려의 전례를 찾아봐도 극도의 문치주의는 그것대로의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다.
Si vis pacem, para bellum.
평화를 위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로마의 플라비우스가 군사학 논고를 저술하며 말한 명언.
만고의 진리이자,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교훈이다.
지금 당장 고려는 옆에 있는 반적들과 사방의 야인정도가 적일뿐이지만 이백 년 이후에는 시대가 격변할 것이니까.
군인에 대한 예우와 그들의 능력을 끌어올리고 충성심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던 해야만 했다.
또한 실리적인 방안이었다.
군의 운용에는 유능하다 볼 수 없는 고을의 수령이 군권을 쥐는 것은 그리 현명한 방법은 아니니.
사관학교에서 우수한 군인들을 교육하여 군령을 맡기는 것이 모든 면에서 더 좋았다.
예전 고려에서는 문신에게 전쟁을 총지휘토록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유능한 문신이지만 무재도 엄청났던 강감찬 장군 같은 경우는 정말 조상이 고려를 굽어 살펴 나온 희귀한 케이스지, 다시 한 번 그런 요행을 바랬다간 양심 없다고 조상에게 뺨을 맞을 것이었다.
교육과 마찬가지로 장군의 계급을 한 단계씩 끌어올렸다.
상장군은 정3품에서 종2품으로,
대장군도 한 단계 오르고 그 공백에 중장군을 두어 계급을 세분화했다.
수성전 때 희생된 자들을 기려 현충원을 만들고 순국한 군인에 대한 예우를 다하니 군심이 매우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복속된 야인들의 경우에도 동등하게 적용되어 그들의 유족들도 모두 군인전을 받고 먹는 것이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뭐 열심히 개편했다고 해도 막상 인선 절차에 들어가니, 매우 심란했다.
정부조직도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이다.
중서성과 집법성은 물론이요 상서성의 장차관급 상서와 시랑의 자리도 비어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느 날 상서령 지숙이 간언하기를,
“폐하, 제 자식들은 나이가 어리고 미욱하니 고관의 반열에 들면 스스로 자만하여 성심을 어지럽힐 수 있사옵니다. 부디 낮은 지위에 제수하시어 그들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닦아 항상 경계토록 하시옵소서.”
상민은 그 말을 흐뭇하게 여겨 경전과 승현, 그리고 지숙의 두 아들을 모두 낭중급의 위에 올렸다.
그의 자식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비슷한 연배라 같이 묶여버린 경전과 승현이 살짝 투덜거렸으나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공이 커지면 진급을 할 수 있다는 목표가 생겼으니 나쁜 일 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상서와 시랑의 위는 모두 공석이라 그들이 사실상의 상서만큼의 업무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상서만큼의 책임은 지는 것이 아니니까.
아직 대학생 정도의 애들에게 그 정도 책임은 무겁기도 하고.
또한,
‘미래가 예정된 관료들이긴 하나 처음부터 굳이 큰 권력을 줄 필욘 없지.’
그들이 자신의 총신이라 하나, 군주는 고독한 법.
그들을 아끼고 사랑할 지언정, 그들을 믿어서는 안된다.
그래도 부서가 저리 구멍이 뚫려서야 제대로 뭘 할 수 있겠나.
업무 처리 서류는 죄다 자신의 책상으로 날아오는 걸로 귀결될 것이다.
오늘도 서류의 산을 바라본 상민이 책상을 뒤집어엎으려는 충동을 참고 이를 갈았다.
과거제가 필요했다. 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