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오준오표(五駿五豹).
상민이 테무진의 사준사구(四駿四狗)를 일컬으며 자신에게는 오준오묘(五駿五猫)가 있다고 농담 삼아 말한 것이다.
객관적 업적으로 비교해 봤을 때, 솔직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
과장이 듬뿍 담긴 이 이야기는 순전히 술자리에서 신하들을 치켜세우기 위해 말한 것일 뿐인데.
하지만 이런 사소한 가십거리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굶주리고 나라의 일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빠르게 펴져나갔다.
이내 그 호명되는 장수들과 문신들도 신경을 쓰게 되어버렸을 정도.
역시 입조심해야 한다니까.
개도 아니라 고양이라니.
황상은 자꾸만 고양이가 개보다 좋다고 주장했지만 무장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무장들의 애원 아닌 애원에 오표, 표범으로 부르기로 합의한 상민이 내심 투덜거렸다.
표범과 호랑이도 고양잇과라 그러네.
명칭의 변동은 있었지만 인원의 변동은 없었다.
문경, 연수, 용길, 량, 사의 이 다섯 명.
그렇다면 다섯 준마는 누구일까.
첫 번째로, 부사의 신임을 많이 받고 있는 경전이 들어갈 것이고,
두 번째로, 사실상 가장 긴밀한 일을 했던 승현이 들어갈 것이고,
나머지는 권농서와 공부의 일을 했던 인근과 기기서의 일을 맡았던 인근의 동생 김인연(金仁沇)이 채울 것이겠지.
마지막 한 자리는 이번 두창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의원 심일석이 들어갈 것이다.
무장들에게 오호(五虎)의 명칭은 최고의 영예였으나, 문신들에게 물어본다면 조금 미묘할 지도 몰랐다.
관청에서 석식을 마치고 온 인근이 동생 인연과 길을 걸었다.
퇴청하러 가는 길은 아니다.
오히려 입궐하러 가는 길이지.
“형님, 황상께선 대체 언제까지 밤낮으로 정사를 돌보실까요.”
“나도 모르겠다. 성후(聖候)가 쇠하시지 않으시길 바랄뿐이야.”
물론 쇠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인 것 같았지만.
여러 전투에서 괴물같은 체력을 자랑한 황상이라 하더라도 과중한 업무는 축복받은 신체라도 병들게 할 수 있었다.
그들 형제가 도착해보니 연경궁의 편전(便殿) 선정전(宣政殿)에는 불이 환했다.
같은 꼴을 하고 있는 승현, 경전을 보니 동질감이 들었다.
둘은 자신보다는 어렸다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서로 친우가 되었다.
예전에는 황상의 총신들끼리 경쟁하는 미묘한 관계가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치기어린 생각에 불과했다.
같이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할 사이기 때문일까.
지금처럼.
편전의 문을 열자, 황상이 높은 책과 문서 더미에 파묻혀 열심히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폐하.”
황상은 문서 더미에서 고개를 들더니 이내 주변을 둘러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저녁이 다 되어가는구나. 해야 할 일이 이리도 많은데, 시간은 야속하게 빠르다.”
경전이 은근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소신들이 감히 폐하의 정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놈이 어딜 도망가려고.
황상의 얼굴은 엄격했다.
“그대들을 교육시키는 것도 나라의 중한 일인데, 짐이 어찌 그리 행동할 수 있겠는가.”
황상이 쭈욱 기지개를 폈다.
키가 새삼스럽게 무척 큰 것이 보였다.
“자, 그대들과 오붓하게 이리 국정의 업무를 보는 것이 참으로 좋구나.”
문신들은 딱히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제각기 가지고 온 문서들을 펼쳤다.
정조의 초계문신(抄啓文臣)제는 관리들을 본업에 면제하고 왕이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지만 눈앞의 문신들은 아니었다.
맡은 일이 끝나도 퇴청을 하지도 못하고 끌려와 이렇게 추가로 업무교육을 받는 것이다.
한창 때의 나이들이고 이제는 가정을 꾸린 사람도 많아 다들 죽어가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
모두 중한 벼슬에 올랐으니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맞다.
그래도, 보름에 삼일은 쉬게 해 주고 있었으니 이런 상관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한동안 편전에는 세필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들이 한글로 문서를 쓰는 것을 보며 상민이 묘한 감흥에 젖었다.
한글.
아, 위대하고 찬란한 문자.
조선시대가 현대 한국인에게 그리 달가운 역사는 아닐지언정, 그래도 그 중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업적 꼽으라 하면 단연코 이 문자가 되겠지.
이 시대에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지만.
지적재산권의 개념이 철저한 사람으로서 상민은 처음 고려에 이 문자를 도입할 때 머리가 아팠다.
세종대왕, 이름으로 하면 이도가 만든 문자인 것인데 자신이 그것을 함부로 가져다 쓸 권리가 있을까.
반면 다른 생각도 들었다.
이미 한반도는 역사 변동이 상당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진 삼별초는 원래 남쪽에서 고려 조정을 괴롭혔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이것이 바뀌고 바뀌어 무슨 일이 일어났을 지 어떻게 알고.
극단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면, 이성계가 권좌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겠고, 이도가 태어나지도 못할 수도 있었다.
한글 창제 자체가 역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자기변호를 치워보면 결국엔 욕심.
하지만 범인이 아닌 군주의 올바른 욕심은 결국 영역 전체의 부강함을 이끌어 낼 수가 있는 것인데.
‘나는 이제 일국의 군주이다.’
물렁한 생각으로 한글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세종이 자신의 백성을 사랑해 위대한 문자를 발명했던 것만큼이나 자신도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했으니.
한글 보급은 놀라울 정도로 반발이 적었다.
까막눈이 많은 무신들.
나이어린 문신들.
눈치 볼 것 없는 주변 나라와 엄연한 황제국이 된 고려.
일부를 제외하고는 계층분화가 눈에 띄지 않는 현 상황.
무지막지할 정도로 강한 창업군주 자신의 권위.
어찌 보면 최고의 시기라 할 수 있겠지.
시간이 지나자 지식인들의 전유물이 될 문자, 한자는 라틴어마냥 부연 설명을 하거나 동음이의를 구별하는 등의 학문 보조적 언어로 자리를 바꾸었고, 한글은 대중들에게 밀접하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역시 한국인에게는 사기적인 문자였다.
머리 위에 달린 것이 모자걸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으니까.
지식의 전파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조금의 노력만 기울인다면 광장에서 관의 명령을 전달할 때에도 글을 읽을 수 있는 자에게 다가가 어깨 너머로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부족했다.
문자의 전파로 혁신과 발전이 체감될 정도로 발생하는 것은 훗날의 일이었고, 당장의 국정 운영에 무엇인가 도움이 되진 않았지.
자신이 네 명의 청년들을 손수 가르치는 것에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여력이 된다면 더 많은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고 싶었지만, 잠을 거의 자지 않는 자신으로서도 시간이 몹시 부족한데.
“인연.”
“예, 폐하.”
“연도를 틀리게 적은 것 같은데.”
“아, 시정하겠사옵니다.”
여러 행정 간소화도 이루어졌다.
국문(國文)과 관련해서는 가독성을 확보하기 위해 문장부호와 띄어쓰기, 가로쓰기를 실시했고, 앞으로는 사전의 편찬도 계획하여 언어의 개변이 덜 일어나도록 맞춤법을 확정할 생각이었다.
사투리도 언어학적으론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겠지만, 중앙 행정에는 분명한 걸림돌이다. 또 지금 고려는 사투리 정도가 아니라 복속 민족들의 고유어를 통합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했으니.
한문의 경우에서는 피휘(避諱)의 구습을 없앴으며, 과도한 음역의 경우도 자제했다.
한글을 쓰는 김에 굳이 한자를 쓸 이유가 없는 것인데 비슷한 한자를 붙여 와누를 와누(瓦累)로 부르는 그러한 일들.
국문이 주로 쓰이니 한번 이런 풍습을 만들어 놓으면 후세 애들도 알아서들 잘하겠지.
숫자와 관련해서는 한자문화권의 숫자보다 훨씬 편리한 인도-아라비아 숫자와 현대적 숫자기호를 널리 보급했다.
당장 대단한 일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행정에 조금 편리해진 감이 있는 정도.
이는 이제 기초 수학이 발전하며 그 효용이 서서히 체감될 것이다.
숫자와 언어의 범위를 벗어난 개혁들도 이루어졌다.
자신의 고려가 새로이 설립된 후 연호를 정했는데, 이를 개천(開天)이라 하였다.
자신은 후대에 태조(太祖) 개천제(開天帝) 해민으로 불릴 것이겠지.
상민은 병자년(1276년)을 개천 원년으로 삼고 병자년이니 을미년이니 하여 사람 헷갈리게 하는 관습을 없앴고 모든 공문서에는 개천원년법(開天元年法)을 우선적으로 표기하도록 명령했다.
그 다음년도 정축년(1277년, 丁丑)의 경우에는 개천 2년이 되는 셈이다.
‘드디어 좀 알아먹게 생겼네.’
육십갑자를 볼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화딱지가 치밀어 올랐는데.
마찬가지로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았던 것들, 도량형의 재편도 이루어졌다.
미터법은 나오려면 한참 남았다.
그렇다면 새로운 단위계를 만들면 되지.
자신에게 매우 익숙한 미터법을 모방해 만들어진 이 단위법은 제국 단위계라 불렸다.
나름대로 길이를 맞춘다고 고생하긴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길이와 무게, 넓이와 부피, 질량은 물론 온도와 각도 등 전통적인 척관법에선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도 보완한 제국 단위계는 기술상의 이유로 수도에 비치된 여러 황동 원기들을 기준으로 정해졌다.
경시서(京市署)의 관리들이 복제된 황동기들을 들고 시전의 상업행위를 감독하는 모습은 이제 꽤 낯익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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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을 하던 관리들도 퇴궐한 한밤중.
‘한 것은 많은 것 같은데, 해야 할 것은 그거보다 많구나.’
끝도 없는 업무의 산 앞에서 상민은 진이 다 빠지는 것을 느꼈다.
인재들이 너무나도 적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미흡하면 국가가 제대로 굴러갈 수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괜히 전근대의 제정신 박힌 군주가 스트레스성 폭식과 스트레스성 질환에 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무심결에 머리를 만졌다.
불노불사가 내 머리털도 보호해 주려나.
다행히 모근은 단단한 모양.
상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쌓인 스트레스는 풀어야지.
이럴 때는 딴짓거리를 해야 한다.
평상시라면 아내에게 달려가거나 밖에서 도 좀 휘두르고 활 좀 쏘았을 텐데.
오늘은 다른 것이 땡겼다.
‘야한 거라도 볼까.’
물론 상민에게 그런 정상적인 취미 활동을 기대하기란 어려웠으니.
그는 춘화대신 엉뚱한 것을 펼쳐들었다.
지도책.
그것을 보자마자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은 천성 군주가 틀림없었다.
고려의 탐사대는 그동안 꽤나 많은 곳을 다녔던 모양이다.
탐사는 상민 자신이 전조의 장군으로 있을 때에도 해안가를 따라 활발히 진행되었다.
어차피 연안 항해이니 높은 항해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모양.
자신이 독립하고 나서도 육지와 해상의 탐험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동쪽으로는 여건상 예전 정보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쪽으로는 꽤나 많은 부분까지 그려져 있었는데, 심지어는 거의 끝으로 추정되는 곳까지 파악되어 있었다.
‘남쪽을 돈 탐사대는 없는 모양이네.’
연안을 따라 먼 거리를 갈 수 있도록 개선한 배의 성능은 충분했을 텐데.
남미의 희망봉을 돌지 못한 까닭이라도 있는지 궁금했으나 남쪽의 끝에 도달한 자는 돌아온 모양.
최근에 파견하였던 탐사대의 보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소신이 감히 그 파도의 크기에 놀라 다만 살아있는 것을 성상의 공덕으로 여길 뿐입니다.
오싹했다.
대체 얼마나 큰 파도를 보았기에.
상민은 입맛만 다셨다.
능숙한 선원들을 잃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항로만 개척되면 직접 초석을 배에 실어 대량으로 나를 수 있을 테고, 그러면 가축 등에 실려 무역으로 찔끔찔끔 오는 양을 아껴 쓰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논밭에도 비료로 뿌릴 수 있겠고.
어찌 되었든 지금의 항해술과 배로는 그곳을 넘지 못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큰 섬을 하나 발견했다고?’
원해도(遠海島)라 명명한 이곳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포클랜드가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한바탕 소유권을 두고 전쟁까지 치룬 섬.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소유였다.
아무도 안 살지만 그래도 그의 것이 자명했다.
‘말 안 듣는 놈은 저기에 박아두고 개척을 지시하면 되겠군.’
악명 높은 귀양 섬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