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석(지도 첨부)
예상대로 동쪽 건양에서 화가 머리에 끝까지 치밀어 올라 휘갈긴 내용이 가득 적힌 외교문서가 날아왔다.
상민은 자신이 읽지도 않은 채, 실직(實職)화된 상서령(尙書令)으로 제수된 지숙 혼자 읽게 시켰다.
그가 자신을 다소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다 읽어 내렸다.
“뭐라던가?”
“......욕설이 반, 위협이 반입니다만, 특별한 내용은 없사옵니다.”
“그래, 이빨을 드러내려면, 조금 더 빨리 행동했어야지.”
새로 만든 옥좌 위에서 상민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정중하게 돌려보낸 답신을 요약하자면, 꼬우면 한 번 더 와 보시던가로 요약할 수 있겠지.
물론 그들은 요란하게 짖어대는 개처럼 굴었지만 정작 상민이 점거한 가장 동쪽의 요새, 교하를 공격하지도 못했다.
창양을 떨어뜨리지도 못하고 거대한 손실만 입었던 것이 엊그제다.
다시금 그만큼의 대군을 운용하기는 커녕, 박살난 인심과 역병의 뒤처리를 하기도 힘든 상태.
그들이 다시금 세력을 불리려면 적어도 십 년은 내정에 치중해야 했다.
그리고 그 십년동안 그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다고 해도, 상민의 고려는 그보다 두 배, 혹은 세 배 더 성장할 자신이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서고려와 동고려는 서로 으르렁대지만 물리적인 접전은 벌이지 않는 묘한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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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치고 받은 두 나라의 사정을 치워보면, 주변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대공백시대라 칭할만큼.
퍼져나가는 두창은 이 시대 남미 대륙에 있는 원주민들을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고 있었다.
인두법을 하지 못한 고려인들도 많이 사망했지만, 그 비율은 원주민들의 사망 비율에 비하면 실로 보잘 것 없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유라시아의 국가들은 그동안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시신을 쌓으면서 견뎌냈고, 살아남은 자들은 인체가 바이러스에 맞서 진화해왔으니 개개인에게는 치명적일지언정 문명이 멸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이곳의 원주민들은 달랐다.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치명적인 질병이라 기본 면역력 자체가 없었다시피 해 걸리는 족족 죽어나갔다.
또한 그들은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정주민이 아니었다.
정주민에 비해 불규칙한 섭생 주기를 가지고 있는 유목민의 입장에서, 거의 몇 달을 자리보전한다는 것은 그냥 죽으라는 소리와 다름이 없지.
심지어 그들은 유라시아의 유목민처럼 동물들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니.
들판과 들판을 옮겨 다니며 하루하루 먹을 것을 찾는 수렵채집인.
섭생을 못해 많은 수가 죽어나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세 번째는, 조금 웃기지만 슬픈 이야기였다.
이 땅의 원주민들은 겉으로 보이는 외모가 종교적 미덕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샤먼들은 흉측한 수포가 올라오는 자들을 사악한 정령이 깃들었다 판단하고 그들을 무리에서 내쫒았다.
환자 관리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모양.
아픈 것도 서러운데 내쫓기기까지 한 사람들이 맞이할 운명은 들판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남만과 야족의 권역은 소름끼치는 고요함이 맴돌고 있었고 중앙과의 전쟁을 치룬 해민의 고려는 상처를 치유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반면 치족의 이야기는 복잡했다.
순 야만인이 아닌 나름대로 문명을 세운 자들.
동맹도, 적성국도 아닌 서로의 이권이 얽힌 복잡한 무역관계.
그들과의 무역로를 통해서 고려는 많은 물품들을 수입하고 있었다.
금, 은, 구리 등과 모피, 동물 섬유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또한 도자기나 식량, 그리고 생필품들 같은 많은 것들도 팔고 있었다.
이를 통해 두창이 전파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
허나 동시에 그들에게도 인두법이 퍼져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신민에게 요란스럽게 접종을 했으니 긴밀한 교류 관계에 있는 저들이 바보도 아니고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치족에게 전파된 인두법은 소문을 통해 그 주변의 다른 소국들에게도 전파되었다.
그들 소국들은 수많은 혈연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했으니 소문이 퍼지는 속도도 빨랐으리라.
이제 안데스 북부는 새로운 질병과 위험한 예방법을 동시에 알게 된 것이다.
이왕 알려진 김에 상민은 이제 두창에 익숙해진 의원들을 파견하여 그들을 돌보도록 했다.
인두법이 전파되었다고 하나 어깨 너머로 배워 주먹구구식이라, 체계적인 도움 없이는 그리 성공률이 높지 않을 것이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인류애적 사랑이 싹터서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 외정이란 오로지 냉철한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상민은 사실 그들을 믿지는 않았다.
사실상 야족과 남만과 저 치족이란 자들이 다를 것이 무엇인가.
문명의 발달 정도? 근거지가 산맥에 있다는 것 정도?
고려 북방의 여진도 앞에선 그렇게 알랑방귀를 뀌다 수틀리면 적대세력으로 돌아섰고, 심지어 큰 나라를 세워 사대를 강요했다는 것을 반추해보면, 국가와 국가 간의 신뢰란 적어도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복해서 복속할까?
그것도 불가능했다.
도성까지 거리의 세 배가 넘는 곳을 가야 그들의 본거지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것도 평야가 아닌 산길을 올라야 했다. 가기도 전에 병력 중 사분의 일이 죽어나자빠질 그런 행군.
또한 의복도 없는 수준의 야만스러웠던 강족을 동화시키는 것에도 상당히 많은 행정적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저들을 흡수하고 동화시키는 세월은 얼마나 걸릴 것인가.
그렇다면 이왕 곤경에 빠져 있을 때 빚을 주어야겠지. 겸사겸사 뭐 좀 얻기도 하고.
또한 그래봤자 지네 열 두 부족 중 가장 남쪽의 가장 찌끄레기 부족이다.
저들의 체급이 더 커진다 해도 당장 위협적이진 않았다.
그들은 의원 파견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상당히 저자세였다.
즉위식 때도 보았던 사절들은 고려의 문물과 화려함에 놀라 그 힘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상민의 앞에서 고려식 대로 예법을 올린 사절이 말했다.
높은 곳의 말, 루나 시미가 익숙해진 통역이 능숙하게 번역을 시작했다.
존칭과 궁중용어의 뉘앙스는 화자가 아닌 통역의 재량이니 대충 알아듣도록 하자.
“황상 폐하께서 저희 부족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하해와 같아 저희 부족이 답례로 무엇을 드릴 수 있을지...”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저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너희들의 씨앗은 짐에게 필요 없으니. 그대들은 무엇을 바치려 하는가?”
사실 세 자매, 옥수수와 호박, 그리고 콩의 씨앗은 이미 전부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첩보망이 그리 무능하진 않았고, 저들이 그렇게 통제력이 강하지도 않았으니까.
뒷거래로 씨앗들을 가지고 왔어도 권농서 내에서만 시범적으로 재배할 뿐, 그 농법이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효율이 딱히 현재 농법보다 엄청 좋은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아쉽구나.
상민이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기똥찬 것이 없을까.
그들은 한동안 수군거리더니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저희 부족은 황상께 와누(Wanu)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 말을 듣자 통역이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쿨럭거렸다.
“와누가 뭐냐?”
문, 무신들이 모두 궁금하여 통역의 입만을 쳐다봐도 통역은 땀만 주룩주룩 흘릴 뿐 속 시원하게 말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기에 저리 당혹해하는지 해민도 궁금증이 생겼다.
“어허! 그대는 무엇을 하는가? 주상 폐하와 조정의 신료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경전이 호통을 치자 그제서야 통역이 기어가듯 입을 열었다.
“새... 새똥이라 아...알고 있사옵니다.”
조정 대신들은 제각기 자신이 잘못 들었나 생각하여 잠시 옆 사람을 돌아보며 질문을 나누었다.
“뭐 이런 미친!”
황상의 앞에서 비속어를 쓰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문경이 대노하여 날뛰었다.
“감히 네놈들이 황상의 은혜를 새똥으로 갚아?”
삽시간에 살기등등한 결투장과 같이 변해버린 정전에 그들은 핼쑥하게 질려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고려가 무역로에 기대는 것 이상으로 그들은 이 무역관계를 소중히 하고 있었다.
“이것은 저희의 최대한의 성의이온데...”
“성의는 무슨! 내 모조리 네놈들의 목을!”
어전이라 채 도는 뽑지 못하고 주먹을 치켜든 문경은 꼬리에 불이라도 붙은 것 처럼 보였다.
“그만! 통역은 저 말은 번역하지 말도록 하여라.”
상민이 한쪽 손을 들어 올리고는 외치자, 날뛰던 문경이 금세 잠잠해졌다.
희미한 미소를 띠고 그가 말했다.
"새똥이라? 더 자세히 설명해 보거라."
"...와누는..."
그들의 설명에 상민이 남몰래 주먹을 쥐었다.
저들이 없다면 무릎을 쳤을 지도 몰랐다.
“그래, 그 와누는 얼마나 줄 수 있느냐? 짐은 최대한 많은 양을 원한다만.”
사절들은 내심 놀랐다.
오직 이 곳에서 황제만이 그 가치를 알아보고 있지 않는가.
많은 양이라.
아랫동네 황제는 광대한 영토와 높은 벽이 둘러진 성을 가진 사람인데 그를 만족시키려는 양이 어느 정도일까.
그들은 머뭇거렸다.
사실 말은 던졌는데, 와누는 오직 산맥의 패권을 쥐는 부족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으로 사실 그들이 와누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허황된 말일지도 몰랐다.
질러놓고 아뿔싸 하던 그들이 방어기제를 발동했다.
“저희 부족의 영향력이 닿는 와누 산지는 그리 많지는 않아 바치는 물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살짝 빼자 상민이 약간 노려보며 말했다.
“와누를 바치겠다는 것은 너희들인데 그것을 많이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또 뭐냐?”
“혹여 조금의 관대함을 베풀어 주신다면...”
그들은 구질구질하게 자신들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설명했다.
안에서는 역병이, 밖에서는 다른 부족들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단다.
“그래?”
상민은 조금 고민하는 척 하다 선뜻 말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에게 정기적으로 철제 무기와 철제 방어구를 하사하겠노라. 그렇다면 능히 외적과 맞서 싸울 수 있겠지?”
신하들이 입을 벌렸고 사절들은 마침내 조금은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것을 원한 것이 분명했다.
정전의 회의가 파하고 문신들이 다가와 말했다.
“대체 저 새똥... 아니 와누가 무엇이기에 성상께서 그리 결정하셨는지 저희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암 중요하지. 중요하지말고.
새똥.
차를 가지고 있다 보면 꼭 한번 쯤은 지붕에 새똥을 맞을 일이 생길 것이었다.
심지어 길거리를 지나다 정말 재수가 없으려면 맞는 수도 있겠지.
개인적 관점에서 볼 때, 새똥은 불결하고 더러운 것 정도로 생각하기 쉽겠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이것은 무궁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자원 중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루나 시미로는 와누라고 말하는 것이겠지만,
동양에서는 다른 말로 유명했다.
염초(焰硝).
이제는 불리지 않을 가능성이 있겠지만 스페인 어로는 구아노(Guano).
나라를 전쟁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 전략자원이었다.
아직도 자신이 즐겨했던 임페리얼 렐름에서 이것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먼 땅에서 얼마나 많은 군사들을 꼴아박아야 했는지 기억이 났다.
그래, 그러고보니 그 게임에서도 칠레는 유명한 곳이었어.
사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용어를 바꿔 말하면 그리 어색하지 않을지도.
“새똥이라 말하니 알지 못하는 것이지. 염초(焰硝)라고 말하면 알아듣겠는가?”
하지만 태반이 젊은 문신들이라 그래도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 와중에 지숙이 잠잠히 있다, 갑자기 무엇이 떠오른 듯 놀라며 말했다.
“저것이 정녕 염초란 말입니까?”
드디어 아는 사람이 있구나.
“그래.”
상민이 걸어가며 말했다.
“철제 무기를 판다고 하더라도 저들이 수많은 세월을 필요로 하는 야금술을 단번에 깨우치지는 못한다.”
기껏 만드는 것은 불순물이 많은 잡철정도가 되겠지.
앞선 기술력이 깃든 무구, 심지어 만들 수 없는 그러한 물건을 가진다면 도리어 그들에게 크게 의지하게 될 것이었다.
초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에 철기를 주는 것 따위야.
당연하게도 원주민들은 이 염초가 어떤 분야에 쓰일 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비료로써도 무지막지할 정도의 효율을 가지는 것이겠지만.
분명 이것은 문명이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도약할 수 있는 열쇠였다.
지숙이 어두운 낯빛을 하고는 말했다.
“그러나 염초가 있다 한들, 화약을 만드는 것을 아는 자가 없는데 성의(聖意)를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역시, 나에겐 지숙이 있어 다행이다.
화약(火藥)을 이야기하면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 염초였지.
근데 맞는 말이다.
대충 구해서 쓱싹쓱싹 만들면 되는 건가.
재료는 알고 있었다. 염초, 황, 숯이었나.
세 개의 물질을 대충 섞어서 터트리면 되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내가 할 이유는 없지.’
상민이 갑자기 표정을 엄하게 하고는 말했다.
“그것은 경들이 알아 와야 하지 않겠나?”
문과 군주는 이러한 일을 직접 할 수가 없어요.
너희들이 알아서 해 와야지.
"인근!"
"...예."
"그대는 공부(工部)의 낭중(郎中)인데 마땅히 이 일을 맡아야겠다."
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의 인근의 등을 아비 지숙이 애써 두드리는 것을 뒤로하고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