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11th. 처음이니 소소하게 (1)
달달한 생각에 취해 있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데이트를 장수연이 본다면?
그때, 머릿속이 번쩍거렸다.
장수연의 외가, 그러니까 장수연의 어머니인 황나연은 조국일보 황현성 회장의 누이동생이다. 조국일보 황 씨 일가가 신성그룹 상속분쟁에 개입해서 장호건의 몫을 늘려줬다지만 지금도 그렇고 이대로 가면 신성그룹은 조국일보 쥐새끼들에게 파 먹히는 치즈 꼴이 될 판이었다.
“무슨 일이냐? 맘에 안 드는 게야?”
할아버지의 걱정 어린 질문에 입을 열었다.
“아뇨. 하연 선배한테 들었는데 컨설팅 계약 체결되면 호텔에서 먹고 잘 거라고 했어요.”
“무슨 소리냐? 멀쩡한 집 놔두고 왜 호텔에서 자?”
“그게···.”
장하연이 재벌가 사람으로서 고려호텔을 자신의 집처럼 마음대로 쓴다는 오해를 없애고자 일 때문에 고려호텔에서 숙식한다는 증거를 남기겠다며 자신의 일과를 녹화하겠다고 알려주자 할아버지가 탄성을 흘렸다.
“거 참··· 그 아이 심지가 참으로 굳구나. 할애비도 귀가 있어서 얘기는 익히 들었다만··· 으허허.”
“그래서 그런데··· 선배 숙박비, 해동그룹 이름으로 처리했으면 해요.”
껄껄 웃던 할아버지가 눈을 몇 번 껌뻑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 보게? 네놈 청춘사업에 돈을 대달라는 게냐?”
바로 염문설로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말에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집안이 해동그룹이고 해동그룹이 우리 집안이니까 할아버지 계좌로 선배 숙박비를 지급하면 기업을 사유물로 여긴다는 말은 없을 거예요. 그렇죠?”
“흐음··· 계속해 보거라.”
“그리고 한 번에 목돈을 주는 게 아니라 하연 선배가 방을 쓴 만큼 일 단위로 결재해주면 더 철저히 보일 테니 오해 살 일도 없고요. 어떠세요?”
기업의 사유화가 당연시되는 재벌 가문들 사이에서도 할아버지는 유별난 분이었다. 개인적으로 해동물산에 오더를 내려서 물건을 구해와도 제값은 치르는 분이기에 나는 그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차분하게 생각을 밝히자 할아버지는 찌푸렸던 눈살을 풀었다.
“계약서에 네가 넣고 싶은 걸 적어 보거라. 네가 넣고 싶은 건 이면계약서로 꾸며야겠지만 할애비가 보고 첨삭해주마.”
“할아버지?”
“네놈이 하연이 그 아이한테 잘 보일 생각이 있다면 잘 생각해보고 써야 할 게다. 참고로 장호건은 처가인 황가 놈들한테 불만이 많다고 하더구나, 흐흐.”
장호건이 자신의 와이프인 황나연을 비롯한 황 씨 가문을 견제했던 것쯤은 할아버지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고 있다.
또한, 본 계약에 부속계약서처럼 쓰는 이면계약서는 공개 여부가 자유롭다. 그래서 때로는 이면계약서가 본 계약서보다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이왕 계약서를 써야 한다면 실력을 보여줄 때였다.
종이를 가져온 나는 할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황 씨 가문을 엿 먹일 이면계약서 내용을 적어서 할아버지에게 보여줬다.
“이게 먹힐 만한 이유를 말해 보거라.”
“우리 그룹이 연간 수백억짜리 거래를 받는 게 첫 번째입니다. 장수연, 장민재의 일천한 경력을 채워준다는 점에서 장호건 회장과 황미연 여사 모두 납득할 거라는 게 두 번째고요. 물론, 할아버지께서 하연 선배 숙박비를 지급한다는 조항만 추가한 이면계약서는 따로 만들어야 합니다.”
장수연, 장민재도 서울대를 나왔지만 성적에 맞춰서 입학한 것 때문에 경영학과 출신의 장하연, 경제학과 출신의 장용재에 비하면 경영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과에 들어갔다.
의도는 다르겠지만 장호건이든 황나연이든 장수연과 장민재의 부족한 ‘스펙’을 채우고 싶은 건 마찬가지일 터. 충분히 먹힐 만한 미끼였다.
할아버지는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고 실장한테 내 돈으로 숙박비를 지급하는 건 도장 찍는 날 추가하라고 일러두마. 고 실장이 이수한이한테 진 빚은 갚게 해줘야겠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금시초문 같은 소리에 눈을 깜빡이는 내게 할아버지는 고승주가 이수한과 이번 컨설팅 건 때문에 처음 만났을 때 본심을 읽지 못한 일을 알려줬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고승주에게 잘못 걸렸네. 이수한 씨, 당신 아주 주옺됐어요, 흐흐.’
고승주의 복수를 챙겨주는 할아버지가 마피아 보스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대신, 하연이 그 아이도 제 돈으로 매일매일 숙박비 계산하라고 해. 그래야 장호건이한테도 빚 지우고 조국일보도 잡아놓지 알겠느냐?”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나와 할아버지는 서로를 마주보며 씩 웃었다.
***
고승주는 이대수의 지시대로 계약서를 꾸민 뒤, 서울의 한 일식집에서 이수한을 만났다.
“결정, 하신 겁니까?”
신성그룹이 해동백화점 컨설팅해주는 계약을 받기로 했냐는 물음에 고승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받기로 하셨네.”
이수한은 고승주의 대답을 듣고 상 밑에 있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계약이 체결됐다는 사실이 그룹 안팎에 퍼지면 다음 오너들인 장용재, 장수연, 장민재의 외가인 황 씨 집안에 빌붙었던 놈들이 동요할 터.
겁먹은 놈들은 어떻게든 징후가 포착되니 장 씨 가문에서 돈을 받으면서 황 씨 일가에 붙어먹은 모리배들을 솎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방방 뛰는 속과 달리 이수한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동물산 사업조정이 수월해지겠군요. 축하드립니다, 형님.”
“축하는 무슨. 이거부터 보고 얘기하게.”
너스레를 떨던 고승주가 방바닥에 뒀던 서류철을 넘겨주자 이수한은 눈치를 슬쩍 살펴보고는 굳은 표정으로 서류철을 펼쳤다.
“···형님?”
좋은 거래이니 바로 수락할 거라는 자신의 예상과 달리 엄청난 내용이 적힌 계약서를 보고 놀란 이수한. 그는 고승주를 쏘아보았다. 다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
“회장님께서 말씀하시더군. 장 회장님이 신세기 장호경 회장과 조국일보를 견제하려고 우릴 끌어들인 것 같다고.”
핵심을 꿰뚫어보는 말에 이수한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수그러들었다. 자신과 장호건의 속내를 모를 줄 알았는데 전부 읽혔다니?
어지간하면 오너 가문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재계의 불문율을 어긴 것까지 읽힌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이대수의 촉은 살아있었다. 아주 날카롭게.
“혀, 형님···.”
“진즉에 자네나 장 회장님 뜻을 알았다면 우리가 한가하게 생선 살점이나 씹을 일은 없었겠지.”
고승주는 건조한 목소리로 거칠게 내뱉고 술을 비웠다.
탁!
고승주가 텅 빈 잔을 세차게 내려놨다.
“자네, 우리 해동이 우습게 보이는가?”
“혀, 형님···.”
이수한이 말을 더듬어도 고승주는 눈에서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장호경 회장이야 그렇다 치지. 분가한 이상 그룹 간 경쟁이니까. 헌데, 장 회장님 집안싸움에 우릴 끌어들여?”
고승주는 이수한을 차갑게 쏘아붙였다. 장호건과 조국일보 황가들 간의 개싸움에 이성민과 해동그룹을 끌어들이다니!
이성민의 노력이 기특해서 구조조정도 수월히 할 겸 좋게 처리하려던 자신의 안이함에 화가 난 건 말할 가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재계의 불문율을 어긴 게 들통났으니 이수한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순위는 신성보다 훨씬 낮아도 재계의 기인이요 재계의 마당발인 이대수가 건재한 해동그룹이 아닌가?
이수한의 사과에 고승주는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됐네. 이미 끝난 일이고 지난 거래로 생긴 빚 정리한 셈 치세. 회장님도 찬성하신 마당에 더 이상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겠지.”
고승주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애써 진정한 척했다. 이수한을 코너로 몰아야 양가의 결혼이라는 조건부라도 신성을 유통 쪽에 발도 못 들이게 할 명분이 생기니 말이다.
고승주는 이수한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신성그룹이 우리 해동백화점을 컨설팅 해준다고 해도 해동과 신성이 결혼으로 이어지게 된다면 유통에 나서지 않는다는 조항이 걸릴 수도 있을 걸세. 안 그런가?”
고승주의 질문에 이수한의 턱근육이 움찔거렸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신성그룹이 재결합하게 되면 유통을 거느리는 건 불가피한데 이렇게 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제안한 컨설팅을 자신들이 파토내자니 그 또한 체면을 구기는 일이다. 여기에 장호건이 가장 아끼는 딸 장하연을 사심 없이 지켜줄 이성민을 포기해야 하는 일도 되니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잔뜩 굳은 이수한의 얼굴을 보며 고승주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영등포 쇼핑몰 합작과는 별개인 일이고 거기다가 두 사람이 혼인할지 안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 다음 장을 보면 우리 회장님 요구사항을 이면계약으로 체결할 가치가 있다고 여길 걸세. 확인해보게.”
고승주는 태연하게 손을 내밀며 이수한에게 확인해보라고 권했다.
이대수 회장은 8.3 사채동결뿐만 아니라 자신의 장남이 자동차 사고로 죽은 게 장호건에게 홀려 자동차에 빠져서 죽은 거라 여겨서 신성그룹과 장호건이라면 학을 뗐다.
그와 별개로 사람에 대한 욕심은 임직원이든 가족이든 아끼질 않는 터라 장하연을 이성민의 배필로 여긴다고 해도 내색 한 번 안 해왔으니 고승주는 자신이 있었다.
벌써 저 구렁이 같은 이수한의 면상에 ‘계산불가’라고 쓰여있지 않나?
고승주의 생각대로 이수한 또한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였다. 그래서 이성민을 장하연과 결혼시키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당최 속을 알 턱이 없지 않나?
‘모르겠다, 씨발. 계약서부터 보고 결정해야지.’
계산 때문에 굴리던 머리를 멈추고 이수한은 다음 장에 있는 계약서 두 장을 봤다.
“이건···?”
이수한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자신과 장호건의 속을 들여다 본 것 같은 계약서들이 아닌가?
“어떤가? 그만하면 우리 회장님 체면 살려드릴 법하지 않겠나? 흐흐.”
낮게 웃으며 청주를 채우는 고승주와 달리 이수한은 웃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바라보는 저 남자의 말대로 지금 본 이면계약서들은 조국일보 황가 놈들과 그 떨거지들을 쓸어버릴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체결하고 싶을 만큼 탐나는 조커였다.
허나 언젠가 합병해야 할 장호경의 신세기그룹을 생각하면 쉽사리 좋다고 할 수도 없었다. 결정권자는 성의원에 있는 장호건이 아닌가?
이수한은 침음성을 흘린 뒤, 잔을 들어 고승주에게 내밀었다.
“한 잔 주십시오, 형님. 이거 마시고 회장님 뵙겠습니다.”
“알겠네. 일만 성사시킨다면야 한 잔이 아니라 한 통이라도 따라줌세, 하하.”
고승주는 껄껄 웃으며 이수한에게 술을 채워준 뒤, 그의 잔과 부딪친 자신의 잔을 단숨에 비웠다. 독한 술이라도 한 잔 해야 오늘의 패배감을 잊은 척하고 장호건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이수한은 그 잔을 마지막으로 고승주와 자리를 파하고 장호건에게 전화를 넣으며 성의원으로 향했다. 대문을 통과한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집무실에 들어갔다.
“요즘 들어 나 때문에 고생하는군. 또 술 마시고 왔나?”
“흐꾹!”
소파에 앉은 장호건이 피식 웃으며 던진 질문에 이수한이 딸꾹질을 했다. 급하게 들어오느라 술 냄새를 없애려고 차 안에 둔 미니 구강청정제 한 통을 다 썼는데 개망신이 따로 없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적당히 써, 이 사람아. 우리 나이부터는 치아 관리 잘해야 해. 오복 중에 괜히 치복(齒福)이 있는 게 아닐세, 하하.”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장호건은 이수한의 겸연쩍은 미소를 보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고 실장한테 새 조건을 받았다고?”
“예. 여기 있습니다.”
장호건은 서류를 받아서 펼쳐보고 침음성을 흘렸다.
“그 영감, 내 생각을 알아챈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확실합니다. 이 회장님 생각이라고 고 실장이 알려줬습니다. 이대로 계약하면 두 사람이 결혼할 시 유통사업 재진출에 제동이 걸립니다.”
역시 만만치 않은 노인네였다. 자신이 의도한 바를 정확히 알고 있다니.
유통사업 진출 금지가 걸렸지만 장호건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사채자금까지 날려먹은 해동 따위, 신성에게 댈 곳이 아니지 않은가?
“걱정 말게, 이 실장. 신성과 맞설 곳은 태현과 금강밖에 없어. 두 아이가 결혼해도 나중에 해동물산 유통부문을 가져오면 그만이야. 적당히 돈푼 던져주면 될 걸세.”
장호건은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이수한을 보며 피식 웃고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엄지로 키패드를 눌렀다. 8.3 사채동결 이후로 처음 거는 번호였다.
“장호건입니다, 회장님. 제안하신대로 하겠습니다. 예. 그리하죠.”
이수한은 통화를 마친 장호건을 크게 뜬 눈으로 바라봤다. 신성과 해동이 20여 년 전에 원수진 뒤로 장호건이 이대수와 직접 연락한 일이 없었는데?
이수한의 놀란 얼굴을 보고 장호건이 피식 웃었다.
“뭘 그리 놀라나? 사업 때문에 전화했는데.”
“저한테 시키셔도 되실 텐데 굳이···.”
장호건은 이수한을 보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앞으로 해동과 볼 일이 많을 것 같네. 이런 일 생길 때마다 자네가 발품 팔면 안 되지? 신성그룹 비서실장이 동사무소 창구 직원도 아니잖나, 하하.”
장호건의 뜻은 액면과 이면이 일치했다. 자신의 친동생보다 더 친동생 같고 자신 때문에 자신만큼 공사가 다망한 이수한이 귀한 시간을 낭비하게 둘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장호건의 뜻을 접수했기에 이수한도 더 이상 만류하지 않고 받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