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10th. 애프터 임팩트(After Impact) (3)
이성민과 장하연이 전화하기 몇 시간 전.
고승주는 이수한과의 식사를 마치자마자 이대수와 태재호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제안 받은 사업을 알리고 삼청동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멈춘 차에서 내린 고승주는 생각보다 세 대는 더 많은 대형 세단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룹 내 사업별 안건은 관련 사업을 맡는 계열사 대표와 자신만 이대수와 응접실에서 의논하는 게 관례다. 이번 일과 상관없는 핵심 수뇌부가 전부 모였다니··· 심상치가 않았다.
고승주는 본관에 들어가서 집사장에게 태재호 외에도 배재훈, 조영찬, 이명진이 들어왔다는 걸 확인하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오느라 고생했다. 저녁 때 이수한이하고 만났다고?”
“예.”
대답을 마친 고승주는 배재훈과 태재호, 조영찬, 이명진의 얼굴을 슬쩍 살펴봤다. 유통부문 사업인데도 왜 이 멤버들이 모였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대수는 그런 분위기를 모른 체하고 입을 열었다.
“알았다. 이수한이가 넘긴 거부터 줘 봐.”
이대수는 고승주에게서 서류철을 받은 뒤, 탁자 위에 놓인 돋보기안경을 쓰고 매의 눈으로 서류를 살펴봤다.
“호건이 이놈이 제 누이하고 처가 놈들 잡으려고 내 새끼를 끌어들였구먼. 내 새끼 빌리는 값 치고는 꽤 비싸게 지불했다만··· 우라질 놈.”
안경을 벗은 이대수의 거친 말투를 듣고 당황한 배재훈이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회장님? 장호건 회장 처가면···?”
“조국일보 황 가 놈들 말이다. 그 버러지 같은 놈들한테 경고장 날리겠다고 꾸민 일 같구먼.”
배재훈을 비롯한 일동은 이대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황 씨 집안이 신성그룹의 숨겨진 재산인 조국일보 주식을 가로챈 건 재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장호건이 그들을 견제하는 건 알고 있어도 왜 이성민이 필요하단 말인가?
“좀 더 풀어서 말씀해주십시오, 회장님.”
이번에는 태재호가 배재훈과 눈짓을 주고받고 나서 이대수에게 물었다.
임직원 사이에서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그라지만 한 치의 흠결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이 맡은 사업이 아닌가?
이대수는 한숨을 내쉬고 배재훈을 보며 물었다.
“장호건 큰딸내미, 알지?”
“고려호텔 장하연입니까? 재벌가마다 탐낸다는 그 아이요?”
“맞네. 머리도, 외모도, 품행도 우리 장손하고 견줄만하지.”
배재훈뿐만 아니라 네 사람도 이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보는 눈에 사심이 없는 이대수의 평이기도 하지만 재계 내에서 공인된 일등신부감이 아닌가? 장하연은.
“헌데 그 아이, 갓난아기 때 장호건이 바깥에서 데려왔다. 황 가 놈들 핏줄이 아니야.”
“예?”
강남터미널 때 들어서 알고 있는 고승주, 이명진과 달리 세 대표이사는 이대수의 말을 듣고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장호건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장하연이 혼외자식이었다니? 이대수와 30여년 동고동락한 그들도 이대수에게서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이대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호들갑 떨 거 없어. 어디 가서 입 밖에만 내지 마. 승주하고 명진이 너희 둘도 마찬가지다.”
이대수의 뚫을 것 같은 눈빛을 보고 모두들 표정을 고쳤다. 절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이 그들을 덮치고 있었다.
***
긴장한 다섯 사람을 앞에 두고 이대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호건이 그놈, 그 아이 옆에 내 새끼 붙여둔 걸 황가 놈들한테 보여주고 싶을 게야. 그래야 그놈들이 허튼 짓할 생각을 못하겠지. 내 새끼가 지 사위까지 되면 더 좋을 테고.”
이제야 다섯 사람의 얼굴도 감을 잡은 것처럼 보였다. 자신들이 조장했다지만 해동그룹이 고꾸라진 줄 알고 돈푼 던져주며 제 딸내미 방패로 쓰려 들다니!
이성민을 사위로 삼든 안 삼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모욕도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었다.
태재호가 잔뜩 굳은 얼굴로 이대수에게 말했다.
“이 사업 안 하겠소, 형님. 장호건 이 호로 자식··· 우릴 핫바지로 본 게 아니오!”
대표이사가 되고부터 잘 다스려왔던 그의 성격이 터지고 말았다. 큰형님 같은 이대수를 모시고 청춘을 다 바친 회사와 이대수의 장손을 물건처럼 쓰겠다니··· 이름은 못 속이는지 태재호는 젊은 날의 호랑이 같던 성격대로 으르렁거렸다.
“진정해라, 재호야. 형님도 가만히 계시는데 무슨 꼴이냐? ”
배재훈이 태재호를 따끔하게 지적한 것과 달리 조영찬은 태재호를 조곤조곤 타일렀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오, 형님. 승주하고 명진이도 참고 있잖소?”
“아닙니다, 대표님. 이런 거래인 줄 모른 제 잘못입니다.”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얼굴이 벌개진 고승주가 손을 내저었지만 이번에는 이명진이 그를 위로했다.
“그게 왜 형님 잘못이오? 장호건이 보통 구렁이가 아니잖 ··· 죄송합니다, 아버지.”
이명진은 장호건을 이죽거리던 중 이대수의 굳은 표정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세 명의 대표이사도 헛기침을 하거나 멋쩍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다른 그룹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어수선한 분위기.
이 방에 없는 박태진과 선해철, 세상을 등진 이명우를 비롯한 이들이 보통 사이가 아니기에 가능했다.
그들 모두 오너와 임직원의 지위를 떠나 부모처럼, 형제처럼, 스승과 제자처럼 지내왔기에 자기 일처럼 화내고, 다독이고, 사과하는 것이었다.
그들 중 연장자인 이대수는 모두를 이해한다는 듯 표정을 풀고 입을 열었다.
“다들 기억하나? 명우하고 호건이가 썼던 거.”
“그거···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대수는 배재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갔고, 서랍 안에서 빛바랜 누런 봉투를 꺼내든 채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턱 소리와 함께 두 개의 지장이 찍힌 봉투가 탁자에 놓인 걸 보고 다섯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이명우 내외가 죽고 이성민이 실신했을 때 저걸 찾겠다고 이 방에 있는 이들과, 선해철, 박태진까지 이태원의 이성민, 아니 이명우 자택을 손수 뒤지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 됐기에.
이대수는 손가락 끝으로 그 봉투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다들 알겠지만 명우하고 호건이가 제 자식들을 결혼시키겠다는 서약서가 이 안에 들어있다. 이걸 숨긴 건 하연이 그 아이가 아니라 그 아이 애비라는 놈이 맘에 안 들어서였지. 내 손주 잡아먹고 우리 집안을 파먹을 것 같았는데···.”
말끝을 흐리던 그가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내 새끼가 지금처럼만 쭉 큰다면 잡아먹힐 일은 없을 걸세. 외려 신성을 잡아먹을 수도 있겠지. 병호 형님한테 떼인 돈에 이자까지 받는다고 여기면 될 것 같으이, 으허허.”
자신들이 방금 그 난리가 난 게 이대수 때문이었는데 그 장본인이 이리 말하고 웃다니··· 다섯 사람은 당혹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대수는 그들을 보며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내 새끼가 작년부터 달라진 건 알고 있지? 승주는 작년에 우리 돈 지켰으니 집에 가면 발 뻗고 푹 잘 것 같고··· 재훈이, 카자흐스탄 사업은 잘 진행되고 있나?”
갑자기 사업이야기가 나왔지만 배재훈은 자신감을 드러내듯 허리를 곧게 폈다.
“내년 4월에 2억 5천만 불 투자해서 지분 50퍼센트 받기로 했습니다. 현지 정관계 리베이트, 노동자 임금협상 모두 좋게 매듭지었고 투자 후 3년차부터 배당금이 나올 겁니다.”
카자흐스탄 구리광산 사업권 획득은 배재훈이 이끄는 상사부문의 경사였다. 내년 4월에야 언론에 공표되겠지만 3년차부터 매년 1억 불 이상의 배당금을 받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이대수는 이명진을 불렀다.
“명진이 너도 요즘 재미 좋지?”
“예, 아버지. 강남터미널 공사도 순항중이고 서초동 주상복합도 96년 말까지 완공해서 분양이 끝나면 수익의 70퍼센트는 우리가 가져올 겁니다. 안전진단 용역에 성수대교, 광진교, 합정역, 당산철교 재건축도 차질 없이 진행 중이고요.”
이명진도 요즘 같기만 하면 바랄 게 없었다.
해동건설은 각종 건설공사 수주에 안전진단 용역과 철거, 재건축으로 돈이 쏟아지고 있었다. 제강과 중공업, 시멘트도 기자재 납품이나 건설장비 관련 실적이 크게 올라서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상여금이 얼마나 나올까 기대하고 있었다.
“이라크 미수금 때문에 진호 형님네가 어지간히 급한가보구먼. 겨우 3할에 만족하다니, 흐흐.”
이대수는 장병호만큼 돈을 떼먹었던 명진호의 태현그룹에 굴욕을 준 게 통쾌했는지 낄낄 웃고 나서 조영찬을 불렀다.
“영찬이, 종금 수익 관리는 잘하고 있나?”
“명진이 쪽에 돈 대주고 신성전자에 돈 빌려준 줘서인지 졸부 놈들이 매일 돈뭉치를 들고 창구에 옵니다. 성민이 고놈 주식담보대출 덕분에 이자 수입도 쏠쏠하고요. 식품회사들한테 대출 깔아놓은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돈 버는 대로 예금 넣어주실 게 아닙니까? 하하.”
조영찬까지 만족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이대수는 태재호를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재호 자네, 신성 쪽 거래 진짜 안 받을 텐가?”
태재호는 입맛을 다셨다. 다들 이성민과 엮여서 재미를 보고 있는데 자신만 되똑하니 예외가 아닌가? ‘큰형님’마저 자기 장손에 대한 근심을 덜었으니 못할 이유가 없었다.
“거 참, 안 하면 바보 될 것 같고··· 해야지요. 하겠습니다, 흐흐.”
“고마우이. 백화점 일 끝나면 내년에 할인점 열 때 내 장손 붙여줌세.”
태재호가 졌다는 듯 너털웃음을 흘리자 이대수는 흡족한 기색을 보이며 고승주를 불렀다.
“승주 너는 이수한이 만나서 성민이하고 하연이 두 아이가 결혼하면 신성은 유통사업 안 한다는 조건으로 컨설팅 받겠다고 해. 영등포 쇼핑몰 건은 일전에 계약했으니 별 수 없지만 장호건이 내 장손을 제 딸내미 방패로 쓰겠다면 셈이 맞아야지?”
터무니없는 조건이지만 이대수는 자신이 있었다.
일반 서민들도 배우자가 처가나 시댁에 살림을 퍼주는 걸 못마땅해 한다. 재벌들도 그 ‘살림’이 사업이나 계열사로 바뀌었을 뿐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마뜩찮은 건 매한가지다.
이 점을 알아채고 배재훈이 미소를 띠었다.
“장호건이 정혼서약서 갖고 있는 걸 노리고 찌르시겠다는 거군요.”
“그렇지. 나보다는 장호건이가 더 아쉬울 테니까. 그 집안에서 하연이 그 아이를 지켜줄 사람이 하나도 없지 않나? 장호건이도 제 처가 눈치 때문에 대놓고 지켜주지는 못하니 말이야, 흐흐.”
이대수에게 장호건은 부처님 손바닥 안 손오공 신세. 그렇기에 이대수도 이런 강짜를 부리는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지 놈이 내 새끼를 사위로 두고 싶다면 유통 사업을 포기하겠지. 그게 싫어서 지가 시작한 일을 물리면 모양도 빠지고 제 딸내미를 지고지순하게 아껴주고 지켜줄 유일한 놈을 차버리게 되니 골이 아플 터.”
“그래도 아버지, 그렇게 하시면 성민이가···”
이대수는 조카를 걱정하는 이명진에게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고 말했다.
“물론, 거래가 파토 난다고 해도 난 두 아이에게 컨설팅을 맡길 거다. 우리 장손 옆에 하연이 그 아이만큼 어울리는 처자도 없으니까. 그리되면 하연이도 장호건이도 우리 집안에 빚이 생기고 두 사람 사이도 벌어질 테니 장호건이가 우리 집안을 파먹을 일은 없겠지.”
역시나라는 눈길로 이대수를 보며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호건이 유통업에 발을 못 붙이게 하거나 장하연이 이 집안 장손며느리가 됐을 때 신성에 이 집안 살림을 퍼 나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게 아닌가? 자의든 타의든.
어느 쪽이든 이대수가 이명우의 죽음에 대한 간접적 책임자인 장호건에게 맺힌 한을 푸는 일. 그 사실을 잘 아는 고승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제안서 꾸미는 대로 연락하겠습니다.”
고승주가 뜻을 받드는 걸 보고 이대수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 새끼가 그 집안에 안 잡아먹힐 것 같으면 원하는 대로 하게 해줄 것이야. 내가 말하기 전까지 정혼서약서 얘기는 묻어둬.”
그 말을 끝으로 이대수는 다섯 남자를 내보낸 뒤, 전화기를 들었다.
“할애비다. 내일 아침에 밥 먹고 응접실에서 차 한 잔 할까?”
스무 살이면 자기 언행에 스스로 책임지라며 풀어줬지만 내일만큼은 장손을 불러다가 속마음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
다음 날 아침.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나와 박태진은 긴장을 품고 삼청동에 들어갔다.
식사를 하는 내내 할아버지, 고승주, 이명진이 평소와 다른, 므훗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웃는 통에 소화불량에 걸릴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자 고승주와 이명진은 회사, 박태진은 사랑채로 갔고, 난 할아버지와 함께 응접실에 가서 차를 마셨다.
“우리 강아지 학사모 쓴지 거즌 반년이구나. 뭐하며 지내느냐?”
“유통과 물류, 섬유소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요즘 나는 기억을 더듬어 세 산업의 향후 흐름을 정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박태진에게서 들은 게 맞으면 해동물산 상사부문의 자원개발과 중공업 계열 사업도 착착 진행되고 있으니 나머지 먹거리를 챙겨야 했다.
할아버지는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부만 하지 말고 운동도 하고 바깥바람도 쐬거라. 책상머리 앞에만 붙어있으면 몸 상해, 이놈아.”
“그렇지 않아도 아침마다 두 시간씩 운동하고 있습니다. 태진이 형하고 대련도 하고 있고요.”
할아버지가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알아서 잘하고 있었다.
내가 전생에 개처럼 일하고도 몸이 버틴 건 하루 두 시간씩 박태진과 함께 운동을 한 덕이었다.
때문에 몸이 회복되고부터는 매일 새벽부터 스트레칭 뒤에 삼대중량을 치거나 박태진에게서 배운 유도나 태권도, 검도로 대련을 하고 있었다.
당신 노파심이 기우가 돼서인지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차를 마셨다.
“흠흠··· 그래도 우리 장손이 하루빨리 사회생활을 했으면 하는구나. 전에 일했던 회사에서는 기별이 없느냐?”
조금은 뜨끔했지만 물 흘러가듯 할아버지의 질문에 대답을 이었다.
“채용 심사 중이라 들었습니다. 미국 쪽 대학 학제 때문인지 늦게 나올 거라고 하네요.”
“양키 놈들 시건방진 건 6.25 때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동물원 원숭이 대하듯 아이들한테 초콜릿 던져주는 게 눈꼴시었는데··· 에잉, 우라질 놈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통역장교로 복무했던 시절이 떠올랐는지 이맛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문득 떠오른 게 있어서 물었다.
“할아버지, 그때 왜 군에 들어가셨어요?”
“왜 물어보는 게냐?”
“그때 우리 집 재산이면 안 가도 되셨잖아요. 아버지한테 듣기로는 해방 직전에 일본 놈들한테 먹을 거랑 옷감 주면서 받은 금붙이에 땅문서만 해도 어마어마했다는데···.”
전생에도 늘 궁금했던 일이었다.
전쟁 직전에 증조부님과 함께 전국 각지의 해동물산 점포나 지사에 있던 모든 재산과 전 임직원들을 부산 지사에 모았으면 군에 안 가도 됐을 텐데··· 왜 그러셨을까?
할아버지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 지난 일이다. 때가 되면 들려주마.”
“예, 할아버지.”
“그건 그렇고··· 어제 고 실장한테 신성 놈들이 내민 거래를 들었다. 하연이 그 애한테 네가 먼저 부탁했다며?”
기다리던 질문이었기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가을부터 할인점 사업 투자비용을 충당하려고 부탁했습니다. 우리 집안과 신성이 원수지간이라도 돈을 벌 기회가 아닙니까? 사채자금 의심하는 것도 지우고요.”
난 이 나라에서 현금 많기로 첫 손꼽히는 집안의 장손이다. 그런 나까지 앵벌이를 했으니 장호건도 우리 집안의 사채자금이 박살났다고 확신할 터.
할아버지는 어느 새 반달눈으로 날 바라보며 탄성을 흘렸다.
“호오··· 거기까지 생각한 게냐?”
“예, 할아버지. 적을 속이면서 곳간까지 털어오는 것만큼 통쾌한 일도 없잖습니까?”
“그렇지. 내 사람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주는 것도 중하지만 원수진 놈은 삼시세끼 쫄쫄 굶게 해야지. 연막까지 치면 더 좋고, 으허허.”
껄껄 웃는 모습을 보니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고 실장이 이수한이하고 만나서 잘 처리할 게다. 계약서에 도장 찍으면 알려줄 테니 착실히 준비해둬.”
할아버지 말을 들으니 백화점 컨설팅 건은 성사될 것 같다. 장하연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