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도 재벌 사위로 살겠다-35화 (34/229)

35화. 12th. 예상대로, 예상 밖으로 (1)

“그럴 거면 왜 나하고 일하는 거야? 혼자서 다하면 될 거 아냐? 같이 준비하고 싶었는데··· 너무해.”

이럴 수가.

나한테 컨설팅 하자고 한 게 직장인 데이트하자는 거였나?

사무실 책상 사이에 두고 자료 찾다가 컵라면 삶아먹고 자판기 커피 뽑아 마시는 거?

중딩, 고딩들 말로 ‘흥칫뿡!’스러운 그녀의 표정을 보고 얼른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나는 얼른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조금은 부끄럽다는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나··· 알잖아.”

“뭐?”

“잊었어? 중학교 때 누나 그려서 줬다가 등짝 맞았었잖아?”

“···그거?”

“내가 이렇게 생겼냐고 울면서 때렸잖아? 그 그림, 아직도 방에 있는데 가져와서 보여줘?”

“···풋!”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한 기억이지만 위기를 벗어나려면 방법이 없었다. 극약처방이 먹혔는지 장하연은 웃음이 터져 나온 입을 손으로 가렸다. 젠장.

미술.

나라는 인간에게 옥에 티였다.

음악이라면 모를까 그림 실력은 똥손이요 보는 눈도 개꽝인 내게 눈을 사로잡아야 하는 사치품은 언감생심이다. 내 스타일도 전생에 찢어지기 전의 장하연이 잡아준 걸 주구장창 우려먹고 있으니 말해 뭐하리.

결정적으로 사치품은 유행을 심하게 탄다. 사치품에 환장한 장수연 때문에 각 브랜드별 역대 디자이너는 알아도 사치품 소비 트렌드에 둔감한 나로서는 장하연이 120퍼센트 실력을 뽐낼 발판을 깔아주는 게 최선이었다.

“내가 상품 고르고 매장동선 짜 봐. 손님들 바로 나갈 걸?”

“알았어, 알았어. 누나가 해줄게, 후훗.”

장하연이 날 달래주며 싱긋 웃었고 박태진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요, 선배님? 선배님도 성민이 그림 못 그리는 거 알잖아요?”

“그건 압니다만··· 휴우, 뭐라 말씀드려야할지 모르겠군요. 저희가 준비한 자료는 어떻습니까?”

한숨을 내쉰 박태진의 질문에 장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종류도 많고, 퀄리티도 좋고··· 일단, 이 자료 전부 가져가서 확인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장하연은 나와 박태진이 어어 하는 사이에 서류들을 박스에 넣고 날 보며 말했다.

“대신에 백화점 둘러보는 건 꼭 같이 해야 해. 너도 나중에 회사 들어가서 일해야지?”

그 정도쯤이야.

장수연한테 끌려 다니며 백화점 짐꾼 노릇했을 때에 비하면 천국의 데이트가 될 것이다.

***

얼마 뒤.

확인을 다 마친 장하연의 전화를 받고 소공동 로엘백화점 본점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매장에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로엘백화점입니다.”

배꼽인사를 하는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 셋은 매장을 둘러봤다. 아직은 외국 브랜드 제품이 별로 없었지만 국내 최대의 백화점답게 봐줄 만했다.

“확실히 외제품이 별로 없네. 먼저 치고 나가면 되겠어. 입구 쪽에는 벨트나 스카프, 화장품처럼 객단가 낮은 것부터 깔고 안쪽으로 갈수록 비싼 브랜드 깔자. 주얼리는···.”

장하연은 미리 준비한 요약자료를 내가 대신 들고 있는 자신의 버킨백에서 꺼내더니 매장 진열대와 번갈아보며 이것저것 적었다.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말을 걸기가 무서웠다.

매장을 돌아다니던 우리는 지하에 있는 식당가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셨다.

“백화점 리뉴얼 끝나고 강남점 지으면 에르메스 들일 수 있을까?”

“에르메스?”

“한국에는 아직 안 들어왔잖아. 우리가 1호점 유치하면 좋을 것 같아서.”

지금이야 시가총액이 한국 돈으로 1조 남짓한 에르메스.

훗날 샤넬, 루이비통과 더불어 3대 명품으로 꼽히고 셋 중 최고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 내후년에 센트럴스퀘어가 완공되면서 오픈할 강남점에 넣고 싶었다.

장하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버킨백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 한참을 넘기던 종이를 멈췄다.

“샤넬하고 루이비통 추가. 세 개는 무조건 들여야 할 거야. 그리고 주얼리는 불가리, 카르티에부터···.”

아가타(AGATHA)처럼 꽤 저렴하면서도 아기자기하거나 화려한 브랜드들도 추천했다. 지나치게 고가품 일색이면 천박해 보인다는 코멘트가 그럴 법하게 들렸다.

여기까지는 그녀답다 싶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뭔가 이상했다.

“생활용품 코너에는 밀레 냉장고나 식기세척기 놓고 아티스티나 아니면 빌레로이엔보흐, 로젠탈, 젤트만바이덴 같은 걸 안에 세팅하면 좋겠어. 가구는 몰테니 같은 것도···.”

“누나, 그거 다 우리 집에 있는 건데?”

“진짜?”

“밀레는 외가 쪽 냉장고하고 같이 쓰고 있는데 저번에 와서 쓴 컵이 아티스티나야. 소파는 몰테니 거고. 다른 브랜드들도 많아. 그쵸, 형?”

장하연이 못 믿는 것처럼 보여서 묻자 박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TV를 제외한 가전은 금강전자와 밀레 한 쌍씩 쓰고 있고, 가구는 예외지만 말씀하신 식기류 브랜드 전부 영등포 본점에서 취급 중입니다. 돌아가신 사장님께서 출장 때 가져온 카탈로그를 보고 사모님께서 고르신 물건들입니다.”

장하연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번졌다. 설마···?

“성민아. 여긴 그만 보고 너희 집 가자. 상표하고 가격 다 알아보고 가구류는 가격표에 공 한두 개씩 더 붙여서 파는 게 어때?”

늘 쓰다 보니 무덤덤했던 우리 집 살림살이가 명품인 걸 오늘에야 안 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발 아파서 돌아다니기 힘 들었는데 데이트 하듯 일하는 게 백배는 나을 것 같다. 맘 바뀌기 전에 빨리 집에 가야지.

***

한편, 로엘백화점의 여성의류 코너는 한 젊은 손님 때문에 난리 속이었다.

“저거하고 저거, 저거, 그리고··· 저거 다시 가져와요.”

“네?”

피팅룸 앞에 있던 장수연에게 여직원은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벌써 저 붉은 드레스만 아홉 번이나 가져오지 않았나?

고객은 왕이기에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숙였지만 장수연은 그녀를 쏘아봤다.

“뭐예요? 싫어요? 여기 사장 부를까?”

“아, 아닙니다, 고객님!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여직원이 황급히 뛰어가서 옷을 가져왔고, 장수연은 옷을 건네받은 뒤 쿵 소리가 나게 피팅룸 문을 닫았다.

실제로 그녀가 살 옷은 극히 일부.

그런데도 오기만 하면 두 시간이 넘게 피팅룸을 점거한 채 같은 옷을 몇 번씩 가져오게 하며 직원들을 수십 번씩 오가게 하는 등 자기만의 패션쇼를 하는 게 그녀의 낙이었다.

직원들은 그런 장수연을 제지하지 못했다. 신성그룹 3세인 건 둘째 치고 월 결제액만 수천만 원인 VVIP가 아닌가?

오늘도 즐겁게 쇼를 마친 장수연은 1천만 원에 가까운 물건이 담긴 가방을 들고 있는 경호원들과 돌아다니던 중 눈에 익은 세 사람을 봤다.

“저건?”

이성민과 박태진, 장하연이 정답게 얘기하며 사라지는 걸 보고 장수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부들부들 떠는 장수연의 모습에 옆에서 쇼핑백을 양손 가득 들고 있던 신성그룹 부속실 직원들은 사색이 되었다. 저 또라이 같은 년의 리미터가 풀린다는 징조가 아닌가?

한참동안 들썩거리던 장수연의 어깨가 가라앉았다. 장수연은 자신의 뒤에 있던 직원들에게 샐쭉하게 내뱉었다.

“뭐해요? 안 따라와요?”

‘아오, 저 썅년! 텔레파시라도 쓰는 줄 아나?’

‘텔레파시 쓰면 앞서나간다고 지랄 거릴 거면서!’

부속실 직원들은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씩 쟁여두기만 할 뿐 장수연에게 찌끄를 수는 없었다. 회장님의 딸이 아닌가?

그렇게 장수연은 집까지 짐을 들고 온 직원들이 따라오는 것도 무시하고 본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

장수연은 문을 쾅 닫고 들어오면서 황나연을 불렀다. 백화점에서 본 꼬라지들을 참을 수 없어서였다.

“무슨 일이니, 수연아?”

“엄마, 장하연이 이성민하고 백화점 돌아다니는 거 봤어요.”

“자세히 말해봐. 둘이 왜 돌아다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성민이 수발 들던 멀대까지 데리고 로엘백화점 돌아다녔다니까? 둘이 사귀는 거 아니야?”

장수연은 부글부글 끓는 화를 견딜 수 없었다. 이성민에 대해 알아보려고 해도 껀덕지가 없어서 만나보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꼴 보기 싫은 년과 희희낙락하다니!

장수연이 질투로 눈이 뒤집힌 것과 달리 황나연은 딸의 말을 듣고 섬뜩해졌다.

뒷배 하나 없는 장하연이 이성민과 붙는다면 해동그룹이 그녀의 뒤를 받쳐줄 터.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보통 영악한 계집이 아니니 해동그룹을 끌어들이면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이 가져갈 몫을 빼앗고도 남을 것 같았다.

황나연은 딸과 함께 안방으로 들어가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핸드폰 번호판을 눌렀다. 곧 있으면 이수한의 방 앞에 있는 남직원이 핸드폰을 받을 것이다.

“나야. 잘 지내지? 고맙긴. 너처럼 잘생긴 애도 우리처럼 휘감고 다녀야지. 후훗.”

황나연은 목소리와 달리 비웃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천한 놈에게 돈 맛을 보여주니 간이고 쓸개고 다 내놓지 않았는가?

“그래. 해동그룹하고 거래하는··· 그래? 아유, 준비성도 철저하네. 알았어. 수고.”

황나연은 얼굴 가득 미소를 품은 채 전화를 끊었다. 장수연은 엄마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고 싶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엄마?”

“장하연 고 계집이 이성민하고 해동백화점 컨설팅을 맡기로 했다고 하더구나.”

“네?”

장수연이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은 회사에 처박혀 일만 하고 있는데 누구는 일이 아니라 일을 빙자한 데이트나 하고 자빠졌다니!

황나연은 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아직 말하지 않은 걸 들려줬다.

“그런데 장하연 호텔 숙박비를 해동그룹에서 대주겠다고 하더라.”

“그게 뭐 대단··· 엄마?”

중간에 끼어들었지만 이내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자신을 부르는 딸이 황나연은 마음에 들었다. 판단력이 빠른 게 자신을 쏙 닮지 않았나?

“네 외가에 알려서 다른 신문사가 터뜨리면 될 거야. 거기에 해동까지 이미지를 깎으면 일거양득 아니겠니?”

장수연은 엄마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들렸다. 자신에게 모욕감을 준 두 연놈을 갈아버릴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해요, 엄마. 당한 것보다 갚아줘야겠어요.”

딸과 마주보며 차가운 미소를 띤 황나연은 침대 위에 던져놨던 핸드폰을 들었다. 조국일보의 무서움을 보여주겠다는 황나연의 각오가 키패드를 누르는 손에 힘을 더했다.

***

잠시 과거로 돌아가서.

황나연과의 통화를 끊은 남직원은 이수한과 마주한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왜 그랬냐?”

“시, 실장님···.”

무뚝뚝한 이수한의 목소리에 남직원은 덩치에 안 어울리게 핸드폰을 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왜 그랬어, 이 새끼야!”

“···죄송합니다, 실장님.”

“닥쳐! 얼마나 널 믿었는데··· 이렇게 배신을 해?”

이수한은 처음으로 맛본 인간적인 배신감에 터질 것처럼 주먹을 꽉 쥐고 남직원을 노려봤다.

자신이 졸업한 상고에 가서 동문 특강을 했을 때 열심히 회사 일을 물어봤고, 자신의 대답을 적는 게 눈에 띈 놈이다. 알아볼 만큼 알아봤고 졸업하자마자 신성그룹 고졸 전형 공채를 제안했고 입사하자마자 자기 방 앞에 앉혀 놨다.

일처리도 야무진 게 썩히기 아까워서 자기 돈으로 야간대학이라도 보내고 대졸 공채를 도와줄까 고민하기까지 했다. 그런 놈이 넥타이, 시계, 구두 따위에 넘어갔을 줄이야···.

이수한이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분노를 뿜어내듯 진한 담배 연기를 직원의 얼굴에 세차게 내뿜었다.

“콜록! 콜록!”

마지막 한 모금을 빨고 재떨이에 비벼 끌 때까지 직원의 기침소리를 듣고서야 이수한은 화를 가라앉히고 전화기를 들었다.

“이수한입니다, 회장님. 말씀드린 게 맞았습니다. 예. 아직 이용가치는 있으니 나중에 처리하심이 어떠십니까? 예.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친 뒤, 이수한이 서슬 퍼런 눈으로 직원을 쳐다봤다.

“네가 용서받을 방법은 하나다. 시키는 대로 하면 LA에 집 사고 슈퍼마켓 차릴 돈은 챙겨주마.”

“실장님.”

이수한은 자신을 부르는 남직원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번 일 끝나면 거기서 숨죽이고 살아. 영원히.”

결과가 어찌됐든 자기 손으로 뽑은 놈이 친 사고.

이수한은 자신이 책임지고 이 일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

며칠 뒤.

장하연과 해동그룹이 사람들 입방아질에 떡이 되게 만들어달라는 누이동생의 연락을 받은 조국일보 황현성 회장.

그는 지금 며칠 전에 약속을 잡은 동양일보 조형만 사장과 한 요정에서 가야금 연주를 안주 삼아 국화주를 마시고 있었다.

“사실이오?”

“이 사람아,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할 사람인가?”

“그래도 하연이 그 아이, 형님 누이 큰딸 아닙니까? 형님 조카 편의를 봐주는 일인데 왜 나한테 물어뜯으라는 거요?”

상에 손을 얹고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조형만 사장의 질문에 황현성은 미소를 띠었다.

재벌 오너들이 회삿돈을 제 쌈짓돈 취급한다는 기사를 쓰면 가판대의 신문이 남아나지 않을 소재다. 하지만 제 혈육을 물어뜯으라고 남에게 던져주다니 의심되지 않겠나?

황현성은 미소를 잃지 않고 조형만의 잔에 술을 따라줬다.

“남의 집안 사정이 그리도 궁금하나? 이게 제대로 터지면 해동그룹 광고 따오는 거고 잘못 되도 50억이 생기는데?”

조형만이 입술을 깨물었다.

같은 보수일간지라도 군사정권과 붙어먹은 조국일보와 달리 군사정권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에까지 할 말은 했던 동양일보다. 이 나라 최초의 민족언론을 세운 집안의 장남이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황현성은 조형만이 웃기지도 않았다. 언제 적 동양일보라고!

억지로 3등을 지키느라 고 씨 집안이 사재까지 쓰고 있는 건 언론계에서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자신이 흘려준 비책과 술상에 올린 신성전자 무기명 회사채 50억 모두 쉽게 외면하지 못하잖나.

동생과 조카들을 돕는 일이기도 하지만 조국일보의 뒤를 쫓아오는 한양일보의 발목을 만년 3등인 동양일보가 붙잡게 할 기회이기도 했기에 황현성은 잔잔한 미소만 띠었다.

“확실한 거요?”

“그래, 이 사람아. 그리도 못 믿겠으면 보증금으로 현금 10억을 더 얹어줌세.”

황현성은 자신이 있었다.

영악한 여동생이 이수한이 가장 믿던 졸개를 구워삶아서 몇 년 간 땅 장사로 번 게 오백 억이 넘는다. 일이 틀어져서 60억을 던져줘도 장하연과 해동그룹을 찢어놓는 값이라 생각하면 나쁘진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조형만이 입을 열었다.

“백억.”

“배, 백억?”

황현성의 눈이 커졌지만 조형만의 흥정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현금 백억에 회사채 50억 추가. 내가 원하는 보증금이오.”

“야! 조형만!”

“왜요? 설마 가짜기사 쓰게 할 생각이었소? 우리 회사 간판 내리게 하려고?”

버럭 소리친 황현성은 조형만의 날선 눈을 쳐다봤다. 호랑이는 죽어도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 틀리지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싸움 끝에 황현성이 이를 악물었다.

“여기 올린 무기명 채권, 보증금으로 주지. 나머지 백억도 기사 나가는 대로 넘겨주고. 됐나?”

“좋소. 모레 내보낼 신문에 실어서 쫙 뿌려 주리다. 형님이 멈추라고 할 때까지 내겠소.”

기분이 언짢아진 황현성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서 황나연의 전화를 받았다.

[오라버니, 나예요. 일은 잘 처리했어요?]

“조형만이 구슬려서 모레 나올 신문에 싣기로 했다.”

우물에서 숭늉 찾는 성질머리는 여전하다 싶은지 황현성이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오라비는 집안과 조카들 잘 되라고 고생인데 철딱서니 없는 동생 년이 한심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고생했는데 선물 하나 드려야겠네, 호호.]

선물이라는 단어가 귀에 꽂히자 황현성의 표정이 풀어졌다.

“무슨 선물이냐?”

[오라버니도 성격 급한 건 똑같네. 이런 거 보면 우리 둘 다 아버지 자식인 건 맞나봐?]

“뜸들이지 마라, 나연아. 이번 일 잘못되면 150억 날릴 지도 몰라. 조형만 그 자식 어찌나 뻗대던지···.”

황현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무게를 잡았다. 그의 얼굴은 어느 집이나 여동생이 이러냐고 묻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요? 그럼 나 혼자 다 먹어야겠네.]

“아, 아니다! 얼른 말해라. 다 잘 되자고 하는 말 아니냐, 하하.”

[신성전자가 평택에 공장을 지을 거라네요? 부지 면적이 10만 평쯤 된다는데···.]

수화기를 댄 황현성의 귀에는 오늘 따라 황나연의 목소리가 슬롯머신에서 코인 쏟아지는 소리처럼 들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