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부발님을 언급한 순간, 때릴 뻔한 것을 프라우 덕분에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그만하지? 그러다가 진짜 눈이 돌아가서 죽일 수도 있다.”
“사과하고 싶어서 말한 거야. 그리고 내가 죽어도 별로 신경도 안 쓸걸?”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 어이가 없었다. 재인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처연한 모습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자각하고 있는 거지? 무슨 10년 전 일처럼 이야기하는 건 뭔데?”
“그때는, 내가 너무 경솔했어. 그리고 나도 필사적이기도 했고. 나에게는 스콜라스가 전부니까.”
애처롭기 그지없는 표정, 사랑에 빠진 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재인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전생이 아니었으면, 십중팔구 이 모습에 넘어갔겠는데?’
자신의 건너편에 있는 레핀의 표정을 보니 이미 넘어갔다. 자신도 저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딱히 믿어지지도 않고, 믿을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신경 쓸 부분도 아니고, 네가 한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찰나였다.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도 발견하지 못했을 움직임.
말을 듣고 난 후에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아미와 올라가는 눈썹. 하지만 다시 애처로움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나도 이렇게 한 번에 용서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냥 진심을 전해주고 싶었어. 미안해.”
‘진심은 권력과 돈에서 나온다고 했던 애가 이런 소리를 하네. 표정 연기는 진짜 대단하다.’
“그렇다고 하자.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니 넘어가고.”
그렇다고 짚고 넘어가서 굳이 쓸데없는 일을 벌일 필요도 없었기에 그저 넘어갔다.
그것을 고민한다고 판단했는지 애처로움을 유지하면서도 은근히 다가오는 재인이었다.
“마스터가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어. 정말 대단하다. 언젠가는 될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축하해!”
“아직 멀었지. 세계가 넓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초인을 만났다면서? 정말 네 앞에서는 부끄럽기 그지없다. 기억나? 예전에 내가 초인따위라고 했던 거 말이야.”
이제는 잊고 있었던 일까지 들춰내는 재인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런 적도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한두 가지여야지.’
“그 당시에는 내가 초인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전혀 감도 못 잡고 있을 때라 그랬어. 그래서 골드 로즈님은 어떠셔?”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이지?”
“아니. 다른 건 하나도 없어. 그냥 너는 직접 뵈었잖아. 심지어 그 구문님의 아들이 되기도 했고.”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는데? 아니 당연한 건가?’
“궁금해서 그랬어. 사실 너처럼 초인분들을 여럿 뵙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위대했지. 대단했고, 말도 안 됐지. 난 멀었고.”
“나는 무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잘 모르겠네. 어떤 느낌인데?”
“글쎄다. 나도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 쉽게 표현을 못 해주겠네.”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재인과 편하게 이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와…. 얘도 진짜 많이 발전했네. 이런 느낌이었구나.’
전생에서 황금으로 산을 쌓았다는 재인에게 두 가지 가장 강력한 무기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황금 냄새를 기가 막히게 포착하는 능력. 그리고 혼을 내어주게 만드는 화법.
‘아카데미에 있을 때는 전혀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는데 말이지.’
기분이 확 나빴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대화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것이 어느새 문장으로 대답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대단하네. 어느새 너랑 대화를 하고 있네.”
그 말에 이상하게도 표정에 금이 갔다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이는 재인.
‘뭐지? 표정 관리야 어색할 수 있는데, 갑자기?’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재인이었지만, 톤이 조금 달라진 것이 티가 났다.
“그나저나 프라우는 완전히 네 밑으로 들어간 거야? 로사는 한창 북부에서 바쁘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재인까지 속일 정도면 힘을 꽤 쓴 모양이네.’
“내가 대답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확실히 프라우가 엄청 힘이 되기는 하지.”
“그 미네르바의 후계라고 해서 얼마나 유명한데! 프라우가 로사에게 있어서 후계자로 낙점받은 거 아니냐는 소리도 나왔다고.”
“오? 프라우가 그 정도였어? 대단한데?”
“아닙니다. 그저 소문에 불과했을 뿐이고, 저는 그런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프라우. 그렇게 딱딱하게 안 해도 돼. 우리 아카데미 동기잖아.”
“아카데미에서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어머? 너랑 있을 때도 이렇게 딱딱해? 완전히 기사 그 자체인데?”
“확실히 기사답기는 하지. 굴강하다고 해야 하나?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지.”
‘기사 같기는 개뿔. 누구보다 해적 같은 해적 덕후지.’
해적의 전투방식에 가장 빠르게 적응한 인물이 프라우였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그래? 미네르바랑은 완전히 다른가 보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편하게 말씀하실 정도로 미네르바님과 친분이 있진 않은 것 같습니다만.”
딱딱하고 굳어 보이는 모습.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기도 했지만, 과거에 보았던 모습이기도 했다.
‘전형적인 충성심 넘치는 기사. 그때부터 그렇게 연기해온 거네. 대단하다.’
“하긴 정말 미네르바님과 다르네. 현명한 검이라고 불리는 그분과 제자가 말이지.”
“선을 넘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머? 미안해. 나는 프라우가 네게 엄청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아쉬워서 그렇지.”
“지금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으니, 그런 걱정은 네가 안 해줘도 될 것 같은데?”
“어머. 온도 차가 너무 심한 거 같은데? 레이디한테 그러면 상처받아 그러면!”
자연스러운 눈웃음과 함께 팔에 손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진다.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았다면 재인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스콜라스를 사랑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인데?’
사랑 하나로 모든 것을 헤쳐나갔다는 그 말이 그냥 이미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근데 나는 누구랑 이야기하면 될까? 카인이겠지? 아니면 에밋?”
그러면서도 은근히 물어오는 질문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아무런 의도 없는 순수한 질문으로 들린다.
“잘 모르겠네. 그런 거에 관심도 없고. 누군가 하겠지?”
“어머! 그러면 안 돼. 최연소 마스터인데 조금 관심도 가지고 그래야지!”
“그래도 은근히 마스터가 많은 것 같더라고, 저분은 누구셔?”
“응? 누구?”
“우리 바로 앞에 가고 계신 분. 마스터이신 것 같은데 이명을 들으면 혹시나 알까 해서.”
“저분이 마스터셨어? 정말? 어쩐지 이렇게 수행원이 적다 싶었는데, 그래도 내가 버림 패는 아니었나 봐.”
말을 하면서 처연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마치 소설의 비련의 여주인공 같았다.
“왜. [맘몬]에서 그렇게 대우가 안 좋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실패로 많은 것을 잃었으니까.”
‘와. 연기력. 재인이 후계라는 걸 몰랐으면, 진짜 이미 넘어갔겠는데? 아니면 뭐가 있나?’
역시나 자신은 머리를 쓰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하게 알게 된다.
다행히 프라우에게 신호가 오는 것이 느껴진다.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아도 된다.
“근데 속도를 좀 높여야 할 것 같은데, 조금 빠르게 가자.”
“응? 벌써? 이 속도로 가도 저녁에는 도착할 것 같은데?”
“저녁? 늦은 오후에 도착해야 해. 저녁에는 훈련을 해야 해서.”
옹졸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납득이 안 되는 이유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재인의 반응은 달랐다.
“역시 너도 무인이라는 거구나. 하긴 그러니까 그렇게 빠른 나이에 성취가 남달랐겠지. 알았어.”
‘이게 진짜 먹힌다고? 도대체가 귀족들이 생각하는 방식은 아직도 어렵다니까.’
정해진 시간을 수련에 힘쓰는 것이 귀족인 무인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보여주기라고 했다.
수련 시간을 정하고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납득을 하는 것을 보니 더 이해가 안 갔다.
‘뭐 내가 알 바 아니지.’
속도를 높인 상태에서도 계속 말을 거는 재인. 신기한 건 그게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와. 저곳이 바로 돌라의 성이구나. 아니, 성이었구나. 너는 어디에서 생활해?”
“주로 성안에 있지. 수련장도 성 내부에 있으니까.”
“그러면 이따 모임에 너도 오는 거야?”
“아마도? 그런 자리가 불편하기는 한데, 계속 나오라고 하네 귀찮게.”
외성을 지나서 내성에 도착할 쯔음 재인을 마중하러 나온 인원이 눈에 보였다.
“마르쿠스? 네가 나왔어?”
“예. 제가 안내하게 되었습니다.”
“고생해. 난 먼저 들어가 볼게.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보자.”
뭐라고 말하려는 것이 보였지만, 보지 못 한 척 프라우와 집무실로 바로 향했다.
“많이 알게 됐어?”
“올라가서 말씀드릴게요. 대장 엄청 좋아지셨네요.”
미소를 지으며 건네는 프라우의 칭찬이 꽤 기분이 좋았다. 집무실에는 카인, 로사, 량 그리고 칼라 이모가 있었다.
“고생했어. 재인은 어때?”
“헐? 알고 있었어?”
“확신은 아니었는데, 널 보니까 확신했지.”
“진작 말이라도 해주지. 어땠냐면.”
량의 말에 프라우를 바라보았다. 훨씬 잘 설명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나설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아직 저희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을 못 한 듯싶습니다.”
“그럼. 그거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데. 아직 에밋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네. 구역주님과 카인님 그리고 에밋님 세 분이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로사님은 전혀 생각도 안 하시는 듯 했고요.”
“그리고 특이하다고 할만한 점은?”
“대장을 계속 유혹하려고 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은 이제 팽 당했다고 주장합니다.”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일행에 마스터가 있었다는 걸 몰랐다며 말하고 수호용병단을 치는 것도 자신은 그저 사랑에 빠졌다고 말을 합니다.”
“개소리구나. 그리고 또 있어?”
그 이후로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점들을 이야기하는 프라우, 그것을 토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카인과 량이었다.
조금 뒤떨어져서 그 장면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던 로사에게 다가갔다.
“넌 다 이해하고 있는 거지 저런 모든 상황을?”
“그렇기는 한데, 네가 꼭 다 이해할 필요는 없어. 괜찮아.”
로사마저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외의 소외감을 살짝 느꼈다.
‘뭔가 애매한 기분이네. 그래도 진짜 대단하긴 하다.’
열심히 대화를 나누면서 대처 방안이 순식간에 완성되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회주님. 이제 슬슬 나가보셔야 합니다.”
노크하고 들어 온 탁트의 부름에 탁트에게 다시금 재인의 일행을 이곳으로 부르라는 량이었다.
“로사. 칼라. 둘은 들어가 있어. 마니에르는 수련장에 있으라고 했으니 괜찮을 거야.”
두 사람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카인과 량이 같이 상석에 앉아있고 그 뒤에 자신이 서 있는 상황에서 문이 열렸다.
옷을 그새 갈아입었는지, 꽤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재인. 그리고 마스터가 뒤따라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묘하게 자신을 바라보면서 들어오는 재인. 드레스가 격식을 차린 것 같은데 묘하게 도발적이었다.
‘눈동자가 엄청 바쁘게 움직이는구나. 근데 재인이 원래.’
“블라우의 구역주를 뵈어요. [맘몬]의 전령으로 온 재인이라고 합니다.”
“오랜만이네?”
단순한 그 말에 웃음을 한껏 머금고 있던 재인의 표정에 금이 간다.
‘한 마디로 금을 가게 하는 량이도 참.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