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과거에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우시아]가 한창 성장을 할 때였다.
재인이 베라트와 몇 명의 수행 인원을 이끌고 당당하게 동아리실로 들어왔을 때. 딱 이 구조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스콜라스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했지.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준다고. 에밋과는 다르다고.’
그 자리에서 에밋은 없는 사람 취급하며 이야기하는 것이 참 대단하다 싶었다.
아무리 태자의 후광을 등에 업고 있다고 한들 백작가의 자제가 공작가의 자제에게 들이받는 모양새였기에 그랬다.
아카데미에 신분의 격차가 없다는 것은 사실 그냥 있는 말에 불과했다. 특히나 귀족들이라면.
그들이 후에 마주쳐야 할 이들이 똑같기에 그랬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무려 [맘몬]의 후계자시니 보이는 게 있었겠나.’
“비슷하지만 많이 다르죠. 그때와 결과도 달랐으면 좋겠네요.”
금세 신색을 회복하고 웃으며 말하는 재인이었지만, 이미 말렸다 생각했을 터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모두 아카데미 동기네요. 저희 기수에서 가장 빛나는 이들이 제 눈앞에 있다니, 신기하네요.”
“찬란한 재능께서 그런 말을 다 하고,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하나만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뭐. 우선 들어보도록 하지.”
“구역주님의 정체가 무엇인지요. 탁트님을 뵙고 심히 놀랐습니다.”
“스승님의 제자다. 다 그렇잖아? 부모에게 받고 스승에게 받고. 뭐가 더 있어야 하나?”
너무나 태연한 반문에 말을 잃은 재인이었다. 뒤에 서 있는 나조차 재수가 없다고 느꼈다.
“그렇죠. 스승님의 덕을 보는 것은 당연하죠.”
“그럼. 이만하지? 친목을 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맘몬]이라고 했나. 그 단체가.”
“단체라기보다 유서 깊은 조직이라고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조직이라 함은 귀족과 신전에 인정을 받은 용병만 가능한 칭호인데, 내가 알기로는 아닌데?”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에 최적화된 듯 말하는 량.
“하지만 그렇다고 신전의 배척을 받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니 오히려 저희는 신전을 충실히 따른답니다.”
“조금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나. 신전에서 아니라고 하는데, 아니라고 충실히 따른다고 표현하는 것이.”
“지금은 과도기일뿐입니다. 과정일 뿐이지요. 제가 [맘몬]의 대표로 오게 된 이유는.”
결국, 재인이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 목적을 이야기하려는 순간 맥을 끊는 량.
“아. 잠시만. 우리가 신뢰가 섞인 사이는 아니지 않나.”
덤덤한 표정과는 다르게 품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최상급 계약서였다.
“이게 뭔지는 알 테고, 읽고 서명하지. 준비는 해왔겠지?”
미리 설명을 듣지 못했다면, 기겁할 광경이었다. 재인도 당연하다는 듯 최상급 계약서를 꺼낸다.
‘서로가 권한이 어느 정도 있는지 명시하는 거라고 했던가. 진짜 있는 사람들의 세계는’
전생에서는 자신이 본 최고 등급의 계약서는 고작해야 중급이었다. 돈에 따라서 계약서가 달라진다.
그렇게만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작가 이상만 되어도 이런 대화가 오갈 때 최소한 두 장의 최상급 계약서를 준비한다고 들었다.
신뢰 관계가 없다면 당연히 하는 절차였고, 백작가 정도가 되면 권위의 표시라고 했었다.
‘참. 저거 한 장이면 일 년을 풍족하게 살 수도 있는 돈인데 말이지.’
심지어 두 장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부와 권력의 과시였다. 솔직히 낭비 같았다.
‘한 장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말이지. 굳이 두 장이나 필요한가 싶네.’
서로 계약서에 쓰인 문구를 한 글자씩 해부하듯이 이야기를 하면서 조율해 나갔다.
‘대충 이 회담에서 각자 소속을 대표하고 있고,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 정도잖아?’
물론 디테일하게 보면 다르겠지만, 결국 논지는 그것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살벌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 이 정도면 그럭저럭 이지. 그럼 이야기해 봐.”
처음부터 윗사람의 태도로 재인을 대하는 량.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재인.
‘참 복잡하게 산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안 드나 보네.’
표정을 읽는다는 것은 기초적인 표정에 대해서 배우고 그것을 볼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마스터의 육체는 굉장히 고성능을 자랑했다. 남들에게는 순간이 꽤 넉넉한 시간이었고, 미세함이 자세함이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환경이 달라서 그런 걸까. 아무래도 환경이겠지.’
회유와 설득의 연속이었을 전생에 비하면 지금은 조금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주변 모두가 자신의 밑이거나 우호적인 사람들일 테지.’
카인과 량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은 사실. 그것이 자신에게 그런 확신을 주었다.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를 말해도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할머니도 성하랑 뭔가 있는 건가. 그래도 지금이라도 허락을 받았으니 다행이지.’
애초에 카인이나 량에게 알려주셨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성하께서도 나에게 말할 생각은 없으셨겠지. 아닌가.’
자유섬에 오기 전, 성하를 뵈었을 때 들은 이야기였다. 포이드와 함께 한 마지막 밤이었다.
‘다음 날 따로 부르셔서 아직은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하셨으니, 근데 왜 그러셨을까.’
생각에 생각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언제쯤 이야기를 꺼낼까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탐색하려는 듯 여러 질문을 던지는 재인이지만, 틈이 없는 량이를 보고 직구를 던진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회유를 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이제야. 계속하도록.”
“하지만 이 자리에 에밋 공녀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카인의 얼굴에 불쾌감이 스쳐 지나갔다. 집중하고 보면 볼 수 있을 정도의 시간.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는지 찰나의 미소가 재인의 입가에 스쳐 지나갔다.
‘저런 걸 훈련받는다는 거지? 쯧. 재인도 불쌍해라.’
“계약서에 작성한 대로, 모든 권한은 지금 여기에 있으니 괜히 떠보지 않았으면 하는데?”
“저로서는 신중해야 하는 일이니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거기에 붙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나. 돌라도 이렇게 쉽게 버리는 마당에?”
“구역주님이라면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조사하셨으니까. 저희도 쉽게 버린 것이 아님을.”
“그렇다고 해서 버린다는 게 오히려 더 신뢰를 못 주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단순히 안정을 찾는다고 해서 말이지.”
“저희도 안정을 찾는 이들을 무조건 쳐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돌라님은 달랐어요.”
“뭐가 다르다는 거지?”
“그건. 저희에게 오셔야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이에요.”
‘량이가 나서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서도 된다고 했었지?’
“재능 때문인가.”
말 한 마디에 재인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이 확연하게 보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적어도 재능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아 범아.”
“찬란한 재능을 가지고 살아오면서 재능으로 사람을 차별하던 삶을 사는 네가 말하는 건 좀?”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어. 미안해.”
“둘의 대화는 거기까지 하고,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게 될 이득은 뭐지?”
뭔가 모를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 이런저런 질문은 하는 량이, 대답하는 재인.
그저 일반적인 대화 같았는데, 재인이 긴장하고 대답을 하는 것으로 보아 뭔가 다른가 싶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린 거랑, 음식 이야기는 왜 하는 거지? 저건 또 무슨 소리래?’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오고 간 후에 재인은 자신의 패를 드러냈다.
“자유섬을 드릴게요. 서섬 전부를요. 저희가 대륙에 진출하는 것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돕는지 모르겠는데.”
“솔직히 [마타 하리]만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될 일은 아니었어요. 하루빨리 여기를 정리하고 저희는 저희 대계로 나아가는 것이 목표예요. 자유섬이 결코 저희의 목적이 아니에요.”
“솔직히. 별로 탐나는 건 아닌데? 얼마나 걸리던 서섬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도 있고.”
“그 부분을 정정해 드리죠. 저희 조직에는 꽤나 많은 마스터가 있답니다. 저조차 모르는 분도 많아요.”
그리고 한 템포 쉰 뒤에 힐끔 자신을 바라보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하는 재인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마스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인과 자웅을 겨룰 만큼 강합니다.”
“그게 네가 말하는 비밀 같은 건가?”
“숨겨진 것이 오히려 많은 곳이랍니다?”
“저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범아?”
“개소리라고 생각해. 그래 봐야 반푼이일 뿐이야. 진짜 초인을 겪어보지 못한 개소리지.”
그 말에 반응한 것은 량이 아니라 재인과 그 곁에 있던 마스터였다.
“티거님에게 죽을 뻔한 네가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마스터. 강하지 네가 그렇게 자신할 만큼 강해. 마스터가 많다는 건 진짜 무서울 일이지. 그렇다고 초인과 자웅을 겨룰 수 있다는 건 개소리야.”
“듣자 하니 그렇게 초인을 잘 아나 싶군.”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이유는 없는데. 그리고 호위로 온 사람이 아니던가.”
“한참 어리고 패기 넘칠 때이지. 그럴 때가 나도 있었네. 둠이라고 하네.”
그 말에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카인의 소리가 들려왔다.
“만년 차석 둠. 설마 이 자리에 있을 줄은.”
‘와 능청스러운 거 보소. 그나저나 만년 차석이라고? 그 백석의 하나를 말하는 건가?’
“그 말을 굉장히 싫어했는데, 지금은 별로 신경이 안 쓰이더군. 말 그대로 만년 차석이었던 둠이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량이 싸늘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선 이유는? 지금 호위가 나설 때가 아닐 텐데.”
그 말에 집무실의 공기가 변한다. 둠의 기세가 공간을 짓누르듯 퍼져 나온다.
‘하여간 강심장. 진짜 신기한 놈이라니까.’
괜히 믿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재능을 담은 손을 한 번 휘둘렀다.
공간을 짓누르려던 기세가 순식간에 미풍으로 사라진다. 둠과 재인의 표정이 볼만했다.
‘기세 싸움에서는 질 일이 없을 것 같기는 하네. ’
“지금 이곳에서 그랬다는 건 죽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데?”
“호기심이었다고 하지. 이 정도의 아량을 보여도 괜찮지 싶은데.”
“근데 왜 계속 반말이지. 미친 건가? 아니면, 재인. 이 회담이 이 자리에서 끝나기를 바라는 거야?”
“예의가.”
“예의는 무슨, 마스터면 모두 대우해줘야 한다는 착각을 하는 건가? 거기에 지금 이 회담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나 보지? 지금 이 회담이 파토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의를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하! 기분이 나빠서 안 되겠군. 저녁을 먹고 난 후에 보지.”
속사포같이 이어지는 량의 말 이후에 뜬금없는 축객령에 진심으로 당황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탁트. 두 분을 모시고 나가서 저녁을 드리도록. 우리는 따로 먹지.”
이게 진짜인가 싶은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탁트의 안내에 당황하면서 나가는 두 사람. 그 뒤로 문이 굳게 닫혔다.
“진짜 저렇게 내보내도 되는 거야?”
“뭐. 안 될 건 없지. 잠시만.”
굳은 표정으로 나온 로사와 칼라가 눈에 들어왔지만,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왜 그렇게 쫓아내듯이 내보낸 거야? 이렇게?”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조금 장치 아닌 장치를 해 놓았다고나 할까.”
“응?”
“카인이 말해줄 거야. 난 쉴래.”
그 말에 모두의 눈이 카인에게로 향하며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우리도 조금 애매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어. 그래서 그걸 좀 확인하고 싶어서.”
“뭐가 애매한데?”
“진짜로 재인이 축출당했는지, 어느 위치에 있는지. 그걸 알아보려고 하는 거야.”
그 말에 카인에게 눈짓을 보내니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 카인이 기꺼웠다.
“우리도 좀 쉬고 밥도 먹고 하자. 프라우랑 로사는 조심해서 먼저 들어가. 이때가 아니면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후. 알았어. 나도 생각할 것도 있고 잘됐네.”
그러면서 로사와 프라우가 나가자 집무실에는 자신의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다.
“재인. 축출 안 당했어. 그리고 독보적인 후계자야.”
자신의 선언 같은 말에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는 량이와 놀라 하는카인이 눈에 들어온다.
“왜 그렇게 보는데!”
“자세하게 이야기해 보시지. 우선 왜 그걸 지금 말하는가서부터.”
량의 말에 카인마저 짜게 식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데, 왜 식은땀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