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판을 뒤엎을 만한 힘…. 난 그게 필요하구나. 진짜 갈 길이 멀었다.‘
아직 초인조차 되지 못한 자신. 판을 엎기에는 부족하지만, 끊임없이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도달할 경지였다.
”자! 그럼 우리 어디로 가는 건데?“
”진짜 단순한 건지, 굳센 건지…. 그리고 그걸 이제 묻냐! 으이그.. 나와!“
타박 아닌 타박을 듣고서는 량이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꽤나 오랜 시간 이야기하고 있었던 듯 서도의 항구가 눈에 들어온다.
”진짜. 너 때문에 엄청 천천히 왔잖아. 자!“
도대체 어느 사이에 천천히 운행하라는 명령을 내린 건지, 알 수 없었다.
프라이스타드의 항구에는 비할 수 없지만, 그래도 꽤나 큰 항구가 조성되어 있었다.
”와….“
태어나 본 세 번째 항구. 각 항구들이 특이 다 다르니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서도(西島)의 세이프 존에 온 것을 환영해!“
마치 자신의 항구인 것처럼 말하는 량이의 말이 하나도 고깝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범선은 블랙 펄이라고 쓰인 도크에 들어갔다.
”진짜…. 나도 언젠가는….“
”웃기지 말고 빨리 따라와.“
자신의 다짐을 한껏 비웃고는 카인과 함께 걸어가는 량이였다.
두 사람의 당당한 모습을 보니 그저 진 느낌이 들어서 그 옆에 갈 수 없었다.
*
”진짜 [바람이 머물다 간]은 없는 곳이 없구나?“
”그것도 그렇지만. 여기는 특별하니까. 아까 량이가 세이프 존이라고 했지?“
”아? 그거? 응. 유일의 세이프 존이라더니. 대충은 알고 있어.“
로즈 골드의 책에 나온 이야기로 자유섬의 이야기에 대해서 꽤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서도(西島)는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지만, 유일하게 그곳에서 한 켠 물러나 있는 곳.
그 장소가 바로 자신이 들어온 항구 도시의 이름이었다.
”말도 안 돼 범이가….“
한껏 설명을 해 주려고 힘을 주던 카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늘이고 있었다.
”쟤가 자주 멍청해 보여서 그렇지, 속에 은근히 여우가 몇 마리는 있는 애라니까.“
”아니 그래도…. 내가 설명을….“
”됐고, 우리가 정한 후보지 중에 하나긴 했는데, 여기서는 뭘 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내일 이동할 거야.“
”그럼..!“
”뭐가 그럼이야. 너도 알 건 알아야지. 다시 수업 시작이다.“
어느새 어디선가에서 칠판을 가지고 나오는 량. 그리고 수업이라는 소리에 다시 힘을 찾은 카인.
그 반대로 나는 특색있는 항구 도시를 세 군데나 들렸지만, 아무 곳에서도 구경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
”그래서 첫째는 도시 정리라는 거잖아? 간단하게 말하면 되는데….“
항구도시에 도착해서, 심지어 밥도 방으로 들여와서 먹었다. 그 온 시간 내내 설명을, 아니 수업을 들어야 했다.
”….“
”범아.“
’하 왜 저렇게 보는 거야 찔리게 시리….‘
”아니….! 그냥 요약한 거였어! 나름대로! 나도 엄청 유익한 시간이었어!“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을 짜게 바라보는 두 친구들.
”아니…. 미안해….“
그러자 갑자기 둘 다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할 때
”우리가 설명하는 내내 네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범아?“
”완전 죽상에, 머리가 터질 것 같고.“
”그래서 나름 정리해서 알려준 거야.“
”나도 카인도 다 이해하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야. 다만, 맥락은 알아야 하니까 설명해 준 거야.“
”자. 팔 내밀어 봐.“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로 자신의 팔을 가져가는 카인이었다. 그리고 이내 얇은 줄을 꺼냈다.
신기하게도 팔에 휘감고 난 후에 끝을 서로 대자 자연스럽게 마치 본래 하나의 줄이었던 것처럼 이어졌다.
”팔찌에 마나를 불어 넣어봐.“
카인이 시키는 대로 순수히 하자 갑자기 여러 문양이 나타나더니 마치 없는 것처럼 투명하게 변했다.
”뭐..뭐야 이건?“
분명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손에 느껴지는 감각은 팔찌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뭐…. 그냥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쓸만해서 만들어 본 거?“
덤덤한 량이의 말과 다르게 자신이 차고 있는 팔찌는 그렇게 덤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을 안 보이게 하는 기초적인 마법조차 3서클인데 얘는….‘
아무런 마나의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마법이 관여한 부분도 아닌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실패하면 이런 게 만들어지는 거냐….“
”뭐 별건 아니고 서로를 인식하는 거라고만 생각해. 일단 팔찌가 있는 사람이라면 보일걸? 봐봐.“
량이의 말을 따라서 서로 손목을 잡고 마나를 팔찌에 불어넣었다.
”와 대박….“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손목에서 각자의 팔찌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을 빨아드릴 것만 같은 검은 색 팔찌, 량이는 금빛의 실선, 자신의 팔찌에는 녹빛의 실색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훗. 내가 이 정도지.“
”맞아. 넌 진짜 천재 같아.“
자신의 칭찬에 얼굴이 붉어지는 량이. 항상 당당하고 천재라고 말하고 다니는 주제에 몇몇 사람의 칭찬에는 부끄러워한다.
’그덕에 이상한 소문도 나기는 했지만….‘
여자로 꾸미면 아무도 남자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미소년인 량이였다.
’그래서 염문설(艷聞說 : 연애나 정사에 대한 소문)이…. 진짜 토할 뻔했네.‘
그 이후로는 대화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내 출발할 시간이 다가왔다.
*
”자! 여기야! 량이랑 내가 열심히 고민하고 고민 한 우리의 거점!“
세이프 존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도착했다. 마차로는 천천히 이동하면 이틀 걸리는 마을이었다.
’특이하게 자유섬에서는 도시라고 안하고 마을이라고 한단 말이지? 빌리지 아니면 타운이랬지.‘
넓게 평지가 펼쳐져 있었고 옆에는 바다가 바로 보였다.
”생각보다 꽤 크다?“
비록 목책이지만, 꽤 튼튼하게 지어진 방벽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크기가 작지 않아 보였다.
”그럼! 크기도 꽤 되고 가장 중요한 건! 여기가 모든 곳이랑 잘 통하는 지역이라는 거지! 무려 타운이니까!“
실제로도 그럴 것 같았다. 주변에 산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는 길에 본 작지 않은 강도 있었다.
”와 이런데를 잘도 차지했다?“
”뭐 아직 완전히 차지한 건 아닌데…. 이제 네가 있으니까!“
그 소리가 왠지 자신을 사정없이 굴리겠다는 소리로 들리는 착각을 하며 목책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자유섬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걸어가는 것 같았다.
각종 좌판에는 수도에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싱싱한 해산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 먹어봐.“
눈치도 빠르게 카인이 꼬치에 둘둘 말린 문어 같은 것을 건네준다.
”낙지라는 건데, 진짜 맛있어. 이 도시 명물이기도 하고.“
불긋한 양념이 가득 발린 꼬치를 입에 넣고 베어 물자, 매콤하면서도 쫄깃한 식감의 새로운 맛이 느껴진다.
”와….“
자유섬에 들어오고 난 후에는 온통 감탄사만을 연발하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모든 것이 신기한 것 투성이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과 같은 꼬치를 들고 먹는 친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맛있지? 특이하지? 이래서 모험가들이 모험가라는 직업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나 봐.“
”그러게.“
트레져 헌터나 모험가들은 직업의 특성상 여러 장소를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여러 곳의 음식을 먹게 된다.
’모험가라….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그것도 괜찮겠네?‘
각지의 특색있는 곳을 살피고 특색있는 음식을 먹는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꼬치를 먹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빛과 바람의 집] 이름이 요상하다?“
”왜! 어때서!!! 좋기만 하구만!!“
얼굴이 한껏 빨개진 카인이 후다닥 걸음을 옮겨서 건물로 들어갔다.
량이와 함께 웃으면서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카인도 참…. 마틴도, 나도 복 많이 받았네.”
누가 봐도 자신과 마틴을 뜻하는 이름을 보며 기분 좋게 들어갔다.
내부는 [바람이 머물다 간]을 따라 한 것인지, 어딘가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2층으로 향하는 카인이었다. 조금 다른 점은 2층 전체가 카인의 방이라는 점이었다.
“여기가 집무실이기도 하고 너희 방이기도 해. 일루와 일루!”
얼굴이 빨개진 것은 거짓말이라는 듯이 자신을 끌고 방으로 데려가는 카인이었다.
[바람]
문에 대놓고 각인이 되어있는 방이었다. 웃음이 모르게 흘러나온다.
자신을 바래다주고 사라진 카인을 뒤로하고 문을 열어 방에 들어가자 너무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저건 소대원들이랑 그린 그림이고, 침대도…. 와 이건 뭐냐….’
자신이 불스 용병단에 있던 그 방과 카인과 함께 썼던 방을 절묘하게 섞어내면 이런 느낌이다를 보여주는 방의 내부.
“진짜 쓸데없이….”
어느 한 곳 허투루 만들고 배치된 것이 없는 곳. 모든 곳을 꼼꼼히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은 곳에는 한 문양이 있었다.
“순(順)?”
뭔지 모를 고대어로 적힌 그 문양을 이제는 비어있던 견갑(肩甲 : 어깨에서 팔꿈치 부근까지를 보호하는 갑옷의 부속구.)에 부착했다.
“흠….”
괜히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이내 카인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방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검제. 저건 로사 방이겠고, 현자. 에밋인가? 그리고 천재. 저건 량이구나.”
방에 적힌 명패의 이름 하나하나가 각 방의 주인을 나타내고 있었다.
“꽤 보는 눈이 날카롭잖아?”
아직 피지 못한 재능들임에도 그 재능을 바라보는 카인의 식견은 꽤 정확했다.
실제로 로사는 검제로 불리기도 했다. 에밋은 현자의 후예로 불리기도 했고 량은…. 말마따나 그저 천재(天才)였다.
“얘도 다시 돌아온 거 아니야?”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곧 도착한 카인의 방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모여있었다.
“범아!”
에밋과 샨 그리고 로사가 벌써 카인의 방에 들어와 있었다. 어느덧 소녀에서 다들 처녀가 된 친구들이었다.
“와~ 에밋!! 샨!!!”
자신도 모르게 둘을 꽉 안아버렸다. 기억하던 느낌과는 사뭇 다르지만, 여전히 친구들과 만나는 것은 좋았다.
“좀 떨어지시지?”
괜히 뿔난 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 뭔가 성에 차지 않은 듯한 표정의 로사가 눈에 들어온다. 그 옆에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프라우?! 진짜 오랜만이다!”
“내가 있으면 당연히 프라우도 있는 거지.”
여전히 뿔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로사가 어딘가 달라졌다.
“어? 로사 머리 잘랐네? 잘 어울린다!”
“그냥…. 각오였을 뿐이야!”
그러면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로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번 살아도 여자는 어렵구나.’
어느새 방에는 카인, 량, 에밋, 샨, 그리고 로사가 앉아있었다.
“근데 이건 뭐야?”
순(順)이라고 적힌 패치를 가리키며 입을 열자 역시나 카인이 입을 열었다.
“아! 우리 상회 문양이자, 의미야. 일단 순 상회로 활동할 거니까!”
그러면서 그 고대어 대해 열심히 설명해 주지만 크게 관심이 없는 이야기.
그저 들어온 소리는 간단한 상회의 구조였다. 총수는 의외로 카인이 맡았다.
그리고 량과 에밋이 부총수를 맡고 로사는 자신의 휘화라고 설명을 해 주었다.
자신과 로사가 섬에서 포섭한, 그리고 고용한 이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 만이 귀에 들어왔다.
순 상회는 꽤나 덩치가 있는 상회로 보였다. 아무래도 각각의 인물들이 인물들이라 그런듯했다.
와흐네 공작가의 후계자인 에밋, 파울로님의 유일한 제자인 량. 그리고 [마타 하리]의 후계자인 카인
“어르신들도 꽤나 좋게 보는 편이기도 하고, 시험 무대로 좋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기도 해.”
계속해서 이어지는 설명이었지만,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지금 가슴에 붙어있는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라면 불스가 그려져 있어야 할 장소에 순(順)이라는 고대어가 멋들어지게 붙어있었다.
‘이제는 불스 용병단의 소대장이 아니라 순 상회의 무력 대장인 거구나….’
무척이나 어색하고 신기한 느낌이었다.
‘새출발 하는 느낌인데?’
생각과 함께 문양을 한 번 손으로 쓰윽 쓰다듬었다.